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민한 화자의 냉소적인 세계 인식 윤상의 신곡에 관하여 이야기하려면, 우선 ‘왜 싱글인가’ 하는 점부터 생각해보아야 한다. 보통 싱글은 앨범 발표 이전에 앨범의 성격을 가늠하게 해주는 일종의 예고편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고, 시의성을 띈 곡(이를테면 해당 계절을 겨냥한 곡)이라서 시급히 발표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선택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날 위로하려거든”은 윤상이 처음으로 발표하는 싱글이다. 이 싱글은 새 앨범의 예고편일까? 아니면 청자들에게 시급히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 모두 답이 될 수 있을 듯하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전자음의 활용에 있어 윤상의 존재는 단연 독보적이다. 전자음은 곧 댄스음악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던 시절부터(지금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지만), 윤상은 차분히 감상할 수 있는 전자음을 들려주며 한국 대중음악에 풍성하고 비옥한 사운드를 선사하였다. 윤상 특유의 도회적인 세련미가 두드러지는 사운드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것은 그의 영원한 파트너인 박창학의 가사이다. 신파조의 가사가 난무하는 한국 대중음악 가운데, 박창학의 가사는 우아하고도 특별한 깊이를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의 근사한 호흡은 엘튼 존(Elton John)ㆍ팀 라이스(Tim Rice) 콤비가 부럽지 않을 만큼, 숱한 명곡들을 탄생시켜 왔다. 흔히 윤상의 노래를 생각할 때, ‘아쉽게 남겨진 햇살에 물’드는 ‘저녁 무렵의 교정’을 바라보며 ‘어린 그 시절 커다란 두 눈의 그 소녀’를 떠올리는 낭만적인 화자를 떠올리기가 쉽다.(“가려진 시간 사이로”) 그런데 박주연의 가사에서 느껴지는 위와 같은 정조는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박창학이 쓰고 윤상이 들려주는 가사에서 화자는 사랑에 관하여 다분히 관조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화자는 ‘내 노래를 외면하’는 너를 노래하며, ‘누가 이토록 우리를 멀어지게’ 한 것인지 그리고 ‘언제 이토록 서로를 미워하게 된’ 것인지 묻는다.(“배반”) 또한 ‘죽도록 사랑했다고 내가 제일 슬프다고 모두 앞 다투어 외치고 있는 결국 똑같은 사랑노래’를 흔해 빠진 것이라 비웃으면서도, ‘때늦어버린 눈물이 필요한’ 바보가 되어버린 자신을 확인하기도 한다.(“결국…흔해 빠진 사랑 얘기”) 우연히 파리에서 예전 연인을 마주치기도 하지만, 상대방은 ‘모른 척 뒤돌아’서고 화자는 ‘불 켜진 에펠탑이’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우연히 파리에서”) 이렇듯 사랑에 관한 관조적인 입장은 냉소적인 세계 인식에 기인한다. 화자가 ‘일등 아닌 꼴등들에겐 박수조차 남의 일인’ 세상에서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이라고 노래할 때에는 우디 앨런(Woody Allen)을 연상하게 하는 지독한 냉소가 느껴진다.(“달리기”) 그렇다면 화자의 세계 인식은 왜 이리도 냉소적인가? 예민한 화자는 ‘숨 가쁘게 흘러가는 여기 도시의 소음 속에서 빛을 잃어가는 모든 것’을 놓치기는 아쉽다고 하며, ‘한 걸음 더 천천히 간다 해도 그리 늦는 것은 아’닐뿐더러 ‘이 세상도 사람들 얘기처럼 복잡하지만은 않’다고 노래한다.(“한 걸음 더”) 화자의 예민함이 그로 하여금, 터무니없이 빠른 세상의 속도에 억지로 자신을 끼워 맞추려 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화자는 ‘날아갈 순 없다’는 누군가의 말에 ‘날아갈 수 있기를 바란 적도 없’다고 대꾸하며, ‘우습지도 않아 미안하지만’이라는 반응을 나타내 보인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저 남들처럼 걷고 있’다고 말하며, 그저 ‘가려고 하는 곳이 조금 다를 뿐’이라고 강조한다.(“기념사진”) 화자의 예민함이 세상을 냉소적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예민한 화자의 냉소적인 세계 인식은 때로 미디어 속 ‘녀석들의 가짜 사랑’을 ‘이미 현실’처럼 받아들이고, ‘녀석들의 가짜 정의’를 ‘이미 법률’처럼 받아들이는 자들에 대한 날선 비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화자는 그들에게 ‘어두운 방에 혼자서’ ‘달콤한 꿈에 빠져 있’지 말고, ‘너의 거리로 따뜻한 피가 흐르는 세상 속으로’ 돌아오라고 권유한다.(“Back to the Real Life”) 2. 강렬한 비트의 처연함 앞서 윤상의 이전 곡들의 가사에서 드러나는 특징들을 돌아본 이유는, 이와 같은 맥락을 이해할 때 그의 신곡 “날 위로하려거든”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괴테의『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실연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세상을 버린 이를 탓하는 것은 병으로 숨을 거둔 이를 탓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조금만 견디면 좋은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은 조금만 견디면 건강을 회복하여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이어서 세상의 누구도 타인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누구도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수 없다. 직접 그 사람이 되기 전에는, 어떻게 그의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위로’라는 것을 너무 손쉬운 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사랑에 빠지는 황홀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사랑에 빠진 이에게 있어 사랑하는 대상은 유일한 ‘세상’이 된다. 그까짓 사랑 따위가 무엇이 그리 대수냐고 말하는 자는 사랑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애처로운 존재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는 것은 ‘세상을 잃’는 것과 다르지 않다. 더욱이 사랑하는 이가 느닷없이 떠나게 되어 그 경위마저 알 수 없다면, 제대로 끼니조차 이어가기 어렵게 마련이다. 그저 우두커니 앉아서 ‘그때 너는 어디 있었냐고’, ‘왜 너의 곁을 지키지 못했는지 그걸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어떤 말로 그를 위로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괜찮아질 거라’든지 ‘이겨내라’든지 하는 말을 너무나도 쉽게 하지만, 그런 말들은 ‘가시처럼’ 세상을 잃은 이를 찌를 뿐이다. 그런데 ‘전부 가진 줄 아는 자’들은 ‘잃을 게 너무 많아서, 이 세상을 다 잃은 슬픔 같은 건 쳐다보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겨우니 ‘이제는 잊으라는 말’,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진다는 말’을 내뱉는다. 혹은 당신의 슬픔이 주위 사람들까지 우울하고 힘들게 한다거나, 심지어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망발마저 서슴지 않는다. 어떤 자들은 세상을 잃은 슬픔으로 제대로 밥도 넘기지 못하는 이들 앞에서 제 배를 채우기도 하고, 음식물을 뿌려대며 비탄에 빠진 이들을 조롱하기까지 한다. 이런 지옥 같은 현실에서, 세상을 잃은 이들은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제발 날 그냥 내버려 둬. 난 지금 세상을 잃었으니.’ ‘제발 날 울게 내버려 둬. 정말로 날 위로하려거든.’ “날 위로하려거든”은 이제껏 윤상이 발표한 곡들 중에서 손에 꼽힐 만큼 춤추기 좋은 비트를 가진 곡이다. 반복해서 듣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이나 목을 까딱거리거나 어깨를 들썩이게 되기 일쑤이다. 차분하고 담백한 윤상의 보컬과 수려하면서도 대중적인 멜로디는 여전하지만, 스페이스카우보이가 가세한 리듬 트랙은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다. 그런데 이 강렬한 비트가 청자를 들뜨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처연하게 만든다. 청자는 가사에서 표현하는 더없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 내던져지지만, 마음과는 달리 몸은 강렬한 비트에 이끌려 한껏 흔들어 대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현실의 비참함들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숨 가쁘게 흘러가는 일상에 휩쓸리고 마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어 처연함은 배가 된다. 윤상 – 날 위로하려거든 | 날 위로하려거든 (2014) 3. 예민한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얼마 전에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윤상은 특유의 예민함 때문에 화제가 되었다. ‘예민함’을 ‘까칠함’이라 낙인찍어대는 한국 사회에서 그의 예민함은 적지 않은 악플을 불러 모았고, 그래서 윤상은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처세의 기본 원리로 통하는 한국 사회에서, ‘예민함’은 지탄의 대상이며 ‘둔감함’은 권장사항이다. 소수자를 조롱하고 약자를 배제하는 사회, 군대식 위계질서가 일상화된 사회, 불의에 대한 침묵이 미덕인 사회에서 ‘예민한 사람’은 ‘눈치 없는 사람’ 혹은 ‘적응력 떨어지는 사람’으로 손가락질 당한다. 예민한 촉수를 지닌 사람은 결코 타인의 고통을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길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분주하게 부유(浮游)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십상이지만, 예민한 사람은 그 사실을 매우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그래서 특유의 섬세함에도 불구하고, 예민한 사람은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날 위로하려거든”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한 상징으로 드러난다.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인 여성은 의도치 않게 어떤 공간에 갇히고, 자신을 꺼내달라고 절규한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계속 두드려 보지만 끝내 빠져나오지 못하고, 누구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는다. 극장 화면이라는 미디어 건너편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윤상은 그녀를 도울 수 없는 자신에게 무력감을 느끼며 한탄한다. 결국 그녀라는 세상은 파편이 되어 침몰하듯 소멸하고,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던 윤상 역시 파편이 되어 소멸하고 만다. 그녀와 윤상이 어떤 관계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윤상은 일찍이 “Ni Volas Interparoli”라는 에스페란토어 제목의 곡을 통하여 ‘우리는 대화하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 ‘나는 대화하고 싶다’가 아니라 ‘우리는 대화하고 싶다’인 이유는, 상술한 바 있듯이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날 위로하려거든”은 사랑하는 이를, 즉 세상을 잃은 이에 관한 노래이다. 이 노래가 청자들의 가슴을 가시처럼 찌르는 까닭 역시,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다 명확하게 느끼기 위하여, 우리는 보다 예민해질 필요가 있다. | 주민혁 idolcritic@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