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쓸 수 있는, 그리고 정기적으로 올릴 수 있는 새로운 기획을 만들어보자. 처음 이 특집을 생각하게 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weiv]의 필자들은 편집장의 기대에 대해 A4용지 반 장이 넘는, 힘이 가득 들어간 기나긴 글들로 화답해줬다. 덕분에 글을 읽는 입장에선 즐겁기 그지없었지만.

어쨌든, [weiv]의 새 기획 ‘어떤 교집합’이다. 매 회마다 한 번씩, 특정 주제를 정하고 필자마다 이것저것 이야기한다. 일단은 음악에 대한 이야기지만, 음악과는 상관없는 글이 될지도 모른다. 아이디어는 이제는 사라진 대중음악웹진 보다(bo-da)의 한 기획에서, 제목은 고아라 작가의 웹툰 <어떤 교집합>에서 빌려왔다. 첫 순서는 ‘가사는 모르지만 좋은 음악’이다. | 정구원

 

Pascal Pinon “Ekki Vanmeta”

 

 

밑도 끝도 없이 단번에 좋다고 믿게 되는 곡들이 있다. 아이슬란드 출신의 자매, 아스틸두르 아카도티르(Ásthildur Ákadóttir)와 요프리오르 아카도티르(Jófríður Ákadóttir)의 듀오인 파스칼 피논(Pascal Pinon)의 음악이 그랬다. 아마 『예술가의 항해술』을 사기 위해 들렀던 것 같다. 약속 시간을 기다리기 위해 들렀던 것 같기도 한데, 1년도 넘은 일이라서 사실 분명치 않다. 어찌됐건 독립서점 유어마인드에서 이들의 2016년작 [Sundur]를 처음 마주했다. 음악을 들었던 것도 아니고, 진열된 앨범을 보았을 뿐인데 그냥 좋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파스칼 피논의 음악을 찾아 들어보았다. [Sundur]도 좋았지만 2집 [Twosomeness]의 곡들이 더 좋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Ekki Vanmeta”를 소개하려고 한다.

곡은 전반적으로 무겁지 않고 적당히 경쾌한 분위기를 띠기에, 듣는 내내 기분이 좋다. 과하지 않은 두 보컬의 화음은 다른 음악적 요소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듯, 곡을 차분하게 이끈다. 적절한 이 균형은 목가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듣는 이로 하여금 편안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아이슬란드어로 된 곡이기에, 나는 아직까지도 이 곡의 내용을 모른다. TV 시리즈 <꽃보다 청춘 – 아이슬란드편>의 BGM으로 쓰였다고도 하니, 아마 검색을 하면 한국어 번역을 찾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굳이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가사를 알게 되면 지금보다 더 좋아하게 될 것만 같으니까. | 전대한

 

 

Bruno Coulais [Coraline Original Motion Picture Soundtrack]

 

 

영화와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다면 ‘라이카 스튜디오’라는 이름을 한 번 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작년 골든 글로브에서 최우수 애니메이션 상을 타고 아카데미에서도 노미네이트가 된 <쿠보와 전설의 악기>을 포함해 지금까지 네 개의 훌륭한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든 스튜디오다. 이들의 첫 작품은 <신들의 전쟁>, <샌드맨>, <닥터 후>의 몇 에피소드들로 유명한 닐 게이먼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아 <크리스마스의 악몽>의 헨리 셀릭이 감독하고 (10년 전의) 다코타 패닝이 목소리를 맡기도 한 2009년작 <코렐라인: 비밀의 문>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좀 더 현실적이고 어둑어둑하게 만든 잔혹동화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은 그 해 애니 어워드에서 최우수 음악 부문으로 상을 탔다.

그 OST를 들어본다. 닐 게이먼과 헨리 셀릭이 참여한 만큼 섬짓하고 의뭉스러운 느낌이 풀풀 나는 동시에 어딘가에서는 어린 아이들 특유의 천진한 느낌까지 든다. 미국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 데이 마이트 비 자이언츠(They Might Be Giants)가 작곡한 삽입곡 “Other Father Song”도 밴드 특유의 기이한 매력이 잘 살아있다. 하지만 <코렐라인>의 OST는 대부분 기괴하고 몽환적인 오케스트라 연주와 어린이들의 합창으로 이뤄졌다. 흔히 ‘어린이 합창단’ 하면 떠오르는 맑고 고운 느낌과는 다르게 어딘가 낯선 분위기의 합창들. 그런데 잘 들어보면 이게 영어인지,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인지, 아니면 동유럽의 어느 나라(체코? 루마니아? 폴란드? 크로아티아?)의 언어인지 애매하다. 정보를 찾아보면 <코러스>와 <오션스> 등 다양한 영화 음악을 만든 브뤼노 꿀레(Bruno Coulais)가 헝가리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니스 어린이 합창단과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낯선 언어의 노랫말들은 프랑스어일까? 아니면 헝가리어?

어느 나라 말인지는 도통 모르겠고, 그래서 노랫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닐 게이먼과 헨리 셀릭, 그리고 라이카 스튜디오의 기묘한 환상 같은 이야기를 음악으로 풀어낸 듯 <코렐라인>의 OST는 낯선 긴장감과 맑은 호기심을 섞은 멜로디, 그리고 웅성대는 어린 유령들의 목소리같은 합창을 의미심장하게 엮는다. 뉴에이지스러운 그루브가 살아있는 재즈나 러시아 민속 음악풍의 연주곡, 오케스트라로 만든 어둡고 몽환적인 앰비언트, 이 모든 질감을 하나로 그러모으는 합창까지- 비 오는 늦가을 밤 산책 중에 들으면 모든 길가와 골목들이 어딘가 이 세계와 어긋난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사실, 제대로 된 노랫말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헨리 셀릭 감독 스스로 <코렐라인>의 OST 속 노랫말은 아무 의미 없는 횡설수설(gibberish)이라고 밝혔다. 그러니까 <코렐라인>의 OST는 정말로, ‘노랫말은 모르겠지만 어쨌건 참 좋은’ 음악이다. 다른 에디터들의 선정과 달리 조금 반칙인 거 같지만 말이다. 여담으로, 언젠가 유튜브에서 OST를 듣고 있다가 그 노랫말을 적은 댓글을 본 적이 있다. 횡설수설을 해석한 그 노랫말들을 보며 이 합창을 들으니 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횡설수설 속에 알 수 없는, 이 세계의 말로는 전혀 해석할 수 없는 뜻이 담긴 거 같기도 하다. | 나원영

 

 

La Vida Boheme “La Vida Mejor”

 

 

라 비다 보헴(La Vida Bohème)의 사운드는 카리브해의 열기와 남미의 활기를 배합한 것처럼 들린다. 이들의 모국 베네수엘라의 지리적 특성을 청각적으로 옮겨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드럼 연주가 현란하게 박자를 쪼개면서 댄서블하고 경쾌한 리듬을 만들어내고, 그 위로 얹힌 악기들은 트로피컬한 멜로디로 흥겨움을 이어나간다. 허나 이들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음악마냥 희망스럽지만은 않다.

이들의 음악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베네수엘라의 뉴스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베네수엘라는 부정부패와 2013년 유가 폭락으로 인해 몇 년째 경제, 사회, 그리고 정치적으로 극심한 혼란 속에 빠져있다. 식량난과 생존의 위협을 못 이겨 다른 나라로 망명 혹은 이주를 떠나는 이들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La Vida Mejor”의 노랫말은 위에서 언급된 현상들을 바라보는 베네수엘라의 시선을 담고 있다. ‘어떻게 해야 삶이 더 나아질 수 있을까요?’(“¿Cómo va a ser la vida mejor?”)라고 아무리 목놓아 외쳐본들, 그 아무도 대답이 없다. 절망에 빠진 자신의 곁을 떠나가는 이들을 향해 화자는 이렇게 부르짖는다. ‘당신이 떠나신다면 제가 어떻게 슬퍼하지 않겠어요?’(“¿Cómo no voy a llorar si tú te vas?”)

스페인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 하는 내가 라 비다 보헴의 음악을 접하게 된 것은 베네수엘라 출신 친구의 추천덕분이었다. 단 한두소절만을 듣고 이들의 음악에 매료된 나머지, 구글 번역기로 가사를 해석하고 베네수엘라의 상황을 담은 뉴스를 찾아나섰다. 어쩌면 이들과의 만남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에게 있어 라 비다 보헴의 노래는 ‘가사는모르지만 좋은 음악’에서 ‘가사를 알수록 더 좋은 음악’이 되었다. | 이선엽

 

 

Misþyrming “Ég byggði dyr í eyðimörkinni”

 

 

정확히 말하자. 이 트랙의 가사가 내가 아는 언어로 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가사를 따로 찾기 전에는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슬란드의 블랙 메탈 밴드 매스써밍(Misþyrming)의 데뷔 앨범 [Söngvar elds og óreiðu]의 여덟 번째 트랙 “Ég byggði dyr í eyðimörkinni”의 노래는 끝없는 고통과 차가운 분노로 가득하다. 보컬 D.G.가 들려주는 목소리는 ‘감정’이 ‘의미’에 선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건 대다수의 블랙 메탈이 가지는 공통점이다.

그러니 질문을 던져보자. 음악에서 언어가, 더 엄밀하게는 ‘언어가 가진 의미’가 차지하는 위상은 어떤 것인가? 보통 음악에서 가사라는 요소는 해당 음악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고 여겨져 왔지만, 정말로 그런가? 어떤 음악을 구성하는 가사의 의미가 전달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음악으로서 ‘기능’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작용하는가? 언어적 의미가 그 위상을 상실할 때 음악은 가치를 잃어버리는가, 아니면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받는가?

밴드는 이런 (답도 없는) 질문에 상관없이, 초연한 태도로 파괴의 풍광을 그려낸다. 당신이 어떤 고민을 하든 간에 우리는 그냥 모든 것을 불태울 뿐, 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런 초연함이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것 같아 좀 얄밉기도 하지만, 최소한 이 트랙을 듣는 순간만큼은 나 역시 이 파괴적인 힘에 별 도리없이 휩쓸려간다. 아마도 이것이, 음악이 언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한 방식일 것이다. | 정구원

 

 

五條人 (Wu Tiao Ren) “綠蒼蒼 (Green an Gray)”

 

 

중국의 광저우에서 도착한 한 앨범은 ‘펑크’라는 설명과 함께 수중에 들어왔다. 앨범을 다 들은 뒤, ‘어째서 펑크라는 설명이 붙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인터넷에서 앨범의 장르를 ‘인디 포크’로 소개하는 글(다행히 중국어가 아니었다)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잘못 들었던 것일까?’ 시작부터 좌충우돌이었다. ‘좋은 음악’과 ‘낯선 음악’의 두 개의 취지 중 낯선 음악 한 가지에만 부합하는 글을 쓸 것 같아 두려움이 들었으나 듣기를 거듭할수록 글을 완성하고 싶다는 욕심이 커져갔다.

우차오렌(五条人)의 2009년 데뷔앨범 [A Tale Of Haifeng]에서 가장 먼저 귀에 들어온 트랙은 10번 트랙 “綠蒼蒼 (Green an Gray)”이었고, 그것은 가장 귀에 익숙한 음악이라는 의미였다. 전자 악기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풍부한 음악들이 녹아있었고, 트렌디하진 않지만 참신했다. 그건 다른 곡들도 마찬가지였다. 육체노동이 떠오르기도 하고 광동어 구어체가 궁금해지기도 하는 3번 트랙 “倒港紙 (Changing HongKong Dollars)”의 추임새, 애덤 리바인(Adam Levine)의 “Lost Stars”와 유사한 인트로로 시작해 스크리밍으로 노래하는 11번 트랙 “阿炳耀 (Bingyao)” 등이 대표적이다. “綠蒼蒼 (Green an Gray)”의 경우 인트로에서 다소 촌스러운 강/약 박자로 시작해 후렴에 이르러 탱고풍의 기타 속주가 반전을 이끌고 그 위에 얹히는 중국어 구어투의 보컬과 추임새가 퓨젼스러운 느낌을 전해준다.

가사를 알았을 때 이 곡들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겠지만 현재까지의 인상은 전위적이다. 라이브를 접하기 전까지, 우차오렌이 어떤 상황에서 부르고 연주할까 상상하는 것은 이 음악을 감상하는 재미의 백미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궁리하는 과정에서 어느새 낯섦은 즐거움으로 바뀐다. 그러니 “綠蒼蒼 (Green an Gray)” 이후에 다른 곡들이 새로 귀에 들어왔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비밀이다. | 김태윤

 

 

Adriana Partimpim “Lindo Lago do Amor”

 

 

오래 브라질을 앓고 있다. 가본 적 없는 지구 반대편, 비슷하게 독재와 성장과 탄핵을 겪은 나라, 그 안에서 불가해한 아름다움을 만들어온 나라의 음악을 끝없이 찾아 들었다. 어쩌다 시작한 사랑인 걸까. 보사노바를 양념처럼 두른 가요들 때문일까. 그걸 빠르게 밀어붙인 일본의 하우스 음악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한국 애플 뮤직에 브라질 음원이 많았던 탓일까. 아무리 떠올려도 죄 사소한 우연들이다. 그 어떤 이유로도 브라질에 곧장 닿지는 못했다.

그러고 보면 브라질 음악의 연원도 그랬다. 서양의 궁정 음악이 남미로 흘러들어 쇼루(Choro)가 되었고, 거기에 노예로 끌려온 아프리카의 리듬이 섞여 삼바가 되었다. 화려한 소리를 기타 한 대의 리듬으로 간추리자 보사노바가 되었고, 거기에 팝과 록의 실험을 더하자 브라질 가요(MPB)가 되었다. 이유를 헤아릴 틈도 없이 겪은 침략의 역사가 우연히 빚은 아름다움이었다.

비슷하게 복잡한 내력이 “Lindo Lago do Amor”에도 서려 있다. 이 노래는 곤자기냐(Gonzaguinha)가 1984년 처음 만들어 불렀다. 국민 가수였던 아버지, 오래 불화했던 아버지 루이스 곤자가(Luis Gonzaga)와 화해한 지 몇 년이 지났을 때였다. ‘임신한’이라는 뜻의 음반, [Grávido]의 표지에서 그는 아기를 끌어안고 있었다. 불화하고 또 화해하면서도 끝내 이어지고 마는 것이 삶이라는 듯이. 신시사이저와 드럼머신,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하모니카까지 받아들이고도 끝내 브라질 음악인 이 노래의 운명이 그러하듯이.

28년 뒤 아드리아나 깔까뇨뚜(Adriana Calcanhotto)는 그녀의 동요 프로젝트 ‘Adriana Partimpim’에서 이 노래를 다시 불렀다. 아련했던 분위기를 더 사이키델릭하게 옮긴 채로. 이런 동요를 듣고 자란 세대는 또 어떤 음악을 만들게 될까. 짐작할 수 없다. 다만 이런 확신은 있다. 그들의 음악은 여전히 브라질이고, 또 여전히 아름다울 것이라고. ‘아름다운 사랑의 호수’라는 뜻을 지닌 이 노래가 몇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러한 것처럼. | 김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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