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비나이 | A Hermitage (은서隱棲) | The Tell-Tale Heart/Bella Union , 2016 음악적 경험의 순간들 2010년의 데뷔 EP [잠비나이 EP]부터 2012년의 정규 1집 [차연]을 지나 올해의 정규 2집 [은서]까지, 잠비나이의 음악은 하나의 의미로 확정되는 걸 거부하며 온몸으로 나아간다. 포스트 록, 국악 연주, 익스트림 메탈, 노이즈 록, 아방가르드 재즈, 스크리모, 앰비언트, 랩, 수많은 음악들을 뿌리 삼아 잠비나이는 그 이름처럼 어떠한 의미도 담기지 않은 음악, 여태까지 없었던 음악을 현재진행형으로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은서]에 담긴 8곡의 노래들도 누구나 깜짝 놀라게 할 순간들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1장의 EP와 2장의 정규 음반의 형태로 나온 경험 속에서 잠비나이가 어떻게 변했는지는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잠비나이 EP]가 앰비언트한 연주와 전자음 노이즈를 10분을 전후로 어지럽게 들려주었다면, [차연]은 짧고 강렬한 메탈의 요소와 어떠한 기승전결이 깔린 포스트 록의 어법을 국악기로 전개하며 이 모든 것이 결합된 그들만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악기와 장르의 활용부터 곡들의 구조까지 [차연] 속의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독특한 동시에 밴드의 색이 가장 살아있는 “Grace Kelly”나 “Connection” 같은 명곡들이 탄생했고, 그와 함께 [차연]은 멋진 음반이 되었다. 국내외의 성과와 함께 드디어 4년 만에 나온 정규 2집 [은서]는 [차연]과 여러 지점을 달리 하고, [은서]의 주된 특징이 된다. 첫째는 [차연]과 달리 [은서]는 어떠한 유기적이고 전체적인 구성보다는 8곡의 곡들 안에 개별적인 이야기들을 담았다는 점이다. [차연]은 일종의 컨셉 음반처럼 긴 흐름을 따라갈 수 있게 구성되었다. 개별 곡의 경우에도 “바라밀다”와 “텅 빈 눈동자”가 두 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한 쪽에서는 앰비언트한 연주를 들려주고 다른 쪽에서는 강렬한 메탈 성향 연주를 들려주는 식이거나, “Connection”처럼 10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어지는 곡들이 담겨있다. 이에 비해 [은서]의 각 곡들은 [차연]보다 훨씬 더 독립적으로 음반 안에 존재하고, 그에 맞춰 곡 길이도 3분에서 7분 사이만을 오가며 이전처럼 10분을 넘거나 두 파트로 나뉘는 대곡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은서]는 하나의 기나긴 흐름을 차근차근 들려주기보다는 짧은 순간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들려준다. 둘째로는 [은서]가 [차연]을 통해 나름의 틀을 갖춘 잠비나이의 음악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앰비언트하고 긴 곡들이 담긴 [잠비나이 EP]와 강렬하고 짧은 곡들이 많은 [차연] 사이의 간격은 은근히 넓다. 밴드 특유의 분위기와 음악적 결합이 짙게 깔린 연주 또한 [차연]에서부터 나타난다. 그에 비해 [차연]과 [은서] 사이의 거리는 그 전보다 넓지는 않다. 그렇기에 [은서]는 더욱 긴 도약을 하기보다는 [차연]을 통해 나름 만들어진 익숙한 스타일에서 다양한 변주를 통해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낸다. 그렇기 때문에 [은서] 속의 각 곡들은 잠비나이라는 토대 위에서 저마다의 특성을 가진다할 수 있을 것이다. 장편소설을 읽는 것처럼 듣는 [차연]과는 다르게 [은서]는 단편집을 읽는 것처럼 모든 순간을 하나하나씩 짚어가며 들어야 할 것이다. 빠르게 달려가면서 음반을 시작하는 “Wardrobe (벽장)”는 타악기와 현악기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는 거문고와 기타와 함께 동등하게 강렬함을 전해주는 해금의 리프, 그리고 49몰핀즈(49 Morphines)의 경력을 담은 이일우의 스크리밍과 함께 전개된다. 일종의 메김 굿 같이 이일우의 선창과 온갖 악기들의 후창으로 전개되는 중반을 지나 둠/슬러지 메탈의 스타일로 묵직하게 분위기로 바꾸며 노이즈와 함께 마무리되는 구조는 “소멸의 시간”과 “Grace Kelly”와도 많이 닮아있다. 적어도 음반을 여는 곡으로써는 강렬한 시작보다 좋은 곡은 없을 것이다. 특히 이전의 곡들보다 훨씬 더 큰 분노가 느껴지는 “Wardrobe”은 가장 마지막 곡인 “They Keep Silence (그들은 말이 없다)” 속의 분노와 이어지는 맥락 또한 있을 것이고, 곧 [은서]의 전체적인 느낌 또한 구성한다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Echo Of Creation”는 그 다음 곡인 “For Everything That You Lost (그대가 잃어버린 그 모든 것들을 위하여)”의 서정적임과 “Wardrobe”에서의 강렬한 분노 사이에 놓인 곡이다. 한 곡 안에서 격렬함과 차분함을 무리 없이 오가는 구성은 잠비나이의 주된 장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4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강하게 내리치는 부분과 글로켄슈필이 들어가는 서정적인 부분의 분위기를 능숙하게 들려주는 동시에 두 부분을 각종 노이즈로 엮으면서 “Echo Of Creation”은 자연스럽게 “For Everything That You Lost”로 넘어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음반의 첫 번째 빛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이 곡은 [잠비나이 EP]의 “나무의 대화 2” 같은 곡들이 [차연]의 방식으로 편곡된 느낌을 준다. [차연]을 서정적으로 맺은 “Connection”과도 비슷한 맥락에 닿아있을 것이다. 중독성 있게 반복되는 기타와 피아노 멜로디와 함께 다양한 악기들은 점점 분위기를 끌어올리며 그 노이즈를 천천히 확장시킨다. 그 거대한 소리의 장은 “Connection”보다도 훨씬 더 깊게 느껴지고, 여태까지 잠비나이가 만든 곡 중에서 가장 주술적이고 몽환적인 곡이 된다. 그 특유의 서정감은 진지하게 확대된다. 각자의 악기들이 그 조심스럽게 고조되는 구성과 함께 저마다의 역할을 해낸다. 거문고와 기타가 가장 밑에서 기조를 잡아주면 해금과 피아노가 쌓이는 노이즈 위에서 이야기를 전한다. 노이즈가 절정을 향해 오른 다음 다시 가라앉으며 여운을 남기는 이 과정은 놀랄 만큼 빽빽하고 섬세하게 구성되어 그 중심의 감성을 훌륭하게 이어간다. [은서]는 여기서부터 [차연]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넓히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Abyss (무저갱)”이 그 다음에 이어지는 건 멋진 배치다. [차연]의 강렬한 곡과 서정적인 곡을 번갈아 배치하는 방식은 [은서]에서도 이어지는데, 특히 “Abyss”는 놀랍게도 이그니토의 랩을 담았다. 랩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잠비나이는 또 한 번의 큰 실험을 한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무리수일 수도 있겠지만, 두 음악인의 조화는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그니토는 특유의 날카롭고 낮은 목소리에 담긴 한글/한문 위주의 랩과 함께 [Demolish]나 [Beholder & Xenrom]의 하드코어함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낸다. 잠비나이도 마찬가지로 단지 랩 밑의 비트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랩과 랩 사이의 부분을 이그니토의 랩을 대신하는 것처럼 강한 노이즈로 채워준다. “Abyss”가 탁월한 이유도 이 지점에 있다. 이그니토와의 협연은 단지 다른 하나에 또 다른 하나를 얹는 방식이 아니라 그 세계들을 유기적으로 합쳐 또 다른 세계를 만드는 방식이 된다. 실험적인 선택이지만 훌륭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은서]가 [차연]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를 품고 있다는 발전의 증거이기도 하다. [은서]는 이렇게 전반부에서 [차연]에서의 강렬한 느낌과 서정적인 느낌을 각자 다른 방식으로 합치고 배치한 다음 전혀 다른 시도인 “Abyss”를 지나 후반부로 넘어간다. “Abyss”와 함께 [은서]의 정중앙에서 잠비나이의 발전과 실험을 상징하는 또 다른 곡인 “Deus Benedicat Tibi (부디 평안한 여행이 되시길)”이 시작된다. 왕과 군대의 행진에서 쓰인 대취타의 태평소 연주를 맨 앞에 놓으며 “Deus Benedicat Tibi”는 파격적인 긴장감을 이끌고, 이어 모든 악기들이 함께 들어오며 긴장감은 폭발하고 이어 데스 메탈이나 블랙 메탈의 방법론이 생각나는 연주로 이어진다. 음반에서 가장 ‘경험’에 가까운 곡일 것이다. 청자를 순식간에 잡아끄는 태평소 연주가 우선 그렇고, 음반에서 가장 묵직하고 거대한 노이즈 덩어리 속에 온갖 혼란과 어둠이 잔뜩 섞이는 것도 그렇다. “Abyss”와 함께 가장 깊고 어두운 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Deus Benedicat Tibi”을 통해 잠비나이는 그 근본인 국악을 더욱 더 적극적이고 성공적으로 다른 음악과 결합하고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를 가장 심화시키기까지 했다. 잠비나이와 이그니토의 유기적인 결합인 “Abyss”와 마찬가지로 “Deus Benedicat Tibi”도 잠비나이가 [차연]에서부터 이어온 국악과 메탈의 결합을 훨씬 더 유기적으로 이뤄낸 셈이다. 마지막 세 곡들도 익숙함 속에서도 유기적인 실험과 함께 더욱 나아간다. “The Mountain (억겁의 인내)”는 다시 일정한 기승전결의 구조 속에서 소리를 겹겹이 쌓아올리는 포스트 록의 어법으로 돌아온다. 이는 “나부락”이나 “감긴 눈 위로 비추는 불빛”, “바라밀다” 등의 곡처럼 잠비나이가 오랫동안 써온 방법이지만, “The Mountain”은 “바라밀다 Part 2”나 “나부락”의 후반부처럼 갑작스러운 폭발로 끝나지 않는다. 천천히 끓어오르고 끓어오르다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마침내 터지는 방식을 통해 말 그대로 ‘억겁의 인내’를 들려준다. 6년 만에 다시 녹음된 “Naburak”도 이와 비슷하다. 이런 점에서 비슷한 구조인 “The Mountain”과 “Naburak”을 나란히 배치하는 게 잠비나이의 지금과 옛날을 적절히 배치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은서]의 “Naburak”은 [잠비나이 EP]의 “나부락”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노이즈를 이 곳 저 곳에 가져다놓는다. 곡을 처음 듣는 모든 청자들에게 엄청난 반전을 선사한 최후반부도 정석 속에서 갑작스럽게 전환하지 않고 꾸준히 이어지다 다시 돌아오는 노이즈의 흐름 속에서 모든 걸 터뜨린다. 곧 [은서]의 “Naburak”은 훨씬 더 정제되고 가다듬어진 “나부락”이다. “나부락” 속에 담긴 날 것의 느낌을 좋아한다면 “Naburak”이 조금은 못마땅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The Mountan”과 “Naburak” 두 곡을 통해 잠비나이는 훨씬 더 세련되게 그들의 음악을 들려준다. 거의 국악기로만 이뤄진 구성의 처음과는 다르게 [차연]에서처럼 기타와 베이스, 드럼 등 서양 악기의 요소들이 훨씬 더 증가한 덕일 것이다. 그렇기에 “Naburak”은 [잠비나이 EP]의 날 것 같은 느낌을 [차연]의 훨씬 더 풍부해지고 세련된 소리로 다듬었고, 이는 6년간의 변화와 발전을 가장 단적으로 들려준다. 마지막 곡 “They Keep Silence”는 언급했듯 “Wardrobe”에서 느껴진 분노를 다시금 불러낸다. 세월호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다는 코멘트처럼 시뻘겋고 시꺼먼 분노를 담은 “They Keep Silence”는 “Wardrobe”와 마찬가지로 역시나 음반을 마무리하기에 가장 좋은 곡일 것이다. 여태까지 잠비나이가 들려준 모든 요소들- 국악기의 격정적인 순간들, 모든 악기들이 울려퍼지는 노이즈, 차분하게 올라가는 아르페지오, 강약을 오가는 구성, 깊고 처연한 어두움이 한꺼번에 담겨있으면서도 그 사이에서 일정한 조화를 만들어낸다. 문제적인 사건에 대한 문제적인 접근까지 더해지면서 더욱 더 환상적인 순간이 펼쳐진다. 처음에 시작했던 것처럼 온갖 혼란과 어두움을 온몸으로 받으며 잠비나이는 그렇게 강렬하게 [은서]의 문을 닫는다. [은서]의 각 곡들은 저마다의 구성과 이야기를 지닌 채 음반을 구성한다. [차연]을 통해 만들어진 토대 안에서 음악적인 경험은 더욱 더 새로워졌고, 전작들보다 훨씬 더 대담한 시도와 메시지들이 담겼다. 더욱 더 정제되었지만 치밀한 혼란이 빽빽이 자리 잡았고, 거문고 리프와 해금의 멜로디 속에서 묘한 중독성이 느껴지는 것도 여전하다. 잠비나이가 이렇게 [은서]를 통해 담은 메시지는 [차연]과 마찬가지로 음악 안에서 경험될 수 있는 것이지, 어떻게 설명을 시도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럼에도 ‘은서(隱棲)’와 ‘A Hermitage’라는 이름을 통해 감히 추측해보자면, 이번 음반에서 잠비나이는 음악을 통해 어떻게든 누군가에게 하나의 은신처를 제공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그 대상은 침묵하는 세상 때문에 무저갱에 빠져버린 사람들일 수도 있고, 수많은 이들이 잃어버린 그 모든 것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잠비나이는 꾸준히 그들만의 방식으로 어떠한 어두운 심연, 우울하거나 흉폭한 세계를 그려냈다. [차연]에서는 “Connection”이란 서정적인 마지막 곡을 통해 이러한 세계 속에서도 ‘연결’이라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 것처럼 보인다. [은서]는 오히려 더욱 더 강한 분노와 어두운 심연이 느껴지는 곡들을 들려준다. 어떻게 보면 위험한 세상과 잔인한 세계를 훨씬 더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은서]는 분노로 시작해 정중앙에 놓인 가장 어두운 지점들을 지나 다시 한 번 분노로 끝난다. 잠비나이는 그렇게 세계의 그런 어두운 지점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모든 걸 어떻게든 음악으로 표현하며 그 틈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해주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정확한 의미는 세상의 모든 작품들이 그렇듯이 제 3자로써는 제대로 깨닫거나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은서]를 통해 확실해진 점이 몇 가지 있다면, 잠비나이에겐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엄청난 경험,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을 들려줄 가능성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해외 진출, 벨라 유니온과 계약, ‘K-MUSIC’의 가치, 그런 것들도 대단하긴 대단하지만, [은서]가 정말로 대단한 이유는 오로지 그 온전한 음악적 경험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음악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수많은 레퍼런스 속에서 온전한 개성을 만드는 능력, 더욱 더 철저해진 구성과 치밀한 전개, 확실히 깨달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경험으로써 느껴지는 메시지. 그 때문에 [은서]는 여태까지 국내에서 접할 수 있는 모든 음악 중에서 ‘경험다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음악들이 담긴 음반이다. | 나원영 onezero96@naver.com Rating: 9.5/10 수록곡 1. Wardrobe (벽장) 2. Echo Of Creation 3. For Everything That You Lost (그대가 잃어버린 그 모든 것들을 위하여) 4. Abyss (무저갱) 5. Deus Benedicat Tibi (부디 평안한 여행이 되시길) 6. The Mountain (억겁의 인내) 7. Naburak 8. They Keep Silence (그들은 말이 없다) “For Everything That You Lost (그대가 잃어버린 그 모든 것들을 위하여)” Leave a Reply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CommentName* Email* Website 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