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카시네마’는 단순히 영화적 소재로서 음악을 선택했거나 뮤지컬 영화처럼 그저 음악의 비중이 큰 영화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무지카시네마’는 음악에 대한 영화이며, 나아가 음악 그 자체인 영화다. 이 칼럼은 그러한 다층적 ‘음악 텍스트’로서의 영화를 다룬다. 초절기교의 탄생 스페인의 클래식 기타리스트 페페 로메로와 록밴드 ‘미스터빅’의 기타리스트 폴 길버트가 비슷한 시기에 콘서트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이들이 각각 한국의 대중매체에서 했던 인터뷰가 기억에 남는다. 똑같은 질문에 상반되는 것으로 보이는 답변을 제시했기 때문인데, 그 질문은 “어떻게 하면 기타를 그렇게 잘 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기억에 남은 대로 적자면, 클래식의 로메로는 이런 식으로 답했다. “여기 컵에 물이 담겨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손을 뻗어 컵을 잡고 어떻게 입까지 옮겨서 물을 마시는지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중요한 건 갈증이다. 갈증이 있으면 물을 마실 수 있다.” 반면, 록기타리스트 폴 길버트는 같은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아침 먹고 내내 기타를 치고, 점심 먹고, 또 기타 치고, 저녁 먹고 다시 기타, 그리고 자고 나서 또…. 그러면 된다.” 로메로와 길버트 중 누구의 대답이 옳을까? 그런데 두 가지 대답은 어느 층위에서 서로 만난다. 로메로가 말한 ‘갈증’이 없다면 길버트가 말한 ‘무한 반복 연습’이 있을 수 없다. 이때의 갈증과 연습은 모두 평범한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비범한 ‘갈증’이 비범한 ‘연습’을 통해 해소될 때 초절기교가 탄생한다. 로메로와 길버트의 대답은 그래서 어느 쪽도 질문에 대한 뾰족한 대답이 아니다. 그 ‘비범한 연습’을 이끌어내는 ‘비범한 갈증’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기 때문이다. 초절기교의 당사자들이 이 정도 궁색한 답변을 제시할 뿐이라면, 이제 질문을 멈추고 더 이상의 궁금증은 예술의 신비로 남겨두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하지만, ‘초절기교 형성의 과학’을 신봉하는 이들은 거기에서 멈출 수 없는 모양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대답을 제시하고 그것을 스스로 ‘합리적’이라 믿는다. “잠재적 천재들 사이의 무한경쟁이 문제의 그 ‘갈증’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 무한경쟁의 과정이야말로 ‘무한연습’의 합리적 방도다.” 뉴욕 명문 재즈학교의 플레처 교수는 학생들의 동기 유발을 명분으로 모욕주기와 신체적 린치까지 불사한다. 정말로 무한경쟁(그리고 탈락에 대한 불안을 도구 삼은 ‘방법적 모욕주기’)이 초절기교 예술가 탄생의 한 가지 방법일 수 있을까? 영화 [위플래쉬] 속 악명 높은 음악 교사 플레처는 그렇게 믿고 있는 듯하다. 그의 믿음은 확고하다 못해 광적이어서 주인공 앤드류에게 가하는 물리적·정신적 고문이나 학대를 스스로 정당화할 정도에 이른다. 앤드류 역시 암묵적으로 그 믿음에 동화되어 그러한 학대를 감내하며, 점차 플레처와 같은 광기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플레처가 ‘갈증’ 유발을 위해 학생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면, 앤드류는 경쟁에서의 승리와 인정을 위해 동료를 배신하고 ‘무한연습’으로 자기 자신의 육체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이 폭력의 향연은 마침내 초절기교를 결과할 수 있을까? 플레처적인 것과 앤드류적인 것 광기어린 인정욕구에 휩싸인 앤드류는 모처럼 얻은 연주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교통사고를 당했음에도 연주에 나선다. 그 광기와 폭력의 끝, 앤드류가 교통사고를 무릅쓰고 자기증명을 위해 피를 흘리며 무대에 올라 드럼 스틱을 잡다가 연주를 망치는 장면은 플레처와 앤드류 양자 모두의 파산선고를 알린다. 영화가 그렇게 끝이 났다면 일종의 교훈극이나 음악적 심리 스릴러물로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반전이 남아 있었다. 감독은 영악하게도 마지막 10분의 연주 장면을 교묘하게 연출함으로써, 이 영화의 메시지가 여러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앤드류가 멋들어지는 솔로 연주를 해내는 이 마지막 장면을 플레처의 교육적 전략이 역설적으로 거둔 성공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 해석의 방향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그 해석이 유발하는 감정조차도 크게 양분될 수 있다. 그러한 ‘성공’을 지켜보는 누군가는 유쾌할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런 비윤리적 방식으로 ‘성공’을 이끌어내는 모습에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감독이 일차적으로 노린 텍스트의 다의성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오히려 플레처의 교육전략이 실패로 끝났다는 해석이다. 영화의 처음 앤드류가 아직 인정받지 못한 학생이었을 때, 그는 혼자 사는 아버지를 배려하고 챙기면서 팝콘 나눠 먹으며 영화를 함께 보던 정 많은 대학생이었고,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니콜에게 어수룩하게 말을 걸어 데이트 신청하던 수줍음 많은 친구였다. 하지만, 그가 플레처의 ‘무한경쟁 초절기교 달성 프로젝트’에 말려들기 시작하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가족들과의 식사자리에서는 사촌들에게 모욕을 주고 자기자랑을 서슴지 않으며, 여자 친구 니콜에게는 ‘더 나은 나’가 되는 일에 데이트 시간 따위는 방해가 될 뿐이라며 감정의 동요도 없이 이별을 선언한다. 교통사고가 있던 날의 연주 해프닝이 퇴학으로 이어지고 드럼 연주까지 포기하게 된 이후에야, 앤드류는 자신의 옛 모습을 되찾기 시작한다. 아버지와 다시 영화를 보게 되었고, 니콜에게 다른 남자친구가 생긴 것을 알고 상실감을 느낀다. 플레처의 연주 제의에 응해서 다시 무대에 서게 됐을 때, 그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그리고 니콜에게 자신의 연주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 마지막 10분의 연주 장면 도입부에서 앤드류는 플레처의 교활한 복수극 희생자가 되어 무대 밖으로 쫓겨 나간다. 그때, 걱정스런 눈빛으로 관객석에서 달려온 아버지를 마주하면서 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미적 충동의 계기를 얻는다. 그는 뒤돌아 다시 무대를 향하면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더 이상 플레처에게 조종당하지 않겠다. 나는 플레처 당신에게 인정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내 가족에게 연주를 들려주기 위해 이 무대에 섰을 뿐이다.’ 무대로 돌아간 앤드류는 스스로 곡목을 바꾸어 밴드 연주를 개시하고, 당황한 플레처에게 “신호를 줄 테니 기다리라”고 말한다. 음악적 권력의 통쾌한 전도가 일어나는 것이다. 길게 이어지는 앤드류의 연주가 과연 초절기교의 연주인지는 여기서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기술이 예술로 바뀌는 순간은 기교가 완성되는 순간이 아니라 그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의 맥락에서 볼 때, 앤드류는 마지막 연주 후에도 플레처를 스승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스스로 그와 같은 유형의 스승이 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가 긴 솔로 연주를 한 것도 그에게 ‘초절기교’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행사하는 미적 자율성과 정당한 미적 소통을 위한 것일 뿐이었다. ‘앤드류적인 것’과 ‘플레처적인 것’은 양립가능하지 않다. 그러니 주연배우의 실제연주로 촬영되고 녹음된 마지막 솔로 연주 장면에 대해서 전설적 재즈 드러머 버디 리치의 연주와 비교하여 연주력을 논하는 일부 재즈 애호가들의 태도는 그 자체로 ‘플레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연주 장면은 영화 마지막에서 ‘플레처적인 것’과 대립되는 ‘앤드류적인 것’이라 할 만한 것을 제시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두 사람의 마지막 미소 교환이 상징하듯 양자 사이에 찰나의 미학적 교감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미적 자율성과 인간적 소통을 상징하는 ‘앤드류적인 것’과 무자비한 무한경쟁 원리의 표상인 ‘플레처적인 것’은 더 이상 양립가능하지 않다. 무한경쟁을 넘어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경쟁이 어느 정도 가치 있는 것을 산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축제적 성격의 예술경연은 고대로부터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어느 경우라도 탈락자들을 나락에 떨어뜨리는 무한경쟁만이 최선의 예술적 가치를 산출할 수 있다는 식의 발상을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자본주의 시대가 만들어낸 신화적 믿음일 뿐이다. 자본주의에서는 희소성이 높을수록 더 큰 교환가치가 부여된다. 무한경쟁은 숨어 있는 가치를 골라내는 과정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최소 숫자를 남긴 뒤 거기에 독점적 가치를 부여하는 사실상 결과론적 과정이다. 예술에 무한경쟁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은 그래서 기만적이다. 초절기교와 관련된 밝혀지지 않은 예술적 원리를 예술적 가치 그 자체로 전환한 뒤, 그조차도 슬쩍 자본주의적 희소성의 원리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 기만적 과정은 클래식에서 먼저 이루어졌고(20세기초부터 생겨난 수많은 콩쿠르들은 음반산업과 기획사의 스타 만들기와 그들의 몸값 올리기에 적절히 부응했다). 21세기 들어 이제 대중음악과, 특히 제도화된 재즈가 바톤을 이어받는 듯하다(영화 [위플래쉬]에서 그려지는 음악적 풍경은 물론 상당 부분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의 추세를 비춘다). 재즈(특히 그 양식적 근원인 블루스)가 원래 희소성이 아니라 민속음악에 기반한 편재성에서 미학적 정당화의 근거를 찾았고 기술적 정확성보다는 즉흥성과 자유를 더욱 중시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재즈의 제도화 과정에서 클래식의 전철을 답습하는 모습은 허탈감을 안겨준다.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빅밴드 재즈가 즉흥연주를 최소화하고 총보와 지휘자의 역할을 중시하는, 1930년대 대공황 시기(즉흥연주가 초래할 ‘리스크’를 최소화할 필요가 있었던 시기)에 이미 클래식화한 재즈의 한 가지 장르일 뿐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그렇다. 앤드류는 플레처 교수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기학대적인 연습을 거듭한다. [위플래쉬]가 음악영화에 머물지 않고 현실 속 우리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는 이유가 있다. 각자의 직업에서 발휘하는 능력과 기술이 한갓 기술에 머물지 않고 ‘예술적’인 것이 되기를 요구하는 세상에서 우리 자신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갖고 있는 기술은 언제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갈증’과 ‘무한반복연습’은 여전히 중요한 실마리일 수 있지만, ‘초절기교’에 대한 자본주의적 판타지에 기만당해서는 곤란하다. ‘앤드류적인 것’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플레처적인 것’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 최유준 Leave a Reply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CommentName* Email* Website 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