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이름 모를 외국 영화를 보면서 ‘포스터로 빈틈없이 도배된 방’에 대한 로망을 가진 적이 있다. 그것은 넓디넓은 방을 다 채울 만큼 많은 밴드의 포스터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이기도 했고, 포스터로 가득한 방에서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대면서 부모님한테 개길 수 있는 자유에 대한 부러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자잘한 이유들을 모두 제하더라도, 포스터가 이뻤다. 형형색색의 포스터는 포스터가 소개하는 뮤지션의 음악과는 별개로 내 눈을 사로잡았다. 저 포스터를 내 방에 붙여놓으면 내 방도 조금 더 이뻐지지 않을까, 하는 동경. 그렇지만 짧은 인생 동안 5번이 넘는 이사를 하면서 벽에 붙일 예쁜 포스터는 고사하고 붙일 벽마저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됐고, ‘포스터로 도배된 방’의 로망은 로망으로만 남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런 외부적 요인 외에도, 포스터를 벽에 붙이는 게 생각보다 멋있는 행위가 아니라는 나름의 깨달음도 로망을 꺼뜨리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로망이 가라앉은 뒤에도 좋은 포스터는 계속해서 내 눈을 사로잡았다. 바다 건너 외국 밴드의 포스터가 아닌, 지금 이곳의 밴드들의 포스터가 말이다. 미니멀하고 깔끔한 디자인의 포스터부터 그림판으로 10분만에 완성한 듯한 미감의 포스터까지 다양한 매력의 포스터들이 리스너들을 유혹했다. 하지만 그 포스터들 중 대부분은 인터넷 공간의 데이터 쓰레기가 되어 페이스북 뉴스피드 저 밑으로, 트위터 타임라인 저 너머로 사라져갔다. 그것이 공연이 끝난 후의 포스터의 숙명이라고 해도, 그런 식으로 떠나보내긴 역시 아쉬웠다. 그래서 새롭게 기획했다. 기억에 남는, 디자인이 깔끔한, 멍청할 정도로 웃기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분명 누군가는 자신의 방에 장식하고 싶어할 만한 포스터를 골라서 아카이빙을 시작하기로 했다. 물론 실제로 포스터를 방에 붙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포스터가 실물로서 제작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당신의 부모님이 벽을 더럽히는 걸 무진장 싫어할 수도 있고, 포스터를 붙일 벽이 존재하지 않는 환경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설사 포스터를 붙일 사정이 안 된다 하더라도 당신의 마음 속 자그마한 벽이라면, 그리고 당신의 뇌리 한 구석이라면, 이 포스터들도 마음 놓고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 정구원 lacelet@gmail.com New Ears Wave 사운드마인드, 15. 1. 10 디자이너: 조한나 (영기획) ‘신년 공연’과 ‘새로운 소리’라는 두 가지 의미가 중첩된 공연 이름과 깔끔한 파형 디자인, 아름다운 그라데이션이 결합한 좋은 포스터. “New Ears Wave”라는 공연 이름은 디자이너 조한나가 직접 제시했다고 한다. Mac DeMarco Live In Seoul 레진코믹스 브이홀, 15. 1. 18 디자이너: 김호 뭉게뭉게한 담배연기를 가지고 디자인한 맥 드마르코의 이름을 보고 맥 본인도 꽤나 좋아했을 듯싶다. 일러스트레이터 김호의 작업기도 읽어 보시길. 맛좀볼래 Party 커먼인블루, 15. 1. 23 디자이너: ??? 포스터 속의 사람들은 과연 제대로 된 요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 애초에 사람들 중에 제대로 된 사람이 있는가? 그래도 다들 귀여우니까 괜찮아. Target in A Mist 사운드마인드, 15. 1. 24 디자이너: 박인 (소리박물관) 안개 속 표적. 단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포스터를 만들었다. 여담이지만 타겟 마크는 역시 영국 공군 마크가 제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