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래쉬 – Terminal Dream Flow – 록레코드, 2000 1990년대에 우리는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 화이트 좀비(White Zombie), 바이오해저드(Biohazard)처럼 “우리의 음악은 무엇이다”라고 한번에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밴드들과 그들의 음악을 (그것도) 메이저를 통해 접할 수 있었다. 이는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와 피어 팩토리(Fear Factory), 또 콘(Korn)과 림프 비즈킷(Limp Bizkit)에 와서 비로소 하나의 장르로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음악 자체적으로 봤을 땐 더 복잡해지긴 했어도 말이다. 그것은 세기말이라는 시대적 불안감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상업적인 전략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시대적 불안감에 의한 아이디어와 그에 따른 테크놀로지(새로운 도구)의 활용이라 말하고 싶다. 크래쉬라. 헤비 메탈 팬들에겐 “국내 최초 해외 프로듀서와의 작업”으로, 또 가요 팬들에겐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로 이름값을 톡톡히 했던 이들이 돌아왔다. 이번 앨범 역시 콜린 리차드슨이 프로듀서와 엔지니어를 맡고 있는데, 그 동안의 강하고 무거운(heavy) 사운드를 들려주던 크래쉬를 예상하고 플레이어를 작동시키는 순간 “이게 크래쉬 맞어?”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것이다. 제법 노래다운 노래를 부르고 으르렁거림이 아닌 보통의 목소리로 가사를 읊는 안흥찬의 보컬과 새로운 멤버 김유성의 키보드 사운드가 기존 크래쉬의 고정관념을 뒤엎어버리기 때문이다. 앨범의 전체적인 사운드는 이들이 데뷔하기 전부터 밝혀온 그대로 인더스트리얼(=테크노)의 궤도에 이제서야 발을 들여놓은 듯하다. 따라서 지난 3집 앨범 [Experimental State of Fear]가 인더스트리얼이나 힙합의 도입을 맛뵈기로 보여준 것이라면 [Terminal Dream Flow]는 이를 본격적으로 시도한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그것이 김유성의 키보드에 의해서인지 멤버 개개인의 개인기(노력)와 취향(접근)의 결과인지는 두고봐야겠지만. 그럼 3년 동안의 결과물을 차근차근 풀어보자. 드럼앤베이스 사운드를 연상시키는 드럼 프로그래밍으로 시작하는 “Failure”는 앨범의 문을 여는 곡으로, 가끔씩 들려주는 안흥찬의 ‘순한’ 보컬과 키보드의 오락실 사운드가 기존의 크래쉬와는 사뭇 다르게 들린다. 피어 팩토리의 보컬리스트 버튼 벨(Burton C. Bell)을 연상시키는 “2019 A.D”, 한국어 가사와 헤비한 연주가 어울리지 않는 “Apocalypse”가 이어진다. 마치 또 다른 보컬이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Wave of Pain”에선 키보드워크가 곡 자체의 흐름과 조화를 이룬다. “Losing”과 “15 Min Ago”에서 보듯 초기 때부터 계속되는 슬로우 넘버도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또한 안흥찬은 노래부르고 있다는 느낌을 제법 준다. 물론 “Temple”, “React”, “Cocoon” 등 변함없는 크래쉬의 모습을 만끽할 수 있는 곡들도 있다. 흥미로운 트랙은 랩퍼 이현도와의 작업인 “이면(The Other Side)”이다. 앨범 [To Be or Not to Be]의 히든트랙에서 랩을 보여준 적은 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작업한 것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이현도의 래핑은 그다지 특징적이지는 않지만 크래쉬의 무거움과 조화를 이룬다. “Aux No.1″은 이번 앨범의 전체적인 색깔을 집약하고 있는 곡이다. 마지막으로 “Failure”의 하우스 리믹스가 실려있다. 크래쉬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적어도 크래쉬가 자기 음악 세계에 충실하면서 열린 마음으로 시대의 변화를 수용한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사실 크래쉬는 쓰래시 메탈이라는 틀 안에서 실험과 변화를 계속해왔는데 이번 앨범은 이를 실증해주고 있다. 계속되는 발라드와 댄스가요의 공세, 여기에 힙합과 모던 록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 앨범이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20000428 | 홍상진 sinnoid@nownuri.net 6/10 수록곡 1. Failure 2. 2019 A.D 3. Apocalypse 4. Wave of Pain 5. Losing 6. Temple 7. W.B.M.F 8. React 9. Cocoon 10. 15 Min Ago 11. Raving Heathens 12. 이면(The Other Side) 13. Aux No.1 14. Failure (Bonus Track Umax Remi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