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카시네마’는 단순히 영화적 소재로서 음악을 선택했거나 뮤지컬 영화처럼 그저 음악의 비중이 큰 영화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무지카시네마’는 음악에 대한 영화이며, 나아가 음악 그 자체인 영화다. 요컨대 다층적 ‘음악 텍스트’로서의 영화. | 최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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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티 속 리얼리티

한국의 아이돌 그룹이나 아이돌 문화에 대해 어떤 논평을 한다는 것은 적잖이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일단 무슨 얘기를 해도 진부해지기 쉽다. 특히 30대 이상의 아저씨 세대가 걸그룹에 대해서 논하는 방식은 더욱 뻔하다. 비판이나 부정을 하면 꼰대 같고, 긍정을 하면 느끼해진다.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입 닫고 모른 척하는 게 속 편한 일이다. 언론에서 곧잘 보고되는 아이돌 팝을 중심으로 한 케이팝 한류의 ‘대박’ 소식에 대해서도 그저 강원도의 카지노에서 흘러나오는 소문 대하듯 나와 무관한 것으로 치부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한국의 걸그룹 ‘나인 뮤지스’의 데뷔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나인 뮤지스, 그녀들의 서바이벌](이하 [나인 뮤지스])를 보면 아이돌은 우리 현실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 속 뮤직 비디오 촬영이 끝난 뒤 모인 회의실에서 멤버들의 눈물을 쏙 빼놓게 야단을 친 뒤 “억울하면 떠!” 하고 쏘아붙이는 스타일리스트 언니, 매니저들끼리 데뷔 무대를 모니터링하고는 “정말 편하게 하는 거죠 쟤네들은. 죽여놔야지, 지금.” 하고 분노의 멘트를 날리는 매니저 오빠, 그리고 화룡점정 콩글리시 발음으로 “Nothing is impossible!”을 외쳐대는 사장님까지, 그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사람들, 아니 현실 속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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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뮤지스, 그녀들의 서바이벌] 스틸컷

기획사 사장과 매니저들만 그럴까. 자신들의 소속사를 자연스럽게 “회사”라고 부르는 걸그룹 멤버들은 우리 사회의 여느 직장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계약직 사원일 뿐이다. 영화 속 힘겨운 군부대 공연을 마치고 지친 멤버 한 명은 무대 뒤에서 땀을 닦으며 속내를 비춘다. “예능이든 뭐든 광희처럼 빨리 혼자라도 떠서, 혼자 다닐 거에요.” 땡볕에 고구마를 캐는 [체험 삶의 현장] 촬영장에서도 들러리 서는 멤버들은 볼멘소리로 말한다. “아홉 명은 너무 많잖아요.[…] 저는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아서 내 할 일만 딱 마치고 다르게 하고 싶어요.”

아이돌 그룹의 일상을 비추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야 케이블 방송 등을 통해서 익숙하게 봐왔지만, 이 다큐멘터리 영상은 종래의 홍보성 리얼리티 영상들과는 조금 달라 보인다. 말하자면 리얼리티 속의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셈인데, 이때의 한 꺼풀 벗겨낸 리얼리티, 화장기를 제거한 리얼리티가 갖는 미덕이 발휘되는 순간들이 있다. 영화 속 걸그룹과 기획사의 생생한 현실이 어느 순간 “그녀들의” 현실로서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현실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영화 메인 예고편

 

2세대 아이돌

1994년에 데뷔한 H.O.T.를 아이돌 그룹의 효시로 생각했을 때 10년 정도 지난 시기에 데뷔한 이들부터 현재까지의 아이돌 그룹들을 보통 ‘2세대 아이돌’로 부르는데, 10년 단위의 편의적인 세대 구분이지만 나름의 일리가 있는 구분법이다. 두 세대를 가르는 2004~5년경부터 한국의 음악산업에서 디지털 음원 판매 수익이 음반 판매 수익을 앞지르는 커다란 전환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기획사들로 하여금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업의 총체적 다각화를 추동했고, 그에 따라 아이돌의 활동 영역도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 출연, 드라마와 뮤지컬, 그리고 영화 출연, 방송 진행 등으로 크게 다양화되었다.

그것은 분명 위기 상황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기획사에게 전권을 주는 한국식의 독특한 불공정 계약(2001년 ‘연제협 사태’를 초래하기도 했던 포괄적 계약) 관행은 신속한 다면적 계약이 요구되는 21세기 디지털 매체 시대의 변화된 대중문화 환경에 융통성 있게 적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아티스트와 소속사 사이의 비대칭적 관계는 ‘성공’이라는 미래의 저울추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한다. 영화 속 ‘나인 뮤지스’의 매니저들은 다음과 같은 화법을 즐겨 쓴다. “나중에 너네 잘되고 나면 너네 하는 말이 법이야. 그런데 지금은 니네보다 우리가 더 잘 알기 때문에 지금은 니네가 자존심을 굽히는 게 우선이라고 난 생각해.”

이 성공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한 가지뿐이다. 영화 속에서 일종의 주인공 역할을 하는 그룹의 리더 ‘세라’(영화 후반부에서 그녀는 리더 자격을 박탈당한다)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쉽게 진단할 수 있듯이, 일중독에 빠지는 것이다.

하루는 회사에서 너무 속이 상해서 아무한테도 연락을 안 받고 전화기를 끄고 뛰쳐나왔어요. […] 내 가족마저 희생시켜 가면서 하는 이 일을 굳이 내가 왜 했을까? 그런데 그때도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리고나서 그 다음날 회사에 세 시간 일찍 나가서 연습을 했어요. 그러니까 이게 내가 가장 많이 스트레스를 받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스트레스를, 이걸 해야지만 근본적인 스트레스가 없어지니까 […]

영화 속에는 소속사 차량을 타고 이동중 교통사고로 멤버들이 다쳤다고 하는 장면이 있다. 다친 멤버는 한쪽 팔에 깁스를 한 채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동료들과 춤 연습을 계속 할 수밖에 없다. 이 장면을 지난 9월에 있었던 ‘레이디스 코드’의 참사와 연결시키는 것은 분명 지나친 것이겠지만, 어떤 징후를 보여준다고는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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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뮤지스, 그녀들의 서바이벌] 스틸컷

아이돌과 감정자본주의

영화 [나인 뮤지스]는 2012년에 제작된 1차 편집본이 이미 국내외의 영화제와 외국의 공영방송을 통해 상영되었고, 이번에 국내에서 극장 개봉된 2차 편집본도 여러 국제 영화제에 출품된 상태라고 한다. 외국에서는 케이팝 한류 현상과 한국의 아이돌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텍스트 가운데 하나로 이 영상물을 활용할 것이다. 외국인의 눈에 이 텍스트가 ‘성공을 위한 눈물겹지만 아름다운 도전’의 이야기로 보일지 ‘인권탄압의 쇼킹 아시아 현장’ 쯤으로 보일지 궁금하다. 그 중간쯤에서 해석될 것 같지만 어느 경우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한국인들 자신이니까.

아이돌의 일상 자체가 예능화되고 시시각각 대중에 노출되면서 이들은 전례 없는 혹독한 감정노동을 감수하게 되었다. OECD 국가의 서비스 산업 비중이 72%에 달하는 후기 산업사회에서 감정노동은 이미 일상화되어 있지만,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고도의 감정노동을 수행하는 이들이 한국의 아이돌 그룹인지도 모른다. “만국의 아이돌이여 단결하라!” 식의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애초부터 비음악적 의도로 결성된 걸그룹 한 팀의 리얼리티 영상물을 통해서 한국 아이돌 그룹의 음악성 전반에 대한 의심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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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뮤지스, 그녀들의 서바이벌] 스틸컷

영화 [나인 뮤지스]를 텍스트 삼아서 하고 싶은 얘기는 한 가지, 모든 대중문화가 그렇듯 한국의 아이돌 문화도 어김없이 한국인이 처한 현실을 비춘다는 것이다. 경제적 효율성의 논리가 일상적으로 구조화된(이 속에서 개인의 감정마저 도구화되고 상품화된다) 우리의 현실 말이다. 음악과 무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돌 그룹(특히 2세대 아이돌 그룹)의 이른바 ‘후크송(hook song)’은 ‘30초 미리 듣기’의 디지털 음원 시대가 만든, 다시 말해 극단적인 효율성을 상징하는 음악 양식이다.

분업화된 집단 창작의 기술적 합리성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의 아이돌 팝은 확실히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해 있다. 이러한 고도 자본주의 시대의 음악문화적 정수에서 에바 일루즈가 지적했던 ‘감정자본주의’의 특징, 곧 차갑게 계산된 친밀함의 논리를 발견하는 것도 당연하다. “사랑해요 여러분!” 하는 아이돌의 해맑은 인사를 우리는 무시하거나 그저 믿는 척할 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믿지 않을 도리도 없다. 우리들의 현실 속 감정 교환 또한 그렇게 차갑고도 친밀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최유준 https://www.facebook.com/yujun.choi.5

note. 최유준.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동아대학교 음악문화학과에서 ‘음악학-문화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남대학교 감성인문학연구단 HK교수로 재직하며 여러 매체와 학술지에 기고 중이다. 홈페이지는 [최유준의 웹미디어].

note. 유튜브 등에서 유료로 구매할 수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XK577H9vhI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