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음악 – 반칙왕 – 봄 필름 프로덕션/크림, 2000 영화 [반칙왕]은 ‘코믹 잔혹극’을 표방한 데뷔작 [조용한 가족]에 이어 김지운 감독이 내놓은 두 번째 작품이다. [반칙왕]은 소심하고 무능한 은행원이 반칙 전문 프로 레슬러로 일탈하는 과정을 그린다. 주인공 임대호는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또 짝사랑하는 직장 동료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무기력한 생활을 하다가 프로 레슬링 체육관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 ‘반쪽’ 프로 레슬러가 되고, 스타 레슬러의 일본 진출을 위한 경기에 ‘임팩트’를 줄 역할로 기용되어 격렬한 한 판을 벌인다. [넘버 3]의 송강호가 주연을 맡았고, 박상면, 장항선, 송영창, 정웅인, 신구 등이 조연을 맡아 연기했다. 일상의 만연한 폭력과 사회의 비정함, 소통과 소외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반칙왕]은 그렇지만 이미 소문난 것처럼 시종 관객을 웃기는 코미디다. 단, 낄낄거리고 난 후의 느낌이 유쾌하지는 않은 ‘슬픈 코미디’다. 그 이유는 주변과 일상을 끌어들이되 미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의 기호들은 프로 레슬링, 유치함, 1970/80년대, 반칙, 가면, 변두리, 소시민 등이다. 물론 그 가운데 주역은 프로 레슬링이다. 1970년대에 ‘국민 스포츠/오락’으로 황금기를 구가하다 이후 사양 산업에 접어들어 잊혀진 프로 레슬링은 오늘날 유랑 극단이나 서커스단과 그리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반칙왕]의 음악은 주변적이다. 영화의 톤과 마찬가지로 지배적이지 않은 것, 유치한 것, 정격적이지 않은 것, 지나간 것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컨대 주인공 임대호는 프로 레슬링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링의 주인공이 되어 노래하는 장면을 상상하는데, 상상 속의 모습은 이렇다. 마치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흉내낸 남진)처럼 하얀 색의 화려한 의상과 구레나룻으로 꾸미고 남진의 “마음이 고와야지”를 다소 거들먹거리면서 부르고, 짝사랑하는 직장 동료 조은희는 링 아래에서 그런 그를 한없이 흠모하는 듯한 눈길로 바라본다. 또 직장 사람들과 가라오케에 갔을 때 임대호가 술에 취해 깽판을 놓는 씬에서, 조은희가 부르는 노래는 이은하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다. 이튿날 밤 가면을 쓰고 용기를 내서 조은희에게 사랑 고백을 했다가 “술 드셨어요?”라는 대꾸로 무안을 당하고 난 후 임대호가 도망치듯 돌아서 달려갈 때, “미소를 지으며…”는 어어부 프로젝트의 저자(백현진)의 음성으로 리메이크되어 다시 등장한다. 또 엔딩 바로 전 씬, 임대호가 평소 헤드록(목조르기)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부지점장과 대결을 벌이려는 장면에서 [황야의 무법자]의 그 유명한 테마곡이 변주되어 배경으로 흘러나오기도 한다. 이처럼 단지 남진, 이은하의 옛날 노래들과 이른바 마카로니 웨스턴의 대명사격인 음악이 나오기 때문에 앞서 [반칙왕]의 음악이 주변적이라고 말한 것은, 물론 아니다. 이는 굳이 영화를 보지 않아도 [반칙왕] OST 음반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이 음반은 창작곡들로만 채워져 있다. 따라서 임대호(송강호)가 남진 노래를 부른 것, 저자가 이은하 노래를 부른 것은 음반에 없다. [반칙왕] 영화 음악은 어어부 프로젝트의 장영규가 맡았다. 어어부 프로젝트는 뭐고, 장영규는 누구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을 듯하다. 영화 팸플릿을 보면 어어부 프로젝트를 “인디 음악의 반칙왕, 대중 음악의 이단자”라고 소개해 놓았다. 표현이 좀 쎄긴 하지만, ‘한국적 아방가르드 밴드’라는 평도 듣는 밴드니까,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다(편의상 밴드란 표현을 썼지만 사실은 요즘 쓰는 명칭처럼 프로젝트에 가깝다). 표현의 적실성 여부는 무시하자. 사실, 어어부 프로젝트는 특정 장르를 추구하는 밴드도 아니고, 한두 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측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간단하게 살펴보면, 어어부 프로젝트는 1994년 백현진(보컬), 장영규(베이스), 원일(타악기, 피리 등)이 모여서 결성, 1997년 봄 데뷔 EP [손익분기점]을 냈고, 같은 해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에 삽입된 “아름다운 세상에 어느 가족 줄거리”로 좋은 반응을 얻었고, 1998년 원일이 빠지고 2인조로 [개, 럭키 스타]를 내놓았으며, 얼마전 싱글 음반을 발매했고 3집 발매를 앞두고 있다. 대중 음악의 관습을 교란하는 이들의 음악은 실험적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장영규는 어어부 프로젝트의 ‘뺀드 마스터’이다. 그는 베이스 기타 이외에 다른 악기들도 연주하고, 어어부 프로젝트의 음악을 전체적으로 조율한다. 어어부 프로젝트 이전에는 뉴웨이브/신스팝 밴드 도마뱀에서 리더이자 베이시스트로 활동했으며, 스튜디오 세션, 무용 음악이나 뮤지컬 음악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일반적인 어법으로 뉴웨이브, 신스팝, 테크노 등의 범(凡) 일렉트로니카 계열의 음악 성향을 보이지만 유연한 자세를 가지고 있어서 넘나들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의 음악 경향에 대한 설명은 ‘소리에 대한 관심과 탐구’라는 다른 표현이 더 적절할 듯하다. [반칙왕] OST 음반은 ‘장영규와 그의 친구들’의 작품이라고 볼 만하다. 장영규가 전곡을 작곡했고, 어어부 프로젝트의 동료인 저자가 몇몇 곡에서 보컬과 작사를 맡았고, 어어부 프로젝트의 음반 녹음과 라이브 세션을 도와주는 이철희와 공명이 드럼과 타악기를 쳤으며, 도마뱀 시절의 정우찬(g)과 이병훈(k) 외에 여러 ‘친구들’이 세션에 참여했다. 19곡이 빼곡하게 들어 있는 이 음반은 장영규(와 그의 친구들)의 성향을 드러내는데, 영화와 조응해야 하는 영화 음악의 특성상 제한적으로 특화된 편이다. 타이틀곡인 “사각의 진혼곡”은 영화 [반칙왕]과 OST 음반의 특징을 집약하고 있다. 프로 레슬러 임대호의 처지를 때로는 적나라하게 때로는 비유적으로 때로는 익살스럽게 그리는 “사각의 진혼곡”은 폴카 리듬의 곡이다. 저자의 보컬은 예의 기괴한 발성으로 임대호의 슬픈 코미디 같은 상황을 표현하고, 드럼이 선도하는 리듬은 다이나믹하며, 트롬본과 키보드 선율은 다소 몽환적이면서 촌스러운 느낌을 준다. 기타는 폴카 리듬의 2박자를 드럼과 함께 분할하고(스카처럼!) 간간이 벤처스 풍의 선율을 보여준다. 음반에 담긴 곡들은 대체로 의도적으로 촌스러운데 유랑 극단이나 서커스단의 ‘쇼’에 흘러나올 법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폴카 리듬이 “사각의 진혼곡” 외에도 “추격”의 후반부와 “달리기”에 쓰였고, 느린 탱고 리듬이 “슬픈 대호”에 쓰였다. 그런 이국의 리듬은 이국적인 느낌보다는 ‘옛 것’의 키치적인 느낌을 주는 편이다. 그 점에서 더 도드라지는 건 트로트곡 “어제일”이다. 이 곡의 남성 보컬은 몇 십년 전에 트로트계를 주름잡던 다소 느끼하고 간드러지는 여성 보컬 스타일을 패러디한 듯하다. 기타나 키보드로 만들어낸 ‘반주’도 최대한 ‘구리다.’ “사각의 진혼곡”이나 “달리기” 같은 곡의 벤처스 풍 기타 연주라든지, “자장가”의 전홍의 톱 연주, “무더운 하루”의 한대수의 보컬, [황야의 무법자] 메인 테마를 연상시키는 “대결”도 옛 정취를 더한다. “고기”에는 노 브레인의 이성우가 보컬을 맡아 거칠면서도 질척한 질감의 노래를 들려준다. 또 영화의 후반부 하이라이트인 레슬링 경기의 시작 장면에 쓰인 “선수 입장”이란 연주곡은 트럼펫과 메탈 풍의 기타가 주도하는 화려한 팝록 스타일인데, 이 곡은 마치 1980년대 헐리웃 권투 영화([록키] 시리즈)나 스포츠를 소재로 한 1990년대 초중반 TV 미니 시리즈의 주제가를 패러디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모든 곡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짧은 러닝 타임의 트랙들도 일반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영화 배경 음악과는 달리 전위적인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런 소품들 중 일부는 호러적인 분위기를 부분 차용한 장면에 어울리도록 긴장감을 주기 위해 작곡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엔딩 크레딧에 쓰인 “풍선껌”은 이 음반에서 가장 이질적인 곡이다. 이 곡은 도마뱀 시절의 연장선상에 있는 장영규의 신스팝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는 트랙이다. 장영규의 이펙트 건 독특한 보컬은 여전하지만 곡을 주도하는 신서사이저는 복고적인 느낌과 새로운 느낌을 동시에 준다. 영화 [반칙왕]이 코미디, 호러, 서부 영화, 멜로 등의 장르 관습, 그리고 [넘버 3] [8월의 크리스마스] [황야의 무법자] [이나중 탁구부] 등의 작품의 이미지를 끌어들여 더러는 뒤집고 더러는 조롱하는 전술을 구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익숙하고 복고적인 것을 재료로 관습성을 패러디함으로써 키치적으로 변주한 [반칙왕]의 영화 음악은 영화의 의도와 잘 부합한다. 양자 모두 비주류적이고 주변적인 것에 대한 오마주이다. [반칙왕] OST 음반은 장영규가 주도한 영화 음악이 ‘영화’ 음악으로서뿐만 아니라 영화 ‘음악’으로서도 손색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아니, 영화보다 더 뛰어나다. 2000년이 앞으로 10개월이나 남았지만, [반칙왕] OST는 올 해 최고의 한국 (영화 음악) 음반에 들 것이다. 성급한 추측이지만, 예감으로 본다면. 20000215 | 이용우 pink72@nownuri.net 8/10 수록곡 1. 팡파레 2. 사각의 진혼곡 3. 추격 4. 어제일 5. 달리기 6. 무더운 하루 7. 자장가 8. 고기 9. 풍선껌 10. 어제일 11. 출전자 대기 12. 유비호 대기실 13. 선수 입장 14. 추격 15. 대결 16. 괴물 선수 등장 17. 팡파레 18. 슬픈 대호 19. intro 관련 사이트 영화 [반칙왕] 홈페이지 http://www.foul.co.kr/ [반칙왕] 소개, 레슬링 이야기, 이벤트, 인터뷰, 갤러리, 동영상, 토크 박스 등의 메뉴로 꾸며져 있으며, 영화 [반칙왕] 예고편과 뮤직 비디오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