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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b Marley – Chant Down Babylon – Tuff Gong/Island/Def Jam, 1999

 

 

난 ‘트리뷰트’ 류의 앨범은 기본적으로 곱게 보지 않는 편이다. 조성모의 [클래식] 앨범과 “가시나무” 파동은 극단적인 경우라 하더라도 트리뷰트는 뮤지션의 ‘추모’와 ‘헌정’의 뜻보다는 음반사의 ‘기획’의 의미가 더 강하고, 원곡의 맛을 살리거나 원곡을 빼어나게 재해석한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예외는 [If I Were a Carpenter] 등 몇몇 앨범에 국한된다).

떳떳하게 ‘밥 말리’의 앨범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Chant Down Babylon]은 죽은 자를 스튜디오로 데려와 만들어낸 테크놀로지의 승리다. 작년에 나온 비틀스의 [Yellow Submarine Song Tracks]나 B.I.G의 앨범 등도 하이테크의 산물이었다(비기의 앨범은 원래 미완성인 곡들을 손본 것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수많은 밥 말리의 대표곡 중에서 열두곡을 뽑아서 실은 이 앨범에는 에리카 바두(Erykah Badu), 루츠(Roots), 에어로스미스(Aerosmith) 등이 참여하여 밥 말리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저세상 사람인 밥 말리의 원곡을 재작업하여 듀엣 형식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기획자는 밥 말리의 아들이며 말리 브라더스(Marley Brothers)를 이끌고 있는 스티븐 말리(Stephen Marley)다.

이 앨범에 대해 일부에서 극찬을 쏟아낸 것과는 달리 몇몇 곡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다소 맥빠지는 앨범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유는 내가 ‘원곡 + 무지막지한 알파’를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원곡이 훌륭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말고는, 한마디로 말해 원곡의 매력에서 두세걸음 내디딘 곡이 별로 없다. 이 앨범을 사는 건 꼭 앨범 버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잡음과 현장감이 보태진 라이브 앨범을 사는 것과 비슷하다. 말하자면 밥 말 리가 노래하고 연주하면 옆에서 래퍼들이 나와서 깔짝거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앨범의 역설은 바로 여기 존재한다. 밥 말리를 ‘기억’하는 요즘 세대가 얼마나 있겠는가. 이 앨범은 밥 말리의 앨범을 여러 장 가지고 있는 청중과 요즘 힙합 세대를 동시에 겨냥한 듯하지만 실제로 강조점은 전자에 놓여진다. 말하자면 비슷한 곡을 다 가지고 있는 청중에게 ‘조금 다른 버전 있는데 이거 안사면 섭섭할껍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너무 혹평을 한 셈인가.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난 몇주일 내내 이 앨범을 끼고 살았고 꽤 훌륭한 곡들도 많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이 앨범을 통해 밥 말리의 출렁거리는 레게 리듬과 꿈틀거리는 베이스 라인과 고뇌어린 보컬을 조금 색다르게 맛보았다는 점이 위안이다.

에리카 바두가 참여한 “No More Trouble”은 원곡을 상당히 변형한 편이다. 다른 곡들이 원곡을 ‘틀어놓고’ 약간의 래핑으로 ‘갠세이’하는 것과는 다르다. 원곡의 다소 들뜬 분위기를 에리카 바두 특유의 신비로운 R&B 스타일로 바꾸었다. 베이스 라인의 변형과 약간의 속도 변화와 색다른 여성 보컬이 가해진 이 곡은 앨범에서 가장 뛰어난 곡이며, 어쩌면 원곡의 매력을 뛰어넘는다.

본 썩스 앤 하모니(Bone Thugs’N’Harmony)의 크레이지 본(Krayzie Bone)이 참여한 “Rebel Music”은 밥 말리 부분은 그 나름대로, 크레이지 본 부분은 그 나름대로 훌륭하지만 합쳐놓으니 왠지 어색한 점이 있다. 구루(Guru), 라킴(Rakim), 버스타 라임스(Busta Rhymes), 루츠(Roots) 참여 트랙들은 록 음악의 분위기에 가까웠던 원곡을 힙합 스타일로 바꾸었지만 그들의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느낌이다. 예컨대 라킴이 참여한 “Concrete Jungle”에 대한 트리뷰트는 로린 힐(Lauryn Hill)의 “Forgive Them Father”에서 이미 충분하지 않았나 싶다(로린 힐 솔로 앨범에 실린 이 곡은 밥 말리의 “Concrete Jungle”을 재해석한 곡이다). 버스타 라임스의 “Rastaman Chant”는 원곡의 익살스러운 재미를 잘 살리지 못했다.

로린 힐이 이 앨범에서 빠진다면 이상하다. 로린 힐은 밥 말리의 며느리인 셈인데, “Turn Your Lights Down Low”를 고전적인 흑인음악의 향취가 가득한 힙합으로 만들었다. 비록 밥 말리의 무게를 다 담아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녀의 목소리와 밥 말리의 목소리는 이음새 없이 어울린다. 하긴 사람들은 이런 점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지만, 로린 힐이야말로 현재 힙합 뮤지션 중에서 레게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배워온 가수다. 척 디(Chuck D)가 참여한 “Survival a.k.a. Balck Survivors”는 래핑보다는 원곡의 꿈틀거리는 생명력과 새로운 사운드 프로그래밍이 잘 어울리며 한편으로는 긴박감을, 다른 한편으로는 재미를 더해준다.

이 앨범을 들으면서 또 하나 확인한 것은 밥 말리의 노래들, 그리고 나아가서는 레게가 록 음악과 잘 어울릴 뿐만 아니라 힙합과도 훌륭하게 어울린다는 사실이다. 레게의 출렁거리는 그루브는 힙합을 위한 훌륭한 배경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얘기해봐야 듣지 못하겠지만 여기 참여한 뮤지션들이 각자 돌아가서 나름대로의 레게와 힙합의 퓨전을 창조해낸다면, 기획자 스티븐의 노력과 혜안이 나중에라도 빛날텐데 말이다. 별로 가능성 없나? 20000329 | 이정엽 evol21@weppy.com

5/10

수록곡
1. No More Trouble – (with Erykah Badu)
2. Rebel Music – (with Krayzie Bone)
3. Johnny Was – (with Guru)
4. Concrete Jungle – (with Rakim)
5. Rastaman Chant – (with Busta Rhymes/Flipmode Squad)
6. Guiltiness – (with Lost Boyz/Mr. Cheeks)
7. Turn Your Lights Down Low – (with Lauryn Hill)
8. Jammin’ – (with MC Lyte)
9. Kinky Reggae – (with The Marley Brothers/The Ghetto Youths Crew)
10. Roots, Rock, Reggae – (with Steven Tyler/Joe Perry)
11. Survival a.k.a. Black Survivors – (with Chuck D)
12. Burnin’ And Lootin’ – (with The Roots/Black Thought)

관련 글
디지틀 시대의 ‘월드 뮤직’, 레게, 덥, 댄스홀 (3) : 스카, 록스테디, 레게 – vol.2/no.4 [20000216]

관련 사이트
밥 말리 공식 사이트
http://www.bobmarley.com/
밥 말리 음악과 맥락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라이브 말리
http://www.livemarley.com
밥 말리 공연의 풍부한 리얼오디오와 몇 개의 mp3 파일이 있다.

The Ara Magic Lounge
http://www.aramagic.com/lounge/bob_marley.html
오디오, 비디오, 탭 악보 등 풍부한 자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