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귀차니즘과 스크롤 압박의 스트레스를 극복하기 위한 음악웹진 [weiv]의 고강도 칼럼 프로젝트 ‘스압! 주의!’ | 웨이브x네이버연예 기획 시리즈 [스.압.주.의] 아이돌이 각 멤버들과 그들의 재능 및 매력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아이돌이라는 마법은, 작사, 작곡, 편곡, 레코딩, 믹싱, 안무, 의상, 미술, 영상 등, 각 분야의 업무를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맡기는 시스템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작은 틈이 있다. 작사, 작곡하는 아이돌들이다. 물론 아이돌 멤버들 중에는 다른 분야에 참여하기도 한다. 의상, 안무, 뮤직비디오 콘셉트 등에 제안 사항을 내놓기도 하고, 그것이 결과를 내거나 호평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작사, 작곡만큼 큰 비중으로 인정 받는 일은 흔치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그것이 ‘음악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뭐니 뭐니 해도 아이돌의 중심에는 음악이 있고, 음반을 단위로 활동을 이어간다. 음반의 크레딧에 이름이 인쇄돼 나온 것을 손에 쥐어보는 경험도 크게 작용할 것이다. 거기에, 음악 작업이 보다 직접적으로 띠는 ‘재능’의 이미지도 추가돼야 할 것이다. H.O.T. 무려 10곡의 자작곡 아이돌도 음악가다 작사, 작곡에 아이돌 멤버가 참여한 역사는 H.O.T.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98년 발매된 3집 [Resurrection] 앨범은 14곡 중 10곡에 H.O.T. 멤버들이 이름을 올렸고, 특이하게도 다섯 멤버들이 각자 최소 한 곡씩 전담한 ‘자작곡’을 수록했다. 이는 다음 앨범인 1999년의 [I Yah!] 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번엔 11곡이 ‘자작곡’이었다. 분명 H.O.T.의 일부 멤버들은 이후로도 다양한 경로로 음악적 욕심을 내비쳤고 또한 실현했다. 그러나, 정작 타이틀곡인 “열맞춰”와 “아이야”는 제외한, 나머지 수록곡 중에서 자작곡의 비중은 분명 심상치 않다. 이는 이전의 음반들과 대조하면 더욱 그렇다. 그 이유는 어쩌면 일종의 ‘인정투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H.O.T.의 경우 ‘문화 대통령’ 서태지와 아이들의 빈 자리에서 ‘10대의 대변자’ 포지션을 취하며 데뷔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과의 비교는 불가피했고, 이는 곧 ‘전대미문의 천재’라는 서태지의 이미지에 대한 비교열위를 의미했다. 아직 아이돌이란 시스템이 낯설던 시절, 끊임 없는 가창력 논란과 공장에서 찍어낸 꼭두각시 이미지에 의해 아이돌은 평가절하되곤 했다. 여러 팀의 메인 보컬들로 구성해 아카펠라를 선보인 동방신기의 기획은, 아이돌의 가창력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하려는 대책으로 해석되곤 한다. 마찬가지로,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대해, H.O.T.는 자작곡으로 항변했다. 16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아이돌은 곧잘 평가절하의 대상이 되며, 그 방식은 여전히 가창력과 꼭두각시 이미지다. 아이돌 산업의 팽창으로 기획사마다 연일 프로듀서들의 데모곡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곡의 수급이 원활하지 못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아이돌들이 작사, 작곡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효용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호랑이와 함께 작곡을 갈고 닦은 지드래곤 그러나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아이돌에 대한 평가는 또한, 이 자작곡들이 아이돌에게 음악적 진정성을 덧씌워주지 못했다는 반증이 된다. 아이돌 팬덤의 집중포화를 피해 가려는 평론가는 있어도, 적어도 지드래곤의 “One of a Kind”(2012) 이전까지 아이돌의 자작곡을 음악적으로 진지하게 검토하는 평론가는 많지 않았다. 상당부분, 아이돌의 자작곡은 팬들을 설득하는 데 그쳤다. 그리고 여기에서, 자작곡의 또 다른 효용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적어도, 팬들에게는 훌륭한 소재가 된다는 점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꼭두각시가 아니며 ‘진짜 음악인’이라는 증명, 그러니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다는 자부심이었다. 때로는 스스로의 만족, 때로는 다른 팬덤과의 경쟁에서 무기가 되어 주는 자작곡은, 팬들에겐 좋은 선물이었다. 일반적으로 지드래곤이 ‘완성’되기 이전으로 간주하는 1집 [Heartbreaker](2009) 앨범이 많은 논란 속에서도 팬덤의 강력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에는 그런 이유도 포함돼 있었다. 적어도 팬들은 그가 YG의 인형 이미지로 머물기보다 ‘진짜 아티스트’로서의 자기증명을 해주길 기대했다. 한때 팬덤이 아이돌에게 경쟁적으로 고가의 선물을 보내던 시기, 그 목록에 수백만 원짜리 음악 장비들이 즐비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조금은 ‘중2중2’한 모습 또한 ‘아티스트 꿈나무’의 자질로 받아들여졌다. 싱어송라이터의 길 사실 ‘자작곡’이란 어휘에는 이미 아마추어의 함의가 내포돼 있다. 곧, 원래는 작곡가가 아니거나, 전문 작곡가에는 못 미치거나, 경험이 많지 않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이단옆차기의 자작곡’, ‘신해철의 자작곡’ 같은 표현은 어색함이 있는 것이다. 물론 ‘자작곡’이란 단어가 비평적 의미에서 작곡의 수준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일반적인 아이돌 산업 구조가 전문 작곡가와 싱어의 구분으로 이뤄져 있기에 이 단어가 더욱 자주 쓰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싱어송라이터로 변신하는 아이돌도 있다. 1세대의 경우 H.O.T.의 문희준, 티티마의 소이, 박지윤 등이 그들이었다. 현재는 2006~7년 이후 데뷔한 아이돌의 상당수가 그룹 소속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라 완전한 솔로 독립 싱어송라이터는 보기 드물다. 그러나 원더걸스 출신 예은이 올해 ‘핫펠트’란 이름으로 싱어송라이터 변신에 성공해 좋은 평가를 받았고, 슈퍼주니어-M의 헨리도 소속사의 제작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자신의 음악세계를 펼쳤다. 젝스키스의 은지원과 2PM 출신 박재범이 힙합 아티스트로서 길을 걸어나간 사례도 있다. 이들 모두 전문 작곡가의 곡을 부르는 싱어의 입장에서 출발해 독자적인 아티스트가 되어갔다는 점만은 같다. 경우에 따른 차이는 있으나, 그 성장 과정에는 아이돌 ‘자작곡’의 필요나 효용, 욕망과 맞물리는 부분도 있음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아이돌 작사만의 힘 그런데 작곡은 조금은 복잡한 일이다. 편곡과 화성학, 악기 연주, 사운드 엔지니어링 등의 어렵고 전문적인 프로세스를 연상시키며, ‘천재’와 같은 환상을 자극한다. 그에 비해 작사는 ‘솔직한 마음’과 ‘고운 감성’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아이돌이 작곡을 했다고 해도, 많은 경우 어느 정도 전문가의 도움이 있었으리라 상상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나, 작사는 보다 쉽게 설득력을 갖는다. 아이돌에 의한 작곡보다는 작사가 많은 점, 여성보다는 남성 아이돌의 작곡이 더 많은 점도 어쩌면 그런 이유일 것이다. (사회적인 성 역할 인식이 여성에게는 작곡보다는 노래와 춤, 글쓰기, 패션으로 굳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사가 작곡보다 열등한 작업은 결코 아니다. 전문성의 측면에서도 물론 그렇지만, 아이돌의 작사가 갖는 또 다른 효용이 있는 것이다. 진정성 있는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명분이다. 특히 힙합 아이돌이 랩을 쓸 때 이것은 극대화된다. 방탄소년단이 ‘학교 연작’을 통해 방황하고 고뇌하는 십대의 삶을 노래할 때, 멤버들이 직접 풀어내는 그 가사들은 전혀 다른 울림을 갖는다. H.O.T.의 노래들이 프로듀서들의 손으로 쓰여졌다면, 이제는 그 이야기를 겪고, 쓰고, 노래하는 것이 모두 동일인물인 것이다. 가사에 공감할 수 있는 청자는 온전한 대변자를 얻는다. 인피니트의 월드 투어 다큐멘터리 [Grow]의 주제곡도 멤버 남우현이 (작곡을 겸해) 직접 썼기에, 곡이 그리는 인피니트의 이야기를 팬들이 더욱 진실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경우이다. 방탄소년단 : 학교는 가짜 학교겠지만 이야기는 진짜 반드시 ‘100% 경험담’ 같은 것이 아니어도 좋다. 카라의 [KARA Solo Collection](2012) 앨범이 각 멤버의 작사와 솔로를 담고 있는 것은 그래서 더 힘을 얻는다. 무대 위에서 멀게 느껴지기도 하는 아이돌이 장식을 내려놓고 자신의 입으로 독백을 하는 순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청자는 아이돌이 직접 쓴 가사를 통해 아이돌의 더 내밀한 ‘목소리’를 듣고, 더 가까이 애착을 느낀다. 샤이니의 종현이 “상사병”, “Spoiler”, “알람시계” 등의 작사를 통해 속 깊고 재치도 있는 성격을 유감 없이 드러내는 것도 그런 이유로 흥미롭다. 청자는 가사 속에서 그 인물의 감성을 엿보게 되고, 이는 인물상으로 이어져 아이돌의 캐릭터성을 강화한다. 이 지점에 이러서야, 아이돌의 ‘작사, 작곡 참여’는 보다 우월한 존재인 아티스트를 따라잡는 수단의 단계를 넘어선다. 아이돌이기에 가능하며 필요한, 독자적인 효용과 가치를 갖게 된 것이다. 프로듀서 아이돌 한편, 지난 몇 년간 우리는 또 다른 형태의 아이돌을 목격했다. 소속사 간판 프로듀서 격의 지위까지 올라간 지드래곤, 내외부로 활발한 활동을 선보여온 비스트의 용준형, 그리고 블락비의 지코가 그들이다. 이들의 활동은 ‘자작곡’을 벗어나 ‘프로듀싱’으로 정의되고, ‘작곡가’보다는 ‘프로듀서’의 영역에 위치한다. 프로듀서의 업무는 작곡 단계에서, 편곡을 하고 사운드를 만드는 단계, 스튜디오 녹음과 믹스의 지휘 및 실무, 음반 자체의 구성과 기획을 담당하거나 조율하는 이그제큐티브(executive) 프로듀서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자신이 직접 관계되는 그룹의 음악 감독으로서 역할을 하고, 다른 팀의 프로듀싱을 맡기도 한다. 씨엔블루의 정용화, 이종현이나 신화의 민우 같은 사례와도 유사한 이 커리어의 형태는, 지드래곤에 이러 그 본격적인 지평이 열렸다고 할 수 있다. 세 사람의 활동에는 차이가 있다. 용준형이 소속 그룹과 멤버들의 잠재력을 충실히 이끌어내는 데에 집중한다면, 지드래곤은 독자적인 크리에이터로서 빅뱅과 솔로 양쪽을 이어가는 것에 가깝다. 한편 지코는 특히 최근 솔로곡인 “Tough Cookie”를 통해 아이돌인 동시에 래퍼라고 하는 두 가지 정체성의 양립에서 출발하는 형태를 보여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지코 – Tough Cookie 아이돌은 음악만으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다. 다양한 분야가 결합된 콘텐츠이며, 그 모든 분야에 전문가인 한 사람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아이돌이 기획사에 의해 여러 전문가가 조합되어 이뤄지는 자본집약적인 산업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프로듀서 아이돌’들은 그런 환경 속에서, 자신이 전달하는 콘텐츠가 하나의 ‘노래’로 축약되지 않는다는 것을 몸으로 경험하며 ‘성장’한 인물들이다. 그들이 반드시 아이돌 산업 속에서의 통제권을 원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들이 통제권을 원할 때 그것은 작사, 작곡만으로 이뤄지는 ‘노래’에 그치지 않는다. 편곡과 프로듀싱이 관계되는 ‘음악’과 음반의 제작, 그리고 청각요소로 이뤄진 ‘음악’에서 더 나아가, 시각요소와 개념요소인 콘셉트까지 다루려 하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폭넓고 훌륭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천재 아티스트’라서가 아니다. 본격화된 아이돌 산업이 낳은 새로운 세대의 ‘욕심 많은 아티스트’는 과거 다른 분야와 다른 사람들인 것이다. 과거와는 조금 다른 아티스트들 우리는 지금까지 아이돌이 작사, 작곡을 하고 때로는 프로듀서의 길을 가는 다양한 경우를 살펴보았다. 때로는 소속사나 주위의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그것을 ‘이름만 내걸었을 것’으로 의심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아이돌 시스템의 구조 속에서 보컬과 춤을 트레이닝 받듯 싱어송라이터나 프로듀서의 자질도 양성되거나 개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야말로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음악적 야망을 위해 주위의 인프라와 시스템의 강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차라리 음악가로서의 미덕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가능성이 기존 가요계와는 사뭇 다른 형태의 아티스트들을 쏟아내기 시작하는 지점에 있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아이돌 씬에서 앞으로 등장할 새로운 아티스트들을 기대해 본다. | 미묘 tres.mimy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