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상자 – Be Happy – 도레미, 1999 유리상자의 신보가 역시나 이 가을에 찾아왔다. 도무지 악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이 듀오는 가을의 사나이 아니랄까봐 찬바람이 스산하게 불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앨범을 출시한다. 이것은 ‘순애보’라는 — 제목에서부터 멜로적 감성이 물씬 풍기는 — 곡으로 데뷔한 이래 충실히 지켜 오고 있는 불문율이다. 아~ 누군가 말했듯이 포크는 정녕 가을의 음악이란 말인가? 이 음반이 남달리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를 배려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드러난다. 스트링을 사용한 편곡, 노스탤지어를 돋구는 아코디언의 쓸쓸한 여운, 여기에 보호 본능마저 일으키게 하는 가녀린 보컬에 천사표 가사가 더해지면 錦上添花에 畵龍點睛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타이틀 곡에 느닷없이 등장하는 복고풍 3박자 왈츠라니! 자연스럽게 작년 (극소수의) 사람들의 마음을 술렁이게 했던 한 엘리엣 스미스(Elliott Smith)의 “Waltz #2″가 떠올랐다. 바다를 건너 온 내성적 사나이의 왈츠가 자조적인 중얼거림에 가까웠다면 이 왈츠는 화사한 센티멘탈리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미워도 다시 한번’ 류의 정서가 90년대산 여과지로 졍련된 듯한… 그렇다고 시종일관 멜랑꼴리한 정서에 호소하여 누선을 자극하냐고? 물론 그렇지는 않다. 몇몇 업템포 곡에서는 분명히 가스펠의 감성을 담아내고 있다. 유리상자의 음악적 기반이 포크와 더불어 CCM이라는 것이 새삼 떠오르게 하는 곡들이다. 앨범을 여는 곡 “나는 기도” 역시 CCM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스트링 위에 떠다니는 기타의 상큼한 솔로 배킹이 들린다 싶지만 이내 두 사내의 곱디고운 보컬 하모니가 귀를 채운다. 첫 싱글 곡은 잘나가는 깜찍이 탤런트 김현주가 신부로 등장하는 뮤직 비디오를 대동한 “신부에게”. 화면 속의 두 남자는 참으로 뻘춤해보이지만 노래만은 각종 결혼식 축가로 주가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남성 듀오의 노래에 등장하는 남정네들은 한결같이 상처받기 쉬운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에 지고지순한 사랑을 바치는 구원의 천사이다. [편지]와 [약속]의 박신양도 서럽게 울고갈 정도로. 게다가 세상을 바라보는 낙관적이고 따뜻하기 그지없는 시선! 누군가 이 앨범을 가리켜 ‘사무사(思無邪)’라고 해도 결코 시비 걸지 않으리. 그러니 이런 앨범을 들으며 ‘사운드 텍스쳐가 어쩌구…’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어쩜 수염난 아저씨들이 저런 감성과 소리를 뽑아내느냐고 감탄하고 가끔은 그 옛날 성가대의 해사한 오빠를 떠올리면 더욱 좋다. 애시드 재즈 풍의 전주가 튀어나온다고 R&B 발라드가 등장한다고 당황하면 안된다. 조금만 기다리면 찬송가 + 싱어롱에 적합한 익숙한 멜로디가 나오니까. 순진무구, 천의무봉 경지의 노래가 이어지다 보니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의 밀도가 떨어진다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듣는 사람의 정서적 감염력이 현저히 약화된 탓이리라. 사랑의 메신저의 화음에 귀 기울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죠’가 들리기 시작하면 이 땅의 척박한 영혼들 그래도 행복한 사랑을 꿈꾸어야겠지. 그런데… 여름엔 댄스, 가을엔 발라드, 이 공식은 어느새 굳건하고 진부한 장르의 관습이 되어버렸다. 그러면 포크는 발라드의 하위 장르 내지는 그 아류로 봐줘야하나? 통기타 발라드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줘야 하나? 아~ 이런 얘기는 이제 그만. 19991027 | 박애경 ara21@nownuri.net 4/10 수록곡 1. 나의 기도 2. 끝내 전하지 못했던 말(BE HAPPY…) 3. 그댈 만나러 가는 날 4. 신부에게 5. 날 위해서… 6. 너 없는 아침 7. 아름다운 세상 2 8. 함께한 시간 끝에서 9. 세상에서 가장 슬픈일은 끝이 보이지 않는 사랑을 하는 것 10. 이보다 더 좋을순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