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딜런(Bob Dylan)의 가사의 문학성에 관하여서는 이미 숱한 논의가 제기되어 왔다. 이 시점에서 굳이 비슷한 논의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번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발표가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에 대한 경계라든지 하는 식의 단순하고 섣부른 정치적 해석은 경계해야 마땅하다. 정치를 선거에 국한하거나 반드시 선거와 결부하려는 자유주의적 접근은 정치를 협소하게 만들 뿐이다. 밥 딜런의 가사가 정치적이라는 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1960년대라는 정치ㆍ사회적 맥락을 제거한 채, 현재 상황에 밥 딜런의 의미를 끼워 맞추는 식의 접근은 경박하기 이를 데 없다. 밥 딜런은 그저 막연한 반전주의자가 아니라, 베트남 전쟁이라는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던 인물이다. 그의 반제국주의적 급진성을 은근슬쩍 지워버리며, 평화를 사랑한 가객이라느니 사회 참여 뮤지션이라느니 하는 식의 중간계급적 안온한 틀에 그를 억지로 끼워 넣는 것을 저지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글의 목적이 밥 딜런의 위대함을 재차 확인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의 목적은 201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발표가 ‘지금, 여기’의 사람들에게 남긴 과제들을 논하는 것이다. 사건이 된 오래된 농담 수상 여부 따위를 예술가나 예술작품의 가치 평가 기준으로 간주하는 발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유치하다. 특히 서구의 문학상만을 ‘세계 3대 문학상’이니 하며 추켜세우는 데 동조하는 것은 기지촌 문화이거나 식민지 근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해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될 즈음이면, 무슨 올림픽 금메달이라도 기다리는 듯이 한국인 작가의 수상을 기대하는 설레발이 반복된다. 일찍이 임화는 「『대지』의 세계성-노벨상 작가 『팔ㆍ빡』에 대하야 (하)」(『조선일보』, 1938.11.20.)에서 “『노벨』상을 앨써 세계문학평가의척도로 과장해생각하”는 것을 가리켜 “조선식미신”이라고 질타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질타가 제기된 지 80여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면, 실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노벨 문학상의 의미를 애써 과장할 이유는 전혀 없다. 하지만 201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발표는 흥미로운 사건임에 분명하다. 수상자로 선정된 이가 바로 밥 딜런이기 때문이다. 밥 딜런의 201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선정을 예측한 이는 2015-2016 시즌 프리미어 리그에서 레스터 시티의 우승을 예상한 이만큼이나 드물었을 것이다. 밥 딜런은 이미 1990년대 후반부터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그의 수상을 예측하는 것은 영국 언론 『가디언(The Guardian)』이 전하듯이 노벨상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농담 중 하나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이른바 전업 작가가 아닌 음악가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된 것은 문학에 관한 관성적 개념 규정에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한 사건이다. 한국문학과 대중음악의 가사 사건 이후 한국문단에서는 엇갈린 반응들이 나타났다. 환영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노래 가사는 시에 미치지 못한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한국문학계는 아직도 ‘순문학’과 ‘대중문학’을 구분하고, 외국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신춘문예’와 같은 등단제도를 ‘문학고시’처럼 고집하고 있다. 문학(文學)은 음악이나 미술 같은 기예(技藝)가 아니라 학문(學問)이라며 어깨에 힘을 주는 일부 낡은 문학자들도 버젓이 존재한다. 그들로서는 대중음악을 하는 ‘딴따라’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된 상황을 직면하게 된 것이 곤혹스러울 게다. 그렇잖아도 한국문학은 여러 모로 위기에 처해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 신경숙의 표절 사건 이후 한국문학계는 격랑에 휩쓸렸다. 민족이 어쩌고 민중이 어쩌고 민주가 어쩌고 진보가 어쩌고 포스트모던이 어쩌고 지식인 놀음에 빠져 있던 문학권력들이 표절 사건에 대해 보인 무책임ㆍ무성의한 태도와 제 식구 감싸기는 한국문학이 환부를 도려낼 시기를 놓쳐도 한참 놓치고 있었음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이후 젊은 감각의 문예지라든지 대중문예지가 잇달아 창간되며 나름대로 변신을 꾀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문학이 정말 변화하고자 한다면, 문학권력을 틀어쥐고 있던 노인들의 자리에 젊은이들을 대신 앉혀다 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문예지를 패션지처럼 만든다고 해서 새로운 문학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급변하는 세계에 발맞추어 문학에 관한 규정부터 새롭게 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다. 근대문학의 제도화는 문학을 고고한 엘리트의 성채에 가두어 버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대중문학 및 대중음악의 가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발표 역시 이와 같은 의견을 반영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노래 가사가 문학에 해당한다는 것은 느닷없는 주장이 아니다. 문자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인류는 노래를 불렀고, 노래 가사들이 훗날 시가 되었다.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시조 가운데 상당수 역시 노래 가사였다. 진정으로 한국문학을 대중의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연구와 비평의 영역에서 배제되고 있는 대중문학은 물론, 대중음악의 가사까지 검토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김민기ㆍ한대수ㆍ산울림ㆍ정태춘ㆍ조동진ㆍ시인과 촌장ㆍ들국화ㆍ부활ㆍ동물원ㆍ유영석ㆍ김현철ㆍ빛과 소금ㆍ윤상(박창학)ㆍ꽃다지ㆍ자우림ㆍ천지인 등의 가사는 문학 작품으로 평가하기에 손색이 없다. 좋은 가사의 중요성 심각한 위기에 처하여 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한국문학에 비하여, 한국대중음악은 남부러울 것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한국대중음악은 보다 본질적인 위기에 맞닥뜨리게 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대중음악의 위기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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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utete bene la vostra https://abcom-farmacie.com/ storia medica con un medico prima di prendere Kamagra, ma la sicurezza di questi medicinali. 음향기술의 발달, 특히 컴퓨터를 활용한 전자음악의 발달은 대중음악 창작을 보다 편리하고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과거에는 각 분야의 전문 연주자들이 한데 모여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사운드를 이제는 전자악기 하나, 혹은 컴퓨터 한 대로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자연스레 밴드 음악의 퇴조와 전문 연주자들의 감소로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더 근본적인 위기라고 한다면, 연주는 물론 작곡에 있어서까지 인간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인공지능이 만든 음악들이 발표되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아직은 초기 단계인 만큼, 인공지능이 만든 음악이 커다란 성공을 거두는 것은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음악보다 인공지능이 만든 음악이 많아지는 것은 그저 시간문제일 수도 있다. 언젠가 인간이 만든 음악이 인공지능이 만든 음악보다 딱히 나을 게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인간은 대중음악의 영역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때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은 다름 아닌 가사일 것이다. 기계가 그럴 듯하게 음을 조합하면, 좋은 음악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듯하게 단어를 조합한다고 해서, 좋은 가사를 만들 수는 없다. 음은 계산될 수 있지만, 가사는 계산될 수 없다. 기계가 아무리 발달하고 알고리즘이 정교해진다고 하여도, 감정을 느낄 수는 없다. 좋은 가사는 감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의 영역으로 남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인공지능이 음악을 만드는 시대에 여전히 의미 있는 대중음악을 남기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좋은 가사를 고민해야 한다. 한국대중음악의 과제는 역시 한국어의 묘미와 아름다움을 잘 살릴 수 있는 가사를 쓰는 것이다. 최근에 주목할 만한 가사를 쓰는 음악가를 꼽자면, 역시 회기동 단편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단편선과 선원들의 두 번째 앨범 [뿔](2016)에 수록된 “모든 곳에”의 가사 중 일부를 살펴보도록 하자. 아니 아닌 말들이 아닌/ 밤이 아닌 말의 밤/ 아니 그리 두려운 밤은/ 오지 않아 오지 않아 네가/ 아닌 내가 아닌 모든 내 안에/ 들지 못한 내/ 아니 돼지가 아니 우는/ 물이 아닌 밤의 말이// 가사만 떼어 놓고 보면, 한 편의 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요즘 젊은 시인들의 작품은 그로테스크하고 난해하다는 평을 듣는 경우가 많다. 회기동 단편선의 가사 역시 그러하다. 이 가사는 암호문이 아닌 만큼, 굳이 의미를 추론하고자 애쓸 필요는 전혀 없다. 분석하기보다는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느낌은 청자에 따라서 천양지차일 수 있다. 이 가사 속의 ‘말’은 말(言)인가, 말(馬)인가? 전부 가능하다. 언뜻 말(言)인 듯하다가, 뒤이어 돼지가 언급되는 것을 보면 말(馬)인 것 같기도 하다. ‘말’이라는 한국어 단어의 중의적 의미를 활용한 언어유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밤이 아닌 말의 밤’은 ‘물이 아닌 밤의 말이’로 바뀐다. ‘말’이 모음의 위치를 바꾸자 ‘물’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어 단어를 능란하게 구사한 가사는 화자가 느끼는 실존에 대한 불안을 적확하게 포착한다. 단편선과 선원들의 “모든 곳에”는 한국어의 묘미와 아름다움을 잘 살린 가사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런 가사는 한국문학의 범주에서도 논의될 수 있어야 한다. 전화기에 대고 수다 떠는 것과 같은 가사를 나쁜 가사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가사도 나름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하지만 어디를 가든지 그런 가사의 노래들만 흘러나온다면, 음악이 주는 즐거움은 크게 반감될 것이다. 대중음악에서 가사는 음악을 뒷받침하는 요소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가사는 음악 못지않게 대중음악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즐길 수 있는 음악은 많은데 두고두고 곱씹을 만한 가사를 듣기 어렵다면, 한국대중음악의 미래를 마냥 밝게 전망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주민혁 idolcritic@naver.com Leave a Reply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CommentName* Email* Website 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