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카시네마’는 단순히 영화적 소재로서 음악을 선택했거나 뮤지컬 영화처럼 그저 음악의 비중이 큰 영화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무지카시네마’는 음악에 대한 영화이며, 나아가 음악 그 자체인 영화다. 요컨대 다층적 ‘음악 텍스트’로서의 영화. | 최유준 [비긴 어게인]의 포스터 음악 지상주의 영화 [비긴 어게인]의 영어 제목은 그대로 ‘Begin Again’이지만, 지금은 부제로만 쓰이는 다음과 같은 원제목이 따로 있다. “노래가 구원을 줄 수 있을까?(Can a song save your life?)” 영화는 진지하게 음악을 생각한 사람이라면 언젠가 한 번 던져보았을 질문, 다소 철 지난 듯한 이 질문을 집요하게 탐구한다. 그리고 이 질문에 과감하게 ‘Yes’로 답한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노래와 음악은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러니 주인공들의 표면적 연인 관계에만 주목하여 이 영화가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면 곤란하다. 전작인 [원스]에서도 그랬지만 존 카니 감독의 관심은 주인공 연인들 사이의 사랑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관심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음악에 집중해 있다. “음악에 치우쳐 스토리를 잃었다”는 영화평론가들의 정형화된 비판도 적절해 보이지 않는 것이 이 영화의 스토리는 오직 음악을 위해, 그리고 음악에 의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플롯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 여주인공 그레타는 어째서 데이브의 콘서트에서 재결합의 기쁨을 나누는 대신에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야 했을까? 자신이 써준 노래를 부르는 데이브의 모습에서 진심을 느끼지 못해서? 아니다. 무대에서 데이브는 그녀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순간 그레타가 주목한 것은 데이브가 아니라 청중이었다. 스타가 된 데이브의 노래에 열광하는 청중들의 모습, 그녀는 자신의 노래가 그들로부터 소외되는 것을 느낀 것이다. 데이브와의 관계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그녀의 판단은 이들 청중과 자신의 노래 사이의 관계로부터 추론되었을 뿐이다. 이 얼마나 잔인한 음악지상주의적 연애인가? 그레타는 데이브가 바람피운 사실조차 데이브의 음악을 듣고 알아낸다. 이렇듯 존 카니 감독은 [원스]에 이어 [비긴 어게인]에서도 그 흔한 키스신조차 없이 철저하도록 음악에 집중된 로맨스를 표현해 냈다. 단순히 음악가가 주인공인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 음악이 연인들 사이의 심적 관계만이 아니라 사실상 육체적인 관계까지도 그려내며, 나아가 극중 인물들의 모든 사회적 관계까지도 은유해내는 음악지상주의적 음악 영화를 연출해낸 것이다. “노래가 구원을 줄 수 있을까” | 영화 [비긴 어게인] 절망의 공동체 다시 구원의 문제로 돌아와 보자. 영화의 첫 장면, 그레타가 뉴욕의 자그마한 라이브 술집에서 뜻하지 않게 부르게 되는 노래(“A Step You Can’t Take Back”)는 지하철에서 자살을 결심한 누군가의 심경을 다루고 있다. 선로를 따라 지하철이 들어오고 있어 고통은 어둠 속에서 지워지네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을 준비가 되었니? 되돌아갈 수 없는 걸음을 그레타 혼자서 기타를 치며 이 노래를 부르는 첫 번째 장면에서 이 절망의 노래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위한 것이다. 관객들은 등장인물들에 대한 아무 정보 없이 이 노래를 들으며 노래 속 화자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이후 영화는 두 번이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댄과 그레타의 절망적 사연을 차례로 펼쳐 보인다. 그레타는 실연의 충격이 주는 절망을 안고 있었다. 이에 비해 댄의 절망은 좀 더 사회적이다. 그에게도 실연의 아픔이 있지만, 그의 절망은 남편과 아빠로서의, 무엇보다 직업인으로서의 실패에서 비롯된다. 절망적 사연들이 현재의 시간에서 교차하면서 반복되는 저 절망의 노래가 그레타와 댄을 정서적으로 연결시켜 준다. 아니, 처음 그 노래를 들었던 관객까지도 이 절망의 공동체에 합류하고 연대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Keira Knightley – A Step You Can’t Take Back | Clip from the movie [Begin Again] 이 영화는 ‘절망의 노래’에서 찾은 ‘절망의 공동체’로부터 영화 속 주인공들이 자기 삶의 새로운 동력을 얻는 과정을 그려내는 데에 주력한다. 그러면서도 흔한 ‘힐링’과 ‘갱생’의 자기계발 스토리로 변질되지 않는 이유는 음악이 갖는 따뜻한 공감과 연대의 힘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단순히 그레타와 댄의 재기와 영웅적 성공담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따분한 음악 노동에 갇힌 뮤지션들, 모멸감에 시달리는 십대, 심지어 할렘가의 아이들까지도 (영화의 리얼리티가 훼손되는 위험을 불사하면서까지) 함께 노래하고 연주하게 함으로써 절망을 희망으로 변화시키는 음악적 소통의 ‘사회적’ 힘을 그려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유쾌하고 아름다운 장면은 댄과 그레타가 스마트폰에 담긴 음악을 와이잭으로 연결된 각자의 헤드폰과 이어폰으로 함께 들으며 뉴욕의 거리를 활보하는 음악 데이트 장면일 것이다. 이 장면의 끝에서 댄은 뉴욕 거리의 일상적 밤풍경을 바라보면서 그레타에게 말한다. “이래서 내가 음악을 좋아하지.” 왜냐고 되묻는 그레타에게 그는 답한다. “가장 따분한 순간까지도 갑자기 의미를 갖게 되니까.” 댄의 말처럼 루틴한 일상에서 무의미해 보였던 시간이 갑자기 리듬을 타고 흐르면서 우리에게 의미로 충만한 시간으로 다가오는 것, 다시 말해 풍부한 제의적 체험의 순간을 안겨주는 것이 음악적 구원의 본질이다. 이 구원이 절망의 노래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루틴한 일상 속 경직된 시간은 도시 속 삶의 고통이 남긴 침묵을 동력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대(‘절망의 공동체’를 통한)는 침묵과 함께 석화된 시간을 넘어서 소통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된다. ‘절망의 공동체’로부터 삶의 동력을 얻는 과정 | 영화 [비긴 어게인] 대안적 음악 소통은 가능할까? 최근 유행하는 치유(힐링) 담론이 대부분 거짓인 이유는 사람들의 절망과 고통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 따라서 그 극복과 치유 또한 사회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모든 문제를 개인의 심리학으로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음악적 치유와 관련되는 물음 역시 개인의 심리적이거나 영적인 체험의 문제로 환원시켜 다루어서는 안 된다. 결국 “노래가 구원을 줄 수 있을까?”라는 물음은 이 사회에서 노래(음악)가 처한 물질적 조건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음악영화를 연출하는 존 카니 감독의 장점은 이러한 물음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정면으로 돌파해가는 데에 있다. 엔딩 크레딧이 떠오르는 가운데 그려지는 맨 마지막 장면에서 그레타는 음반 기획사의 파격적 제안을 물리치고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자가배급의 모험을 선택한다. 앨범 전체를 1달러에 내놓고 그 수입을 녹음에 참여한 모든 뮤지션들과 균등하게 나누어 가진다는 과감한 결정과 함께. 이 마지막 장면은 도시의 열린 공간에서 일상의 소음까지 담아낸 앞서의 여러 녹음 장면들과 연결되면서 기존 음악산업의 한계를 넘어서 뮤지션들의 연대에 입각한 대안적 음악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해 보려는 스크린 너머의 실천적 의지로 읽힌다. [원스]에서 표현되었던 음악적 진정성이 아직 시장에서 상품으로 진열되기 전의 때묻지 않은 순수성과 관련이 있다면, [비긴 어게인]에서 진정성은 시장을 스스로 만들고 뮤지션이나 청중들과 새롭게 소통하고 연대하는 데서 찾아지는 것이다. 헐리우드의 영화 자본과 손잡은 이 영화의 태생적 조건상 그 진정성은 여러 모로 의심스러워졌지만 말이다. | 최유준 http://musicology.co.kr note: 최유준.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동아대학교 음악문화학과에서 ‘음악학-문화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남대학교 감성인문학연구단 HK교수로 재직하며 여러 매체와 학술지에 기고 중이다. 홈페이지는 [최유준의 웹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