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퍼렐 앨범에 관한 논란은 ‘영 페미니스트’에 대한 이야기, 여성주의가 팝 음악과 연관되는 맥락이 더해졌다. 논란의 아이콘 마일리 사이러스와 ‘우먼 임파워링’을 외쳐온 알리샤 키스의 참여는 그러한 논란에 불을 지핀다. 사실 최근의 몇 아티스트들은 페미니즘 관련 이슈를 만들어 왔다. 이 앨범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라는 “Blurred Lines”부터 마일리 사이러스, 릴리 알렌, 비욘세 등으로 이어지는 페미니즘 이슈까지 최근의 분위기가 있었다. 비욘세는 영 페미니스트들의 표현 혹은 그들이 이슈를 풀어내는 방식과는 별개의 담론, 즉 흑인 페미니즘이나 여성의 몸, 성적 욕구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크게 주목받았고, 마일리 사이러스는 또 복잡하고 빠르게 진행 중이며, 릴리 알렌은 ‘포지션’과는 별개로 실수를 자꾸 하는 것 같으니, 여기서는 퍼렐 앨범에 집중하기로 한다. 퍼렐의 이번 앨범은 Tinymixtapes.com에서 별 다섯개 만점에서 고작 ‘반 개’를 받았다. 그냥 무시해도 될 일이지만 이 앨범을 설명할 때 그 사이트는 ‘neo-liberal’이라는 단어를 썼다. 사실 저열한 방식이라고 화낼 만하다는 생각도 있지만, 그 전에 음악이 가진 의미 만으로 이런 평가를 받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경우는 미국 얘기지만, 한국 힙합에서도 여성 혐오 마케팅으로 뒤덮인 상황(from [아이즈(ize)])과는사뭇 대조적인 앨범임에도 오히려 그런 상황과 밀접한 평가라는 생각도 든다. 퍼렐은 그렇게 한 쪽에서 욕을 먹었다. 그리고 다른 쪽에서도 욕을 먹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에게 퍼렐은 ‘부족한’ 사람이었고, 좀 더 공부를 하고 오라는 식의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그런 평가 하나 하나에 일희일비할 필요도 없고 실제로 그러기도 힘들지만,이러한 현상이나 평가 자체가 어느 한 명만의 것이 아니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퍼렐의 이번 앨범을 평가할 때 자주 따라붙는 단어는 ‘feminist’일 것이다. 이걸 가장 먼저 꺼낸 건 영국의 가디언이고, 이후 사람들은 앨범을 그런 관점으로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퍼렐은 페미니스트인가?” 누군가는 그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며 단지 그러한 행동을 하고 앨범을 낸 것이다, 혹은 그가 아닌 ‘앨범’이 페미니즘에 가까울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비슷한 맥락의 비판도 있다. 퍼렐은 페미니즘 감수성이나 지식이 부족하다, 그가 놓치는 것들이 아직 많다는 이야기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맥락이 중요하다. 그리고 내가 퍼렐을 지지하는 건 이것이 시도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고, 그 의도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가끔 여성주의 진영에서 활동가와 학자 입장의 간극 혹은 그 차이에 관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퍼렐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여성주의 학문은 익혔지만 그 감수성은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여성학을 배워도 현상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감수성이나 예민함이 제로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교조주의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고 싶다. 퍼렐을 비판하고 지적하는데 공격적일 필요가 없다고 본다. 퍼렐의 [Girl] 앨범은 크게 헐뜯을 부분이 없다. 특히 음악은 말이다. 이 얘기는 나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퍼렐의 팬이라면 지난 1~2년 간 그가 디스코(disco)나 훵크(funk) 같은 과거의 흑인 음악에 기반한 작품들을 꾸준히 만들었다는 점은 잘 알 것이다. 그래서 “Get Lucky”나 “Blurred Lines”를 제외하더라도 맥신 애슐리(Maxine Ashley)나 레드골드그린(RDGLDGRN), 마일리 사이러스(Miley Cyrus) 등 인디펜던트 아티스트부터 메인스트림 팝 스타까지 퍼렐에게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곡을 받았다는 걸 생각해보면, 퍼렐이 가진 음악적 관심사 등을 잘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게다가 넵튠즈 때부터 이어온 특유의 핸드 클랩을 녹음해서 사용하는 방식, 퍼커션의 패닝을 튀게 하는 등 그가 전반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고려해도, 또한 BPM을 유지하고 자신감이 붙은 코러스 녹음까지 들어봐도 이번 앨범은 온전히 퍼렐의 앨범인 것이다. 그는 팝 음악 트렌드를 먹어 삼키는 데 급급한 사람이 아니라, 2~30여 명의 현악기 세션부터 누구나 들으면 다 알 법한 무료 샘플 음원까지 잘 활용하는 아티스트다. 여기에 더해서, 퍼렐의 새 앨범은 여성에 대한 예찬과 리스펙을 가득 담은 작품이다. 그는 앨범에 관한 인터뷰에서 성차에 관한 불균형과 여성이 사회 내에서 여전히 주목을 받지 못하는 점 등을 이야기했다. 인터뷰 내용을 떠나 퍼렐은 이 컨셉에 대해 고민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익숙한 단어를 익숙하지 않게 보이고 싶었다’는 말은 꽤 감동적으로, 퍼렐에게 감사할 정도이다. 그건 세상을 ‘다르게’ 이해하는 데 굉장히 우선적이고 중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막상 수록된 10곡(인터루드를 포함하면 11곡)을 다 들어보면 그렇게까지 이 앨범이 여성주의 감수성을 담고 있나 싶을 정도로 평범한 구석도 있지만, 특유의 젠틀함과 여성을 향한 예찬론은 선명하고, 애초 가사를 쓰는 목적이었던 ‘임파워먼트’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본다. 특히, 이 앨범을 접하는 계층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냉정하게 말해 이 앨범을 듣는 전 세계 몇 억의 사람들 중 일상적으로 여성의 권리나 사회적 지위에 관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상황에서 퍼렐은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의도와 말을 충분히 전달했기에 나는 이 앨범의 가사가 성공적이라고 본다. 퍼렐 역시 이 앨범에 여성주의 감수성 같은 것을 100% 채우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이나 영국의 언론들 중 일부는 (심지어앨범이 나오기도 전에) 그런 단어를 쓰고 있었다. 외부에서 그런 의미가 붙여지면 당연히 트러블은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일련의 사태를 보면, 미국 언론 역시 그렇게 뛰어난, 혹은 다양한 프레임을 가진 것은 아니란 생각도 든다. 퍼렐을 공격하면서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레이시즘’으로 연결하는 전략을 종종 취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여성주의 안의 인종 문제’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런 문제제기는 과연 그가 정치적으로 ‘얼마나’ 올바른가를 증명하라는 압박인 셈인데, 릴리 알렌의 경우는 뮤직비디오에서 그런 부분을 생각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고 결국은 기존에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로 학습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가 드러났다. 퍼렐도 그런 식의 공격을 당했는데, 주요한 포인트는 ‘커버에서 이미 인종차별주의가 드러난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퍼렐은 이에 대해 그냥 차분하게 대답했다. 난 합리적인 대응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렇게 ‘정치적 올바름’이나 ‘레이시즘’을 겨냥하는 건 미국에서는 일종의 뻔한 패턴이기도 한데, 정작 그 주체인 퍼렐이 흑인이라는 점에서 맥락은 전혀 달랐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굉장히 어이없는 일이기도 하다. 커버에 실린 네 명의 여자 사진 중에서 어떤 인종이 좀 더 앞에 있거나 뒤에 있다는 걸로 인종주의를 언급하고 퍼렐을 공격하는 건 좀 찌질해 보인다. 보다 근본적인 논쟁도 있었다. 과연 여성주의 안에서 이 앨범을 애기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인터넷 공방이었다. 최근 여성주의 진영 안에서 화두인 것이 ’21세기 페미니즘’인데, 몇몇 언론들은 이 ’21세기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프레임을 짜기도 하고, 이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나 정의를 내리기 어려울 정도로 그 논의가 꾸준히 이어지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논의에 대해 긍정적이다. 퍼렐의 이번 앨범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들은 ’21세기 페미니즘’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말한다. 이렇게 되자 또 ’21세기 페미지늠’이 무엇이냐부터 그것의 당위 혹은 진위를 놓고 갑론을박이 펼쳐지는 것이다. 하지만 정의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이 얼마나 적절하게 반영되었는지를 따지는 것은 오히려 소모적인 작업이다. 그렇다면 왜 싸우는 걸까? 이렇게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언제나 마찬가지였겠지만, 동시대에 페미니즘을 논하는 층위가 세대 별로 나뉘어졌다. 좀 더 전통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21세기 페미니즘’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변화에 대해 염려나 우려라는 것은 분명하다. 반면 동시대의 젊은 여성주의자들은 좀 더 진지하게 대응하고 있기도 하다. 기성세대에게 21세기 페미니즘은 약간 가벼운 걸로 인식되는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은 국내나 해외나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정치적으로 비슷한 자리에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인터넷이 더 익숙한 세대이자 공부가 부족해 보이거나 실제로 부족하기도 하기 때문에, 혹은 경험의 문제 때문에 이 세대 전체의 목소리가 가벼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걸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아직도 페미니즘이 여성우월주의와 동의어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저런 논쟁들이 오히려 부러워보이기도 한다. 하여튼 우리(애매모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어쨌든 ‘영 페미니스트’들이) 가장 중심에 내세워야 할 가치 중 하나는 스스로를, 그리고 스스로가 하는 것들을 ‘존중’하는 것이다. 퍼렐의 ‘임파워먼트’라는 것도 결국 같은 맥락일 것인데, (더 쓰면 한없이 길어지니까) 적어도 우리만큼은 스스로를 격려하고 긍정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당연하게도, 이것이 자아도취하라는 게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공격받고 비판받으면서 스스로 성찰하는 과정에 주목하라는 얘기다. 어떤 삶이든 그 에너지가 중요하다. 우리는 깨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퍼렐의 [Girl]로부터 배울 수 있는 건, 실패하더라도, 내가 설령 모자란 부분이 있을지라도 좀 더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표현을 다듬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을 바꾸고, 다시 말해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던 것들(가부장제, 차별, 혐오, 폭력 등등)을 실제로 그 눈 앞에 드러내기까지 노력했던 시간들이 수포가 되거나 그 전으로 다시 돌아갈 지도 모르겠다. | 블럭(박준우) blucshak@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