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귀차니즘과 스크롤 압박의 스트레스를 극복하기 위한 음악웹진 [weiv]의 고강도 칼럼 프로젝트 ‘스압! 주의!’ 말하자면, 길고 어렵습니다. 진짭니다. 두 번 경고했습니다. 그래도 스크롤을 쭉쭉 내리는 당신은…… 멋있는데?!  | [weiv] (네이버 연예 스페셜 제휴 기사)

 

네이버에서 키워드 검색으로 ‘LP 판매량’을 검색해 보자. 가장 먼저 뜨는 건 뉴스 카테고리. ‘LP 찾는 2030세대, 아빠에겐 ‘향수’ 우리엔 ‘새로움’’, ‘요즘 LP가 인기라면서요?’, ‘LP 붐은 음반, 디지털 공존 가능성을 의미’, ‘되살아나는 LP 음반, 아날로그의 매력’. 2013년부터 2014년까지 쓰여진 기사다. 스크롤을 조금만 내려보자. 뉴스 라이브러리 카테고리가 뜬다. ‘LP판매량 격감’, ‘외국음반 직배사 ‘컬럼비아 에픽’ 클래식 LP 중단 CD에 주력’, ‘LP한물가고 CD시대 활짝’, ‘LP용 소재 판매급감’.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쓰인 기사다. 네이버 검색어 첫 페이지를 통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자면 LP는 국내에서 1990년대 초반 CD에 밀렸다가 30년이 지난 2010년에 예수처럼 그렇게 다시 부활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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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해외의 LP 판매량은 눈에 띌 만큼 늘고 있다. LP 판매량 기사가 나올 때마다 단골로 언급되는 미국의 음반판매량 조사회사 닐슨 사운드 스캔의 보고를 따르면 미국의 LP 판 매량은 2008년 180만 장이 팔린 걸 기점으로 매년 기록을 경신하며 2013년에는 610만 장을 판매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 떨까? 2011년 11월, 한국 최초의 레코드페어인 서울레코드페어가 열렸다. 이후 서울레코드페어는 번외 행사를 포함해 올해 6월까 지 총 5회의 행사를 치렀다. 2012년 국내의 마지막 LP 공장이었던 서라벌 레코드가 폐업한 후 8년만에 다시 국내에도 LP공장이 생겼다. 본 공장을 통해 서울레코드페어의 한정반과 조용필의 LP가 제작됐다. 2013년에는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홍대 인근에 김밥레코즈가 개업하고 시트레코드가 이전해왔다. 제작을 멈추었던 LP 타이틀 역시 상당수 발매됐다. 버스커 버스커, 지-드래곤 등의 메인스트림 가수는 물론이고 김두수, 유재하, 정윤희 같은 재발매 타이틀 그리고 3호선 버터플라이, 사람12사람, 에피톤 프로젝트, 위 헤이트 JH 등의 인디 음악까지 골고루 LP 카탈로그를 갱신했다. 그렇다면 국내의 LP 판매량은 어느 정도일까. 네이버에 ‘한국 LP 판매 통계’를 검색해 보자. 가장 먼저 뜨는 기사는 ‘[해설] 서민층 LP가스 사고 대폭 감소되나?’. 음? (CD 시절에도 그랬듯) 한국의 LP 판매량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통계는 없다. 다만 위의 현상들로 볼 때 ‘지금 과연 LP 붐인가?’라는 글을 써 돈을 벌기엔 적당한 시기라고 판단할 뿐이다.

LP 시대가 저문 후 첫 LP 붐이라 할만한 시기는 1990년대 말에 찾아왔다. PC 통신 동호회(블랙스, SnP), 공 연장(마스터플랜), 음반(1999 대한민국), 랩스타(드렁큰 타이거) 등의 등장으로 한국 힙합 신이 태동하던 시기다. 당시 사람들 이 힙합에 열광한 이유 중 하나는 노래를 못 불러도, 악기를 연주하지 못해도 누구나 할 수 있다는 환상 때문이었다. 어떤 이는 라 임노트를 만들며 랩을 만들어 마스터플랜의 프리스타일 무대에 오르고 어떤 이는 ‘나의 꿈 나의 MIDI’ 같은 책을 보며 비트를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본토’의 것과 같은 느낌을 내기엔 뭔가 부족했다. 랩은 버벌진트 같은 구세 주가 나타나 ’다음절라임’이라는 복음을 전한 덕분에 정리됐다. 그리고 미디(로 연주하는) 악기 특유의 수수깡 소리를 벗어나려던 프 로듀싱은 다음 한마디로 정리됐다. ‘닥터 드레가 MPC3000 한대로 비트를 만든대’. 여기서 MPC3000 은 샘플러다. 여기에는 로저린이라는 사람이 만든 퀀타이즈(비트의 밀고 당김을 조절하는 알고리즘)가 적용되어 있는데 이 특유의 느낌 을 통해 닥터드레 같은 비트를 만들 수 있다는 소문이 둥둥 떠다녔다. 샘플러는 소리나 음악의 특정 부분을 잘라 가공하고 재조합 해 새로운 음악으로 만들 수 있는 악기다.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샘플을 따기 위한 원곡이 필요하단 얘기다. 그리고 얼마 후에 다음 과 같은 소문이 돌았다. ’닥터드레처럼 심장을 울리는 킥 소리는 LP에서 샘플을 따야 만들 수 있대’. 곧 주말에 회현상가 LP 가게에서 통 큰 배기 진을 입은 청년들이 몰려들어 쭈그려 앉아 고개를 처박고 LP를 고르는 걸 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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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힙합 음악을 하는 이에게 LP는 여러모로 쓸모가 있었다. 샘플 을 딸 수 있고 그냥 음악을 들을 수도 있었다. 당시 힙합 쪽에서 주로 샘플링되던 음반은 6,70년대의 흑인 음악인데 대강 어 떤 걸 들어도 좋은 연주력과 멜로디를 갖추고 있었다. 턴테이블을 한 대 더 사고 믹서까지 장만하면 디제이가 될 수도 있다. 아직 CDJ가 보급되기 전의 일이다. CD나 MP3로 샘플링을 하는 이들에게 ‘저들은 진짜 힙합을 하는 이가 아니야’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자격도 안겨줬다. 실제로 LP로 샘플링을 하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우선 턴테이블이 필요하다. LP를 직 접 손으로 돌려 샘플링을 하기 위해선 (그리고 디제잉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 일반적인 감상에 쓰이는 벨트 타입의 턴테이블이 아 닌 모터와 회전판이 직접 연결된 다이렉트 방식의 턴테이블을 사야 한다. 대부분 힙합 디제잉에 주로 쓰이는 테크닉스 SL-1200 모 델을 찾았는데 국내에서는 새 제품을 구하기 어려웠다. 중고 장터 또는 청계천을 뒤져 어렵게 산 턴테이블은 완제품이 아니다. 비 싼 돈을 주고 엘피를 읽을 바늘과 바늘과 턴테이블을 연결할 카트리지를 사야 한다. 자, 이제 LP를 사러 갈 차례다. 회현 지하상가에서 판매하는 LP는 대부분 외국에서 박스 채로 떼어 게 대부분이었다. 가끔 분류되어 있는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분류되지 않은 LP를 박스 채로 내놓고 팔았다. 당시 청년들은 60년대부터 70년대 말까지 흑인이 재킷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LP를 찾 아 샀다. 본토의 힙합이 그때의 흑인음악을 샘플로 음악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 음반이 흑인이 하는 컨트리 음악이라 할 지라도 사는 수밖에 없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의 일이다. 디제잉은 또 어떤가. 굳이 턴테이블리스트라는 불리는 이들이 하는 스크 래치와 저글링(같은 또는 다른 두 개의 비트를 실시간으로 연결해 새로운 비트를 만드는 일)까지 가지 않아도 두 개의 레코드를 온전 히 귀와 손의 순발력에 의존해 섞는 일은 훈련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덧 시대는 변했다. 70년대 훵 크 샘플을 주로 쓰던 미국 힙합은 샘플링을 하는 대신 80년대 음악을 소스로 삼으며 신시사이저를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샘플 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업체에서 만든 라이브러리부터 개인이 만든 것까지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게 됐다. MP3 에서 샘플링을 한다고 욕을 먹었던 한 프로듀서는 매일 밤마다 여자친구를 바꾼다고 랩을 하며 벤츠를 탔다. 힙합을 발명한 그랜드마스 터 플래쉬는 디지털 디제잉 장비인 트랙터 스크래치 광고 모델이 됐다. 그리고 힙합 프로듀서들이 그렇게 따라 하고 싶던 비트를 만들 던 닥터 드레는 MPC3000 앞에 쭈그리고 앉아 비트를 만드는 대신 비츠라는 이름의 헤드폰을 팔아 부자가 됐다. 회현상가에서 쭈그려 앉아 LP를 고르던 청년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환상과 진정성 그리고 필요가 손을 잡았던 1차 LP 붐은 이렇게 끝났다. 한때 중고장터에서 200만원에 거래되던 MPC3000은 이제 50만원에 거래되고 있다.

지금의 LP 붐을 2차 LP 붐이라고 정의한다면 1차 LP 붐과는 어떻게 다를까? 1차 LP 붐이 필요가 없어져 사그라졌다면 2차 LP 붐은 필요가 없는데도 일고 있다. 1차 LP 붐때만 해도 음악을 듣기 위해 CD나 테 이프와 같은 음악이 기록된 저장매체를 사 음악을 듣던 시기였다. 이제는 플레이어 기능이 달린 저장매체에 음원을 다운로드 받아 듣 는 시기를 지나 이조차 번거로워 클라우드에 올려져 있는 음악을 커넥티드 디바이스로 전송해 듣는 시대가 열렸다. 음악을 듣는 방법 이 매체의 소장에서 음원의 소장으로, 곧이어 음원의 전송으로 바뀐 거다. 이제 이탤리언 커피 쿠키 프라푸치노 한 잔 가격이 면 한 달 동안 과거에 존재한 거의 모든 음악과 새로 나오는 음악을 어디에서든 바로 들을 수 있다. 레코딩이 발명된 이후로 이렇 게 음악을 저렴하고 간편하게 들을 수 있던 시대는 없다. 잠깐 여기서 (약간의 비약을 섞어) 음원과 LP의 장단점을 비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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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LP의 장점을 음질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LP는 가청 영역 외의 음역대를 잘라낸 CD나 음원과 달리 모든 음역대를 보존해 원음 그대로의 소리를 담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음원으로 변환하고 나면 거추장스러운 포장지가 되어 버리는 CD가 거리낌 없이 음원으로 대체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다. 잠깐, 근데 요즘은 대부분 디지털로 마스터링을 하는데? 처음부터 LP를 제작하는 경우는 LP에 맞게 마스터링을 따로 하기도 하지만 재발매되는 음반의 경우는 대부분 CD 마스터링 음원을 쓴다. LP의 음질이 ‘나쁘거나 보통이거나 매우 좋음’인 건 그만큼 환경에 따른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퍼스트 프레스인지 아닌지. 턴테이블, 앰프, 스피커의 궁합은 괜찮은지. LP와 바늘의 상태는 괜찮은지. 집에 습기가 많은지. 에 따라 LP의 음질은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편집샵에 올라온 스피커가 달린 예쁘장한 가방형 턴테이블을 사면 되지 않느냐고. 음질로만 따지자면 그건 비싼 위스키를 국산 맥주에 섞어 폭탄주를 만들어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어쨌거나 2차 LP 붐에서 음질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중 하나다. 게다가 최근 제작되는 대부분의 LP는 음원 다운로드 코드를 제공한다. 즉, LP를 굳이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지 않더라도 음원을 다운로드 받아 언제라도 재생 기능을 가진 저장매체를 통해 들을 수 있는 거다.

그렇다면 LP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김밥레코즈에서는 가끔 직접 기획하는 내한 공연 티켓과 패키지로 LP를 판매하거나 내한 오는 음악가의 LP를 따 로 홍보하곤 한다. 사인지로 쓰라는 의미다. 음반에 음악가의 사인을 받는 건 음반이라는 형태가 생긴 후부터 생긴 고유의 전통이지 만 이 경우는 인과관계가 좀 다르다. 음악가를 만날 기회가 생겼으니 음반을 사는 거다. 음악은 그 전에 스트리밍 서비스로 듣고 있 었으니까. 실제로 지금의 LP는 음악을 듣기 위한 도구보다 머천다이즈에 가깝 다. 음반을 사는 곳 역시 잘 보이지 않는 레코드가게 대신 각종 페어나 공연장으로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음반이 음악을 담기 위 한 저장매체에서 음악가 또는 이벤트에 관한 기억을 새기기 위한 매체로 바뀌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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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2차 LP 붐은 2011년 서울레코드페어의 등장과 함께 생겼다. 해외에서 LP의 판 매량이 는 것 역시 2007년 레코드 스토어 데이 이후다. 이제 사람들은 서울 곳곳을 관광지 삼아 주말의 레저를 즐기는 데 익숙하 다. 주말마다 각종 공연, 파티, 페스티벌, 페어, 플리마켓, 룹탑 파티, 뜨는 맛집 등이 생기고 이 중 일부는 인스타그램 해시태 그로 표현되는 브랜드를 갖고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아무도 정체를 알 수 없었었기에 제1회 서울레코드페어를 찾은 이 역시 상당수 그 런 의미로 이벤트를 즐겼을 것이다. 강남의 중심에서 열리는, 한정반 LP를 판 매하고 평소 비싼 입장료를 내야 볼 수 있는 인디 음악가의 공연이 열리는 행사 아닌가. 서울레코드페어가 열렸던 날 내 트위터 타임 라인은 온통 그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내 주변의 음악가와 디자이너 친구들 역시 타임라인을 보다 빠지면 안 될 것 같아 뒤늦게 페어 에 참석해 레코드를 한 두장 샀다. (그리고 다시는 그들을 서울레코드페어에서 볼 수 없었다.) 그와 관계없이 레코드페어는 계속 열 리고 있고 그 외의 상황은 첫 문단에서 적은 것과 같다.

2014년에 열린 4회 서울레코드페어는 전시, 공연 등의 부대 행사를 줄이고 무료 행사로 전환했다. 양일간 열린 행사에서 나는 셀러로 참여해 영기획에서 발매한 CD와 LP를 판매했다. 판매 부스는 인디 레이블, 개인 콜렉터, 오래전부터 LP를 판매해온 회현 상가의 LP 전문점부터 새로 생긴 LP 가게 그리고 음원 서비스 업체까지 다양하게 채워졌다. 오는 이 역시 다양했다. 한정반 LP를 구입하러 시작부터 줄을 선 언니네 이발관 같은 밴드의 팬, SNS에서 세일 정보를 보고 평소에 사고 싶었던 LP를 사러 온 여성 관객, 중고 LP 박스를 뒤지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 헐렁한 배기 진 대신 스냅백을 쓴 힙합 마니아까지. 1차 붐이 사그졌다고 했지만 그때 처음 LP를 샀던 이들 중 일부는 프로듀서가 되었든 되지 못했든 아직도 계속 LP를 사고 있다. 셀렉트숍의 등장과 함께 LP를 사게 된 어느 인스타그램 친구는 턴테이블은 없지만 아주 가끔 메이어 호손의 하트 모양 LP 같은 걸 찍어 올리고 있다. 이베이에서 주로 LP를 사는 어느 음악가는 자신이 가진 라이센스 반이 비싸게 팔렸다는 블로그 글을 남겼다. 지금의 LP는 음악 마니아의 당연한 취미 생활이자 힙스터의 한때 유행이며 ‘진짜’ 음악 애호가의 인증 수단이자 재테크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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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 마니아]에서 사이먼 레이놀즈는 ‘시간이 흘러 물체로서 음악에 관한 대중의 기억이 희미해지면, 음반 수집은 점점 더 비정상 적인 생활 방식, 즉 이해하기 어려운 노력 낭비와 돈 낭비에 가까워질 것’이라 이야기한다. 스트리밍 라디오 서비스를 운영하는 대표 는 개인적인 만남에서 자신의 아이가 지-드래곤의 한정반 LP를 산 후 그 안에 든 검고 동그란 플라스틱 원반이 무엇이냐 물었다는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이들은 음반의 개념을 모르고 자랄 거라는 얘기를 했다. 어쨌거나 나는 이 글의 원고료를 받으면 그중 일부로 어느 LP를 살지 고민할 예정이다. 여전히 내가 원하는 음악가의 음반을 커다란 판형으로 소장하고 싶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구한 LP를 인스타그램에 찍어 올리고 가끔 생각날 때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며 음악 애호가인 양 굴고 나중에 혹시라도 내가 가진 LP의 가격이 올라 비싼 가격에 팔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 건 아직 즐거운 경험이기 때문이다. 물론 원고료가 두 배 정도 늘면 보스 사의 블루투스 스피커도 고민의 대상에 오르겠지만. 이렇게 세상이 복잡하고 빠르다. | 하박국 http://www.younggiftedwack.com

note. 하박국: 성경에 나오는 ‘하박국’과는 다른 사람. 웹진 [weiv] 필자이자 글을 쓰고 디제잉을 해 번 돈으로 [영기획]을 운영하는 영세자영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