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카시네마’는 단순히 영화적 소재로서 음악을 선택했거나 뮤지컬 영화처럼 그저 음악의 비중이 큰 영화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무지카시네마’는 음악에 대한 영화이며, 나아가 음악 그 자체인 영화다. 요컨대 다층적 ‘음악 텍스트’로서의 영화. | 최유준 좌절의 F코드 내가 생각하는 잘 만든 음악 영화의 기준은 단순하다. 음악이 적재적소에 잘 배치되어 있고, 음악인 역할을 하는 배우들이 관객의 청각적 감흥을 깨지 않을 만큼 음악적 장면을 자연스럽게 소화할 수(가능하다면 직접 연주를 해낼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주로 청각을 통해 이루어지는 음악적 소통의 여러 의미를 영화적 장치(시각이 좀 더 중심을 이루는)를 통해 번역할 수 있어야 한다. 음악영화에 대한 이러한 평가 기준에 비추어볼 때 영화 [쎄시봉]은 비교적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 듯하다. [쎄시봉]이 1970년대 서울 무교동 거리와 통기타 청년문화의 한 단면을 사실적으로 재현해냈는가 하는 것은 사실상 둘째 문제다. 오히려 이 영화의 장점은 영화 속 실명으로 등장하는 실존 인물들 틈 속에 오근태(정우/김윤석 분)라는 가공의 인물을 투입한 데서 비롯된다. 관객의 감정이입을 위해 만들어낸 캐릭터인 오근태는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음악 천재 모차르트를 오히려 조역으로 밀어낸 채) 살리에리라는 질투의 화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거두었던 효과와 비슷한 것을 발휘한다. “모든 평범한 자들의 죄를 사하노라!” 하고 외쳤던 살리에리의 광기 어린 목소리와 중첩되는 오근태의 좌절은 관객들의 감정과 결합한 회한의 눈물과 함께 극복된다. 영화 [쎄시봉] 포스터따라서 영화 속 가상의 인물 오근태는 ‘트윈 폴리오’의 전신인 ‘트리오 쎄시봉’의 잊힌 실존 멤버 이익균의 분신이 아니다. 그가 표상하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아니 현재 살고 있는 평범한 대중이다. 그는 기타를 배우며 F코드 때문에 좌절하고(F코드 때문에 전사한 기타리스트 지망생들의 숫자가 수백만은 되지 않을까?), 섣부른 기타 실력으로 젠체해 보려 하다가도 프로들의 세계에는 범접하기 어려워 늘 주눅이 들곤 하는, 무엇보다 다른 사람이 지은 노래로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평범한 대중매체 시대의 개인인 것이다. 반대로 영화 속 해설자이기도 한 이장희(진구/장현석 분)는 윤형주나 송창식과 같은 개별 음악가를 넘어서 대중음악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장희는 천재들의 음악적 향연의 무대로 오근태(평범한 ‘우리’)를 불러내고 사랑의 감정을 나누게 하며, 그에게 기타를 가르쳐주기도 하고 그의 사랑 고백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노래를 제공한다. 심지어 대중음악의 본고장인 미국과 한국을 공간적으로 이어주기까지 하는데, 영화 속 이장희의 이러한 모습이 마치 세속적 욕망을 초월한 도인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영화 [쎄시봉]의 한 장면현재와의 접속 영화 [쎄시봉]은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등 실존 인물들의 캐릭터와 그들의 음악 세계를 맛깔스럽고 따뜻한 시선으로 재현해 보이는 동시에 그들의 음악과 동행하고 교감하며 사랑과 꿈을 나누던 대중들의 음악적 소통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적잖은 미덕을 발휘한다. 오근태와 민자영(한효주 분)이 나누는 말 못할 사랑의 감정은 ‘카세트 녹음기’라는 상징적 매체를 통해 소통(혹은 불통)된다. 대중매체 시대의 ‘우리’는 이러한 녹음 매체를 통해 음악을 들으며 함께 울고 웃어 왔다. 요컨대 영화 속 오근태의 노랫 소리는 윤형주나 송창식과 같은 전문 가수들의 노래를 녹음 매체로 들으며 따라 부르던 우리 자신의 목소리인 것이다.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개연성의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좀 더 가까운 과거(1990년대의 어느 시점)와 현재를 부각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영화는 세파에 시달리며 속되게 변해버린 오근태의 모습을 통해 노골적으로 관객들 자신을 비춘다. 오근태가 미국에서 이장희를 만났다가 헤어지면서 차갑게 던지는 말, “나는 니들 친구 아니야!”는 기실 대중음악을 듣던 젊은 시절의 꿈과 희망에 대한 배반의 언사인 것이다. 영화 [쎄시봉]의 한 장면. 청춘을 지나 중년의 옷을 입고 만난 오근태와 민자영.청춘은 돌아볼 때만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현재진행형으로서의 청춘은 언제나 앞이 보이지 않는 불안과 고통,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굴욕과 좌절이 있다. 우리는 모두 사랑스럽고도 겁 많은 청춘의 시절을 (사랑의 힘으로?) 지나오는 것이다. 더구나 한없이 부조리한 사회는 나약한 청춘들을 더욱 힘겹게 만든다. ‘쎄시봉’의 시대 역시 그랬고, 영화 속 오근태의 비겁은 바로 그런 부조리한 사회가 강제한 것이다. 이런 오근태의 모습에 이 시대 젊은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는 점은 이 영화의 상업적 노림수인 동시에 이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씁쓸한 감정의 정체이기도 하다. 스쳐 지나가는 복고 유행일까? 영화 [쎄시봉]을 보면서 ‘지긋지긋한 복고 유행이 또 한 번 지나가는군’ 하고 냉소를 던지고 말았다면 대중문화와 음악문화의 현재 흐름을 반쪽만 보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리얼리티 음악경연 프로그램이 TV 음악 프로그램의 대세를 장악하기 시작하던 2010년을 전후해서 ‘과거의 음악’을 향수하고 듣고 리메이크하는 일은 단순한 ‘복고 문화’가 아니라 ‘주류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제시되는 “우리도 20대였던 시절이 있었다”라는 대사는 “20대 시절”이 오랜 과거가 되어버린 나이 든 관객들의 울컥한 향수를 자극하는 것만은 아니다. TV 음악경연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 무대에서 객석에 특별히 모신 선배 가수의 ‘흘러간 노래’를 편곡하여 부르는 후배 가수들처럼, 영화를 보는 젊은 관객들도 이 대사를 “우리도 20대다”로 리메이크할 것이다. 한국의 ‘현재’는 그렇게 ‘과거’의 권위로부터 평가받고, ‘과거’의 전설과 신화를 부추겨 이용하고 있다. 심수봉부터 현진영까지. TV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은 박제한 과거를 이용한다. 포스트 음반 시대의 대중음악은 예전의 신화와 전설을 잃어가고 있다. 편재하는 ‘아이돌’은 ‘우상의 상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현재의 음악과 대중문화가 과거의 소재에 눈을 돌리는 이유다. 하지만, 영화 [쎄시봉]이 ‘과거’를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와 접속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 ‘과거’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상 서양의 스탠다드 팝송을 번안해서 부르던 그 시절 ‘쎄시봉’의 음악은 음악사적 맥락에서 전설일 것도 신화일 것도 없다. 그 과거는 오직 현재 시점에서 아름답게 돌아볼 수 있을 뿐이다. 영화 [쎄시봉]은 “사랑하는 사람들은 늙지 않는다”는 메시지로 끝을 맺고 있다. 바라건대 이 메시지가 최근의 심상찮은 문화적 복고(復古)나 조로(早老)의 징후를 염려하는 시선에 대한 낭만적 해답이었으면 한다. | 최유준 https://www.facebook.com/yujun.choi.5 note. 최유준.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동아대학교 음악문화학과에서 ‘음악학-문화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남대학교 감성인문학연구단 HK교수로 재직하며 여러 매체와 학술지에 기고 중이다. 홈페이지는 [최유준의 웹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