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귀차니즘과 스크롤 압박의 스트레스를 극복하기 위한 음악웹진 [weiv]의 고강도 칼럼 프로젝트 ‘스압! 주의!’  | 웨이브x네이버연예 기획 시리즈 [스.압.주.의]

 

가수와 시인, 쓸모로 엮인 우정

“요즘 시대에 누가 시를 읽는단 말이오?” 시인들의 자조 섞인 말도 어느새 새삼스러운 소리가 되었다. 가수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가 싶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오늘도 수많은 노래가 쏟아져 나온다. 사람들의 귀에 머무는 노래는 단 몇 곡뿐이다. 읽히지 못한 시, 귀에 박히지 않은 노래는 소음이 될 처지에 놓인다. 이쯤 되면 각자 쓸모를 고민하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린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시가 있는데, 굳이 내 시가 필요한가. 세상에 이렇게 부를 노래가 많은데 굳이 내 노래가 필요한가. 하고 나면 괜히 던진 질문 같지만,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질문. 허나 가수와 시인은 이 질문을 통해 서로 마주보게 된다. 시인은 노래를 통해 시의 쓸모를 탐구해갔고, 가수는 시를 통해 노래의 쓸모를 깨달아갔다. 그리하여 오늘날 쓸모는 가수와 시인의 우정을 뜻하는 언어로 자리 잡게 된다.
나는 여기서 외려 가수가 아닌, 직업적으론 조금 동떨어져 보이는 시인의 관점에서 대중가요의 위상과 의미를 정리해보려 한다. 대중가요를 향한 시인들의 홀대와 환대, 그 변화상은 특히 ‘가사’의 측면과 관계된 한국 대중음악의 이색적인 지점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는 문단의 입장을 변론하거나 옹호하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와 가요가 맺은 쓸모의 역사는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이자 사운드의 역사였다.

1932년: 시인, 가요계를 기웃거리다

시와 가요가 처음부터 단짝 친구는 아니었다. 둘의 사이는 생각보다 데면데면했다. 가령 음악의 근대화가 시작되던 일제강점기, 국내 문단을 주름잡고 있던 몇몇 시인들은 유행가를 ‘악종가요’라 칭했다. 그때만 해도 시인들에게 시란 마음속으로 읽거나, 조용히 소리 내어 읽는 ‘수준 높은 글’이었다. 시가 입말이 되어 노랫말로 쓰인다는 건 시를 낮추어 보는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1920년대 들어 동인지와 문학잡지의 폐간이 속출했다. 시가 실릴 지면이 줄어들었다. 시인들은 당황했고, 직업으로서의 시인이 가능한지 고민했다. 이때 시인들은 가요에 눈을 돌린다. 시인들이 보기에 가요는 시가 널리 퍼질 수 있는 장치였다. 1929년 조선가요협회라는 단체가 창설되었다. 시인은 단체 구성원으로서 작사가가 될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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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유성기음반이 발매되고 대중음악이 널리 보급되는 시스템이 하나둘 갖춰졌지만, 문인들은 시큰둥했다. 그러다가 1920년대 들어 각종 문학 저널이 폐간되면서, 가요를 폄하하던 시인은 대중가요계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이광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출처: 엔하위키 미러)

1932년은 시인에게 가수에게도 중요한 해였다. 한때 유행가를 폄하하던 이광수 등의 유명 문인들은 자신이 쓴 시를 유행가 가사로 발표했다. 호응이 제법 있었다. 1934년, 그 당시 국내 대중음악 산업에 영향을 끼친 일본콜럼비아축음기주식회사는 시인들을 전속 작사가로 삼았다. 하지만 작사가가 된 시인들은 가요의 쓸모를 시와 시인의 생존에만 국한시켰다. 시와 가요는 아직 수평적인 교감을 나누지 못했다.

시 그리고 ‘건전한 가사’라는 말의 속내

이런 인식은 시간이 흘러도 꽤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김용범 시인은 월간 문학지 『소설문학』1988년 1월호에 <현대시와 대중가요>라는 글을 발표한다. 내용인즉슨 시가 독자 안으로 파고들려는 노력은 서적이나 책자로는 모자라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등의 매체를 통해 짧은 시간에 최대다수에게 전달되는 방식을 꾀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중가요는 그 방식에 가장 적당했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적 분위기도 좀 더 유연해졌지만, 여전히 시와 대중가요의 관계는 경직되어 있었다. 대중가요는 시의 전파를 위한 장치로만 머물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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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길옥윤 같은 유명 작사가들은 대중가요의 저급화를 막기 위해 시인들이 작사 활동에 참여할 것을 언론을 통해 권장했다 (<아쉬운 홈송 대중가요> 『경향신문』1967년 11월 25일자 기사 출처: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대중가요를 시의 부수적인 도구로 삼는 인식엔 ‘건전한 가사’라는 틀도 있었다. 건전한 가사 운동이라는 모토가 만들어지면서, 시는 ‘사랑 타령이나 하고 앉은’ 노랫말의 대항마라는 임무를 맡는다. 언뜻 건전은 온전히 선한 말 같지만 음흉한 속내가 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견해를 빌자면, 건전과 건강은 다르다. 건전이 집단적 도덕에서 선한 것으로 판단되는 속성이라면, 건강은 개인적 윤리의 시선에서 좋은 것으로 판단되는 어떤 속성이다. 가요와 엮인 시의 건전한 쓸모는 시인의 건강도, 가수의 건강도, 어떻게 보면 대중 속 개인의 건강도 챙겨주질 못했다. 사회적 분위기를 한껏 잡으려는 윗분들의 공명심(사실 윗분들의 심기를 불편하지 않게 하려는)에 가까웠다.

시집, 앨범 속 또 하나의 부클릿이 되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나팔꽃’이나 ‘꼬두레’처럼 시인과 대중가수가 뜻을 모은 문화운동이 생겼다. 도종환, 정호승, 김용택, 안도현 등의 시인이 안치환, 권진원, 윤도현 등 유명 가수와 협업하는 움직임은 자연스러웠다. 다만 여전히 그 안에 담긴 ‘반듯한’ 기운에는 시의 쓸모를 위해 대중가요를 활용해야 한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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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대표적인 서정시인 도종환, 정호승, 안도현, 김용택 등이 가수 안치환, 윤도현과 함께 만든 시노래모임 ‘나팔꽃’. 시인들이 과거와 달리 대중음악에 유연한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시노래모임 ‘나팔꽃’이 피었습니다>, 『경향신문』,1999년 8월 31일자 기사, 출처: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그러나 조금씩 대중가요와 시의 수평적 교감을 꾀하는 노력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성기완(1967년생), 박정대(1965년생), 문혜진(1976년생), 황혜경(1973년생) 등등 지금부터 살펴볼 이들의 공통점은 시집을 통해 대중음악의 감상법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1990년대 대중문화의 기운을 자유로이 만끽하던 청년들은 시인이 되어 시와 대중음악의 일체 그리고 교감을 꿈꾼다. 시집을 통해.

문혜진은 『질 나쁜 연애』에서, 우리가 어떨 때 제니스 조플린, 스매싱 펌프킨스, U2의 보노, 전인권, 에미넴의 노래를 듣고 살아왔는지 공유한다. 닉 케이브의 광팬인 박정대는 <세상 모든 원소들의 백색소음>이란 시를 통해 우리가 진정 지켜나가야 할 음악이 무엇인지 고심한다. 그는 닉 케이브를 ‘그리운 소음’으로 칭하며 음악의 본질을 탐구한다. 황혜경의 <烈이 노래한다>는 이승열의 음악세계에 대한 감상기다. 시인은 이승열을 “자극과 위로의 타이밍을 꿰뚫고 있는 듯한 싱어송라이터”라 부르면서 그의 음악세계를 아래와 같이 평한다.

눈, 코가 입이 귀가 막히는 진공의 어둠 속에서도
아픈 부위를 어루만지는 저음의 자장가
– 황혜경, <烈이 노래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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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혜경은 이승열의 음악세계를 조명한 「烈이 노래한다」를 발표했다. 시인은 이승열이 자극과 위로의 타이밍을 꿰뚫고 있는 듯한 싱어송라이터 라고 밝힌다.

이처럼 시집은 가수들의 앨범에 새로이 들어간 또 하나의 부클릿이 되었다. 성기완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인물이다. 익히 알다시피 그는 시인이자 3호선버터플라이의 멤버다. 이런 그의 정체성은 자신의 음악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성기완은 솔로 앨범 [당신의 노래]를 시집 『당신의 텍스트』와 한 쌍이 되게 제작했다. [ㄹ]은 시집 『ㄹ』과 동시에 발매되었다. 성기완의 두 앨범은 익숙한 시를 배우나 가수가 대신 읊는 흔한 낭송집이 아니다. [ㄹ]은 앨범 속 소개글처럼, 시집을 읽어나가며 수록곡을 들어도 좋고, 수록곡만 들어도 좋고, 시집만 읽어도 좋은 앨범이다. 그는 시는 시다운, 노래는 노래다운이란 경계를 허물고, 시와 노래가 한 덩이가 될 가능성을 줄곧 실험해왔다. 이 실험의 목적은 오늘날 사운드란 과연 무엇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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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완은 시집 『ㄹ』과 쌍을 이루는 사운드 아트 앨범 [ㄹ]을 동시에 내놓았다. 시인이자 3호선버터플라이의 멤버였던 그는 시와 노래를 한 덩이 삼아 사운드란 무엇인가를 고찰해온 ‘사운드 디자이너’다.

가사도 사운드다

물론 가수와 시인이 만들어가는 쓸모의 역사는 시인의 일방적인 구애와 의지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다. 단순히 시어를 좋은 멜로디에 맞게 담아내는 차원이 아니라, 주체적인 관점에서 탐구하는 마음으로 작업하는 가수들은 많았고 움직임은 이어지고 있다. 시와는 [인사]를 통해 삶 아래 숭고해져가는 인간의 맹세를 이야기하는 김선재의 시 「마지막 들판」을 담담한 포크로 해석해냈다. 아마도이자람밴드는 앨범 [크레이지배가본드]를 통해 故 천상병의 시세계를 ‘호방함’으로 해석하며 얼큰하고 호탕한 리듬과 톤으로 그 속에 숨겨진 짠한 인생살이를 들려주었다. 봄로야는 근래 자신만의 몽환적인 음향으로 진은영의 시 「멜랑콜리아」를 불러들였고, 낭독회를 통해 유희경의 시세계와 협업을 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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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이자람밴드는 2010년 천상병예술제에 참여하면서 천상병의 시세계를 음악화하게 된다. [크레이지 배가본드]는 천상병 시인의 시 중 한 편이다.

가수와 시인, 그 쓸모의 역사는 각자의 세계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는 중이다. 싹트는 우정은 서로의 장점을 통해 가능성을 남겼다. 가수는 시를 통해 가요가 ‘쓸 수 있는 말’임을 알게 되었고, 시인은 가요를 통해 시가 ‘부를 수 있는 글’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가수와 시인이 만들어가는 쓸모의 역사는 자연스레 싱어송라이터라는 명칭의 사회적 쓰임새에 대해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과연 작사도 하고 작곡도 하는 한 가수의 능력에 대해 가사의 중요성을 얼마만큼 생각하고 있을까. ‘사운드=멜로디’라는 경향 속에서 가사 또한 멜로디만큼 소중한 사운드로 취급받고 있는가. 가사는 싱어송라이터가 충분히 공을 들인 결과물로 인정받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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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조의 정규앨범 2집 [나의 쓸모]엔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소개글과 함께 김소연 시인의 소개글이 담겨 있다. 가수와 시인이 서로의 세계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해석해 협업의 결과물을 내놓는 예가 늘어나고 있다.

누구나 한 번쯤 연습장에, 카페에 비치된 냅킨을 메모장 삼아 가사를 옮겨 적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가사를 시를 읊듯 잠시 멜로디 없이 읽어보길 권한다. 가사라는 사운드를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세상에는 이렇게 부를 노래가 많은데 (…) 굳이 이렇게 음표들을 엮고 있”(요조, [나의 쓸모])는 가수의 쓸모, 그 본래의 고민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 노래들은 듣는 노래가 아니었다. 내게 나타난 노래였고, 나를 만나러온 목소리였다”(김소연 시인, [나의 쓸모] 앨범 소개글 중)는 고백은 시인이 대중음악을 통해 품어보는 시의 쓸모와 통한다. 물론 이 방법이 가수와 시인의 쓸모에 대하여 마땅한 해답을 내놓진 못할 것이다. 그래도 그들의 ‘그다음’ 노래와 ‘그다음’ 시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 정도는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쓸모의 역사는 계속된다. | 김신식 jjcrowex@hanmail.net

note. ‘1932년: 시인 가요계를 기웃거리다’는 구인모의 연구논문 「근대기 시인의 현실과 유행가요 창작의 의미」(『한국문학연구』, 제46집, 2012)를 참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