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8일 조동진이 ‘바람 끝 닿지 않는 밤과 낮 저편’으로 갔다. 그의 장례식이 치러진 일산의 한 병원에 들어선 지 몇 시간이 지났을 때 주변의 누군가 말했다. 조동진이 포털 사이트들의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고… 미처 확인할 경황은 없었지만,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 있을 때 그럴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관심이 없는 것보다는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유족들의 수고를 덜어주느라 얼떨결에 ‘홍보 담당’을 맡은 나는 장례식을 찾아온 젊은 기자들이나 PD들을 응대해야 했다. 그들 대부분은 “솔직히 고인에 대해 잘 모르지만…”이라고 질문을 시작했다. 몇 주 전 조동진의 ‘투병’을 전하던 기사들이 ‘이효리·이상순’으로 시작해 ‘장필순·조동익’을 거치는 것을 보았을 때처럼 약간의 짜증스러움이 스며 나왔다. 때로는 화가 나는 순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짜증이나 화라는 감정은 조동진이라는 인물과 작품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 시간에 내가 그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조동진의 음악이란 초연, 관용, 여백, 무념 등 아니던가.

 

“겨울비”

 

이 글의 대부분의 독자들인 나보다 젊은 사람들이 조동진의 음악을 ‘잘 모르는’ 것이 그들의 탓만은 아니다. 들국화, 어떤날, 시인과 촌장, 장필순은 좋아하더라도 그들보다도 한 세대 먼저부터 활동한 조동진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자신들이 10대가 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제라도 들어보고 생각을 바꾸기를 기대해 볼 뿐이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면 ‘한국적 상황’ 때문일 것이다. 물리적으로 한국이라는 것보다는 문화적으로 변방이라는 뜻이다. 비틀스와 밥 딜런의 작품들이 영원한 고전처럼 남아 있다면, 그들과 비슷한 시대에 한국에서 활동한 인물들의 작품들은 ‘흘러간 가요’로 남아 있다. 그 ‘흘러간 가요’를 ‘100대 명반’이나 ‘불후의 명곡’ 등으로 포장하기 시작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런 작업도 이리저리 굴절되고 왜곡되는 인상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사실 대중음악의 중심인 미국이나 영국의 상황을 한국같은 변방의 상황과 비교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지금은 그 지위를 조금 벗어나는 징후가 드문드문 보이기도 하지만, 20세기 내내 한국이 변방에 머물렀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인프라는 열악했고, 시스템은 영세했고, 제도는 엉성했다. 결정적으로 정치는 투박하고 거칠었다. 그래서 음악을 직접 만들어서 연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자조(自嘲)의 감정이 보편적인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변방이라는 환경에 대해 자조하는 것을 넘어선 음악인들이 존재하고,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위대하다’고 부른다. 그런 사람들 여러 명을 손꼽을 수 있지만 조동진은 그 가운데서도 독보적인 지위를 갖는다. 그는 1970년대 이른바 ‘포크송 혁명’과 연관되지만, 그리고 그 전에는 록 밴드(당시 용어로 ‘그룹 사운드’)에서 활동했지만, 그는 둘 가운데 어느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자립적인 길을 걸었다. 30세를 넘은 1979년부터 50세를 앞둔 1996년까지 약 17년 동안 5종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 늦은, 그리고 느린 행보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하지 못한 놀라운 성취다.

그는 느리지만 꾸준했고 시간의 흐름 앞에서 초조와 불안을 느끼지 않았다. 1집과 2집 사이 1년이라는 짧은 간격을 예외로 한다면, 그는 평균 5년에 한 번씩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 그리고 개별 앨범은 하나의 기점을 만들었다. “제비꽃” 등이 수록된 3집(1985)이 동아기획을 기반으로 ‘조동진 사단’의 영광의 시간이 도래하는 신호였다면, “항해” 등이 수록된 4집(1990)은 하나음악이 새로운 세대로 이어져 공동체를 만드는 기초가 되었다. “넌 어디서 와” 등이 수록된 5집(1996)은 하나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어도 ‘그만 둘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작품이었다.

그의 삶은 그의 가사에 자주 등장하는 은유인 강물이나 바람처럼 도저했지만, 그저 무난하고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 점에서 고인이 언제나 가난했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 실례가 아니기 바란다. 1970년대까지 그는 서울의 변두리를 전전하면서 살았고, 그의 이름을 알린 1980-90년대에도 서초동의 25평 아파트에서 조용히 살았다.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릴 테이프를 들고 (스튜디오) 여기저기를 전전했다”고 술회했듯, 그가 남긴 작품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악전고투를 하면서 치열하게 만들어진 것이었다는 것을 되새기고 싶을 뿐이다.

 

“제비꽃”

 

전인미답(前人未踏)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이 하나 더 있다. 지금부터 10개월 전인 2016년 11월 그는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 오랜 시간 동안 병마와 싸우고,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고희(古稀)가 다가오는 시점의 일이다. 이 작품에 대한 평은 ‘누구도 그렇게 하지 못한 일’이라는 말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의 1집 앨범이 남들보다 10년쯤 늦은 것이라면, 6집 앨범은 30년쯤은 늦은 것 같다.

그 뒤로도 그는 오래된 레코딩의 리마스터링 작업에 몰두했다. 리마스터링이 꼭 필요한 건지에 대해서도 감식가들은 이런저런 평을 내놓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에 불가피한 제약 때문에 자신이 구상한 소리를 실현할 수 없었다는 회한이 집요하고 철저한 작업이 갖는 수고를 압도했던 모양이다. 그게 병마를 더 악화시켰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냥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도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살아있을 때 모든 것에서 느렸던 사람이 세상과 작별을 고하는 일은 너무 서둘렀다.

음악인으로서 그의 삶에서 많은 대중음악인들에서 조금씩은 나타나는 ‘적당히 대충 넘어가는 일’을 발견할 수 없다. 그가 풍기는 온화한 인품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서 완고하고 비타협적이었다. 그를 직접 따랐던 수많은 음악인들뿐만 아니라 그와 면식이 없었던 음악인들도 넓고 깊게 공감한 것은 바로 그런 태도 아니었을까. ‘언더’, ‘인디’, ‘자립’ 등의 말로 표현되는 태도를 이전의 실천에서 발견하려면 조동진이 해 왔던 일들을 헤아리지 않고는 불완전할 뿐이다.

음악, 그것도 대중음악에 대해서 구도(求道)의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조동진과 하나음악이 형성한 공동체적 분위기가 귀족적이고 엘리트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중음악의 자존(自尊)을 가지기 위해서 이렇게 예외적으로 구도적인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이 있을까.

 

“강의 노래”

 

그 자존이 무너져 내렸다. 그가 침묵했던 1997년부터 2015년까지의 시간을 ‘대중음악의 자존이 무너져 내린 시대’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칠까. 어떤 사람들에게 그 시간은 ‘눈부신 세상’이었을 테니 지나칠 것 같다. 무엇보다도, 한국 대중음악은 자조를 가뿐이 넘어 자찬(自讚)의 단계로 진입했다. 변방이라는 지위를 조금은 벗어나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시간에  대해 ‘눈 먼 행복과 벗겨진 꿈 / 눈물 없는 슬픔과 사랑 없는 열기만 가슴에 있네’라고 미리 통찰한 사람도 있었다.

그 동안 한국 대중음악의 세계는, 더 넓게 보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정말 더 좋아진 것일까. 답은 엇갈릴 것이다. 그런데 조동진의 음악이 그에 대해 심오하고 발본적인 질문을 던진 음악이라는 점에 대한 답은 엇갈리지 않는다. 이제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사라졌다. 세계를 다르게 느끼고, 생각하고, 겪는 방법을 소리로 전해 주던 사람이 떠나 갔다. 아, 우린 또 얼마나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가. | 신현준 hyunjoon.shin@gmail.com

 

 

1947. 9. 3 – 2017. 8. 28

 

 

* 지난 8월 8일과 8월 20일 생전의 조동진과 대화를 나눈 내용의 일부는 [한겨레] 9월 4일자에 게재되었다. 인터뷰 전문은 조만간 weiv 에 공개할 예정이다.

** 9월 16일 한전아트센터에서 그가 무대에 오를 예정이었던 공연 <조동진 ‘꿈의 작업 2017’ – 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는 하나음악/푸른곰팡이 구성원들의 연주로 치러질 예정이다.

One Response

  1. 유수엽

    많은 링크가
    없어진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기사를 보고 참
    고맙게 잘 정리했다싶은데
    한단계 들어가면 거의다 링크가 끝어지고
    404가 뜬는군요,
    북마크하고
    자주 들어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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