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귀차니즘을 극복하기 위한 음악웹진 [weiv]와 네이버 연예의 공동 기획 [스.압.주.의] 지난 1월 3일 토요일 [무한도전]에서 기획한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이하 ‘토토가’)’가 다양한 화제를 뿌리며 끝났다. 정준하와 박명수의 우스갯소리로 시작된 이 기획은 음원 차트의 탑 10을 ‘가요톱10’으로 돌려놨다. 지금은 30대가 된 이들이 SNS에서 90년대의 추억을 공유했고 거기에 추억 보정과 보정된 추억을 다시 보정하려는 이들의 대화가 추가됐다. 미디어가 이런 좋은 소재를 놓칠 리가 없다. 20년마다 유행이 돌아온다는 20년 유행 주기 설이 소환되고 그때 문화를 누렸던 이들이 지금은 신 소비계층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이어졌다. 프로그램에서 예원이 가요 선배를 예우하는 멘트처럼 ’90년대는 한국 대중문화의 황금기였다’는 나른한 주장도 있었다. 엘리트주의에 함몰돼 90년대 가요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는 반성도 뒤따랐고 문화를 잃은 30대의 퇴행적 노스탤지어라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그때를 이야기하는데 정작 이 이야기는 아무도 하지 않는 듯하다. 그건 90년대 댄스 가요라는 음악 양식 그 자체에 관한 이야기다. 당시만 해도 흔하게 과소비를 추방하자는 광고와 뉴스를 볼 수 있었다. 90년대 댄스 가요를 이야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당시 시대 상황을 먼저 꺼내야 한다. 1987년 6월 항쟁 후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개헌됐다. 전두환의 군부 독재가 끝났지만 그렇게 해서 당선된 대통령은 여전히 노태우였던, 아직 과거와의 연결 고리가 완전히 끊기지 않은 상황이었다. 1988년도에는 서울 올림픽이 열리고 해외 영화 직배가 시작된다. 1989년도에는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그해 120만 명이 해외로 나갔다. 이 중 절반은 2,30대였다. 이와 함께 언론사에서는 경상 수지 적자를 언급하며 해외여행으로 나라 경제가 좀먹고 있다는 기사를 양산했다. 90년대 초는 ‘과소비’라는 용어가 공기처럼 떠다니던 시대이기도 하다. 1991년에는 한국 최초의 상업 방송 SBS가 개국했다. 미니 컴포넌트가 유행했으며 언론사에서는 ‘신세대’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1992년은 90년대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해다. 우선 노래방이 유행했다. 노래방은 전국에 6,000여 곳이 생기며 성황을 이룬다. 그와 함께 언론사에서는 노래방을 청소년 탈선과 범죄의 온상으로 묘사한다. 노래방 조명이 눈 건강에 나쁘며 노래방 기기 수입으로 외화가 낭비되고 있다는 기사도 등장했다. 최루탄 사용이 80% 감소하고 학생 운동은 서서히 소강하고 있었다. 압구정을 중심으로 과소비를 즐기는 이들을 ‘오렌지족’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들에 관한 혐오도 함께 생겼는데 이는 1994년 부유층에 관한 분노를 살인의 이유로 내세웠던 지존파 사건으로 정점을 찍는다. 1992년도를 상징하는 가장 큰 사건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아이돌 그룹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내한 사고다. 200여 명의 팬이 공연장으로 몰려가 40여 명이 부상하고 1명이 사망한 이 사건은 당시 기성세대가 10대에 갖고 있던 온갖 부정적인 시선을 드러내는 촉매가 된다. 사흘에 한 명이 자살할 만큼 입시 경쟁이 치열한 시대, 과소비를 일삼으며 미국산 문화에 몰두하는 한심한 세대가 탄생한 것이다. 과소비에 덧붙여 ‘왜색문화’, ‘문화적 식민지’ 같은 표현이 신문을 장식한다. 정부에서 외래어 간판을 단속하던 때다. 여기까지가 90년대 초의 상황이다. 80년대에 시작된 민주화 운동은 서서히 소강했으나 그때의 이데올로기는 문화 전반에 남아 있었다. 젊은이들은 해외 여행 자유화와 위성 티브이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된 외국 문화에 충격을 받고 새로운 문화를 갈증하고 탐닉했으나 어른들은 여기에 왜색 문화라는 딱지를 붙이고 해방된 지 50여 년 만에 다시 한국이 문화적 식민지가 될까 봐 걱정했다.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소비문화가 발달했으며 이를 당연하게 누리는 10대, 20대를 향해 기성세대는 ‘신세대’라는 이름을 붙이고 장사의 대상으로 삼거나 거부감을 보였다. 대체적으로 둘을 동시에 했다. 당시의 기성세대는 저들의 주먹이 자신들을 강타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1992년 4월 한국의 ‘뉴키즈’로 소개되며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다. 당시 새로운 문화는 일방통행으로 흘렀다. 서구와 일본을 축으로 유행하는 문화가 이태원과 강남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이 문화는 이후 시차를 두고 강북-경기도-지방 순으로 퍼졌다. 90년대 댄스 가요는 이 연결고리의 ‘경부 고속도로’ 같은 존재였다. 빠르게 10대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응집하게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등장 후 한국 음반 시장의 70%는 10대의 몫이 됐다. 경직된 기성세대에게 나도 알 건 다 안다고 외치는 듯한 ‘난 알아요’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90년대 댄스 가요의 시대가 열렸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대중문화는 대부분 서구 문화의 동경에서 시작됐다. 90년대 댄스 가요 역시 그랬다. 촘촘한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기에 여기에는 몇 가지 다리가 존재했다. 90년대 댄스 가요의 두 축은 유로 댄스와 같은 하우스 리듬의 댄스 음악 그리고 뉴 잭 스윙, 힙합과 같은 흑인 음악이다. (여기에 레게를 추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유로 댄스 음악이 퍼진 곳은 이태원과 강남 일대의 나이트클럽이다. 당시 이태원은 쉽게 접근하긴 어렵지만 한국에서 서구 문화를 가장 빨리 접할 수 있던 곳이다. 미군과 보따리 수입상들은 문익점마냥 서구의 문물을 이태원에서 전파했다. 여기에 한국과 가까운 일본을 통해 현지화된 서구의 음악이 함께 소개됐다. 강남은 이를 가장 빠르게 소비하하고 전파하는 장소였다. 강남 월드팝스에서 활동한 디제이 김창환이 히트 작곡가가 된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힙합을 중심으로 한 흑인 음악이 소비된 곳은 이태원의 작은 클럽 문나이트다. 미군과 흑인만 다니던 이 클럽이 80년대 중반 이후 내국인에게 문을 열면서 내놓으라 하는 춤꾼들의 무대가 된다. 대부분의 90년대 초 댄스 가수들이 이곳을 통해 기획사에 발탁되거나 인맥을 쌓아 데뷔했다. 90년대의 댄스 음악은 당시 두 군데 클럽을 모두 다니던 디제이와 댄서처럼 두 음악을 종횡하며 만들어졌다. 동경과 흉내 사이에는 오해와 한계라는 단계가 있다. 90년대 힙합 패션을 흉내 내기 위해 통이 큰 바지의 아랫단을 고무줄로 묶거나 압정을 꽂았던 게 유행이 된 것처럼. 대중음악의 역사는 오해와 한계를 통해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고 오리지널리티를 확보하며 발전한다. 90년대 댄스 가요 역시 오해와 한계를 통해 전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댄스 음악을 창조했다. 당시 춤 꾼들이 몰려 들었던 이태원의 작은 클럽 문나이트. 이 음악이 처음 전파되는 곳이 여의도 방송국이었던 건 이 음악의 가장 큰 한계였다. 음악으로서의 댄스보다는 보이는 댄스가 우선 됐다. 소방차, 박남정부터 시작된 댄서를 가수로 만들던 전통은 90년대에도 계속됐다. 춤과 외모라는 능력치가 우선되었기 때문에 가수의 나머지 능력치가 본래 가진 장르의 특성과 일치하지 않는 결과물이 만들어다. 이는 당시 댄스 가요의 특징 중 하나다. 그루브를 중요하게 여기는 장르임에도 그루브가 없는 노래를 부르는 뉴 잭 스윙이 탄생하고 기계적인 보컬이 특징인 유로 댄스 음악에 록 보컬이 쓰였다. 스티비 원더가 우상인 흑인 음악 베이스의 보컬 김건모가 전형적인 유로 댄스 스타일의 곡에 노래한 ‘잘못된 만남’이 한국에서 가장 히트 한 댄스 가요가 된 건 상징적인 일이다. 보이는 게 중요하다 보니 패션과 이를 구성하는 콘셉트가 중요했다. 90년대 댄스 가요에서 장르는 대부분 목적보다 소재로 쓰였다. 음반은 질리지 않고 들을 수 있도록 백화점식 구성을 띄어야 했고 한 가수와 작곡가가 여러 스타일을 동시에 소화했다. 레게 팝이 유행하자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이태원에서 구한 댄스홀 판에 있는 음악을 참조한 곡을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10대를 대상으로 한 음악이었기에 유치한 가사와 귀여운 멜로디가 늘어났다. 나중엔 이점이 극대화되어 H.O.T.의 ‘캔디’나 UP의 ‘뿌요뿌요’ 같은 곡이 탄생하기도 했다. 유로 댄스 트랙에 고음의 샤우팅 창법을 구사하는 소찬휘(본명:김경희)는 본래 여성 메탈 그룹 이브의 기타리스트였다. 당시 상황은 흥미로웠다. 서구의 음악이 한꺼번에 들어왔고 비교적 현지의 것을 잘 구현한 것부터 지나치게 현지화가 된 것까지 단기간 내에 다양한 스타일의 댄스 가요가 등장했다. 여기에는 그만큼의 실험과 노력 그리고 표절이 존재했을 것이다. 당시 가수들의 인터뷰를 보면 음악에 관한 강한 프라이드를 읽을 수 있다. 클론의 구준엽은 자신들의 음반을 다 들으면 얼마나 멋진 음악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이수만은 스튜디오에서 한국인의 발성을 댄스 음악에 접목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구를 했는지 이야기한다. 고영욱은 룰라에 관해 대중적인 음악을 했지만 수준이 낮거나 저급한 음악을 한 팀은 아니라고 인터뷰했다. 이들은 한국에 새로운 음악과 문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소개한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만화에 등장하는 불량배의 옷에 인기있던 댄스 가요 팀의 이름을 적어 놓은 [TOON]의 한 장면. 하지만 당시 사회는 90년대 댄스 가요의 음악적 성취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혐오했다. 위에서 언급했듯 기성세대는 서구의 소비문화를 바탕으로 한 10대 문화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신세대, X세대 같은 표현을 통해 그들을 타자화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규정지었다. 댄스 가요는 10대를 타락시키는 주범이었다. 랩이라는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단정하지 않은 통 큰 바지를 입고 머리를 염색하는 10대 아이들은 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박무직과 같은 만화가는 자신의 만화에서 불량한 학생들에게 헐렁한 힙합 옷을 입혀 놓고 그 위에 당시 인기 있던 댄스 가수의 이름을 적어 놓기도 했다. KBS는 ‘하여가’ 시절 레게 머리라 불리는 브레이즈 머리를 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방송 출연을 금지했고 신문은 30대의 문화가 대중문화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기사를 썼다. 비평계 역시 이들을 무시했다. 2007년 선정된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90년대 댄스 가요 음반은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밖에 없다. 나머지는 거의 대부분 록, 포크 음반이다. 비평에서 댄스 가요는 실력도, 음악성도 없고 립싱크와 표절을 일삼는 상업적인 음악이었다. 서구 비평계에서 가져온 백인, 록 중심의 시선과 가창과 연주력 그리고 진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가 여기에 한몫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90년대 말에는 방송 프로그램 위에 ‘립싱크’ 마크가 뜨기도 했다. 방송국은 제대로 된 모니터 시스템도 마련하지 않고 댄스 가수들에게 라이브를 시켰고 헐떡이며 퍼포먼스를 하는 그들을 보며 대중음악의 질을 높일 수 있게 됐다며 흐뭇해 했다. 댄스 가요가 현지화되며 드러난 멜로디와 창법의 ‘뽕끼’ 역시 댄스 음악을 평가하는 데 걸림돌이 됐다. 90년대 후반 홍대를 중심으로 인디 록 문화가 생겨나자 비평은 이들이 한국 대중 음악의 대안이라며 담론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빨간색: 주요 사건 | 파란색: 90년대 댄스 가요 대표곡 | 초록색: 90년대 댄스 가요에 영향을 준 팝 음악 자, 이제 제목에서 던진 질문에 관한 답을 해야 할 차례다. 90년대 댄스 가요는 열광할만한 음악일까? 그 전에 좀 더 가까운 곳으로 와보자. 지금의 케이팝은 열광할만한 음악일까? 이에 관한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적어도 케이팝은 90년대 댄스 가요보다 제대로 평가를 받는 듯하다. 정부에서는 한류의 주역으로 치켜세우고 아이돌 팬뿐 아니라 평론가까지 케이팝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아이돌 음악을 폄하하는 것은 음악적 무지함을 고백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들려 온다. 왜 케이팝은 전보다 제대로 된 평을 받을까? 단순히 그때보다 음악의 질이 높아졌기 때문일까? 한류의 중심으로 막대한 외화를 벌고 외국에서의 평 또한 긍정적이기 때문인 건 아닐까? 90년대 댄스 가요가 기성세대의 새로운 10대 문화에 관한 두려움과 미디 음악에 관한 몰이해 그리고 백인 록 중심의 비평 문화 때문에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던 것처럼 지금 케이팝 역시 서구 시선의 의식과 성과주의에 묻혀 과장되게 평가되고 있는 건 아닐까? 여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두 음악에 대한 담백한 평가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무한도전을 보고 이정현의 “와”를 리메이크 한 유튜브 가수 제이슨 레이. 90년대 댄스 가요를 들으며 추억 보정에 빠져 그때는 좋았는데 지금 음악은 깊이가 없다고 얘기하는 건 멍청한 꼰대라 놀림 받기 좋은 일이다. 이때를 한국 음악의 흑역사로 치부하는 건 한국 대중 음악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다. 90년대 댄스 가요는 지금 케이팝을 이해 할 때 꼭 짚고 가야 하는 음악이다. 서구에서 케이팝의 특징으로 꼽는 콘셉트와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짜여진 복잡한 구성 그리고 이제는 시스템으로 정착된 아이돌 비즈니스는 모두 90년대 댄스 가요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다. ‘토토가’에 나온 S.E.S.의 곡이 차트에 오를 때 함께 있던 에이핑크의 ‘LUV’는 노골적으로 S.E.S.를 레퍼런스로 삼고 있으며 방탄소년단은 ‘전사의 후예’와 트랩을 섞은 듯한 음악으로 데뷔했다. 인피니트와 카라의 곡을 만든 스윗튠의 곡은 당시 유행한 유로비트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용감한 형제의 최근 곡에선 90년대 말에 등장한 리듬이 덜 강조된 미드 템포 R&B의 뉘앙스가 느껴진다. 관심을 기울이면 보이기 마련이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그땐 그랬지’ 이상의 더 많은 이야기를 즐겁게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토토가’에 열광한 또는 여기에 말을 얹은 많은 이가 이를 예기로 단순한 유행가가 아닌 시대를 풍미했던 음악 양식로 세심하게 90년대 댄스 가요에 관심을 갖길 바란다. 이 때의 음악이 단순한 ‘추억팔이’의 도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음악으로 우리 곁에 계속 존재할 수 있도록. | 하박국(레이블 [영기획] 대표) http://www.younggiftedwack.com note. 90년대 댄스 가요 작곡가가 누군지 부클릿을 살피며 듣고 하이텔 오디오 게시판에 리뷰를 썼다. 그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재는 프로듀서 중심의 일렉트로닉 뮤직 레이블 영기획(YOUNG,GIFTED&WACK)을 운영하며 [웨이브]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