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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n Ishii – Sleeping Madness – R&S, 1999

 

 

‘일본 테크노의 신’이 만들어내는 기계음의 추상적 세계

일본이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 중 하나는 ‘첨단 하이테크 문명’이라는 것이다. 마천루 스카이라인에 전자적으로 통제되는 시스템, 자연을 실내에 그대로 옮겨놓은 인공 낙원, 컴퓨터 게임 산업의 천국. 이런 조건들은 일찍이 많은 사람들의 창조력을 자극하여 오토모 가츠히로(Otomo Katsuhiro)의 <아키라>를 비롯한 SF 만화나 츠카모토 신야(Tsukamoto Shinya)의 <철남> 등 사이버펑크 무비를 낳았다. 켄 이시이(Ken Ishii) 역시 이들과 같은 범주로 넣을 수 있을까. 하지만 켄 이시이는 문명의 파국을 그리는 파멸의 시나리오보다 낙관적 상상력에 가깝다.

켄 이시이는 디제이 크러시(DJ Krush)와 더불어 서구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일본의 테크노 뮤지션이다. 그는 얼마 전 내한하여 클럽에서 공연도 가진 바 있으며 “Misprogrammed Day”는 5월에 발매된 한일 공동 테크노 컴필레이션 시리즈 ‘PLUR’의 두 번째 음반 [PLUR: rendezvous]에도 수록되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감정 이입이 좀처럼 쉽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데, 잘 알려진 샘플의 사용이나 그 흔한 여성 보컬은 물론 청자가 친근함을 느낄 만한 어떤 선율도 그의 음악에서 찾기 힘들다. 극단적으로 말해 그는 인간에 대한 배려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으며 그저 기계적인 비트에 몰입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추구하는 것은 인간 혐오나 문명 비판의 메시지라기보다 기계로 이루어진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에 가깝다. 그리고 그 희망은 따뜻하기보다 차갑다.

그의 세 번째 앨범 [Sleeping Madness]는 지난 앨범들에 비해서는 덜하다고 하지만 여전히 만만히 듣기가 힘들다. 보컬은 가끔씩 음원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보코더를 비롯한 전자적 조작으로 그 주체를 알아볼 수 없게 처리되어 있다. “Misprogrammed Day”나 “Sleeping Madness” 등 몇 곡에서 그루브를 확인할 수 있지만 춤을 추고 싶은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 추상적인 이미지로 가득한 그의 음악을 각자의 내면으로 끌어와 일체화하기 위해서는 듣는 이의 노력이 그만큼 필요하며, 또 추상적인 이미지를 그 자체로 즐기기 위해서는 새로운 미적 감각이 요구된다.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그렇다.

켄 이시이의 음악은 그런 면에서 독특하다. 그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어떤 생물체도 살지 않는 완전살균된 세상에 와 있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테크노 음악을 만들고 즐기는 주요 동기 중 하나가 기계에 대한 사랑이라면 기계에 음악을 맡기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이때 과연 우리는 그런 음악을 참아낼 수 있을까. 어쩌면 켄 이시이는 이런 상상에까지 나아간지도 모르겠다. 20000713 | 장호연 ravel52@nownuri.net

5/10

수록곡
1. Khaotic Khaen
2. Misprogrammed Day
3. Where Is The Dusk
4. Enso Online (featuring DJ Spooky That Subliminal Kid)
5. 24bit Optimist
6. Bugged-in Fusion
7. Water Dripping Down On The Middle Of The Forehead (featuring Talvin Singh)
8. Game Over (featuring Co-Fusion)
9. Missing Melody
10. Sleeping Madness
11. Misted

관련 사이트
R&S 레이블 아티스트 소개
http://www.rsrecords.com/artists/kenishii.htm
켄 이시이의 디스코그래피와 바이오그래피를 볼 수 있다.

technogate
http://www.technogate.co.kr/techno_japan.htm
일본 테크노 씬의 간략한 역사와 대표적인 뮤지션들을 소개하고 있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