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잔향속에서우리는 | 우연의 연속에 의한 필연 EP | Self-Released, 2017

끝없는잔향속에서우리가마주하는것들에관하여

세계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거대한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진다. 예술 또한 두 축에서 자유롭지 않다. 공간성을 주축으로 하는 공간예술과는 다르게, 시간성을 강조하는 시간예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고 향유되는 예술을 의미한다.

음악은 대표적인 시간예술이다. 휘발성이 강한 소리라는 요소로만 구성되기에, 필연적으로 음악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들을 수 있는 것이 생기고 동시에 들을 수 없는 것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음악 작업은 시간예술로서의 특징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보통은 시간의 전개에 따라 음악의 서사를 전개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어떤 가사나 화성을 반복적으로 배치함으로써 특정한 지점을 강조하기도 하고, 시간의 추이와는 대조적으로 음악적인 진행은 역순으로 이루어지게끔 하여 독특한 효과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다시 말해, 시간이라는 축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음악에서 무척 중요한 지점이다.

포스트 록으로 분류될 수많은 음악들은 이러한 시간예술의 핵심적인 특징에서 출발한다. 사소한 모티브와 길지 않은 멜로디 및 리듬으로부터 곡이 시작된다. 그리고 시간이 진행됨에 따라 악기들이 하나씩 등장하고, 이를 정교하게 쌓아가거나 빼 나가면서 음악을 만들어 나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켜켜이 쌓인 모든 소리들이 응축되고 끝내 폭발한다. 이 모든 과정은 즉흥적이고 본능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체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포스트 록이라는 장르를, 시간예술의 특성을 효율적으로 활용한 사례로 평가할 수도 있겠다.

끝없는잔향속에서우리는의 첫 EP [우연의 연속에 의한 필연]은 언급한 지점들에 매우 부합하는 앨범처럼 느껴진다. 거의 항상 안다영의 보컬로부터 출발하는 곡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많은 것을 들려준다. 때로는 매력적인 기타 리프가 가장 먼저 들려오고, 또 때로는 목가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키보드가 보컬 바로 다음으로 들려온다. 그리고 이들을 탄탄하게 뒷받침하는 베이스와 드럼이 나타나 곡을 더욱 확장시킨다. 그리고 ‘절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순간을 지나, 쌓여있던 소리들이 하나씩 멀어지고, 마침내 음악은 사라진다.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처음의 시간으로 다시 돌아간 듯하다. 시간이 흐르고 음악이 이에 따라 진행된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간다는 사실은 시간예술이 마주하는 필연성이다.

그러나 안다영이라는 ‘존재’는, 거스를 수 없을 것만 같은 시간의 급류 속에서도 오롯이 제자리를 지킨다. 포효처럼 들리기까지 하는 안다영의 보컬은 음악적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그것보다 더 앞서는 것은 그녀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다. 안다영이 내뱉는 언어들은 시간이 지나면 곧 소멸할 불확정적인 소리가 아니라, 분명히 존재하는 무언가의 명확한 흔적에 가깝다. 달리 말하자면, 그녀의 보컬을 통해 청자는 어떤 현전을 마주한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곡은 “Interlude(우연의 연속에 의한 필연)”이다. 이 곡에서 드러나는 것은 오로지 시간의 서사뿐이다. 다른 곡들과는 다르게, 어떤 풍경이나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무언가를 언어로 풀어내려는 시도조차 없다. 안다영은 마치 자신이 하나의 악기인 것처럼, 흥얼거림과 포효에 가까운 소리들을 내뱉는다. 역설적으로 아무런 서사를 노래하지 않기에, 언어에 오염되지 않고 존재만이 오롯이 남는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차라리 공간예술에 가깝다. 어떤 대상(작품)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인식하고, 점유된 그 공간을 통해 존재를 확인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어떤 존재를 인지하는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면서 우리는 대상으로부터 숭고나 아름다움과 같은 미적 감정을 체험한다.  (주로 안다영의 보컬이 연출해내는) 분명히 현존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존재감 앞에서, 청자는 스스로의 존재를 재확인하게 된다. 엄청난 에너지를 담고 있는 보컬을 듣고 있는 ‘나’ 역시도 음악과 같은 시간 위에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요컨대, [우연의 연속에 의한 필연]은 현전을 목도하고 있는 주체로서의 자신을 인지하는 순간을 도출하고, 이를 통해 미적 체험에 가까운 상황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압도적인현전을, 그리고끝내우리자신을마주할것이다. 끝없는잔향속에서우리는. | 전대한 jeondaehan @naver.com

 

Rating: 8.5/10

 

수록곡
1. 5:41
2. And so it goes
3. #
4. Interlude (우연의 연속에 의한 필연)
5. 푸른소매
6. 집
7. 제목 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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