경향으로서의 트랜스 ‘트랜스’는 테크노의 한 하위 장르이다. 리듬은 하우스의 한 변형이고 후경을 이루는 사운드는 사이키델릭하다. 그리고 전경을 이루는 반복적 시퀀싱으로 이루어진 키보드 패턴은 고전적인 ‘아르페지에이터’식 아날로그 신디사이저의 리듬 패턴을 답습하고 있다. 그게 끝이다. 리듬, 후경의 사이키델릭한 암시들, 전경의 아르페지오가 마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용처럼 서로를 감싸며 휘돈다. 트랜스가 더 나가면 ‘사이키델릭 트랜스’나 이른바 ‘고아 트랜스’가 되는데, 그 음악적 특징은 일반적인 의미의 트랜스의 어느 한 부분을 약간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아다시피 고아는 인도의 어느 한 지방의 이름이란다. 트랜스를 틀어놓고 야외 레이브를 즐겨 벌이던 곳이다). 대표적인 뮤지션으로는 씨제이 볼랜드 CJ Bolland나 주노 리액터 Juno Reactor, 그리고 보다 급진적인 아스트랄 프로젝션 Astral Projection(이스라엘 출신이다), 그리고 할류시노겐 Hallucinogen, 또 트랜스웨이브 Transwave 등을 들 수 있다. 어떤 면에서 트랜스는 지금의 테크노 판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장르라 할 수 있다. 사실은 최근의 경우 고전적인 트랜스는 하우스적인 테크노들과 잘 구별이 되지 않는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트랜스가 하우스를 잡았다고 해도 된다. 베이스 드럼(킥)이 1마디에 4번 ‘쿡 쿡’거리는 음악은 모두 트랜스적인 쪽과 관련이 없지 않다. 물론 특정 장르로서의 트랜스가 좀 더 속도가 빠른 점이나 디스코적인(훵키한) 요소가 적다는 점 등은 장르로서의 구별점이지만, 그게 다른 요소와 섞이는 경우가 지금은 허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장르로서의 트랜스를 이야기한다면 싸이키델릭이나 고아 트랜스를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분야의 음악들은 여전히 약간은 눈에 띄는 방식으로 ‘트랜스’라는 장르의 독자성을 보여주고 있다. 트랜스의 목표는 음악 바깥에 있다. 트랜스는 일종의 엑스터시에 가까운 황홀경의 체험을 목표로 한다. 트랜스 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황홀경이 은근히 ‘근본적인’ 쪽하고 닿아 있음을 암시한다. 싸이키델릭 트랜스 쪽을 하는 사람들의 ‘예명’만 봐도 알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한 사람들 말고도 ‘인피니티 프로젝트 Infinity Project’니, ‘지네틱 시스템 Genetic System’이니, ‘일렉트릭 유니버스’니 하는 이름들이 그 예다. 90년대 이후의 테크노가 서양에서 큰 의미를 갖게 된 건 테크노가 바로 ‘트랜스적인’ 체험을 일반화시킨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90년대적인 테크노의 키워드 중의 하나가 트랜스인 셈이다. 트랜스라는 말 자체가 ‘황홀경’이라는 뜻이지만 그 황홀경은 ‘공간적’인 느낌과 관련이 있다. 그 황홀은 어딘가로 가는 황홀이다. 가긴 어딜가? 정확한 표현으로는 다녀오는 거겠지. 황홀하게 ‘다녀온다’는 건 보통 정신으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약물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어떤 면에서 일반 하우스와 트랜스를 구별하는 간단한 방법은 무슨 약을 먹고 노느냐와 관련이 깊다. 보통 하우스의 레이브가 엑스타시 같은 약물을 먹고 노는 반면 트랜스는 LSD를 먹고 논다. LSD 하면 고전적인 사이키델릭 약이다. 이 쪽 계통은 (약간은 쓸데없이, 그리고 사이비적인 방식으로) 인도를 떠올리게 한다. 고아에 가서 노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팝이 ‘다녀오기’를 목표로 설정한 건 언제부터일까? 그리고 그건 무엇 때문일까? 물론 LSD 같은 실험실 약물의 광범한 대중적 유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사실이지만, 그게 무슨 의미를 지니고 사람들에게 다가갔던 걸까? 트랜스를 장르의 수준이 아니라 하나의 광범위한 ‘경향’의 수준으로 다루기 시작하면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게 된다. 단순히 ‘뻑 가는 걸 원한다’는 것 이상의 뭔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트랜스, 다녀오다 팝이 제대로 팝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하면서도 여전히 팝인 역설적 경향을 띠기 시작한 건 1960년대의 체험들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후이다. 60년대적인 체험들의 일부는 낭만주의적이다. 그 낭만성은 ‘트립 trip’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원래의 뜻은 ‘여행가다’이고 거기서 ‘약 먹고 환각의 여행을 하다’의 뜻이 파생된다. 하나의 트립은 도시 바깥으로, 그러니까 문명의 공간에서 자연스러운 공간으로의 이동으로 구체화된다. 히피들은 도시를 떠나 시골로 떠돌면서 마치 새로운 풍속의 실험을 하는 듯한 착각(지금으로 봐선 착각이다)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건 미국으로 치자면 휘트먼 류의 낭만주의에서 그 기원을 발견할 수가 있고, 유럽으로 치자면 루소 같은 풍의 낭만주의이다. 더 멀리 가보면, 중국 육조 시대 지식인들의 퇴폐주의도 이와 관련되겠지. 폄하시켜서 생각하면 일종의 이국취향으로 격하되고, 좀 쳐주면 반문명적인(따라서 반자본주의적인) 자기 발견, 따라서 급진적인 인간 해방 운동의 순진한 단계쯤이 된다. 또 하나의 트립은 정신적인 것이다. 이 일은 보다 급진적인 ‘다녀옴’, 여기서 저기로의 ‘이행’을 체험하는 것이 된다. 지난번에도 언급했듯이 약물이 이와 관련된다. 특히 LSD. 이 약의 별명이 Zen, 즉 선(禪)인 것만 봐도 이 ‘트립’의 뜻이 짐작이 간다. 본질을 체험하는 여행을 약물과 함께 떠나는 일. 그 일에 음악이 동반자 역할을 한다. 음악은 보이지 않는 그 길을 뚫는 일종의 안내자다. 가깝게는 비트닉들의 전통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긴스버그 같은 시인들의 트립핑. 조금 멀리는 압도적으로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이 크다. 랭보나 보들레르 같은. 그들의 시와 하쉬쉬는 자본주의 바깥으로의, 그러니까 속물적인 부르조아 질서의 바깥으로의 다녀옴, 혹은 그 바깥에서의 떠돎의 여정을 보장해주는 안내 지도였다. 또 이러한 여행의 궁극적인 지점에 인도가 있다. 요가, 유체이탈, 본질적인 하나의 ‘점’인 태초의 상태로의 이행 속에서 존재가 진실을 깨치는 과정 말이다. 이러한 본질적인 존재론적 실천에 팝이 관련된 것은 어떻게 보면 참 기묘하다. 물론 70년대에 들어서면서 팝적인 것의 이와 같은 맥락과의 관련성이 많이 퇴색된 점이 없잖지만, 그 잔존물들은 여전히 팝적인 전통에 침전되어 있다. 1990년대의 레이브나 트랜스가 다시 한 번 그 다녀옴의 진정성을 회복하려 시도했다고 보면 90년대적인 탈주극으로서의 고어 레이브 같은 것들이 히피적인 전통의 일정한 복원과 맥이 닿는 데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다녀오려는 걸까. 아니, 왜 그 바깥으로, 그러니까 문명 바깥으로 나가려는 걸까. 너무 보편화시킬 필요는 없지만 그 일반적인 배경을 이루는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일은 흥미롭다. 20000318 | 성기완 creole@nownur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