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 “다시 만난 세계”, 소녀시대, 2007

소녀시대의 데뷔곡 “다시 만난 세계”의 뮤직비디오를 지금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면 사뭇 이색적이다. 아홉 명의 소녀들이 각자의 직업 인생에서 땀 흘려 노력하는 본격 청춘물이었던 것이다. 가사 또한 사랑하는 소녀의 설렘이 담겨 있기는 하지만 그 대상이 불분명한 가운데, “눈앞에 선 우리의 거친 길”, “알 수 없는 미래” 등 삶의 여정을 “언제까지나 너 함께하는” 존재로 그려졌다. 소속사인 SM 엔터테인먼트는 아마도 10년 전의 S.E.S.를 통해 한 가지를 확실히 터득한 듯했다. 여성 아이돌은 여성 팬을 잡으면 남성 팬이 따라오게 돼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여성 팬에게 소녀시대가 어필하는 방식은 주체적인 자아를 가진 여성이라는, 공감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물론 ‘만들어진’ 존재가 근본적으로 주체적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가능하지만, 우선은 표면적인 양태에 주목해본다.)

taeyeon1“알 수 없는 미래” (출처: http://instagram.com/taeyeon_ss)

 

1. 다시 만난 세계

A-B-C 구조에 충실한, 매우 정형적인 곡이다. 후렴구와 브리지의 마지막을 한 마디씩 끌어줄 뿐 8의 배수에 충실하다. 심지어 인트로도 잔잔한 4마디 이후 풀밴드의 8마디를 굳이 다 채움으로써 27초가량에 달하는 길이가 되었다. 1절이 2절보다 버스가 2배로 긴 점 또한 전형적인 A-B-C 구조의 특징이며, 후렴구의 구성도 정형적이다. 마지막 후렴구를 단 한 번만 반복하는데도 전체 플레잉타임은 4분 26초에 달해서, 최근의 아이돌팝을 듣던 귀로 들으면 ‘그래, 현대의 팝송은 원래는 이 정도 길이가 나오게 마련이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작사 김정배 / 작곡 Kenzie / 편곡 Kenzie / 2007년 8월

Intro (4+8마디)
A (16마디) – B (8마디) – C (16마디)
Break (4마디)
A (8마디) – B (8마디) – C (16+1마디)
Bridge (8+1마디)
C (16+1마디)

록적인 색채로 시원하고 힘 있게 뻗어 나가는 이 곡은 후반 절정부에서 무척 흥미로운 양상을 보인다. 브리지가 끝나고 후렴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코드 진행과 가사에 변화를 주며 고음 솔로가 시작되면, 화제가 된 발차기 안무가 등장한다. 짧은 치마를 입고 뛰어다니며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성적 긴장이 곡의 절정과 함께 폭발한다. 그러나 이 순간의 흥분에는 면죄부가 주어진다. 건강하고 의젓한 소녀들이 세상을 향해 날리는 발차기이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치마 속은 어쩌다 보인 것일 뿐이다. 즉, 보는 이는 이들의 육체가 아닌 성격에 매료된 것이라고, 자기 자신에게 변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치마를 잠시 잊고 절정부를 다시 들여다본다. “슬픔 이젠 안녕” 부분은 조성이 뒤집히면서, 보컬의 화음이 주제가 되는 부분이 등장한다. 단선적인 멜로디에 백업보컬의 화음이 곁들여지는 것과는 달리, 어느 음이 멜로디인지 불분명해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 부분의 강렬한 효과를 제외하면, 곡의 대부분은 사뭇 예스러운 보컬 편곡을 선보인다. 멜로디의 3도 위 화성에 교과서적으로 위치하는 백업보컬은, 으레 등장하게 마련인 후렴구를 제외하면 프리코러스의 “시선 속에서” 외엔 거의 들리지 않는다. 단적으로 말해, 코러스를 대동한 솔로 보컬리스트가 불러도 무리가 없는 곡인 것이다.

 

2. “소녀시대”

전작의 성적이 생각보다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소녀시대”는 여러 곳에서 전략 수정에 돌입한다. 특히 뮤직비디오는 지금 보면 가슴 한켠이 짠해질 지경이다. 멤버들 모두가 각자의 이름이 쓰인 무대 의상을 입고 나와, ‘이름이라도 알리겠다’는 각오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비디오의 후반부에는 멤버를 구별하기 쉬우라고 각자 악기까지 들고 있고, 세 명의 멤버가 번갈아가며 고음을 뽑아내는 절정부도 어떻게든 한 명에게라도 매력을 느끼길 바라는 절실함이 느껴진다. (“드럼 치는 애 예쁘던데?” “난 ‘말도 못 하고~’ 하는 애.”) 그리고 무엇보다 그룹 이름과 같은 “소녀시대”란 제목이나, 성인층에게 익숙한 이승철의 원곡이라는 점에서, 인지도를 올리는 일이 이들에게 얼마나 큰 임무였는지 알 수 있다.

작사 이승철 / 작곡 송재준 / 편곡 Kenzie / 2007년 11월

Intro D (4+4마디)
A (8마디) – D (4마디)
A (8마디) – B (8마디) – C (8+1마디) – D (4마디)
A (8마디) – B (8마디) – C (8마디)
Bridge (8마디) – C’ (8마디)
C (8마디) x 2
Outro C’’ (2마디)

비디오를 차치하고도, “소녀시대”는 전작이 가졌던 상업적 약점들을 보완하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인다. 당장 인트로만 해도 ‘조용하게 시작한 뒤 테마를 제시한다’는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4+8을 과감하게 잘라 4+4로 구성했다. 마지막의 후렴 반복도 두 배로 늘렸고, 브리지와 아우트로에서도 후렴의 모티프를 반복한다.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 모티프는 후렴 C의 8마디 중 2번 등장하는데, 세어보면 브리지가 시작된 이후로 이 모티프가 7번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해 각인 효과를 노린다는 것이다. 인트로와 간주에서 등장하는 D 테마도 후렴 C의 코드 진행을 가져와서 후렴을 더욱 상기시킨다.

보컬의 연출은 전작에 비해 훨씬 과감해졌다. “날!”, “오!” 등 가사의 한 음절을 강조하는 백업보컬은 음정과 거의 무관한 외침으로 구성되었다. A에서도 “사랑해, 하며 키스해 주었네”, “파도 같아” 등을 여러 층의 화음으로 백업하고 있어 전작과 대조를 보인다. 후렴에서도 메인 멜로디와 2도 차이를 갖는 등 보다 과감한 화성을 사용하고 있어 한층 더 화려하고도 테크니컬한 보컬 화음을 구사한다. 프리코러스와 후렴은 메인 보컬이 고음(D)을 얹으며 폭발력을 보인다.

악보“소녀시대”(부분), 채보: 미묘, 감수: 배선희

새로 작곡돼 들어간 브리지는 인상적인 보컬을 선보이는데, 높게는 F#까지 올라가며 상당한 고음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여러 겹의 보컬 솔로가 번갈아가며 고음을 향해 치닫는 모습은, 조금 과장하자면 에어쇼라도 보는 듯하다. 댄스 브레이크나 랩을 넣지 않고 가창력을 강조하는 브리지를 만들었다는 점은 무슨 의미일까. 어쩌면 SM 엔터테인먼트는 전작의 부진을 세간의 인식에서 찾았는지도 모른다. 특히나 1세대 아이돌을 경험한 세대에게 아이돌은 실력이 없는 존재라는 평판이 고답적이지만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로선 낯설던 9명 구성의 그룹에 대해 ‘연습생 대방출’이란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던 참이었다. 밴드 연주 콘셉트의 뮤직비디오와 ‘보컬파’ 멤버들의 ‘고음 배틀’은 SM과 아이돌의 클리셰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우회하는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프로듀서 켄지의 감각이 짜릿한 보컬 편곡을 만들어냈음은 물론이다.

 

3. “Kissing You”

전략 수정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자 소녀시대는 공격적인 애정 공세에 들어갔다. “Kissing You”는 후렴구보다 더 강한 인상을 남기는 D 파트(“둣두루 둣둣두 키싱 유 베이비”)가 등장하는 곡이다. 구조적으로 흔히 ‘후크’라 부르기도 하는 이 부분은, 현재의 아이돌팝에서는 매우 흔한 구성요소가 되었다.

작사 권윤정, 이재명 / 작곡 이재명 / 편곡 이재명 / 2007년 11월

Intro (8마디) – D (4마디)
A (4마디) – B (4마디) – C (14+2마디) – D (4마디)
A (4마디) – B (4마디) – C (14마디)
Bridge (8마디) – C’ (4마디)
C (14마디) – C’’ (2+1마디)
Outro (4마디)

버스 A와 프리코러스 B가 과감하게 짧다는 점 역시, 비교적 정형적이었던 기존의 곡들보다 현재의 아이돌팝에 가까운 파격을 보인다. B의 마지막 부분인 “사근사근 그대 이름 부르죠”의 멜로디가 갑작스럽게 상승하면서 금세 업템포의 후렴으로 돌입하고 있어, 약간은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구성인 것이다.

그에 비해 상당히 길게 만들어진 후렴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합창부인 Ca 4마디(“그대와 발을 맞추며 걷고…”), 솔로인 Cb 4마디(“고마워 사랑해 행복만 줄게요…”), 다시 합창부인 Ca 4마디(“내일은 따스한 햇살 속에…”)가 반복된 뒤, 솔로 Cb’(“달콤한 사랑의…”)가 2마디로 잘려 등장한다. 이후 경우에 따라 간주의 형태로 2마디가 추가되거나(1절),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기도 하고(2절), Cb’를 변주하며 반복하기도(브리지 이후) 한다. 후렴에서 테마의 반복 횟수나 양상은 전작 “소녀시대”와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 그러나 템포가 118 BPM이란 점을 고려할 때, 합창과 솔로의 대화가 4마디 간격으로 이뤄진다는 것은 다소 긴 편이라 할 수 있다.

가사의 내용은 오직 사랑하는 사람에 관한 내용만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화자 자신에 관해서는 “숙녀처럼 (…) 그대 이름 부르죠”와 “내 볼엔 핑크빛 물이 들어도”를 제외하면 어떤 모습의 사람인지 전혀 묘사가 이뤄지지 않는다. “너만의 소중한 여자친구”로서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행동들뿐이다. “소녀시대”가 리메이크작이어서 작사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면, 이 곡이야말로 소녀시대가 이성애적인 전면전에 나선 시점인 것이다. 그리고 알려진 바처럼 일부 멤버마저 부담스러워했을 정도로 극단적인 소녀풍이었던 이 곡은, 비로소 소녀시대를 안정권에 올려놓게 된다.

 

4. “Baby Baby”

1집 [소녀시대]의 리패키지인 [Baby Baby]에 수록된 곡이다. 2절의 버스에서는 리듬 변화를 주었다가 다시 원래의 맥락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간주 C’에서는 후렴의 모티프 “Baby, baby, baby”를 추출해 오케스트레이션과 조화를 이루는 등 아기자기한 편곡이 인상적이다. 버스 부분에 솔로와 코러스의 대화 형식이 등장하긴 하지만, 멜로디 구성 자체는 “다시 만난 세계”와 마찬가지로 솔로 곡의 양상을 보인다. 곡의 구조도 낯설 것이 없는 정형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기존의 흐름에 비추어 다소 보수적인 성향인 셈인데, 황성제 특유의 유려하고도 사랑스러운 곡풍이 잘 살아 있어 리패키지의 팬서비스적 성격도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합할 수 있겠다.


작사 황성제, 유제니 / 작곡 황성제 / 편곡 황성제 / 2008년 3월

Intro (4마디)
A (8마디) – B (4마디) – C (8+1마디)
A’ (8마디) – B (4마디) – C (8마디)
C’ (4마디)
Bridge (8+1마디)
C (8마디) – C (8+1마디)

가사에서는 눈에 띄는 점들이 있다. “엉뚱한 상상 때문에 미루는 바보”, “이런 내 수줍은 고백”, “부드러운 눈웃음으로” 등의 구절은 화자 자신을 관찰하는 시점이 엿보인다. 자신에 대해 스스로 말하기보다, 제3자의 시선으로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는 상황이다. 차후에 논의할 기회가 있겠으나, 2008년 이후 여성 아이돌의 곡에서는 이런 성향이 급속도로 늘어나게 된다. 과격한 형태는 아니나, 이 곡에서 그 단초가 엿보인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또한 솔로와 코러스가 주고받는 “친구 이상은 절대 아냐 (그러면 어때)”도 주목할 만하다. 서로 상반된 의견을 제시하는 대목으로,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법은 이후 둘 이상의 화자를 점점 더 분리하면서 완전히 별개의 인격체로 설정하게 되어, “I Got A Boy”(2013년 1월)로 대변되는 대화체 가사 쓰기로 발전하게 된다.

 

5. 다시, “다시 만난 세계”

“다시 만난 세계”로 돌아가 보자. 당시로서도 다소 과거지향적인 부분이 있었던 이 곡은 강렬한 기타가 리드하는 역동적 구성을 갖춰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장하는 수작이었다. 앞서 언급한 여성 팬 공략과 더불어, 어딘지 모르게 애니메이션 주제가 같은 분위기를 풍겨 일본 서브컬처에 익숙한 팬들도 노릴 수 있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곡은 소속사가 당시 갖고 있던 노하우들이 켜켜이 쌓여 기획된 야심 찬 곡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카라의 “Break It”(2007년 3월)이 같은 소속사 선배인 핑클의 “Now”(2000년)를 강하게 연상시킨다는 점과 비교해보자. 결국 당시의 아이돌 기획자들은 1세대 아이돌, 더 제한하자면 동방신기 이전의 아이돌들이 남긴 유산을 계승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차트를 지배한 것은 원더걸스였다. 탑 100에 9개월간 머물며 (네이버 차트 히스토리 기준) 전국을 뒤흔든 “Tell Me”(2007년 9월)와 이어지는 “So Hot”(2008년 5월), “Nobody”(2008년 9월)의 성공은, 뮤직비디오도 없는 앨범 트랙이나 게임 홍보곡까지 순위에 올려놓았다. 소녀시대의 상대적 부진의 이유는 여러 가지를 상정할 수 있다. SM의 아이돌 시스템이 고도의 상업성으로 나쁜 인상을 남겨둔 바 있기 때문이거나, 9명이라는 대형 포메이션이 낯설었고 본인들 역시 이를 어떻게 다뤄야 좋을지 잘 몰랐다거나.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은 중요한 한 가지를 잘못 예측했다. 바로, 2차 아이돌 붐이 성인, 특히 성인 남성들에 의해 주도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아주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래 2001년에 데뷔한 같은 소속사의 밀크(M.I.L.K.) 2집을 위해 만들어졌던 “다시 만난 세계”를 사용한 것은 어쩌면, 과거의 아이돌에 대한 향수가 시장을 지배할 것임을 내다본 한 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1세대 아이돌을 답습한 것은 결과적으로 패착이었음이 드러났다. 분명 뭔가가 바뀌고 있는 시점이었다.

소녀시대와 카라 모두, 급격한 방향 전환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겉모습은 이성애적 어필의 본격화로 드러났다. 사랑스러운 소녀의 모습을 전시해주는 것만으로는 ‘남심’을 사로잡지 못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소녀시대”, “Kissing You”, “Baby Baby”로 이어진 이러한 기조는 “Gee”(2009년 1월)로 대히트를 기록하고, 서현, 제시카, 티파니의 “오빠 나빠”(2008년 4월)와 2집의 “Oh!”(2010년 1월)에서 ‘오빠’를 직접적으로 호명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오빠”라 불린 ‘삼촌들’은 소녀시대를 위시한 여성 아이돌들에게 쌍수를 들고 성문을 열어준다. 가히 ‘삼촌혁명’이라 불러도 좋을 상황이었다.

그런 흐름 속에서 “다시 만난 세계”는 사뭇 이질적인 곡으로 남았다. 가사의 내용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통파의 구조 속에 기타의 리듬으로 퍼포먼스의 역동성을 담보하는 방식, 충분한 워밍업을 통해 긴장을 쌓아올리는 시간 배분, ‘노래’의 형식에 충실한 보컬 편곡. 그것은 변칙적인 곡의 구조와 과격한 연출로 짧은 시간 안에 자극을 쏟아내는 현재의 아이돌팝과는 무척이나 다른 형태였다. 음악적인 측면에서도 과거의 기념비 같은 소리를 들려준 것이다. 팬이 무대 위 아이돌을 동경하는 시대에서 ‘삼촌’이 ‘조카’를 ‘예뻐하는’ 시대로. “다시 만난 세계”는 어쩌면 팬과 아이돌이 수직적 관계였던 아이돌 신화의 시대가 남긴 마지막 송가였는지도 모른다.  | 미묘 tres.mimy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