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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렁큰 타이거 – 위대한 탄생 – 도레미, 2000

 

 

본의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드렁큰 타이거는 새삼스럽게 “정통 힙합이 뭐냐”라는 (특히 힙합 팬들끼리의) 논쟁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다. ‘토종’으로서는 감히 도전하기 어려운 정도의 현란한 영어 랩을 구사했던 첫 앨범은 댄스 가수 못지 않은 인기를 얻었다.

한국어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라는 전작의 과도한 영어 랩에 대한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을 자신감을 가질 법한 드렁큰 타이거지만, 그런 비판을 의식했는지는 몰라도 두 번째 앨범에서는 한국어 랩과 가사가 크게 확대되어 절반이 넘는다. 아무리 ‘본토 힙합’에 대한 자존심이 강한 드렁큰 타이거라지만 이런건 전략상으로건 전술상으로건 후퇴라고 보이지 않는다. 라임이나 한국어 랩 가사에 대한 얘기는 힙합 앨범마다 다 한 얘기이므로 다른 얘기를 하자. 스크래치나 DJing이 다채로워졌다는 점, 다양한 샘플 사용이 돋보인다는 점(“Drunken Symphony”, “늑대와 여우”, “모래시계” 등), 타이거 JK의 랩 일색이었던 1집에 비해 DJ 샤인의 랩이 많이 들린다는 점 등의 특징도 간단하게만 짚고 넘어가자.

플룻 비슷한 목가적인 현악기로 시작을 장식하는 “그의 끝에 시작(Find Fantasy)”에서부터 느낄 수 있듯이 이 앨범의 중요한 컨셉트는 ‘동양 혹은 중국풍’이다. 레게 취향이 보태진 “위대한 탄생(Fetticcini)”이나 “Blues(Boom BAP으로 치료해줄께)”에서 나오는 서스텐션이 짧은 현악기 소리는 이런 추측을 확신케 한다. 앨범 중간을 차지하고 있는 “취권 VS 당랑권” 같은 곡은 아예 제목에서부터 중국 (혹은 홍콩 무술 영화) 취향이다.

눈치챘겠지만 이건 흑인 음악 판에서는 별로 새로운 게 아니다(미국 힙합의 최근 몇가지 경향들 참조). 특히 홍콩 무술영화를 샘플로 사용하는 등 여러 가지 중국의 아이콘을 힙합의 한 요소로 가져오는 데 공헌한 우탱 클랜을 연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우탱의 ‘아류’라고 말하기는 무리지만, 이번 앨범의 “The Movement”가 1집에서도 한 곡에 사용했던 우탱 클랜에게서 따온 주제 리프를 다시 사용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드렁큰 타이거가 우탱을 염두에 두고 컨셉트를 잡은 것만은 확실하다. 성긴 곡의 분위기, 샘플의 사용 등 여러 곡에서 우탱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어차피 드렁큰 타이거는 미국인과 다름없으므로 그쪽의 ‘신기한 이국취향’에 대해 관심갖는 것에 동참한다고 해서 뭐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드렁큰 타이거가 (미국으로 돌아가겠지만) 현재는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아시안 아메리칸으로서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미국 힙합의 동양 취향의 유행에 그저 동참하거나 ‘답습’하는 것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시 말해 이 앨범은 동양 취향을 통해 1집의 경향에서 벗어나 또다른 음악적 영역으로 들어서는 데는 성공했지만, 드렁큰 타이거의 독특한 음악적 영역과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으로는 나아가지 못했다는 뜻이다.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가?

사족 한마디 덧붙이자. 트랙수는 18개지만 실제 곡수는 11개다(5번 트랙과 17번 트랙이 같은 곡임을 감안한다면 실제로는 열 곡이다). 나머지는 인트로, 스킷 같은 거다. 곡과 곡 사이에 여섯 개나 들어간 스킷들은 첨 들을 때는 재미있을지 모르겠지만 앨범을 다섯 번 이상 들을 때면 짜증이 난다. 물론 ‘skip’ 기능도 있지만 말이다. 설마 이 앨범을 다섯 번 이상 듣지 않을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20000416 | 이정엽 evol21@weppy.com

5/10

수록곡
1. Intro
2. 그의 끝에 시작(Find Fantasy)
3. Skit #1
4. 위대한 탄생(Fetticcini)
5. The Movement
6. Blues(Boom BAP으로 치료해줄께)
7. Skit #2
8. 쾌속질주
9. Drunken Symphony
10. 취권 VS 당랑권
11. Skit #3
12. 늑대와 여우(Happy Mexico)
13. Skit #4
14. 모래시계
15. 난 널 원해 II
16. Skit #5
17. Umalis BAR
18. Drunken Tiger Skit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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