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귀차니즘과 스크롤 압박의 스트레스를 극복하기 위한 음악웹진 [weiv]의 고강도 칼럼 프로젝트 ‘스압! 주의!’ | 웨이브x네이버연예 기획 시리즈 [스.압.주.의] G-드래곤 & 태양, “Good Boy”. ‘미국’을 바라보는 케이팝 G-드래곤과 태양이 발표한 싱글 “Good Boy”가 미국 빌보드 차트의 ‘월드 디지털 송’ 부문에서 1위를 기록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와 관련된 다른 기사들, 간단히 말해 ‘해외 관계자’들에게서 좋은 평가를 얻고 있다는 기사도 같이 읽었다. 그러다 몇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실은 그 생각을 이야기할지 망설였다. 듣기 좋은 소리도 아니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아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케이팝’이 하나의 스타일로 고유함을 획득한 이 시점에서 조심스럽게 꺼낼 만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었다. 이 글을 읽게 될 여러분의 의견도 궁금하다. 에두르지 않고 묻는 게 좋겠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지금 현재 케이팝이 ‘음악적으로’ 정말 재미있는가? 듣기 즐거운가? 가수들의 멋진 외모, 화려한 춤 솜씨, 개성적인 패션, 빼어난(또는 성실한) 가창력, 예능과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재치 있는 언변과 착하고 바른 심성, 멋진 뮤직비디오, 드라마와 영화에서의 연기력, 팬에 대한 사랑과 배려,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음악만 들었을 때, 그러니까 음악과 여러분 사이에 달랑 이어폰 하나만 있을 때, 과연 지금의 케이팝은 매력적인 음악인가? 듣고 즐기고 사랑할 만한가? 나는 잘 모르겠다. 음원 차트를 ‘올킬’하는 케이팝 뮤지션들의 새로운 싱글과 음반을 들으면서, 나는 이 장르가 진부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돌 그룹의 음악만이 아니다. ‘음악성’을 내세우며 차별화하지만 실상 아이돌 시스템의 절차를 따라 생산되는 노래들도 마찬가지다. 그 음악들이 별로라는 소리가 아니다. ‘별로다’라는 느낌마저 없다는 게 문제다. 아침에 잠에서 덜 깬 채 멍하니 앉아 시리얼을 씹으며 TV를 볼 때처럼 아무 생각이 안 든다. 이 노래들은 ‘못 만든’ 음악이 아니다. 프로듀싱은 세련되고 매끈하며, 치고 빠지는 편곡과 구성은 현란하고, 겹겹이 쌓은 사운드는 화려하다. 가수들은 최선을 다 한다. 그럼에도 대부분 음악만으로는 끝까지 버티기 힘들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겨우 3분에서 4분밖에 안 되는 곡을 다 듣기 위해 필요한 게 많아 보인다. 시선을 빼앗는 뮤직비디오, 눈부신 조명, 쉴 새 없이 터지는 불꽃이 곁을 지켜주지 않는 이상 이 3~4분짜리 마라톤을 완주할 자신이 없다. 싸이, “강남스타일”. 역사상 가장 큰 히트를 기록한 케이팝 물론 케이팝은 애초에 음악만으로 인기를 얻은 장르가 아니다. 비디오, 안무, 패션, 가수의 ‘스타성’은 음악과 더불어 이 장르의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필수 요소다. 음악만으로 케이팝에 대해 얘기할 수는 없다. “강남스타일”이 순전히 음악 때문에 인기를 끌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음악평론가’의 편협한 태도라 해도 어쩔 수 없지만, 나는 케이팝의 핵심에 여전히 음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제는 그 음악이 관성적으로 생산되고 유통되고 소비되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강남스타일”이 아니었다면 그 시기는 더 일찍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원더걸스의 “Tell Me”와 소녀시대의 “Gee”, 카라의 “미스터” 등이 인기를 얻었던 2000년대 후반의 음악적 풍경을 돌이켜보자. 이 시기에 빅뱅이 “거짓말”을, 태양이 “나만 바라봐”를, 샤이니가 “Ring Ding Dong”을 불렀으며, 2NE1이 “Fire”로 데뷔했다. 당시 케이팝에는 새로운 세계를 개척할 때 느껴지는 특유의 활력이 있었다. 이 활력은 전염성이 강했고, 그래서 심지어 표절 내지는 아류작임에 확실한 곡들에조차도 모종의 생동감이 배어 있었다. 영미권의 ‘본토 음악’에 대한 강박 내지는 콤플렉스가 상당 부분 사라졌다. ‘본토’의 유행 스케줄에 맞춰 음악을 만드는 건 여전히 중요했지만 적어도 그쪽 음악을 ‘선진문물’로 간주하는 태도는 줄어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서 케이팝 특유의 무국적 잡식성이 형성되었다. 온갖 장르와 스타일을 거리낌 없이 빨아들였다. 키치에 가 닿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고, 대담하고 뻔뻔하며 신선했다. 허를 찌르는 매력을 갖춘 노래들이 노래만큼이나 번쩍거리는 비디오에 실려 온라인 네트워크에 퍼졌다. 소녀시대, “Gee”, 활력 넘치던 시절의 케이팝을 대표하는 곡 그 뒤 케이팝 산업은 성장을 거듭했다. 오늘날 수많은 소년소녀들이 ‘케이팝 스타’의 꿈을 꾸며 기획사와 방송국으로 몰려든다. 팬덤은 스타에게 애정을 쏟아 붓고, 그러다 종종 마음의 상처를 입고, 한편으로는 다른 팬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케이팝은 일본을 휩쓸었고, 유럽과 아메리카에 발을 디뎠으며,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커다란 인기를 누린다. 스타들이 무대를 누비는 다른 한편에서는 스캔들과 소송이 계속해서 터지며, 때로 SNS가 치명타를 날린다. 이 산업은 언제나 시끌벅적하다. 일상에 치이고 삶에 지친 이들에게 달콤하고, 짜릿하고, 때로 가슴 저미는 환상을 제공하며, 대중은 그 보답으로 사랑과 관심과 돈을 내 준다. 그러나 화려한 외양과는 별개로, 케이팝에서 팬덤의 범위를 넘어서는 대중적 호소력을 가진 히트곡은 더 이상 여간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이 씬은 거대하지만 폐쇄적이다. 사운드와 구성은 지나치게 복잡해졌다. 요란을 떨면서 폼을 재고 무게를 잡지만 속은 텅 비어 있는 경우가 많다. 잡식성 자체가 하나의 상투구가 되어 앞뒤가 안 맞는 괴상함을 파격으로 포장한다. 그게 아니면 지나치게 뻔해진다. 대형 기획사가 자체적으로 만들어내는 곡들을 제외한 나머지 영역은 소수의 히트 작곡가 팀들이 나눠 가진다. 나쁘지는 않되 결코 좋지도 않은, 몇 가지 닳아빠진 성공 공식이 안이하게 되풀이되는 노래들이 생산된다. ‘섹시 댄스’를 찍은 ‘직캠’ 하나 때문에 신인 그룹의 노래가 차트를 역주행하는 일이 가능한 건 그 위에 있던 다른 그룹의 히트곡도 똑같은 작곡가가 만든 음악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음악이 그게 그거라면 다른 방법으로 뜨(려)는 수밖에 없다. 이른바 ‘선정성’은 그 맥락에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팝 음악의 선정성이 여기서 잠깐 말하고 끝낼 만큼 단순한 문제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스템이 그렇게 생겨먹은 탓이니 어쩔 수 없다’며 덮어놓고 옹호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일부 ‘평론가’나 매체가 성희롱이나 다름없는 모욕과 비난을 여성 가수에게 퍼붓는 건, 그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여성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상업성과 선정성에 대한 비판’이라는 편리한 알리바이를 동원하여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현아, “Bubble Pop”. 어떤 이들은 케이팝의 ‘선정성’을 ‘선정적’으로 비난한다 그래서 어쩌라는 걸까? ‘그러니 우리는 시시한 케이팝을 버리고 인디 음악을 들어야 합니다’나 ‘역시 1990년대를 버텨 온 진정한 뮤지션들이 최고지요’ 같은 주장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디와 1990년대 뮤지션은 케이팝의 안티테제도, 대안도 아니다. 적어도 이 논의에서 이들은 각자의 가치를 가진 다른 음악일 뿐이다. 우리는 지금 ‘케이팝’이라 통칭되는, 대개 일렉트로닉과 디스코, 록, 힙합이라는 판 위에서 온갖 소리를 끌어 모으며 부풀어 오르다 폭발하는 독특한 양식의 팝송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지당한’ 대안을 의무적으로 제시해 볼 수도 있겠다. 예를 들면 공정한 계약 시스템을 확립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걸로 충분할까? 합리적인 계약과 공정한 수익분배는 중요한 일이며,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는 끝까지 이의를 제기해야 하고, 뮤지션을 아끼는 팬들이라면 당연히 이를 지지해야 한다. 그러나 공정한 시스템과 좋은 음악 사이에 상관관계는 있을지 몰라도 필연은 없다. ‘부당한 계약’에서 벗어나 ‘진짜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음악’을 했을 때 변변찮은 결과물을 내는 뮤지션은 한둘이 아니다. 물론 시스템이 합리적이라면 뛰어난 재능을 더 많이 유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진입한 판 자체가 대담한 시도를 감행할 의욕이 없다면 아무리 재능 있는 뮤지션이라도 자기 뜻을 펼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지금 어찌 보자면 대책 없는 불평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 장르에서 꾸준히 나오는 멋진 음악들을(내가 평소에 적극 추천하던 노래들을 포함하여) 일부러 못 본 척 하며 상황을 단순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음원 올킬’이나 ‘멤버 직접 작사 작곡’을 무작정 ‘음악성’과 동급에 놓거나, ‘수출의 역군’내지는 ‘한류 전도사’로 이 장르를 간주하거나, 혹은 케이팝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비즈니스의 역학관계’로만 해석하거나, 그도 아니면 지나치게 쇄말적인 태도로 음악을 뜯어보면서 사소한 변화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일부 매체와 팬과 평자들 역시 무언가 중요한 걸 간과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우리가 음악으로서의 케이팝을 다시 고려해 볼 때가 왔다고, 이 장르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된 이유를 처음부터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음악이 더 많이, 더 자주 나오지 않으면 이 장르는 얼마 안 가 현재의 생명력을 소진할지도 모른다. 분 단위로 갱신되는 ‘최신 연예 뉴스’만 남을지도 모른다. 작년에 A그룹이 불렀던 노래를 올해 B그룹이 불러도 그게 같은 곡이라는 걸 아무도 모르고, 알아도 딱히 신경을 안 쓰는 세상이 올 수도 있다. 이는 당연히 과장이지만, 지금도 어떤 노래들은 정말 그렇게 들린다. | 최민우 daftsound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