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정말로 비평이 아니다

2016년 11월 26일, 김작가와 배순탁, 두 평론가는 비슷한 시간대에 같은 사건에 대해 길지 않은 글을 페이스북에 남긴다. 두 평론가 모두 촛불집회 무대에서 예정되어 있던 DJ DOC의 공연이 ‘수취인분명’의 여성 혐오적 가사로 인해 취소되었다는 내용의 허핑턴포스트의 기사를 공유하며, 배순탁 평론가는 “이게 검열의 부활 아니고 뭔가? 정치적 올바름 지랄하고 자빠졌네.”라는 문장을, 김작가는 “진짜 별… 이런 극단주의적 ‘검열’도 사라져야 한다.”라는 문장을 덧붙였다. 이후 김작가는 좀 더 긴 글을 공유하며 DJ DOC의 공연 취소가 과거 시행되었던 사전검열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김작가와 배순탁 평론가는 모두 페미니즘에 기반을 둔 여성 단체의 비판으로 인해 DJ DOC의 공연이 취소된 상황을 두고, 과도하게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우고 있다고 말했으며 이를 ‘검열’이라고 명명했다.

언급한 김작가와 배순탁 평론가의 글은 페이스북을 통해 공유된 짧은 두 개의 피드이다. 사실 ‘이것은 비평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비평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주 짧은 글이고 심지어 사적인 공간으로 여겨질 SNS에 공유된 글이기에, 이러한 지적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김작가와 배순탁 평론가의 짧은 두 글은 엄밀히 말하면 비평이 아니다. 단지 ‘좋은’ 비평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비평’이라는 형식적 범주에 속하는 산물로써 생산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글들은 ‘정말로 비평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망설임 없이 두 글이, 평론가의 산물로서는 큰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다. 솔직히 나는 이전에 다루었던 한동윤 평론가나 이종민 평론가의 글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비평적인 태도나 시각을 내포하고 있는 ‘비평’이 아님에도, 오히려 노골적으로 ‘비평가’라는 정체성에 근본적으로 반하는 태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김작가와 배순탁 평론가의 반응은 모두 공통으로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에 근거한 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태도를 내포하고 있는데, (곧 다루겠지만) 비평가는 그 근원에서부터 정치적인 것과 분리하기 어려운 정체성이었다.

따라서, 나는 김작가와 배순탁 평론가의 짧은 두 글을 발판 삼아서, ‘비평가’라는 정체성의 근원에 위치하고 있는 어떤 태도들에 대해 고찰해볼 것이다. 더 나아가, 비평가가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정치성에 대해 논할 것이다. 이를 통해,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검열’이라는 프레임을 씌웠던 김작가와 배순탁 평론가의 짧은 두 글이, 비평가로서 얼마나 부적절하고 무책임한 것이었는지 또한 논증하고자 한다.

 

몬티 카플란 (Monty Kaplan), “나이트크롤러 (Nightcrawler)”

 

기와 비평

우선, 비평가의 어원을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비평을 뜻하는 영어표현은 Criticism이다. Criticism은 ‘분할하다’는 뜻의 그리스어 Krinein으로부터 파생되었다. 흥미롭게도, 그리스어 Krinein은 위기를 뜻하는 Crisis의 어원이기도 하다. 크게 상관이 없어 보이는 위기와 비평은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가? 문화평론가 문강형준은 위기(Crisis)와 비평가(Critic)의 접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비평가 언제나 위기 상황 앞에 있는 사람이다. (…) 말은 비평가가 텍스트에 대해 내리는 판단 하나하나가 사회의 어떤가치 직결되어 있고, 그의 잘못된 판단에서 나오는 잘못된 가치는 결국 사회의 위기를 드러낸다는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1

비평가는 위기와 비상사태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비평가는 정상으로 여겨지는 현상이나 존재로부터 위기를 예민하게 ‘분리’해내는 작업을 수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설령 많은 사람이 DJ DOC의 가사를 놓고 여성 혐오가 아니라고 말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비평가만큼은 이를 위기 상황으로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김작가와 배순탁 평론가는 위기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심지어 주어진 상황에 관해 비상사태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이들을 비난했다. 비평가가 위기를 분리해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위기 상황을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정치적 올바름이 결여된 우리 사회의 위기 상황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누구보다 예민하고 비판적이어야 하는 비평가마저 무너지는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어 ‘비평의 위기’마저 떠올리게 만든다.

 

무의식적 순간에도 의식의 언어를 쓰기

특히 김작가 평론가는 관련해서 내놓은 긴 글에, ‘수취인분명’의 가사를 근거 삼아 DJ DOC의 공연 취소를 요구했던 이들에게 “‘수취인분명미스박 그렇게 불편하고 참을 정도였다면 DJ DOC 측에 가사를 수정해서 불러달라고 하던지, 아니면 노래를 빼고 해달라고 요청했으면 충분한 일이다.”라고 썼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제일 나서서 요구했어야 하는 이는 바로 ‘비평가’라는 정체성을 가진 그 자신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비평가야말로 그 누구보다 위기 상황의 최전선에서 그것을 분리해내야 하는 자이다. 많은 이들이 인지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수용한 어떤 위기가 있다면, 그것을 앞장서서 비판하고 성찰하는 역할이야말로 평론가의 근원에 놓여있는 의무다. 김작가 평론가는 스스로가 이 최소한의 것마저 내팽개쳤음을 너무나 당당하게 밝힌다. 그 순간, 우리는 그가 ‘비평가’라는 정체성마저 함께 내려놓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문학평론가 도정일은 무의식과 의식이라는 개념을 통해 비평의 근본에 대해 논한다. 그의 문장을 옮겨적는다. 창작과 비평은 문학의 나라를 구성하는 개의 공화국이다. 양자는 서로 나란히 있으면서도 통합되지 않으며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공화국을 지배하는 언어, 관습, 제도들은 서로 다른 규약을 갖고 있다. 창작의 언어는 가장 의식적인 순간에도 기본적으로는 무의식의 언어이며 비평의 언어는 가장 무의식적인 순간에도 기본적으로 의식의 언어이다.”2 이는 단지 문학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DJ DOC라는 창작자의 ‘수취인분명’이라는 산물이 무의식의 언어로 이루어졌고, 특히 “미스박”이라는 가사는 가장 무의식적인 순간이라고 하자. 많은 이들이 이것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하더라도, 적어도 비평가만큼은 그것에 대해 의식의 언어로 차분하고 꼼꼼하게 접근해야만 한다. 하지만 김작가와 배순탁 평론가는 무의식적인 순간에 의식의 언어로 반응하려고 노력했던 이들에게, ‘검열’이라는 검토되지 않은 프레임과 심지어 지랄하고 자빠졌네라는 극단적인 무의식의 언어로 대응한다. 누구보다 의식의 언어를 구사해야만 하는 이가 그 누구보다 무의식적인 언어를 구사할 때, 우리는 그를 비평가라고 부를 수 있을까?

 

“검열”이라는 자기모순과 정확하게 거리 두기

오히려 나는 김작가와 배순탁 평론가에게 묻고 싶다. 두 사람의 논리대로라면 현실에서 객관적인 비평, 두 사람의 단어로 바꾸어 말하자면, “검열”이 아닌 비평이 과연 존재하는가? 사실, 비평은 결코 검열일 수 없다. 검열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검사나 심의 등이 비판과 평가라는 비평의 핵심 요소에 준한다고 가정하더라도, 검열의 필요조건은 국가 기관처럼 공권력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백번 양보하여, 김작가와 배순탁 평론가의 두 글의 전제로 추론이 가능한, ‘특정한 입장에 기반을 두어 중립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무언가를 비판하고 평가하는 것’이라는, 넓은 의미의 “검열”을 받아들인다고 하자. 그렇다면, 김작가와 배순탁 평론가가 말하는 ‘검열’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오직 기계적 중립을 취하는 비평이다. 하지만 비평은 비판과 평가로 이루어지고, 이는 필연적으로 중립적일 수 없다. 비평가의 주관과 신념이 개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검열’이라는 범주에 의하면, 그 어떤 것도 비평일 수 없다. 이렇게, 대중음악 평론가 김작가와 배순탁은, 자신들이 쓴 페이스북의 짧은 피드에 의해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다.

덧붙여, 비평가에게 요구되는 객관성은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상태를 취하는 기계적 중립이 결코 아니다. 비평가에게 요구되는 객관성은 주어진 텍스트를 그리고 그것을 통해 바라보는 현실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직시하는 것이다. 현실을 정확히 밝힌다는 것은 곧 어떤 이상에 준하여 비판하고 행동하는 것”3이라는 문학평론가 백낙청의 문장처럼, 비평이란 정확하게 거리를 두는 문제이다. 비평이 본래 있어야 할 곳은 원근법적 조망과 전체적 조망이 필요한 세계, 특정한 관점을 취하는 것이 아직도 가능한 세계이다.”4라는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비평가는 산술적으로 계산된 정중앙에 위치하여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다. 비록 특정한 이상과 관점에 근거하더라도, 그것을 토대로 논리적으로 텍스트를 검토하여 현실에서 위기 상황을 분리해내는 사람이야말로, 비평의 어원이 제시하는 비평가의 근원에 가까울 것이다. 적어도, 비판을 제시하는 이들에게 큰 고민 없이 “검열”이란 딱지를 붙이는 누군가보다는 말이다.

 

콜린 리온스 (Colin Lyons), “자동적 폐허 (Automatic Ruins)”

 

레토릭 그리고 비평의 작은 역사

물론 고작 비평이라는 단어의 어원으로부터, 현실적인 책임과 의무를 도출해내는 것이 지나친 비약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오늘날, 많은 ‘비평가’는 정치적인 지점과 전혀 무관한 존재처럼 보인다. 영역과 관계없이, 비평이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기능은 정치적인 것에 관한 논의가 아니라 대중이 놓칠 수도 있는 미학적인 지점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또 실제로 많은 비평가가 미학적 비평으로써 비평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비평의 역사적 기원은 미학적 비평이 아니었다. 테리 이글턴에 따르면, “(…) 역사적 기록상, 초기 비평에서 가장 일반적인 양식은 요새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학적’ 비평이 아니었다. 초기 비평의 일반적 양식은 지금 사람들이라면 ‘담화 이론’이라고 부를 비평, 특정한 사회 국면에서 특정한 언어 용법이 가지는 물질적 효과를 분석하는 비평이었다. (…) 이러한 비평을 일컫는 이름이 레토릭Rhetoric이었다. (…) 고대 후기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비평’은 레토릭이었고, 중세 이후까지도 레토릭은 지배계급에게 정치적 헤게모니 테크닉을 가르치는 텍스트 훈련이었다.”5

즉, 비평의 역사적 기원은 정치성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그 정반대로 정치적인 효율성을 위해 기능하던 레토릭(Rhetoric)이다. 현대 사회에서 레토릭이라는 표현은 궤변이나 다소 진부한 발화를 비꼬는 의미로 사용되곤 하지만, 이러한 편견을 걷어낸다면 레토릭은 흔히 수사학이라고 불리는 학문이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수사학은 웅변이나 연설처럼 타인에게 무언가를 논증하거나 설득하는 기술 자체와 그 기술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의미한다. 문장이나 담화 등의 언어적 수단을 통해 타인을 설득하거나 논증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담론이, 권력과 어떻게 결합하여 이데올로기와 같은 하나의 체계로 작동하는지를 파악하는(심지어 종종 그 과정에 기여하는) 것이 레토릭 그리고 비평의 본질적인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평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비평가가 아무리 미학적 비평을 수행하더라도 그 근원에 놓여있는 정치적 성격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비평이라는 연립방정식

오해하지는 말자. 이 글을 통해서 하려는 이야기는, 비평의 본질은 오직 정치성이라는 것이, 혹은 비평의 전부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것이 아니다. 내 입장은 사실 비평의 본질을 단 하나로 규명할 수 없다는 회의론적 입장에 가깝고, 앞서 살펴본 비평의 여러 기원과는 별개로 비평의 선험적인 본질을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비평의 본질에 관해 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명백히 비평이 아닌 것들과 계속해서 싸워나가야 한다는 것 정도뿐이다. 그래서 비평이라는 복잡한 연립방정식의 해를 구하기 위한, 미지수의 개수를 하나씩 차근차근 줄여가는 소거법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우리가 구해야 할 해의 개수조차 정확히 모르지만, 아니 이것이 완벽하게 풀 수 있는 방정식인지조차 알지 못하지만, 분명 하나의 해는 ‘정치적 올바름’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x의, y의, 혹은 z의 값일지는 모르겠지만. | 전대한 jeondaehan @naver.com

 

  1. 문강형준. 「어떻게 하면 통치되지 않을 것인가? – 비평의 의미와 문화비평의 임무」. 『문학동네』. 2016. Pg 3.
  2. 도정일. 「작가와 평론가」. 『내일을 여는 작가』. 1997년 1-2월호. Pg 160.
  3. 백낙청.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창작과 비평』. 1966. pg 8.
  4. 발터 벤야민. 「세놓음」. 『일방통행로』. 도서출판 길. 2007.
  5. 테리 이글턴. 「레토릭의 작은 역사」. 『발터 벤야민 또는 혁명적 비평을 위하여』. 이앤비플러스. 2012. Pg 181-182.

One Response

  1. 정말로 애매한 이야기입니다. 비평이 곧 검열인 것은 맞습니다. 검열은 누구의 기준이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겟지요. 이제 이 세상은 무엇이 비평이냐 무엇이 영화냐, 무엇이 음악이냐뿐만 아니라 무엇이 비평이냐 무엇이 평론이냐까지 따질 수 있는, 혹은 따지게 된 시대입니다. 저도 그러한 점에서 무엇이 맞는다고(혹은 나의 검열로 판단)할 수 없다느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정답이고 모두가 평론을 할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예술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 처럼요. 저는 아직까지도 예술은 일정의 기준을 가진다고 봅니다. 예술의 높낮이는 없을 수도 있지만, 예술이냐 아니냐의 차이는 있으며 그것을 비평할 수 있는 기준은 지금도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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