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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는 속옷도 생겼고 여자도 늘었다네

90년대 후반부터 00년대 초반까지 옐로우키친, PDS, 피와꽃, 잠을 지나왔다. 이제부터가 무언가 진정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2000년대 초반의 포스트록 밴드들 중에서 최고의 밴드가 아닐까 싶은 그 이름, 바로 우리는 속옷도 생겼고 여자도 늘었다네, 통칭 속옷밴드다. 처음에는 그 이름 때문에 무언가 키치적이고 개그스러운 밴드인 줄 알았지만, 막상 들어보니 머리를 후려친 것 같은 반전을 선사하는 밴드다. (그 이름의 유래는 염상섭의 소설 구절에 ‘속옷’과 ‘여자’를 집어넣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해외 포스트록에서 갓스피드 유! 블랙 엠퍼러(Godspeed You! Black Emperor)의 위치에 있는 밴드를 한국에서 찾는다면 그 밴드는 속옷밴드가 되지 않을까? 둘 다 새로운 유형을 지닌 포스트록의 전체적인 문법을 다지면서 밴드의 고유한 스타일도 멋지게 들려준 명반을 내놓고 사라진 다음, 10년 즘 지난 최근에 다시 컴백했기 때문이다. 갓스피드가 컴백 이후 음반을 두 장 ([Allelujah! Don’t Bend, Ascend!], [Asunder, Sweet And Other Distress])이나 낸 것에 비해 속옷밴드의 신보는 아직 없다는 게 슬프지만. 어찌되었든, 2003년에서 2006년까지 2장의 음반을 내며 속옷밴드는 옐로우키친이 만들고 잠이 닦은 포스트록의 기틀 위에 튼튼하고 큰 기반을 쌓아올렸다. 그리고 감히 말하자면 이들의 두 음반은 이후의 여러 밴드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국내 포스트록에 있어서 중요한 이정표를 찍은 음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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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속옷밴드에서 가장 눈여겨볼 점은 멤버들의 구성이다. 다섯 명의 밴드 멤버들 중 무려 셋이나 기타를 담당한다. 조월, 박현민, 정승호가 다루는 세 대의 기타는 곧 속옷밴드 특유의 겹겹이 쌓인 소리를 만들어내고, 장윤영의 베이스와 정지완의 드럼까지 들어오며 묵직함도 확보한다. 이러한 3기타 구조는 이전의 밴드들과 비교했을 때 나름 획기적인 구성이다. 옐로우키친과 PDS는 기타 록에 기반을 둔 사운드보다는 전자음을 택했고, 피와꽃이 로파이한 밴드 연주를 들려줬지만 무언가 제대로 비교할 수 있는 정규 음반은 나오지 않았다. 잠 또한 1대의 기타만을 가지고 노이즈를 들려줬고 이후에 전자음을 사용한 걸 생각해 보면, 속옷밴드는 기타를 전폭적으로 활용한 포스트록을 최초로 들려준 셈이다. 다른 건 몰라도, 기타 소리만큼은 확실히 하겠다는 의지 같기도 하다.

속옷밴드의 첫 번째 EP [사랑의 유람선]은 2003년, 시기적으로 보자면 옐로우키친이 2집을 낸지 1년이 지나고 잠이 막 활동을 하고 있었을 때 나왔다. 9분짜리 첫 곡 “폭우”에서 조용한 분위기의 기타 노이즈들을 반복하며 속옷밴드는 그들의 음악을 넌지시 드러낸다. 특유의 지글거리는 기타들의 노이즈는 가끔은 배경이 되기도 하고, 가끔은 중심이 되기도 하며 그들의 음악에 전반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속옷밴드가 잠잠하고 앰비언트한 기타 루프만을 반복하는 건 아니다. “Off”까지 이어지며 천천히 끌어올려진 반복은 마침내 “My Favorite Tunnel”에서 한 번 터지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포스트록의 문법으로 조금 들어간다. 세 대의 기타 소리가 조율하는 노이즈와 그 밑을 훌륭하게 받치는 베이스, 나름은 리드미컬한 드럼까지 긴 호흡을 이어가던 밴드는 반복의 구조를 살짝 고조시키며 특별한 기운을 더한다.

이후 “손짓을 취하다”의 인스트루멘탈 힙합 같은 리듬감과 함께 이어지는 노이즈는 여태까지의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기타리프의 구조와는 다르게 그 리프를 다양하게 변주하며 색다른 느낌을 가져다준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밤의 글라이더”도 조금 더 전면적으로 쿵쾅대는 드럼 위로 기타를 조곤조곤 늘어놓으며 무언가 일어날 것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낸다. 비슷하게 “Satellite Song”은 조용한 분위기를 중반부까지 유지하다가 따뜻한 분위기가 드는 연주와 함께 이전 곡들과는 다른 구조의 곡을 이어나간다. 조금 심심하기도 했던 초반부의 반복적인 조용함은 이 다양한 구성과 느낌들의 곡으로 이어지는 느슨한 서사를 위한 하나의 장치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유람선]은 조곤조곤한 연주로 이뤄진 조곤조곤한 이야기다. 이후의 정규 음반에 담긴 여러 곡들과는 다르게 [사랑의 유람선]에 실린 곡들은 나무 뒤에 숨어 쉽사리 얼굴 보여주지 않는 소심한 아이처럼 조심조심, 슬며시 연주하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레이어를 쌓아올려 절정에서 터뜨리는 구조도 있다고는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두드러지지는 않고, 오히려 반복적인 연주를 통해 기타 노이즈 중심의 앰비언트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앞의 곡들과 비슷한 느낌으로 반복되는 연주를 조용히 들려주는 마지막 곡 “It’s Not Your Fault”를 통해 음반은 일종의 수미상관의 구조를 띠고, 그 안에는 조급함, 따스함, 차분한 상승과 하강, 속옷밴드가 들려주는 포스트록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들이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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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유람선] / [우리는 속옷도 생겼고 여자도 늘었다네]

 

그 특유의 앰비언트함이 무척이나 아름답지만, [사랑의 유람선]에는 조금 늘어지는 느낌이 있긴 하다. 하지만 2006년에 나온 정규 1집 [우리는 속옷도 생겼고 여자도 늘었다네]는 확실히 다르다. 테이프를 넣는 소리로 시작하자마자 난데없이 서정적이고 꽉 찬 연주가 시작되는 “안녕”에서부터 속옷밴드가 단순히 노이즈를 조용히 반복하는 방식을 넘어섰다는 게 확 느껴질 것이다. 청자에게 새롭게 “안녕”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곡은 장기하와 얼굴들이 달라진 소리를 담아 ‘뭘 그렇게 놀래’로 [장기하와 얼굴들]을 시작하는 것과 비슷한 격일 테다. 소심했던 세 대의 기타는 이제 다양한 위치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며 훨씬 더 적극적으로 소리를 쌓아올리고, 베이스와 드럼마저도 그에 동조하며 폭발적인 연주를 들려준다. 포스트록 특유의 기승전결이 확실하고, 전보다 훨씬 깊은 입체감까지 느껴지는 연주는 다음 곡인 “MCV”에서도 이어지며 역시나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확실한 연주를 뒤로 하며 “MCV”는 후반부에서 한 박자 쉬어가는 느낌으로 바뀌고, “파고듦”으로 그 반복적인 차분함을 잇는다. 음반의 한 호흡이 지나간다.

다음으로는 [사랑의 유람선]에서 느껴지던 분위기를 풍기는 “I’ve Been Here, We’ve Been Here”이 시작된다. 이리저리 오가는 기타 너머로 들리는 리드미컬한 드러밍이 특히나 돋보이며 다시 차분하고 익숙한 느낌으로 들어온 것도 좋다. 하지만 “안녕”의 호기로운 기운이 이렇게 없어지나, 느껴질 때 속옷밴드의 대표곡이자 명곡 “멕시코행 고속열차”가 귀에 남을 리프와 함께 시작한다. 속옷밴드의 공간감과 합이 제대로 드러나는 “멕시코행 고속열차”는 조금 부풀리자면 국내 포스트락에 드디어 인상적인 연주가 시작되었구나, 느끼게 해준다. 첫 번째 기타의 반복되는 중심 리프, 그 위로 덮히는 두 번째 기타의 노이즈, 그리고 두 기타가 분위기를 만들자마자 단박에 들어오는 세 번째 기타의 메인 멜로디까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구성을 통해 밴드는 폭발적인 연주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완급 조절도 마찬가지로 깔끔하기 그지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멕시코행 고속열차”는 국내 최초의 포스트록 ‘명곡’이다.

이렇게 [우리는 속옷도 생겼고 여자도 늘었네]는 [사랑의 유람선]이 그랬던 것처럼 일종의 기승전결 형식을 띠며 연주를 전개한다. 다만 전보다 확실할 때는 더 확실하며, 적극적인 연주를 선보인다. ‘멕시코행 고속열차’가 말하자면 이러한 구조 속에서 ‘전’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 역할의 마지막 곡 “Bluemoon”은 속옷밴드가 익히 보여준 기타 리프의 반복으로 시작해 그 분위기를 점점 고조시켜 “안녕”과 “멕시코행 고속열차”가 들려준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절정으로 모든 걸 마친다. 무언가가 맘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한 멋진 순간들과 함께 [우리는 속옷도 생겼고 여자도 늘었다네]는 [사랑의 유람선]처럼 수미상관으로 끝을 맺는다.

 

 

슬픈 건 그와 함께 밴드도 끝을 맺은 것이다. 국내 포스트록의 결정적인 음반들을 내고, 속옷밴드는 해체했다. 하지만, 이미 해체한 다른 밴드들과 달리 이 해체가 그렇게 안타깝지는 않은 건 조월과 박현민 덕분일 테다. 조월은 전자음으로 우울과 몽환을 달리는 드림팝을 만들어낸 모임 별에서도 활동하고, 솔로로도 슈게이징 노이즈와 앰비언트 포크를 합친 음반을 2장이나 내며 현역으로 달리고 있다. 박현민 또한 니나이안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만의 슈게이징 세계를 개척하며 인상적인 음반을 한 장 냈다. (이들의 이야기는 시간이 좀 지나고 다룰 것이다.) 비록 이 둘 뿐만이 아니라 드럼의 정지완은 코코어를 거쳐 잼을 제대로 연주하는 헬리비전과 구릉열차의 드럼이 되기도 했고 말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다룰 수는 없지만 매우 좋다) 그리고 매우 기쁘게도 이들은 재결합했고, 가끔씩 무대륙 같은 곳에서 공연도 하며 새 음반을 준비 중이다. 작년 네이버 온스테이지에 출연한 그들은 “이 무서운 왕뱀을 향해 화살통 하나가 다 빌 때까지”라는 길고 아름다운 제목의 신곡을 선보이며 건재함을 알렸다. 긴장감 가득한 분위기를 천천히 몰고 가며 특유의 입체감과 흡입력을 잔뜩 뿜어내는 곡만으로도 그들의 신보를 기대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빨리 나오기를 기다릴 뿐.

이렇게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진 속옷밴드가 국내 포스트록의 가장 인상적이고 중요한 밴드가 된 이유를 꼽자면, 일단 그 특유의 사운드가 아닐까 싶다. 일찍이 세 대의 기타를 가지고 촘촘한 사운드를 내는 포스트록 밴드는 없었다. 이전의 밴드들이 무언가 다른 소리를 제시한다는 느낌이었다면, 속옷밴드는 소리를 장인처럼 촘촘히 쌓아올려 선보인다는 느낌을 준다. 이 장인 정신은 그대로 프렌지나 노 리스펙트 포 뷰티 등의 다른 연주 중심 포스트록 밴드들로 이어진다. 이런 기타 인스트루멘탈 밴드가 아니라도, 아침이나 실리카겔처럼 기타 연주와 사운드를 음악의 중심에 놓는 밴드에서도 속옷밴드의 잔상을 느낄 수 있다. 또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속옷밴드가 정립한 그들만의 포스트록 어법이다. 그러니까 위에서 계속 이야기한 반복과 기승전결의 어법이다.

속옷밴드의 이러한 방법적인 시도는 포스트록이라는 장르에서 듣는 이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적인 경험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갓스피드를 다시 끌어와, “Storm”의 환상적인 첫 부분이나 20분간 사정없이 소리를 쌓고 부수는 “Mladic”, 아니면 그런 작업을 아예 EP 길이로 담은 [Slow Riot for New Zero Kanada] 등은 이런 구조를 통해 듣는 이의 감정적인 카타르시스를 최대치로 올려 먹먹하고 황홀한 경험을 선사한다. 속옷밴드의 음악도 비슷하게 잘 만든 롤러코스터처럼 연주를 통해 듣는 이들을 감정의 최고점으로 몰아가 완벽한 순간에 (아마도 음악적이고 내적인) 비명을 내지르게 한다. “멕시코행 고속열차”로 대표되는 그들의 곡은 아마 이후의 수많은 연주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둠과 서정을 넘나드는 연주는 아주 빽빽하고 사려 깊게 국내 포스트록의 기초 공사를 이뤄냈다. 그들이 1집을 낸지도 10년, 국내 포스트록은 더욱 멋진 곳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 속옷밴드를 지나 또 다른 굵직굵직한 포스트록 밴드들이 등장하는 2000년대 중반, 정확히는 빛나는 2006년이 다가오고 있다. | 나원영 onezero9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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