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er Robinson – Sad Machine | Worlds (2014)

 

포터 로빈슨(Porter Robinson)은 12살에 프로듀싱을 시작했다. 18살에 스크릴렉스(Skrillex)의 레이블 ‘오슬라(OWSLA)’와 계약을 체결하며, EP [Spitfire]로 단숨에 빌보드(Billboard) 댄스/일렉트로닉 앨범 차트 11위를 차지했다. 어린 나이에 음악을 시작한 뮤지션은 신동 또는 천재라는 칭호를 비교적 쉽게 획득한다. 반면 ‘나이 어린 음악가’라는 굴레 안에서 제한적인 인상과 평가를 받기도 한다. 포터 로빈슨 또한 이름 앞에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그리고 천편일률적인 EDM(Electronic Dance Music) 사운드와 구조에서 벗어난 음악을 들려줌으로써, 나이와 상관없이 씬에서 주목받는 프로듀서로 자리매김했다.

사실 그는 ‘오타쿠’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사 준 게임기와 애니메이션 비디오, 그리고 DDR(Dance Dance Revolution)을 계기로 일본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텀블러만 봐도 일본 서브 컬처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지난 6월에 있었던 BBC 라디오 1 방송에서는 오프닝으로 닌텐도 게임 <젤다의 전설> 시리즈 중 “무쥬라의 가면”의 삽입곡을 틀어 일본 문화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애니메이션 <잔잔한 내일로부터((凪のあすから)>의 오프닝 송, 우타다 히카루(うただヒカル), 캬리 파뮤파뮤(きゃりーぱみゅぱみゅ)의 노래도 선곡했다. 그리고 그의 첫 번째 정규 앨범인 [Worlds]가 지난 8월에 발매되었다. 예상했겠지만 그가 좋아하는 비디오 게임과 애니메이션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제작했다.

그의 취향과 재능이 여실히 드러나는 트랙은 “Sad Machine”이다. 자, 이제 오타쿠에 대한 편견은 지울 시간이다. 곡은 일본어 가사가 등장한다거나 8비트 게임을 떠올리게 하는 칩튠이 아니다. 대신 단편 만화처럼 스토리를 갖고 있다. 가사는 외롭게 살아남은 여자 로봇이 길을 헤매다가 마침내 소년을 만나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뮤직비디오는 게임에서 주로 사용하는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며, 대화창처럼 뜨는 가사와 3D 영상 또한 게임 그래픽과 유사하다. 보컬로이드 ‘아반나(AVANNA)’를 이용해 여성 보컬 파트를 만든 것도 재밌는 발상이다. 보컬로이드는 음표와 가사를 입력하면 실제 사람의 목소리에 가까운 음성으로 노래를 제작해 주는 음성 합성 소프트웨어다. 그런데 아반나는 단순히 프로그램이 아니다. 가상의 인물로 모에화 즉, 소녀의 모습으로 의인화된 캐릭터이다. 인터넷 이미지 검색을 하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녀는 167cm에 호리호리한 체격의 18세 소녀다. 남자 보컬 파트는 포터 로빈슨이 직접 노래했다.

포터 로빈슨은 과거 BBC 인터뷰에서 앨범의 방향성에 대하여 “기존에 해 왔던 장르를 벗어날 생각은 없다. 다만 내가 정말 좋아하고, 좋다고 느끼는 음악을 만들고 싶다”고 답했다. 약속은 아니었지만 모두 지켜졌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본의 하위 문화를 이용해 참신하고 흥미로운 음악을 완성했다. 무엇보다 그는 EDM 안에 머무르면서도 기존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급격한 빌드업과 드랍 없이도 충분히 즐거운 음악이 될 수 있으며, EDM도 슬픔, 귀여움, 몽환, 희망 등 다양한 정서를 연출할 수 있다. 씬이 이미 포화상태라거나, 스타일의 획일화로 음악가들의 개성이 없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계속 재기되어 왔기에 그의 이번 앨범이 더 반갑고 의미 있다. | 정은정 cosmicfingers9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