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십일)은 사운드 아티스트 김지연의 솔로 프로젝트이다.” EP [11]의 라이너 노트 맨 첫 문장을 그대로 옮겨 적는다. 이 문장 이상으로 그녀를 더 잘 규정할 자신이 없다. 그녀는 필드 레코딩과 엠비언트(Ambient)를 기반으로 하는 싱어송라이터이며, 라이브 스트리밍 작업을 진행하는 사운드 아티스트이자, 미니멀리즘 계열의 인스트루멘탈 음악을 들려주는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장르적으로 일관된 특징을 집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저 소리를 기반으로 하는 작업들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사실 어떤 일련의 공통점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11을 장르적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과감히 포기하기로 한다. 하지만 ‘11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하는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11의 행위와 그 행위가 이루어지는 방식이고, 그러므로 이를 통해 11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에 관한 물음을 답해보려 한다.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의 작업들을 통해 세계의 어떤 단면들, 구체적으로는 특정한 풍경이나 기상 현상, 을 포착하기 위해 애써왔다. 포착된 단면들은 소리라는 형식으로 기록된다. EP [11]에서 들을 수 있는 유리잔에 부딪히는 물방울 소리(“레인드랍(Raindrop)”)나 발자국 소리(“디어 메이(Dear May)”)는 그러한 기록의 단적인 사례들이다. [Weather Report], 2015~2016 [Weather Report] 또한 기록처럼 보인다. [Weather Report]는 필드 레코딩을 통해 특정한 실제 장소의 소리를 실시간으로, 그리고 있는 그대로 들려주는 라이브 스트리밍 프로젝트이다. 꽤 긴 시간의 스트리밍에서, 청자는 다양한 소리들을 듣는다. 때로는 도시의 소리 – 이를테면 공사장 소리, 지하철 소리, 지나가는 사람들의 목소리 따위가 들려온다. 또 때로는 자연의 소리들,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 빗소리 같은 것들을 들을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EP [11]보다도 더욱 기록에 가깝다. 특정한 시공간에서만 감각할 수 있는 (어떤 존재의) 소리를 채집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물론 기록 매체가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왜곡과 재생 장치가 갖는 물리적 한계로 인하여, 들려오는 소리는 실재의 소리와 완벽히 일치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지점을 감안한다면, [Weather Report]는 소리로 어떤 시공간 위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박제한, 기록이다. 세계에 대한 기억 그러나 11의 작업들, EP [11]과 [Weather Report] 그리고 1집 [Transparent Music]은 사실 기록보다는 기억에 가깝다. 실재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고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감각을 통해 지각된 세계를 경험으로 환원시키고, 그 경험의 일부를(혹은 조각을) 소리라는 형식으로 채집한다. 이렇게 채집된 소리는 다른 여러 음악적인 요소들과 함께 뒤섞여, 세계에 대한 기억이 된다. 다시 [Weather Report]로 돌아가자. 이 작업이 실재를 기록했다는 사실이 아주 명백함에도, 우리는 들려오는 소리를 낯설어한다. [Weather Report]가 시작되는 순간, 청자는 자신이 지금 듣고 있는 소리가 정말로 제시된(표시된) 시간과 공간 위의 존재가 만들어낸 소리인지를, 그리고 이것이 자신이 지각했던 혹은 경험했던 기억 속의 그 소리가 맞는지를 끊임없이 회의하게 된다. 실재의 소리에 대한 기록과 그 소리를 통해 호출된 기억 사이의 불일치로 인해 우리는 잠시 갈피를 잃는다. 물론, 이들은 곧 기억과 실재 간의 차이의 가능성을 깨달으며 자신의 기억을 새로이 형성한다. [11 EP], 2014 현상학적 기억의 순간 요컨대, 이는 기억이 현상학적으로 작동하는 순간이다. 후설이 말한 ‘현상학적 에포케(Epochḗ)’의 순간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들려오는 소리가 분명히 특정한 시공간 위 어떤 존재의 소리를 기록한 것임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청자는 자신의 감각을 통해 축적된 경험에 기반하여, 기억 속의 소리와 들려오는 소리를 끊임없이 대조한다. 이를테면, [Weather Report]에서 들려오는 제주의 어떤 새소리는 실재(에 가까운 것)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청자가 가진 기억 속의 새소리와는 이질적인 것이다. 심지어 청자가 제주에서 들었던 새소리를 들었고 그것을 기억을 통해 호출한다고 해도 말이다. 이때 자연스레, 지연의 순간이 발생한다. 실재(라고 여겨지는)의 소리와 기억의 소리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지만, 청자는 그 둘이 동일한 혹은 유사한 것이라고 착각하며 이화된 지점의 근원을 찾아내기 위해 계속해서 둘을 대조하기 때문에 인식과 판단이 지연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순간은 기억이 현상학적으로 작동하는 순간이다. 대조하고 회의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제각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대상에 불과한 세계의 가능성을 깨닫는다. 다시 말해, 소리라는 형식으로 세계에 대해 포착된 기록은, 청자 개개인의 기억을 현상학적으로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업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을 하는 텍스트를 읽으며, 이 소리들이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이라기보다는 11이라는 개인의 기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굳건한 실재라고 믿었던 세계가, 한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주관적인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현상학적 기억의 순간이다. 11 EP by 11 드러나는 기억의 허구성 EP [11]은 현상학적 순간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기억의 다른 단면을 보여준다. 수록된 다섯 곡은, 그녀가 보거나 체험했던 특정한 풍경이나 기상 현상에서 받은 인상과 감정을 모티브로 삼아 쓰였다. 언급했듯이, 이 모티브를 잘 표현해내기 위해, 실제 소리를 곡의 소스로 사용한 경우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재의 파편들이 곡을 중심적으로 이끌어가지 않고 곡의 핵심을 구성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실재가 아닌 것들, 이를테면 그녀가 내뱉는 언어(노랫말)나 음악적인 요소들이 더 도드라진다. 청자는 이제 기억이 내포한 허구성과 마주한다. 실재의 파편은 그저 포착한 세계의 단면을 표현하는 여러 재료 중 하나에 불과하다. 실재를 단서 삼아 구성되는 것이 기억이지만,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허구가 수반되어야 한다. 실재를 감각하고 경험하던 그 순간의 감정과 생각, 느낌 같은 요소들이 함께 서술될 때 비로소 기억이 된다. 왜냐하면, 실재 그 자체를 기억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재는 감각되고 경험되는 순간, 이미 필연적으로 왜곡되고 곡해된다. 다만 우리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감각하고 경험할 수 있고 이를 토대로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다고 착각할 뿐이다. 우리 모두는 그저 코끼리 다리를 더듬고 있을 뿐임에도 말이다. ([Weather Report]의 현상학적 기억이 중요한 이유는 이 인식을 가능하게끔 하기 때문이기도 할 테다.) EP [11]에서 필드 레코딩을 통해 얻어진 소스들이 곡의 모티브를 잘 담아내고 있음에도, 곡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요소가 아닌 이유는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Transparent Music], 2017 실재를 포기한 기억 끝내 11은 과감하게 실재를 포기한다. 가장 최근의 앨범 [Transparent Music] 또한 언급한 이전의 작업들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구체적인 풍경이나 장면을 담아낸다. 사람들이 빙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풍경을 담은 “Skating”, 도시의 밤을 되새기며 만든 “La Nuit”, 수돗가에서 조금씩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들으며 작업한 “dots”, 두 무용수의 듀엣 장면을 위해 만든 “duet” 등, 그녀가 보고 듣고 경험했던 것들에 대해서 피아노를 기반으로 한 사운드로 구현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실재의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형식이었을 필드 레코딩을 통해 실재를 박제하거나 기록하려 하지 않는다. 온전히 허구만으로 기억을 구성한다. 자신이 받은 인상,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음악적 요소로 치환한다. 그래서 [Transparent Music]은 기억의 성립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작업이다. 이제 우리는 한 물음과 마주한다. 허구만으로 구성된 이 기억은 과연 기억인가. 그녀가 경험하고 감각했던 어떤 장면이나 풍경에 대한 인상과 감정을 토대로 한 작업이기에, 이 또한 넓은 의미의 실재가 반영된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약간 고쳐 묻자. 실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기억은 과연 기억인가? 긍정의 대답을 선뜻 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기억의 가장 근본적인 정의는 실재에 기반을 둔 경험과 감각을 축적해두었다가 호출해서 재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우리가 무언가를 기억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항상 실재에 온전히 기반을 두지 않는다. 망각이나 기시감 같은 기억의 구체적인 종류들을 떠올리면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일정 부분은 실재와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어떤 기억들 또한 [Transparent Music]의 방식처럼 어떠한 실재에 기반을 두지 않고서 구성되고 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물어야만 한다, ‘기억은 과연 가능한가.’를. Transparent Music by 11 소리로 세계를 기억한다는 것 사실 소리로 세계를 기억하는 작업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 안의 감정,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사태,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서 노래하며 그것을 기억하려던 시도들은 종종 있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11의 작업은 한 발짝 더 나아가 세계를 기억하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해서 고민하게끔 한다. 그녀는 우리에게 무엇을 기억할 수 있으며, 어떻게 기억해야 할 것인지를 묻는다. 그래서 우리는 11을 주목해야 한다. 기억해야 할 사태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세계에서, 보다 더 잘 기억하기 위해서. 11을 규정하려던 시도로 다시 돌아가자. 그녀는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현상학적 기억의 순간으로부터 출발하여, 기억이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허구성을 드러내고, 결국 기억 자체의 성립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11의 작업과 행위를 “소리로 세계를 기억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드디어 “사운드 아티스트” 이상으로 11을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을 찾았다. 그녀는 소리로 세계를 기억하는 사람이다. | 전대한 jeondaehan @naver.com 관련 사이트 11 공식 사이트 http://www.weathermusic.kr/ 11 밴드캠프 https://11ep.bandcamp.com/music [Weather Report] 스트리밍 https://www.mixcloud.com/weather_report/ Leave a Reply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CommentName* Email* Website 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