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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 카메라와 조명이 어지러운 시사회장에서,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을 봤다. 자리 잡기 문제로 스트레스 받지 않아도 되는 기자 대상 시사회라는 사실은 맘을 동하게 했다. 물론 공짜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게 결정적이었다. 그 점은 나 같은 백수한테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잠시 잊었다. 시사회 보고 영화 음악에 대해 글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오해 없기를. 미끼이자 독인 시사회 관람을 시켜준 사람은 [weiv] 편집장이 아니라 어느 영화 웹진 편집장이다. 그에 대한 ‘복수’로 우리 [weiv]에도 글을 올리기로 맘먹고 글을 쓴다. 근데 큰 일이다. 판소리에 대해 일자무식인데 뭐라고 쓴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내가 입수한 [춘향뎐]에 관한 정보는 대충 이런 것이었다.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방식인, 판소리 ‘춘향가’를 바탕으로 영화화했으며, 옛 이야기이지만 젊은이들이 보아도 신선할만큼 모던한 영화를 지향했다는 것. 영화를 보고 든 생각은,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는 것.

다른 점은 몰라도, [춘향뎐]이 판소리 ‘춘향가’를 중심으로 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인터뷰에 의하면, 임권택 감독은 [서편제]를 연출하면서 조상현의 ‘춘향가’ 공연을 보았는데 거기서 소름끼칠 정도의 감동을 받아 이 작품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 영화는 정동 극장에서 공연한 조상현의 춘향가 완창 장면을 수미쌍관의 액자로 하고 그 안에 ‘춘향뎐’ 극을 삽입한 액자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두 개의 축이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고, 중간중간 ‘춘향뎐’ 극과 조상현의 공연을 오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판소리 영화는 우리에게 낯선 것이다. 1993년 ‘서편제 신드롬’이 있었지만, 임권택 감독도 고백했듯이 [서편제]는 본격적인 판소리 영화라고 하기엔 미진한 영화였다. 더군다나 [춘향뎐]의 경우처럼 판소리를 소재로서 다루는 게 아니라 판소리 한 마당 전체를 골격으로 영상화한 것은 처음이다.

하긴 판소리 자체가 익숙하지 않다. 아니 이 말은 좀 약하다. 판소리는, 나아가 흔히 국악이라 부르는 한국 전통 음악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다. 한국 전통 음악은 서양 고전 음악보다 낯설다. 커피가 녹차보다 익숙하고, 맥주가 전통 술보다 입에 잘 맞고, 커피 전문점이 전통 찻집보다 편안하듯이, 급격한 근대화와 자본주의화를 거치는 동안 거의 맥이 단절된 한국 전통 음악은 이른바 클래식보다 더 이색적이고 이국적이다. 누가 전통 차와 전통 술을 항상 마시는가.

영화 [춘향뎐]은 무슨 무슨 명절 때 TV에서 방영해주는 ‘마당놀이 **전’ 같지도 않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렇단 말이다. 판소리 ‘춘향가’를 원안으로 한 만큼 판소리 특유의 해학과 웃음은 있다. 그런데 그 웃음은 다소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거침없는 육두문자의 파격에 의지하는 측면이 많다. 그럴 때 [춘향뎐]은 웃음과 재미에 경사된 ‘마당놀이 춘향전’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은 판소리 ‘춘향가’의 창(唱)과 아니리(창이 아닌 대사의 전달)를 최대한 살린 데에서 비롯된 한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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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뎐]을 보면서 더 많이 재미를 느끼고 웃을 수도 있다. 단, 그러려면 한문(체)에 익숙해야 하고 어느 정도 능통해야 한다. 판소리 ‘춘향가'(그리고 이 영화)의 창과 아니리의 상당 부분이 문어투이고 한문체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사투리와 상징적인 표현까지. 할 수 없다.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건 상상력을 발휘하여 아전인수하거나 고등학교 국어 참고서로 예습 혹은 복습을 하는 수밖에.

예컨대, 광한루 구경에 나간 이몽룡이 그네 타고 있는 성춘향을 보고는 불러오라고 해서 방자가 춘향에게 뜻을 전했을 때, 춘향은 ‘안수해, 접수화, 해수혈(雁隨海, 蝶隨花, 蟹隨穴)’이란 알쏭달쏭한 말을 남기고 집으로 가는 대목이 초반부에 나온다. 이를 전해들은 몽룡이 그 말의 의미를 ‘기러기는 바다를 따르고, 나비는 꽃을 따르고, 게는 굴을 따른다’로 풀이해주는데, 그 뜻풀이는 관객에게 빙그레 웃음을 짓게 하거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친절함은 이 영화에서 예외적이라 할만하다.

그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에 대한 설명과 부연은 영상이 일정 정도 대신해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몽룡과 춘향이 “사랑가”를 부르며 노는 장면에서, 이도령이 춘향을 보고 “너는 죽어 글자가 되되 날일 따곤 그늘음 안해처 계집녀(女)자 글자가 되고, 나도 죽어 글자가 되되 하늘천 하늘건 날일 볕양 지아비부 사나이남 아들자 (子)자 몸이 되야, 계집녀자 변에다가 똑같이 붙혀서서 좋을호(好)자로만 놀아를 보자”라는 대목이 있다. 원래는 몽룡이 창을 해야 하는 대목인데, 영화에서는 조상현의 창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몽룡과 춘향의 누운 모습과 계집녀자와 아들자자가 좋을호자로 합쳐지는 것으로 영상이 처리된다. 진양조의 조상현의 창의 느낌과는 달리 영상의 만화적 형상화는 웃음을 유발한다.

대체로 영화 [춘향뎐]은 판소리와 영상이 조응한다. 잦은몰이로 빠르게 창을 하는 대목에서는 영상도 빠른 리듬으로 진행되고, 진양조로 느리게 창을 하는 곳에서는 카메라의 움직임도 느리거나 거의 없다. 힘찬 우조(羽調)나 애절한 계면조(界面調) 같은 창조(唱調)에 따른 영상의 변화도 비슷하다.

하지만 영화 [춘향뎐]을 요약하는 말로 ‘춘향가 뮤직 비디오'(혹은 ‘춘향가 뮤지컬’)이란 표현만큼 적절한 게 없을 듯하다. ‘조상현 창본 춘향가’를 원본으로 영상은 진행된다. 다소의 가감은 있지만 원안에 충실한 편이다. 그런데 ‘춘향가 뮤직 비디오’란 표현의 적합성은 반드시 판소리 ‘춘향가’에 의한 영상 진행이란 측면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를 보면 좀더 명확하게 느껴지겠지만, 이 영화가 요즘 횡행하는 뮤직 비디오 이미지와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남원시에 1천 여평의 세트장을 건립하여 총 8천 여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하고, 고증에 의해 출연진 의상 1만 2천 여벌을 제작하고, 컴퓨터 그래픽을 동원하여 남원부중을 재현하는 등의 노력 끝에 완성되었다. 굳이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그런 물량 공세가 사극이기 때문에 불가피해 보이긴 하지만, 최근의 뮤직 비디오의 어떤 경향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어떤?

잠시 옆길로 새자면, (이제는 지겨운 얘기지만) 요 몇 년 사이에 뮤직 비디오는 그야말로 붐을 일으키고 있다. 4, 5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뮤직 비디오는 선택적인 홍보 수단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1998년 하반기에 불었던 조성모의 “To Heaven” 뮤직 비디오 열풍은 뮤직 비디오를 필수적인 음악 전달 매체로 자리매김했다. 그 이후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대로다. 뮤직 비디오의 거의 반에 가까운 수가 “To Heaven”처럼 톱 스타(배우)들을 캐스팅해서 비극적인(혹은 폭력적인) 스토리 구조를 탐미적인 영상에 담는 형식을 갖고 있다. 이런 뮤직 비디오의 특징 중 하나는 음 악을 그대로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음악을 끊고 대사와 연기가 들어가기도 하고 극적인 장치들도 과감히 삽입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제작비가 억 단위로 나간다는 점도 공통적이고.

그 때문일까. [춘향뎐] 영화를 보다가 문득 최근의 천편일률적인 뮤직 비디오 형식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춘향뎐]은 판소리 ‘춘향가’를 영화 매체에 적합하게 가감하면서(‘춘향가’를 완창하면 5시간이 걸린다) 만든 ‘장편’ 뮤직 비디오 같다. 신인급 배우를 쓴 점을 빼면, 제작비는 과감히 쏟아 부었고 필름은 평범하지 않은 것으로 썼으며, 구조는 액자 구조를 큰 축으로 하되 넘나들기도 하고, 서사적으로 진행되는 스토리는 비감하고, 기타 등등.

좀 억지 아니냐구?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영화 보고 자기가 판단하면 되는 거지, 뭐. 그런데, 조상현은 1986년에 파리 퐁피두 문화센터에서 ‘조상현 춘향전 완창’ 공연을 했고, 프랑스에서 무슨 훈장도 받았다 한다. 그는 그 외에도 전미 순회 공연, 구소련 순회 공연, 유고, 헝가리 공연 등을 통해 판소리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명창이라는 소개도 보았다. 명창들의 소리가 훌륭한 것이야 두말할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는데, 조상현은 자신의 소리가 영화를 통해 세계 만방에 울려퍼지게 되어 기쁘다는 말을 했다는 얘기가 들리고, 이 영화가 깐느 영화제로부터 경쟁 부문 출품을 권유받았다는 소식도 들린다. 영화 보면서 ‘외국어로 자막 넣으려면 참 고생이겠다’ ‘우리도 못 알아듣는 그 많은 한문체는 다 어떡하나’하는 시키지도 않은 걱정을 한 게 떠올랐다. 그런 걱정이 김칫국이 되진 않은 셈이지만, 왜 개운하지가 않지? 20000131 | 이용우 pink72@nownuri.net

5/10

수록곡
1. 사랑가 (메인테마)
2. 호남 좌도 남원부는
3. 적성산 아침날
4. 봄빛이 얼마나 깊은지 – 위창복
5. 백백홍홍난만중
6. 퇴령 소리 길게 나니
7. 사랑가, 그 첫째 소리
8. 사랑가, 그 둘째 소리
9. 이별가
10. 가는 님을 바라보니
11. 갈까부다, 갈까부다
12. 변학도 신관되어 내려오는디
13. 십장가
14. 남원에 열녀났네 – 최현주
15. 이몽룡 장원급제에 전라어사라
16. 농부가 – 윤충일
17. 박석치 올라서서
18. 옥중상봉
19. 권주가
20. 암행어사 출또여
21. 열녀춘향 난 배로다 – 김성녀
22. 더질더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