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네이셔스 디의 ‘불량수집가 록’ 음악비평가 사이먼 레이놀즈가『레트로 마니아』에서 말했듯, 90년대 이후 뮤지션이 자신의 음악에 영향을 준 선배 뮤지션들의 목록을 공개하는 일이 부쩍 늘어났다. 레이놀즈는 특히 록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 것을 보고 ‘음반수집가의 록’이라는 용어를 붙였는데, 터네이셔스 디도 이 범주에 드는 록 듀오다. 이들은 셀프 타이틀 앨범 [Tenacious D](2001)부터 [Rize Of The Fenix](2012)까지 총 3장의 정규 앨범을 내는 동안 줄곧 ‘록 에디터(rock editor)’이자 ‘록 큐레이터(rock curator)’로서 활동해왔다. 이들은 무엇을 수집하고 편집하며 전시하려 했는가. 바로 불량이다. 익히 알다시피 록이 더 이상 반항의 교과서가 아닌 시대에 이들은 의도적으로 개정되지 않은 반항·불량의 교과서를 들고 나왔다. 이미 우리는 터네이셔스 디의 간판 잭 블랙이 출연한 [스쿨 오브 록]을 통해, 그가 개정되지 않은 불량의 교과서로 학생들을 가르치려 할 때 나왔던 주변 반응을 유추할 수 있다. 50센트가 청소년의 방 안 벽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에 터네이셔스 디는 고집을 피웠다. 그들이 직접 언급한 고집의 참고문헌을 살펴보자. 블랙 사바스, AC/DC, 아이언 메이든, 주다스 프리스트, 디오……. 참고문헌을 본 당신의 입에서 자연스레 “What the hell…?”이 나왔다고 터네이셔스 디는 당황스러워할까? 외려 상황을 즐길지 모른다. 이들은 당신의 그 부정적 반응을 음악적 양분으로 삼기 때문이다. 올해로 45살이 된 제이블(터네이셔스 디에서 잭 블랙의 애칭)과 54살이 된 케이지(터네이셔스 디에서 카일 가스의 애칭), 이 두 삼촌은 당신을 조카로 앉힌 채, 조카의 입에서 “awesome!”이 나올 때까지 ‘록 복음 3장 16절’을 설교할 것이다. 악마라는 레트로 “임무를 수행할 시간이에요. 당신은 록을 하기엔 너무 늙었어요, 더 이상 당신을 위해 록을 할 순 없어요. 우리는 당신을 집으로 데려다줄 거예요. 그렇지만 우리는 당신을 노래할 겁니다.” – 1집 수록곡 [dio] 중에서 디오(Dio)는 터네이셔스 디의 록 복음 3장 16절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이다. 故 로니 제임스 디오(1942~2010); 그는 우리가 록 콘서트장에서 자연스레 쓰는 손 표시 ‘메탈 혼(metal horn)’의 전도사이자 블랙 사바스, 레인보우 등의 리드 보컬을 거쳐 1980년대 메탈의 굵직한 취향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잭 블랙은 록의 고고학자로 빙의해 그를 재발굴해냈다. 영원히 악동으로 남고 싶은 터네이셔스 디에게 디오는 매력적인 ‘음악적 소년성’을 유지하는 노장이었다. 실제로 잭 블랙은 터네이셔스 디의 밴드 결성기를 다룬 영화 [Destiny Of Pick]에서 디오를 출연시켰고, 디오는 어린 잭 블랙의 방 안에 정령으로 등장해 록으로 세상을 구원할 것을 명령한다. 터네이셔스 디의 영화 <destiny of pick>에 수록된 테마 [beelzeboss] “메탈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디오의 소명의식은 “악마로부터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고자” 음악을 한다는 잭 블랙의 말로 재현된다. 이 지점은 터네이셔스 디의 대표곡 “Tribute”와 “Rize Of The Fenix”의 뮤직비디오에서, 영화 [Destiny of pick]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기타를 맨 수도사 잭 블랙과 카일 가스의 여정 앞엔 늘 악마가 기다리고 있다. 실은 이러한 극의 구성은 디오가 “Holy Diver” 뮤직비디오에서 메탈의 기사가 되어 악마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Last in line”에서 어린 사환을 지옥에서 구출하는 이야기 전개와 유사하다. 아울러 [Destiny of pick]에 등장하는 악마(푸 파이터스의 데이브 그롤이 목소리로 연기한)가 치는 드럼에 새겨진 666과 사탄의 형상은 일찍이 아이언 메이든의 “The Number of The Beast” 뮤직비디오의 그것과도 겹쳐 있다. 디오, [last in line] 뮤직비디오 악마를 언급한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길거리에서 건네주던 뉴에이지에 대한 경고장을 진지하게 떠올릴 필요는 없다. 헤비메탈이 정서의 오염물질이라던 종교적 담론은 이제 논란거리이기보단 한때의 추억이다. 논란거리가 문화적 기억으로 남을 때 우리는 거기서 더 이상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문화연구자 캐서린 스푸너가 『다크 컬처』에서 말한 것처럼, “현대의 시청자들에게 악마성은 유쾌한 것으로 제시된다.” 터네이셔스 디는 그들의 장기인 ‘희화화’를 동원해 악마(demon)를 유쾌하고 귀엽게 선보인다. 터네이셔스 디가 악마를 무찌르고자 쓰는 기타와 그것에 대한 애착은 게임에 필요한 주술적 아이템을 ‘득템’하는 기분을 자아낸다. 터네이셔스 디의 음악에서 악마라는 레트로는 롤플레잉 게임에 등장하는 유머러스한 ‘끝판왕’일 뿐이다(참고로 유튜브엔 ‘월드 오브 크래프트’ 같은 게임 속 화면에 터네이셔스 디의 [wonder boy] 같은 노래를 배경음으로 깔아 만든 동영상이 제법 있다). 터네이셔스 디가 악마와 대결하며 보여주려는 것은 과거처럼 사탄주의(satanism)의 발흥이나 정서적 유해와 거리가 멀다. 우리는 제이블과 케이지라는 캐릭터를 통해 끝판왕을 깨고 난 뒤, 결국 게임의 목적이 세상의 평화가 아니라 터네이셔스 디라는 듀오의 결성 혹은 컴백을 우스꽝스럽게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터네이셔스 디의 숙제, ‘록커’ 혹은 ‘록터’ 허나 이런 희화화가 터네이셔스 디의 인기에 마냥 보호막이 되어주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터네이셔스 디의 희화화는 노랫말과 멜로디, 리듬만으로 충분히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평자들이 ‘코미디 록’으로 터네이셔스 디의 음악 세계를 분류했을 때, 이는 터네이셔스 디에겐 족쇄로 작용했다. 터네이셔스 디의 풍자를 이해시키고자 특성으로 내밀었던 프론트맨 잭 블랙의 퍼포먼스는 시각성과 행위성에 치우쳐 있다. 이를 록 오페라 혹은 록 뮤지컬이라고 하는 기존의 장르로 소화해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와 별개로 사운드의 요소가 비주얼에 잠식당하는 한계를 간과할 순 없다. 터네이셔스 디의 음악은 카일 가스의 기타 사운드와 리프만으로 익살스러움을 구현할 수 없는 것이다. 잭 블랙이 [샤이닝]의 잭 니콜슨처럼 눈을 부라리거나 부러 과장되게 예전 록커들의 손동작을 흉내 내고 나서야 감상자들은 이 록 듀오의 서사에 만족감을 충분히 표시할 수 있다. 터네이셔스 디의 앨범이 매번 잭 블랙과 함께 ‘프랫 팩(frat pack, 혹은 슬래커 팩 slacker pack 이라 불렀던)’을 이룬 멤버였던 벤 스틸러, 오웬 윌슨, 윌 퍼렐, 스티브 카렐이 등장하는 작품에 깔린 ‘영화음악’과도 같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잭 블랙이 시각적 연기로 이끌어가는 지분이 상당하다보니 해외 비평가들의 지적처럼 터네이셔스 디의 앨범은 서사적 요소가 지나치다. 한 곡 한 곡을 떼어 그 이야기를 편하게 소화할 수 있기보다는 터네이셔스 디라는 코미디 영화 한 편에 꼭 얽매여 있어야 그 이해도를 높일 수 있는 노래가 많다. 터네이셔스 디가 자신들의 음악 세계에 원천은 코미디임을 밝히면서도, 그 명성을 존립시켜주는 평가의 언어에 ‘코미디’ 록이라는 방점이 찍히는 것에 부담스러워 하는 건 이 때문이다. 그들은 불량스러운 록커인가, 아니면 불량스러운 록커를 연기하는 ‘록터’인가. 터네이셔스 디의 숙제다. 마틴 에이미스의 소설 [누가 개를 들여놓았나: 르네상스 소년의 반사회적 삼촌 관찰기] 무게에 대한 증오도 무게다 “모든 것이 무게가 없고, 모든 것이 무게를 증오했다.” -마틴 에이미스, 『누가 개를 들여놓았나』중에서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터네이셔스 디가 이런 우려를 불식시킬 가능성 또한 코미디다. 그들은 적어도 음악을 한다는 것, 록을 한다는 것에 대해 진지함을 잃지 않았다. 터네이셔스 디의 코미디는 록에 대한 진지함을 외려 진지하게 보여줌으로써 거기서 유머를 드러냈다. 그들이 록 씬을 조롱한다고 해서 일찍이 ‘모크 록(mock rock)’이라는 장르를 덧대어주었지만, 터네이셔스 디의 조롱이 록의 족보와 정통성마저 부정하진 않는다. 그런 면에서 터네이셔스 디의 과장되고 경박한 퍼포먼스는 자신들의 고유한 불량끼를 연출한다기보다는 기존의 불량끼를 ‘모범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터네이셔스 디가 수집한 불량의 참고문헌은 세월이 지나 이미 ‘모범적인 불량끼’로 평가받은 것을 고스란히 가져왔을 뿐이다. 터네이셔스 디는 80년대 헤비메탈 씬의 그 과장된 몸짓과 의상, 발산형의 사운드를 차용해 그들의 과장됨과 발산적 기운을 고스란히 감상자와 관객에게 전달한다. 이것은 조롱으로 해석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대문자로서 ‘THE BAND’의 시대를 만들고 전성기를 누렸던 선배 뮤지션을 향한 애도이기도 했다. 언론을 통해 “위대한 록 밴드의 부족”을 여러 번 이야기했던 터네이셔스 디는 10여 년 넘게 줄곧 터네이셔스 디라는 밴드의 탄생과 결성, 해체와 컴백을 앨범 속 메인 타이틀로 잡아왔다. 이를 음악적인 나태함으로 보고 싶진 않다. 그들은 ‘미스·미스터 애즈보(ASBO:Anti Social Behaviour Order, 반사회적행동금지명령)’란 낙인을 받고 싶은 ‘연출된 괴짜’를 자처하는 젊은 조카들에게 밴드로 살아간다는 것의 희노애락을 계속 보여준 채, ‘THE BAND’ 시대의 불량끼를 향유해보길 권하고 있는 것이다. 특집, 파문, 파격, 실험, 종언……. 이제 이 단어들은 생성되자마자 소멸을 걱정하는 단어가 되었다. 아마도 불량도(세트로 불온도 있다) 이런 걱정거리에 포함될 것이다. 허나 시대를 뒤돌아보면 늘 암울함을 찾는 요구가 있어왔다. 고로 불량은 사라지면 또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곤 했다. 터네이셔스 디 또한 이런 요구 속에서 한 시대의 불량을 이야기하고 있다. 불량의 역사란 것이 가능하다면 이들은 ‘불량의 미래주의’보다는 ‘불량의 레트로’와 친숙하다. 다만 불량의 과거-현재-미래 속에서도 여전히 우리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은 무게에 대한 증오였다. 꼰대들은 늘 이런 무게에 대한 증오를 불편해했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무게에 대한 증오도 필요한 무게라는 것을. 터네이셔스 디의 록은 이 시선에 늘 가닿아 있었다. ‘개 같은’ 두 삼촌의 불량끼가 여전히 반가운 이유다. | 김신식 www.facebook.com/shinsik.kim note: 내성적인 사람들을 위한 사회학을 연구하는 감정사회학도. 대중음악계를 감정이란 키워드로 접근해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