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의 음악 유랑기, 성공 모델이 되다 익히 알다시피 삶의 바닥을 겪는 것엔 연습 기간이 없다. 좋지 않은 기운은 급작스레 찾아와 많은 것을 쉬이 앗아간다. 대비책이 있을 리 만무하다. 사람들은 언제 친구의 집 소파 신세를 전전하며 살아갈지 계산하며 하루를 보내지 않는다. 다만 불황과 최저라는 표현이 아무렇지도 않은 요즘 시대, 사회는 시민이 자신의 육체적·정신적 빈곤 상태가 곧 ‘밑바닥 체험’이라는 유형에 들어갈 것 같다는 우려를 갖도록 분위기를 조장한다.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청년들이 스스로를 ‘전문적 노숙인(technically homeless)’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는 우파의 전형적인 비판처럼 복지국가의 혜택을 입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노동을 거부하는 경우와 다르다. 학자금대출 등으로 빚어진 개인 신용 파산, 부모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의 징표로 작용하는 개인 거주공간의 박탈이 예상되는 청년들이 스스로를 ‘밑바닥 체험’에 들어갈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공표하는 실천 방식에 더욱 가깝다. 노숙인은 갑작스레 찾아온 불운의 처지가 아니라, 자신의 불안을 관리할 수 있는 계획의 언어가 되어버렸다. 전문적 노숙인에 접어들었다고 말하는 청년들은 자신의 재정 상태를 솔직하게 밝힌다. 그리고 누구 집에 얹혀 잘지, 하루 끼니를 무엇으로 때울지를 온라인상에 공유하기도 한다. 해외 포털에서는 자신이 전문적 노숙인 단계에 접어들었는지 물어보는 광경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건실한 청년’ 싱어/송라이터 에드 시런 한편 전문적 노숙인 단계를 명성 획득의 한 과정으로 전환시키려는 분위기도 나타났다. 현재 최고의 인기를 구가 중인 싱어송라이터 에드 시런의 음악 유랑기가 그렇다. 2014년 7월, 《텔레그래프》(“나는 비평가들을 위해 음악을 만들진 않는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전문적 노숙인 시절을 겪었다고 밝힌 23살의 청년은 흔하디흔한 ‘유튜브 스타’도, [X 팩터](영국판 [아메리칸 아이돌]) 우승자 출신도 아니었다. 에드 시런의 서사는 유튜브나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스타를 만드는 것에 피로감을 느낀 대중음악계와 언론의 호기심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고생을 위한 보험, 고생이라는 보험 에드 시런은 17살에 부모 곁을 떠나 배낭 하나와 기타를 메고 혈혈단신 거리공연을 시작했다. 이는 곧 친구·지인 집 소파 신세를 지며 불안(편)한 쪽잠을 자는 소파 서퍼(sofa surfer)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음악인의 서사로 볼 때, 그의 고생담이 지나치게 평범해 보이면서도 특수한 지점은 아버지의 역할이다. 에드는 남들이 으레 생각하듯 음악을 극심하게 반대하는 부모 곁을 ‘탈출’한 것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에드의 아버지 존 시런은 에드의 음악 인생에서 유랑이 필요했던 소명의식을 심어준 장본인이었다. 어느 날 존은 가수 제임스 모리슨(James Morrison)의 공연 기사를 오려 와 에드에게 보여줬다. 2012년 2월 《데일리메일》과의 인터뷰에서 에드는 아버지의 말을 다음과 같이 떠올렸다. “이 기사 좀 보렴. 이 친구는 한 해에 200회의 공연을 했다는구나. 그는 이처럼 경험을 쌓았고, 인정을 받은 거야.” 독립생활을 한 지 2년째가 되던 2009년, 에드는 한 해에만 ‘312회’의 공연을 열었다. 온갖 펍과 바를 돌아다니며, 그곳에 관객이 있든 고작 5명 정도밖에 되지 않든 간에, 하류 인생이라 불리는 이들과 음악으로 교류하는 법을 배웠다. 존 시런은 아들 에드의 어린 시절부터 사람이 인생의 목표를 이루려면 충분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이야길 즐겨했다. 에드는 그런 면에서 순종적이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무엇을 절제해야 하는지 일찌감치 깨달았다. 약 ‘10살’ 때 기타를 처음 잡았던 소년은 하루에 ‘7시간’씩 기타를 연습했다. 기존 가요의 코드를 따서 자신의 멜로디를 만들 줄 알았던 것도 이때였다.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놀런이 쓴 에드 시런의 전기(『Ed Sheeran A+: The Unauthorised Biography』)를 보면, 한창 놀 나이에 에드는 친구들이 나가서 놀자고 해도 “지금은 안 돼. 음악 연습 중이야. 시간 아까워”라고 말하던 소년이었다. 소년은 ‘14살’ 때 음악이 자신에게 맞는 일임을 깨달았고, ‘16살’ 때 이 일을 위해 무언가를 조금씩 시작했다. 데미안 라이스의 공연을 보고 와서 자극을 받은 소년 에드는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바로 ‘여섯 곡’을 만들어버렸다. ‘아웃라이어’, 혹은 말콤 글래드웰의 1만 시간의 법칙 에드 시런의 좋은 기억력은 앞서 보듯 자신의 음악 인생을 계량화된 서사로 표현하는 재주로 이어졌다(에드는 특히 언론을 통해 자신이 청소년 시절부터 한 공연(gig) 횟수의 어마어마함을 기꺼이 드러내고 싶어했던 것 같다). 이는 음악 저널리즘이 에드 시런의 고생담을 양질의 도덕적 교훈극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제한된 지면 가운데 독자들에게 유익한 메시지를 주기에 에드 시런의 ‘계량화된 고생담’은 주말판 『아웃라이어』가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자신의 역경을 시기와 시간으로 적확하게 표현할 줄 알았던 에드 시런은 말콤 글래드웰의 대표 이론인 ‘만 시간의 법칙’을 적용해보고 싶은 인물이었다(실제로 2014년 6월, 대중음악 칼럼니스트 닐 맥코믹은《텔레그래프》에 에드 시런의 2집 <x>를 리뷰하는 글을 쓰면서, 그의 음악 인생을 만 시간의 법칙에 비유한 적 있다). 에드 시런을 성공의 독특한 기회를 발견한 아웃라이어로 간주한다면, 그의 유랑기는 경제적 불운과는 거리가 먼, 유명 음악인이 되기 위한 자발적 고생담이자 성공을 위한 투자였다. 2011년, 데뷔앨범 [+]으로 성공하기까지 에드 시런의 유랑에는 아버지가 지지하고 마련해준 음악인이 되기 위한 심리적 기반이 있었다. 이는 그의 ‘고생을 위한 보험’이 되어준 셈이다. 아울러 콜드플레이 만큼의 명성을 얻고 싶으며, 전형적인 팝스타와는 다른 길을 가고 싶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청년의 야심을 볼 때, 유랑 자체는 성공을 위해 가입한 ‘고생이라는 보험’이었다. 에드 시런을 둘러싸고 있는 말, ‘노동윤리’ 에드 시런은 데뷔 앨범이 대박 난 뒤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고생(hard work)’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이 표현은 자연스레 그를 ‘노동윤리(work ethic)’가 좋은 음악인으로 평가받게 했다. 노동윤리란 무엇인가. 세상엔 공짜란 없으며, 쉰다는 건 부끄럽다는 말이다. 에드 시런은 자신이 고생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다. 그는 ‘넘어짐으로써 안전하게 걷는 법을 배운다’는 영국 속담에 잘 들어맞는 청년이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존 시런은 아들에게 남에게 존경받고 싶으면 그들이 품은 노동윤리를 고스란히 따라하지 말고, 적어도 그 두 배에 달하는 노동윤리를 지닌 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 적 있다. 에드는 자신의 노동윤리를 엄청난 음악적 생산성으로 구현해냈다. 3년간 120곡을 쓸 정도로 그는 일 중독자였다. 업계에서는 이 청년의 활력이 기특해 보였을 것이다(가령 2012년 12월 [빌보드]는 2013년 화제를 일으킬 스타를 꼽는 기사에서 워너 뮤직 그룹 회장 마이크 캐런의 인터뷰를 빌어 에드 시런의 노동윤리를 칭찬한 적 있다). 덩달아 에드 시런의 주요 지지층인 십대·이십대 팬들은 에드의 노동윤리에 대한 호평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그를 ‘견실한 청년’으로 추대해나갔다. 자신들의 나이 때 행한 엄청난 공연 횟수와 떠돌이 생활은 독특한 경험의 부재에 압박받는 청(소)년 팬들을 자극시켰다. 아울러 팬들에게 그는 성공한 음악인으로서 허세도 없으며, 기부도 잘하고 자기 가족과 팬들에게 충실한 모범적인 청년 싱어송라이터였다. Ed Sheeran – Sing | x (2014) 에드 시런은 르윈 데이비스가 아니다 다만 에드 시런의 고생담과 이에 연유한 노동윤리가 가져다주는 지나친 교훈적 기운은 시런 자신을 경직된 도덕적 성자로 만들어나가고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그런 위치를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성공의 열쇠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실패의 열쇠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같은 빌 코스비의 격언 등을 자주 꺼내는 그는 자신의 고생에 깃든 도덕적 가치를 매우 투명하게 밝히는 데 거리낌이 없다. 조숙했던 그의 생활경험에서 우러나온 가사와 감수성, 이를 살리는 비트 감각과 장르의 다양한 수용이란 음악적 호평과 별개로, 자신의 음악적 성공을 너무나 이른 시기에 좋은 도덕 교과서 한 권으로 굳히는 담화는 큰 매력이 없어 보인다. 직업으로서의 노동을 볼 때, 즐기면서 만족하는 일이라는 세계는 안타깝게도 소수가 점령하고 있다. 그 소수가 설파하는 노동윤리는 ‘아, 저들도 우리처럼’이라는 친밀감보다는 불가능성에 가닿은 감상하기 좋은 ‘볼거리’로 다가올 뿐이다. 연예인에게 노동윤리는 자신을 매력적으로 보이는 장치로 소비되면 끝일뿐이다. 이것이 좋은 사회적 영향력으로 이어지는가는 그들의 소관이 아닐지 모른다. 성공한 에드 시런의 노동윤리는 체화하고 싶은 삶의 지침이 될 수 있겠지만, 제목과 카피에 혹해 몇 쪽 읽은 채 방 구석에 내팽개친 겉만 번지르르한 자기계발서일 수도 있다. 그의 노동윤리는 이제 어느 허름한 펍에서 엄청난 인파가 모이는 아레나로 향해 있다. 자본과 유명세를 관할하는 업계 입장에서 에드 시런의 노동윤리는 ‘기타 하나, 목소리 하나, 루프 페달 하나’란 단촐한 이미지로 소비되길 원한다. 이 가운데 오늘도 그를 선망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기타 하나를 메고 길거리로 향한다. 언론에서는 냄새를 맡고 ‘에드 시런의 단계를 밟아가는’이란 표현을 써가며, 유랑과 버스킹을 신화화하는 작업에 더 심혈을 기울이는 듯하다. 다만 에드 시런의 노동윤리와 이에 기반한 라이프스타일은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근면하고 순수한 성공 모델에 머물지 않는다. 에드 시런이라는 원 맨 밴드는 10대의 무대 준비 트럭을 5대로 줄여주는 효율적인 장치이자, 어느 가수와도 거리낌 없이 협업하며 자신의 브랜드를 기꺼이 홍보해주는 고마운(?) ‘일중독자’에 더 가 닿아 있다. 혹한의 뉴욕을 떠도는 르윈 데이비스와 ‘방랑하는 젊은 예술가’라는 신화 그는 이제 충분히 떠돌수록 마일리지가 쌓이는 ‘떠돌이 보험’을 지닌 유랑자로서, 여러 팬들을 만나고 유명세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의 이름을 구글에 검색해 기사와 반응을 자주 찾아보고, 매일 자신과 동료의 음악 순위를 챙겨서 보는 이 주도면밀한 자기관리의 화신은 성공을 위한 유랑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호주 언론 《커리어메일》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구글에 자주 쳐본다고 밝혔다). 아마도 행색은 전과 다를 바 없을지 모른다. ‘자신의 마음은 이방인'(“Grade 8”)이며, ‘길거리는 나의 친구'(“City”)라는 노랫말도 잊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는 이제 세계 각지에 연예인 친구들이 있으며, 유랑이 끝나면(유랑이라 쓰고 여행이라 읽는다) 돌아갈 자기 아파트 한 채도 있다. 그는 르윈 데이비스가 아니다. | 김신식 https://www.facebook.com/shinsik.kim note: 김신식. 내성적인 사람들을 위한 사회학을 연구하는 감정사회학도. 대중음악계를 감정이란 키워드로 접근해보는 중이다. 인문사회비평지 《말과활》에서 잡지·강좌 기획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