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글리터링 블랙니스, 폴 우리의 포스트록을 찾아다니며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기틀을 만든 선구자들, 2006년 전후를 뜨겁게 달군 실력자들, 2000년대 후반을 환하게 빛낸 대표자들을 만났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국내의 포스트록은 아무것도 없던 백지에서 나름의 씬을 만들어냈으며 여러 가지를 성취해냈다. 그리고 이제는 2010년대의 현역들을 만날 차례다. 2010년대로 들어서면 캄브리아기 대폭발처럼 수많은 포스트록 밴드들이 등장한다. 모두가 그들만의 멋진 포스트록을 들려주지만 하나하나씩 다루다가는 시리즈가 끝나지를 못할 것 같아 2010년부터 지금까지를 두 부분으로 나눠 각 시기에 등장한 포스트록 밴드나 음반들을 정리하듯 짚어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그 전에 2010년대를, 정확히 말하자면 2010년대 초반을 대표할 두 포스트록 밴드들을 짚어보겠다. 이들은 넓어지고 깊어지는 국내의 포스트록 씬에서도 웅장한 멜로디의 연주 구성, 장엄하고 서사적인 구조, 이를 따라가는 감정적인 분위기 등 2세대 이후 정형화된 포스트록의 형식을 가장 확실하게 담아냈기에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글리터링 블랙니스, 폴(줄여서 GBF)이 그 첫 번째다. 쉼표가 들어간 멋있는 이름과 함께 2007년에 결성되어 2010년에 자체 제작 EP를, 2014년에 소포모어 정규 음반을 냈다. 개인적으로 100분 남짓 되는 이 두 장의 음반이 국내 포스트록과 더불어 인스투르멘탈과 익스페리멘탈 록 모두의 최전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두 음반 모두 ‘Untitled’라고 이름 붙여졌지만 2010년에 나온 EP는 [Untitled EP]로, 2014년에 나온 정규 음반은 [Untitled]로 구분해서 짚어보고자 한다. GBF의 포스트록은 오로지 세밀하게 짜인 구성과 구조에 집중하는 포스트록이다. 음악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철저하게 계산되고 짜인 구성과 구조 속에서 이어지며 GBF는 이를 통해 장르적인 특징과 감정적 분위기, 음악적 서사 구조 등 모든 것을 휘어잡는다. 속옷밴드(와 조월)에서 시작되어 불싸조를 지나 프렌지까지 닿았던 포스트록 기타 연주의 진화가 이들의 레코딩에서 다시 한 번 도약을 이루었다고도 할 수 있다. [Untitled EP], 2011 EP라고는 하지만 50분 가까이 되는 [Untitled EP]부터 살펴보자. 3대의 기타를 바탕으로 베이스 기타와 드럼 등 다양한 악기들이 정교한 합을 만들어낸다. 여타 포스트록 밴드들처럼 이들도 단 하나의 악기로 시작해 그 구성이 점점 늘어나 완전한 합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거친다. EP를 여는 “0”으로 시작하자면 곡은 먼저 홀로 같은 리프를 지글거리며 긴장감을 주는 베이스 연주로 시작해 디스토션 노이즈 섞인 기타를 여럿 추가하고, 그 위에 상대적으로 맑은 소리의 또 다른 기타가 간간히 얹힌다. 곡의 앞쪽 절반에서 이 소리들은 강약을 조절하며 소리의 공간을 만든다. 그 공간이 확실히 잡혔을 때 곡은 다시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베이스 리프만이 지글거리는 맨 처음으로 돌아간다. 디스토션 노이즈는 싹 사라지고, 여기에 주 멜로디를 연주하는 기타가 더해진다. 베이스와 마찬가지로 기타도 똑같은 리프를 반복하며 긴장감을 더해주고 이를 조금 다른 사운드로 연주하는 다른 기타들이 추가된다. 이윽고 초반부에서 사운드의 큰 부분을 맡은 디스토션 노이즈가 이번에는 부가적인 소리가 되어 들어오며 초반부의 느낌이 변주되고, 곧 후반부의 새로운 느낌과 연결된다. 그리고 합이 완성된다. “0”은 역동적인 서사 구조는 없는 곡이지만, 베이스 리프 / 디스토션 노이즈 / 주 멜로디의 세 부분을 7분 동안 차분하게 조율해낸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베이스 리프는 끊임없이 긴장감을 만들며, 디스토션 노이즈가 소리의 공간을 만들고, 주 멜로디를 맡은 기타가 그 위로 새로운 긴장감을 더한다. 각 부분들은 서로 작아지고 커지며, 밀고 당기며 서로를 보조해준다. GBF의 연주는 이 세밀한 구성, 장인과도 같은 치밀함으로 빛난다. 곡에 조금 더 역동적인 서사가 들어가면 이 장인 정신은 더욱 확실해진다. 갓스피드 유! 블랙 엠퍼러(Godspeed You! Black Emperor)의 [F# A# ∞]와 [Slow Riot for New Zerø Kanada EP]와 많이 닮아있는 스산한 분위기의 “1”은 이전과 비슷하게 소리를 점점 더 추가하지만, 곡 자체의 강약이 더욱 제대로 드러나게 한다. 반복되는 기타 리프에 베이스가, 다른 기타들이, 드럼이, 건반이 들어오고 곡은 점차 완전한 소리의 덩어리가 된다. “0”보다는 더 역할이 많은 드럼 덕에 확실한 박자가 형성되며, 이 박자는 곡이 8분대를 막 지나갈 때 순식간에 속도를 올리며 빠르게 긴장감을 만들고 절정부로 향한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두근대는 드럼과 함께 이전의 멜로디를 반복하고 변주하는 주 기타, 지글대며 노이즈를 까는 부 기타, 반복되는 베이스가 모이며 합이 완성되고, 곡의 서사와 만나며 최고의 효과를 낸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긴장감은 불어나고 그와 함께 쌓아올린 시간과 과정은 마지막 순간에 훌륭하게 마침표를 찍는다. 이어지는 “2”에서도 이 속도감은 짧은 길이와 함께 좀 더 안정적으로 다듬어져 짧은 길이에도 일정한 기승전결을 가진다. 분위기를 쌓는 초반부와 이를 변주해서 이어가는 중반부, 초반부의 리프를 좀 더 강하게 연주하며 끝내는 후반부까지. 주된 기타 리프는 한두 번의 반복만으로도 확실히 뇌리에 남으며, 주 기타를 보조하는 다양한 악기들이 멜로디 밑으로 오고가며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이는 각각 11분, 15분짜리 긴 곡들인 “3”과 “4”도 마찬가지다. 특히 음반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곡인 “4”는 GBF이 EP 내내 들려준 다양한 구성들을 한꺼번에 합쳐낸다. 곡은 여러 소리들이 다양하게 반복되며 천천히 고조되는 전반부와 빠른 진행으로 고조된 분위기를 확장시키는 후반부로 이뤄졌다. 여기에 주 기타의 멜로디 / 반복되는 베이스 리프 / 짙은 기타 노이즈의 세 요소가 다양하게 배치되며 탄탄한 구조를 만들고 건반과 드럼 등 부가적인 요소들을 적절히 추가하는 악기 구성과 만나 훌륭하게 음반을 마무리한다. 이렇게 50분 동안 거침없이 쏟아져 내린 연주는 모든 것이 지나간 빈 공간에 울리는 스트로크로 여운을 남기며 [Untitled EP]를 닫는다. 이렇게 GBF는 악기들의 구성과 서사적인 구조를 다양하게 변주한다. 구성과 구조 모두 정교하게 짜여 합쳐질 때 그 포스트록적인 합이 완성되며 이는 속옷밴드나 불싸조, 프렌지보다도 상대적으로 차갑고 무거운 GBF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Untitled], 2014 2014년 GBF는 [Untitled]라는 똑같은 이름의 정규 음반을 한 번 더 내며 그들의 연주를 계속해서 이어나가고 확장한다. 0에서 4까지 간편한 넘버링으로 죽 이어지던 곡 이름에 맞게 이번 음반에서는 5, 6, 7하는 넘버링이 나오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재미있게도 [Untitled]는 이전의 “3”과 “4”를 한 번 더 등장시키고, 게다가 “3”의 경우에는 곡들에 하이픈을 붙였다. “3-1”, “3-2”, “3-3”의 세 곡은 [Untitled EP]에 있던 “3”과 직접적으로 이어지며 마찬가지로 “4” 또한 [Untitled EP]의 곡을 다시 한 번 녹음한 것이다. 과연 이러한 구성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 “3”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자면, 첫 곡인 “3-1”은 훨씬 더 정제되고 보강된 연주로 다시 한 번 “3”을 담는다. 여러 면에서 “3”보다 더 강해진 “3-1”은 후반부의 속도를 조금 더 빠르게 이끄는 구조와 더불어 악기들의 구성 또한 전보다 더욱 치밀하게 짜내어 훨씬 업그레이드된 버전의 “3”이 된다. 이를 평범한 자기반복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이전 곡의 빈틈들을 깔끔하게 메워 좀 더 나은 버전을 들려주는 GBF의 시도에서 일종의 장인 정신을 느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곡들을 들어보면 GBF가 [Untitled]에서 시도하는 것들이 단순한 반복이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계속되는 “3-2”와 “3-3”에서도 마찬가지로 [Untitled EP]에 있던 여러 순간들이 다양하게 변주되어 새롭게 펼쳐지며 특히 두 곡은 함께 두고 들었을 때 더욱 재미있다. “3-2”는 건반 사운드의 앰비언트함을 바탕으로 차분하게 분위기를 깔며, 반대로 “3-3”은 처음부터 빠른 속도와 함께 고조와 하강을 교차한다. 두 곡 모두 나름 비슷한 멜로디의 리프로 이뤄졌지만, “3-2”는 내면을 향해 조심스럽게 파고들고 “3-3”은 외면을 향해 격동적으로 달려간다. 두 곡은 동전의 양면처럼 구성되어 독특한 대비를 이룬다. 이러한 “3-1”의 반복(혹은 변주)과 “3-2”와 “3-3”의 대비는 GBF 자체를 반복-변주-대비하는 것이라 보고, 이 치밀한 반복-변주-대비는 [Untitled]가 [Untitled EP]의 단순한 자기반복이 아닌 것을 증명한다고도 본다. [Untitled EP]를 통해 스스로의 세계를 구축한 GBF는 [Untitled]로 그 세계를 해체하고 재구축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3”에다 하이픈을 붙여 일종의 평행우주처럼 한 곡의 새로운 가능성과 경로를 여는 구성은 무척이나 영리하고 효과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3-1”처럼 다시 한 번 이전의 “4”를 반복-변주한 “4”에서도 역시나 돋보인다. 이렇게 약 40분 동안 [Untitled]는 [Untitled EP]의 여러 순간들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한다. 이 재조립의 과정은 단순 반복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능동적인 변주와 확장으로써 작용한다. 이 40분간의 연주, 특히 “3-1”이나 “4”가 재조립과 변주를 추구한다면 음반의 마지막 6분을 채우는 “5”와 “out-in”은 짧지만 강렬하게 확장과 가능성을 추구한다. [Untitled EP]에서의 “4”는 음반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맡으며 짙은 디스토션 노이즈의 절정 뒤로 차분하고 조용한 스트로크를 깔며 여운을 만들었다. 하지만 [Untitled]에서의 “4”는 디스토션 노이즈에 그대로 이어지는 “5”를 배치하며 여운을 쳐내고 그 분위기를 잇는다. (이 또한 어떻게 보자면 일종의 변주라고도 할 수 있겠다) 짙은 노이즈에서 그대로 빠르게 이어지는 “5”는 여태까지 GBF가 들려준 곡 중에서 가장 직설적으로 질주하고, 치밀한 구성과 서사적 구조의 형식이 아닌 새로운 형식을 담았다. 이러한 새로움이 “5”에서만 확연히 나타나는 게 조금은 아쉽긴 하지만, GBF가 이후에 음반을 낸다면 어떤 음악을 들려줄지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쨌든 간에 숫자가 제목이었던 다른 곡들과는 한참 다른 제목의 “out-in”은 1분 30초 동안 GBF 특유의 서늘함이 잔뜩 묻어난 리프를 반복하며 그 의미심장함을 더욱 키워준다. 일종의 공수교대 표시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제목의 묘한 의미가 음반 전체의 변주-변화와 어우러지며 [Untitled]는 [Untitled EP]의 연장선이자 일종의 리믹스로써 현재의 GBF는 물론 이후의 GBF도 기대하게 하는 음반이 된다. 2010년대 이후의 국내 포스트록 밴드들 중에서도 글리터링 블랙니스, 폴은 가장 최전선에 있다. 가장 정석적으로 고착된 형식의 포스트록을 연주하지만, 빈틈없는 합의 연주로 채워진 구성과 수렴하고 발산하는 서사적인 구조가 함께 만나 글리터링 블랙니스, 폴만의 세계를 형성한다. 이러한 구성-구조의 적절한 결합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이 결합을 해낸 속옷밴드-불싸조-프렌지의 계보를 제대로 이으며 국내 포스트록 기타 연주의 진보에도 한몫한다. 게다가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고 부수고 다시 만드는 유기적인 과정도 주목할 만하다. 아직까지 이 두 ‘Untitled’ 음반에 이어지는 다음 음반이 나오지 않았지만, 점점 변화하는 이들의 세계가 어떻게 이어질지 짐작하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구성과 구조가 그들의 포스트록에 맞춰 절묘하게 섞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는 해체와 변주를 이어가며 진화한다. | 나원영 onezero96@naver.com Leave a Reply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CommentName* Email* Website 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