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전자양이라는 괴물이 있었다.] 
[어느 날, 괴물은 1집을 냈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괴물은 군던전에 봉인되었다.] 
[길고 긴 기다림 끝에, 2집이 나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괴물은 다시 한 번 자취를 감췄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20171113.] 

 

[전설에 따르면 던전에 들어간 이는 절대 돌아오지 못한다고 한다.] 

 

프롤로그

요새는 던전에서 만남도 추구하고 던전밥도 지어먹는다는데, 이제 일어나지 못할 일은 없는 거 같다. <던전 앤 드래곤(Dungeons & Dragons>(이하 <D&D>) 시리즈의 RPG(혹은 TRPG)가 7~80년대 영미권을 휩쓸었고, 이후 8~90년대 JRPG가 일본(과 세계?)를 또 한 번 휩쓸었다. 그렇게 얼마 정도, 세계는 대-RPG시대를 맞았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간다. 고전 RPG니 JRPG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는 하지만 게임 형식으로써의 RPG는 수많은 게임들로 퍼져 스며들어갔고, 현재의 시점까지 왔다. 20세기 끝자락에 태어난 나는 그 유산 속에서 사는 셈이다. 그러니까, 구체적인 예로, <언더테일(Undertale)>을 하면서. (언더테일 아시는구나!! 당근 빠따지, 언폭도들아!!)

RPG를 상징하는 몇 가지 요소들 중에서는 당연히 던전이 있다. 아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D&D>나 JRPG의 던전. 그러니까 판타지적인 몬스터들이 득실대고, 쓸데없이 어두컴컴하고 복잡미묘하며, 레벨업을 하면서 다다른 맨 끝에는 항상 겁나 크고 겁나 센 보스가 떡하니 기다리고 있는, 그런 던전은 이제 새롭고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금 <우리의 RPG를 찾아서>를 시작하는 건가, 싶으면 그건 아니다. 이는 단순히 프롤로그일 뿐이다.

여기서 잠깐, <기묘한 이야기>. 일본에서 하는 그거 말고 (물론 일본의 그것도 좋지만) 넷플릭스에 있는 그거. 원제는 <스트레인져 씽스(Stranger Things)>. 80년대에 대한 오마주와 패스티시로 가득 찬 이 기묘한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건 역시나 <D&D>, RPG, 그리고 던전. 평화로운 동네 호킨스의 어느 날, 소년 윌 바이어스가 사라지고, 그의 친구들은 던전 같은 그림자 세계(이 세계의 모든 오브젝트들은 미역 줄기와 거미줄의 혼합물 같은 걸로 뒤덮여있다)로 윌이 끌려들어갔다고 생각하며 기묘한 초능력 소녀 일레븐과 함께 모험을 시작한다. 작품 속에서 아이들은 끊임없이 <D&D> 이야기를 하며 싸운다. 당연하게도 <D&D>의 던전은 현실에 대한 하나의 비유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 형누나언니오빠들과 어른아재할배들, 계속해서 일레븐을 쫓는 비밀 국가 기관, 그림자 세계에서 튀어나온 끔찍한 괴물, 수많은 몬스터들이 호킨스와 그림자 세계라는 거대한 던전에서 아이들을 방해한다.

나는 언제나 ‘현실’과는 동떨어진 각종 환상이 들어간 세계, 그러니까 매우 고전적인 신화나 전기 소설부터 SF/판타지나 최근 애니의 이른바 “이세계” 등의 세계들은 모조리 멀리 떨어져 있는 현실의 비유라고 생각한다. 가끔씩, 아니 사실 매우 자주 환상은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일 때가 있다. <기묘한 이야기>의 환상과 현실이 그런 것처럼. 일종의 환상이자 이세계인 던전은 <기묘한 이야기>에서는 정말로 현실이다. 아마 20세기의 RPG 게임들도 그럴 것이다. 생각해보면 중학생 즈음부터 나는 20세기 RPG가 남긴 유산인 자작 동인 RPG 게임 속에서 살았던 거 같다. 그러니까 <유메닛키>라든지 <이브>라든지 조금 이후에는 <마녀의 집> <매드 파더> <모게코 캐슬> <무서운 걔임> 그리고 기타등등.

그런 기나긴 헛소리와 함께, 나는 어떻게 어떻게 해서 구한 게임이 들어간 폴더를 열었다. 겨우겨우 어쩌다 어쩌다 구한 이 게임은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한 15년쯤 전(전설에 따르면 그 때에는 윈도우XP도 없었더라고 한다)부터 국내에서 활동을 시작한 쯔꾸르 게임 제작자의 신작이다. 인디/동인 게임 제작자들과 덕후들 사이에서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고, 최근에 다시 돌아왔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는 천천히 해야 한다. 일단, 찬찬히 게임 정보를 살펴본다. 보통 이러한 류의 자작 RPG 게임들은 확장자가 exe이기 마련인데, 이번 것은 mp3이다. 확장자를 바꿔보니 플레이어로 가볍게 돌릴 수 있는 쯔꾸르 RPG다. 제목은 간단하게도 [던전]. 그러니까 여태까지 모든 RPG의 요소들을 제대로 끌어왔다는 포부와도 같은 것인가? 헛소리는 계속되었다. 나는 던전.mp3를 눌렀다. 잠시간의 검은 화면. 그리고 메인 화면이 반짝.

노을인지 아침놀인지 모를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 아가리를 벌린 거대한 고양이 머리 괴물. 그 시꺼먼 아가리 속으로 주어진 운명 비스무리한 뭔가를 향해 들어가는 자동차. 딱 봐도 정석적인 판타지의 느낌은 아니었다. 사실 뭐 21세기의 동인 RPG들 중에서도 20세기를 정석적으로 담아낸 류는 그리 많지 않다. 내가 20세기를 잘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많이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언제나 스스로가 21세기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어쨌든, 일러스트에 있어서는 꽤 공을 많이 들인 작품 같다. 몇 초 간 약간 놀라워하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 개의 버튼을 본다. 시작. 종료는 없나? 뭐 ESC를 누르거나 그냥 창을 닫으면 되니까, 상관없다. 저장이나 불러오기는? 아마 시작으로 들어가면 나오지 않을까. 미니멀한 디자인도 좋다. 나는 당장 시작 버튼을 누른다. 설마 매우 흔한 양판소나 겜판소처럼 끌려들어가지는 않겠지?

 

오프닝

[당신은] 
[빛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손끝의 벽과 발끝의 갈림길만이] 
[여기가 아직도 미로 속임을 끝없이 상기시킨다.]  
[앞으로 갈 길이 더 나빠지라는 법은 없지만] 
[지난 길속에 출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허리춤에 매달려있다.]  
[할 수 있는 것은 선택뿐이다.]  
[갈림길 앞에서 자꾸 뒤를 돌아다보며]  
[지금 여기 주저앉는 것도 솔깃하게 느껴질 때]  
[어디선가 희미하게 음악이 들린다.]  
[이상하지만 친근하고 귀엽지만 괴기스러운 아이들의 소리다.] 

[당신은 일단 그곳까지는 가보기로 한다.] 

 

기묘한 레트로 8bit 칩튠 음악과 함께 나름 멋진 문구가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뜨는 몇 개의 문구.

 

[Day Is Far Too Long] 
[] 
[소음의 왕] 
[을 만든 팀 Electron Sheep의 신작] 

[던전] 

 

 

…그렇다. <쥬만지: 새로운 세계>가 무의식 중에 떠올랐지만 다행히도 게임에 빨려들어가지는 않았고, 글은 계속된다. [던전]은 인디 게임(그때 당시에는 ‘인디 게임’이라는 말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제작자들 사이에서도 1인 제작자 게임으로써 칭송받고, 그 특유의 스타일과 감각 때문에도 수많은 추종자(라고 하기 보단 나 같은 어쩔 수 없는 덕후들)들을 양산했다는 팀 “일렉트론 쉽”의 신작이다. ‘정규’ 시리즈의 이름이 붙은 2001년작 [Day Is Far Too Long], 2007년작 [숲]을 지나 2015년의 컴백작 [소음의 왕]을 지나 마침내 그들의 새로운 정규작이 나온 것이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시간으로만 따지면 10년.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지난 이야기

[하루는 너무 길어, 중얼거리던 다락방 소년 괴물은] 
[숲으로 들어가 온갖 기묘한 모험을 하고 결국에는] 
[소음의 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순간도 잠시] 
[괴물은 새로운 던전을 맞닥트렸다.] 
[당신과 함께.] 

 

사실 지난 이야기만 설명하다보면 결국 본겜을 시작 못하는 꼴이 나니까. <스타워즈> 오프닝처럼 기나긴 검은 배경에 시퍼런 설명을 띄울 수도 없으니 지난 세 개의 작품들은 한 문장으로 줄어들었다. 일렉트론 쉽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해온 이종범은 아주 오래 전, 방구석(혹은 다락방?)에서만 만들었다는 [Day Is Far Too Long]을 낸다. 말 그대로의 ‘로파이’한 스타일로 잔잔하고 꿈같은 분위기를 선사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우울하고 독특한 분위기에 취했다. “달이 우물에 빠진 날”에 “치즈달 여행”을 시작한 “아스피린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을 보고 누군가는 “Mavellous(Marvelous가 아니라?)”한 이야기라고 칭송했고 누군가는 “잘 먹겠습니다”라는 칭찬이 어울린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자작 게임의 슬픈 특징 중 하나인 불투명한 후속작과 제작 기간은 일렉트론 쉽의 경우에서도 똑같았다. 오랜 기다림(그 중 1/3 정도는 군대였다) 끝에 이어지는 [숲]은 전작에서의 꿈같은 분위기를 다양한 방향으로 확장시켜 이전 길이의 두 배가 넘는 대작을 만들었다. “유에프오 플레이그라운드”를 배경으로 “카운트 갓”과 “무신론자”가 날뛰고, “소다팝”을 든 “당분인간”이 “여름밤 히치하이커”와 함께 난리를 피우다가 “홀리엔드”로 치닫는 이 기묘한 이야기는 “우리가 사랑하던 아스피린 소년은 어디 갔냐!”는 혹평과 “당분인간이야말로 새로운 아스피린 소년이다”는 호평을 동시에 들으며 ‘저주받은 명작(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이라는 호칭을 얻는다.

나는 이 두 게임을 막 쯔꾸르 게임들을 즐겨하던 때(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넘어가던 때였을 것이다)에 하게 되었다. 물론 몇 년 전에 나온 작품이어서 오래되었다, 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그런 것과는 무색하게 ‘던전 마스터’로써 일렉트론 쉽/이종범이 선사한 이야기들에 빠져들었다. 그러기도 몇 년 후, 갑자기 “쿵쿵”이라는 매우 짧은 플래시 게임이 인터넷에 등장한다. 다시 한 번, 우리가 이전에 알았던 일렉트론 쉽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고, 팬들의 심장은 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쿵쿵”은 그대로 일렉트론 쉽(이제는 ‘팀’ 일렉트론 쉽이다!)의 컴백을 알리는 알록달록한 첫 신호탄이 되며, 몇 달 뒤 [소음의 왕]이 나온다. 전작들과는 달리 조금 짧은 길이의 작품이었지만, 우리가 알던 아스피린 소년과 당분인간은 소음의 왕으로써 세 번째 페이즈에 다다랐고, 다시 한 번 사람들은 열광했다. 이전의 모습들이 여러 방식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더욱 두껍고 단단하게 짜여 새로워졌다. 가장 격하게 열광한 부류 중에서는 나도 있었다. [소음의 왕]은 <언더테일>과 함께 나의 GOTY였다. 그렇게, 팀 일렉트론 쉽은 세 번째 정규작을 예견했고, 2016년은 아무 일도 없이 조용했다. 헌정의 의미로 만들었다는 <언더테일>의 오마쥬 팬 게임이 잠깐 나왔고 데모작들이 조금씩 조각조각으로 나왔을 뿐.

그리고 올해가 되어 요즘 게임들의 다운로드 콘텐츠(DLC) 상술과도 같은 ‘에피소드 별 발매’의 스타일로 [던전]이 나오기 시작한다. 4월부터 9월까지 조각조각 나온 [던전]의 조각들은 과연 그 완성체가 어떤 모습일까 사람 애태우게 만들었고, 마침내 11월. [던전]이 발매되었다.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튜토리얼

사실 일렉트론 쉽이 이 모든 걸 친절하게 설명하는 편은 아니다. 플레이어들을 그냥 바로 낯선 세계로 뛰어들게 하는 편이며 개인적으로도 그런 방식이 게임의 세계에 더 깊숙이 빠지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눈을 뜨면 바로 낯선 실험실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포탈>처럼. 하지만, 여전히 갈피를 못 잡는 사람들 위해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잠시 동안 튜토리얼이라고 해야 할까 일종의 설명을 해야 할 거 같다.

알다시피 아니면 알지 않다시피 [던전]은 팀 일렉트론 쉽의 전작들에서 매우 느슨하게 이어지는 이야기다. 바뀌지 않은 점이 있다고 하면 결국 팀의 생명이기도 한 게임적인 방법론이라고 할까, 일종의 개성이다. 그러니까 <언더테일>이 괴물들과의 전투를 일종의 슈팅 게임 시리즈 <동방 프로젝트> 류의 탄막 피하기로 표현하거나, <크립트 오브 더 네크로댄서>가 기존 로그라이크1 게임에 리듬 게임 형식을 더한 것처럼 말이다. 게임의 경우에는 형식이나 구성 자체가 내용과 의미가 되기도 한다. 일렉트론 쉽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방법이나 분위기는 조용한 로파이에서 더욱 기묘해진 싸이키델릭 풍으로, 구성은 팀의 형태를 통해 더욱 탄탄하게 바뀌었지만 역시나 팀 중앙에 있는 알 수 없는 기획자이자 프로그래머, 캐릭터 디자이너, 이른바 ‘던전 마스터’인 전자양 본인의 기운은 여전히 그대로다. 능청맞은 내레이션이나 기묘하고 괴이쩍기 그지없는 캐릭터들, 아이 같은 순수함과 괴물 같은 음침함을 함께 담은 분위기 등도 역시 그대로고. 일렉트론 쉽은 항상 알맞은 형식으로 이 모든 것을, 조금씩 다르게 표현해왔다. [던전]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나는(어쩌면 우리는?) 게임으로 바로 빠져든다…

 

[GAME PAUSE]

음, 게임에 빠져들기 직전에 갑자기 일시정지해서 미안하지만, 비유는 여기까지. 내가 쓰는 게 버겁다. 버거운 이유가 있다. 가끔, 그런 음반들이 있다. 음반이라는 틀을 넘어 다른 매체들까지도 연결되는 음반. ‘컨셉 음반’이 그나마 적절한 호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제8극장의 [나는 앵무새 파리넬리다!]는 대항해시대를 배경으로 한 유쾌한 뮤지컬이고, 어어부 프로젝트의 [탐정명 나그네의 기록]은 (원래 그렇지만) 기묘한 음악-극의 한 형태 같고, 언니네 이발관의 [가장 보통의 존재]는 당연하게도 이석원표 에세이 같으며, 브로콜리 너마저의 [졸업]은 가난한 대학생이 만든 독립 단편 영화고, 아폴로18의 [The Red Album]은 <씬 씨티(Sin City)> 같은 강렬한 스릴러 영화이면서도, 김목인의 [콜라보 씨의 일일]은 잘 만든 연작 소설집인데다가, 피기비츠의 [Mr. Munba]는 키치적인 애니메이션 같다. 언급은 여기까지. 이렇게 다른 매체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영감을 끌어오고 영향을 받은 음반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한다. 본질적으로는 음반이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보면 전혀 다른 무언가이기도 하다. 소설-음반, 영화-음반, 애니-음반, 극-음반, 에세이-음반…

[던전]의 경우에는, 당연하게도 게임. RPG 게임. 8090 전성기의 JRPG 게임이 바로 생각난다. 전자양(혹은 팀 일렉트론 쉽)의 지난 음반들도 게임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게임 OST 음반들이나 칩튠 음반들을 제외하자면 게임을 이토록 닮은 음반은 처음이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던전]은 게임-음반이다. 음반과 관련된 공연이나 마케팅에서도 코인이라던지 레벨업 등의 단어들, 알 수 없는 싸이트들까지도 끌어오며 전자양은 게임을 적극적으로 그들의 세계로 차용했다. 그러므로 <언더테일> 커버는 우연이 아니다.

게임이 다른 스토리텔링 매체들과 구분될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이 있다면 “플레이어”의 존재 여부일 것이다. 인터랙티브함, 이라는 단어를 많이들 볼 수 있는데, 여태까지의 매체들이 (넓은 의미에서의) 작가와 독자가 작품을 통해 바로 매개되었다면 게임은 그 사이에 플레이어를 두어 작가가 만든 세계와 독자가 있는 세계 사이의 매개체로써 활용한다. (물론 어떤 게임은 그렇지 않고, 어떤 게임은 기꺼이 그 경계를 넘는다. <언…>하는 그 게임처럼.) 음반의 경우에는 결국 작가와 독자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게임과 음반의 가장 큰 차이는 여기에서 일어난다. 음반을 듣는 우리는 게임을 하는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그 세계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당연히, [던전]이 게임 같게 느껴진다면, 게임적인 요소가 있다면 가장 큰 특징이 아니라, 또 단순한 분위기나 용어 사용이 아니라, 더욱 중요한 방법이 필요할 것이다.

[던전]의 경우에 그것은 게임의 또 다른 중요 요소인 레벨이라고 생각된다. 게임 제작에서 레벨 디자인이 있지 않은가. 글의 기본 구성단위가 문장 혹은 문단이고, 만화가 컷 혹은 페이지며, 영화가 쇼트/컷/시퀀스 등등이라면 게임의 경우에는 각각의 레벨일 것이다. 그리고 음반의 경우에 기본 단위는 각각의 노래들이다. [던전]의 경우에는 13개의 노래들이 기본 단위가 되어 순차적으로 배치되어 음반 하나를 구성한다. 전자양이 2017년 내내 거의 모든 곡들을 따로따로 결합하고 배치해 [던전 SOUND]라는 싱글 시리즈를 낸 걸 생각해보면, 이 ‘배치’는 완전한 음반의 형태인 [던전]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문제다. 왜 [던전]은 이러한 순서일 수밖에 없을까? 어쨌든, [던전]은 게임이기 이전에 음반의 형태를 띠고 있다. 지극하게도 음반인 것을 게임으로 이야기하려니까 버거울 수밖에. 그럼에도, 게임의 시선에서 또한 음반의 시선에서, [던전]의 레벨 디자인을 분석해볼 필요가 다분하다. 우리는 이제 정말로, [던전]을 공략하러 가본다. 아, 그러기 위해서는-

[GAME RESUME]

 

1회차2 게임 제작자의 도구 상자3

[던전]의 레벨 디자인을 이야기하려면 결국 이전의 음반들도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사뭇 분절적인 밴드의 역사 속에서도 남아있는 ‘전자양스러움’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고 표출되었고, 그들이 마련한 세 번째 던전은 그 분절적인 시간들을 한데로 그러모은다. 이 지점에서 레벨 디자인의 첫 번째 단서를 끌어올 수 있다. [던전]은 결국엔 [Day Is Far Too Long]과 [숲]을 더해 [소음의 왕]으로 나눈 값과도 비슷하다. 지금까지 나온 세 장의 음반들이 모두 담겨있다. 이것을 일종의 정반합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싶다가도 그건 아니라는 느낌도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일종의 변증법, 과거를 끌어와 현재를 만들어내기, 적 면모가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담겨있을까. 드디어 시작이다.

가장 먼저 들여다봐야 할 지점은 음반 사이사이에 있는 1분도 안 되는 짧은 곡들인 “키위”, “생명의 수프”, “유물과 유적”이다. (“우주에서 온 색채”는 “스티커”의 오프닝격인 곡이므로 함께 붙여야 한다.) 13곡이란 트랙 숫자에 비해 살짝은 짧은 37분 14초의 음반 길이에 일조하는 노래들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이 짧은 세 곡이 [던전]의 레벨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들이다. 세 곡 중에서도 특히 “키위”와 “유물과 유적”은 [Day Is Far Too Long] 시절의 로파이 포크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키위”는 애초에 로파이한 질감을 갖고 있고, “유물과 유적”의 기타 스트로크와 멜로디는 바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 지점을 공략한다. 음반이 진행되는 군데군데에 배치된 이 짧은 노래들은(다시 말하지만, 배치는 중요하다), 게임의 시점에서 생각해보면, 그러니까 이런 것이 아닐까.

 

[Loading…] 
[로딩 중 잠깐 상식 : 공식 컴백하기 이전인 2014, 전자양은 Q.T라는 이름의 기묘한 영상에 음악을 제공했습니다!] 

 

게임은 어찌되었던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구동되려면 다음 코드들을 불러올 잠시간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 때문에 로딩이 존재한다. 가끔씩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로딩 화면이나 돌고 도는 시계 아이콘을 띄우거나 게이머들을 조금 배려할 줄 안다면 컷 씬이나 미니 게임이나 팁 같은 걸 끼얹기도 하지만 뭐. [던전]은 음반이기에, 각각의 레벨들을 로딩하면서 짧은 소품들을 선보인다. 이 소품들은 당연하게도 게임의 각 레벨들과 연결되기도 하며, [던전]의 전체 컨셉과도 이어진다. 그 말을 다시 한 번 바꾼다면, “키위”와 “생명의 수프”와 “유물과 유적”은 [던전]의 세 레벨들을 오가는 입구이자 출구, 연결점이며 매개체인 셈이다. 이 곡들을 전후로 [던전]의 레벨들이 나눠지며, 본격적인 디자인은 여기에서 나온다. 이렇게 분류를 하는 것이다.

 

[LEVEL 1 : 던전1 / 오컬트 / 사스콰치 / 돈은 페스트, 우리는 쥐] 
[Loading… : 키위] 
[LEVEL 2 : 던전2 / 명상 / 우주에서 온 색채 / 스티커 / 어두컹컹] 
[Loading… : 생명의 수프] 
[LEVEL 3 : 쎄쎄세] 
[Loading… : 유물과 유적] 

 

세 개의 레벨, 세 개의 로딩. 꽤 완벽해 보이는 구조라고 느껴지는데, 보통 서사 구조 이야기를 할 때 시작-중간-끝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던전] 또한 깔끔한 삼단 구조다. 위의 분류를 보면 게임으로써의 던전은 꽤나 긴 두 개의 레벨을 지나 마침내 ‘최종보스’가 있는 세 번째 레벨로 가는 구성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제는 각각의 레벨을 뜯어보며 팀 일렉트론 쉽이 이전의 시간들을 어떻게 [던전]으로 끌어오는 지를 살펴보자.

 

강약약 강강강약 강중약!

여기에서 게임 디자인의 정석으로 꼽히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Super Mario Bros.)>로 가본다. 게임 역사상 가장 유명한 레벨이자 미야모토 시게루의 천재성을 증명하기 위해 수십 수백 수천번은 분석된 레벨인 1-1이 있는 바로 그 게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의 구성을 생각해보면, 평범한 편인 1-1에서 1-2, 1-3을 지나 중간보스 스테이지 혹은 레벨인 1-4에 다다르고, 다시 한 번 평범한 2-1과 2-2와 2-3을 지나 또 한 번 중간보스 2-4에 다다르고, 이 과정을 반복하며 게임의 난이도는 점점 높아지며 8-4에서 최종보스의 쿠파를 물리치는 격이다. 이 방식 또한 [던전]에서 유효하게 사용된다. 그러니까, 일종의 계단처럼 점차 올라가다 한 번 내려가고, 또 한 번 점차 올라가다 또 한 번 내려가는 걸 반복해서 결국에는 가장 높은 곳(=가장 어려운 곳)까지 올라가는 셈이다. [던전]에서는 레벨 1과 레벨 2가 그러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게임의 난이도는 그렇다면 음악에도 난이도가 있나?

음, 잠깐 딴 길로 새서 사이드 퀘스트로 향하자면- TV Tropes라는 영어판 나무위키 같은 싸이트에는 록과 메탈의 모스 경도라는 항목이 있다. 음악에서(그 중에서도 참 쉬운 말장난을 이용해 ‘록’에서) 스타일이 얼마나 ‘강한지’를 모스 경도에 비유한 항목이다. 레벨 1부터 레벨 11까지 부여된 이 경도는 레벨 1에 비틀즈의 참으로 따스하고 편안한 “Here Comes The Sun“을, 레벨 11에 머즈보우(Merzbow)의 악명 높은 ”1930: Part 1“을 부여하며 음악의 ‘난이도’를 설명하는데, 어쩌면 [던전]의 레벨에도 이 모스 경도를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Day Is Far Too Long]의 ”아스피린 소년“부터 ”오늘부터 장마“까지의 잔잔한 로파이 포크가 ‘약’이라면 [숲]의 반절 정도를 차지하는 ”여름의 끝“이나 ”비행선“ 같이 경쾌한 모던록은 ‘중’정도이겠고, [소음의 왕]에서 체현된 ”멸망이라는 이름의 파도“와 ”우리는 가족“ 같은 싸이키델릭 대곡들은 ‘강’이라고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매우 자의적이긴 하지만, [던전]에 담긴 노래들의 경도를 살펴보면 이 훌륭한 레벨 디자인의 실체를 알아차릴 수 있다. 물론 [던전]에서 이 노래들은 지금의 전자양에 맞게 편곡되어 있어 이전의 강도와는 완전히 닮지는 않았고 그 때문에 이 분류는 당연히 정답이 아니지만 말이다.

 

[LEVEL 1] 
던전 1 (약-중)
오컬트 (중)
사스콰치 (중-강)
돈은 페스트, 우리는 쥐 (강)
키위 (약)

[LEVEL 2] 
던전 2 (약-중)
명상 (약-중)
우주에서 온 색채-스티커 (중-강)
어두컹컹 (강)
생명의 수프 (약)

[LEVEL 3] 
쎄쎄쎄 (강)
유물과 유적 (약)

 

그리고 이를 게임의 난이도와 함께 엮어보자면, 이러한 레벨 디자인이 나온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렇게 [던전]의 공격 패턴을 알아냈다! 중중중강약에 중중중강약에 강약!

 

실전 [던전] 레벨 디자인 공략 법 : 어때요, 참 쉽죠?

그래서 이렇게 기꺼이, 게이머 여러분들에게 1회차 플레이 만에 밝혀낸 [던전]을 레벨들을 공략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다. [던전]은 세 개의 레벨로 구성되어 있다. 레벨 1과 레벨 2는 잡몹이라도 할 수 있는 일반적인 몬스터들이 몇몇 나오다가 중간 보스가 나오고 (절묘하게도 그 보스들 중 하나의 “사스콰치”이기도 하다) 레벨의 끝에서 최종 보스와의 싸움이 이어지고, 다음 레벨로 넘어갈 때 로딩이 시작된다. 어떻게 생각해보자면 레벨 1과 2 사이의 “키위”와 레벨 2와 3 사이의 “생명의 수프”는 또 절묘하게도 음식 이름(물론 “키위”의 그 키위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과일 키위가 아니지만 뭐, 뉴질랜드 원주민들은 날지 못하는 새 키위를 먹지 않았을까)인 걸 생각해보면 이 두 개의 로딩 트랙은 HP나 MP를 올려주는 힐템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던전]의 레벨 디자인과 공략은 이런 셈이다.

먼저, 레벨 1에서 던전 1에 들어가 오컬트 같은 세계를 경험한다. 이 첫 두 곡들은 게임의 시작에 놓인만큼 게임이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려준다. 이어 털북숭이 괴물 사스콰치와의 열띤 중간 보스전 이후 우리는 한 마리의 쥐가 되어 실체가 있는 털북숭이 괴물 사스콰치보다 무서운, 실체 없는 페스트, 돈과 맞서 보스 전을 치룬 이후 키위를 먹고 HP를 회복한 다음 레벨 2로 진입한다. (페스트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자.) 이어지는 레벨 2는 다시 한 번, 조금 더 어려워진 던전 2로 진입한 다음 약간의 쉬어가는 타임인지 명상을 통해 다가오는 전투들에 맞서 몸과 마음을 정비한다. 러브크래프트풍의 코즈믹 호러가 가득 담긴 우주에서 온 색채를 내뿜으며 등장한 두 번째 중간 보스 “스티커”를 겨우겨우 뚫고 지나가면 어두컴컴한 어둠 속에서 어두컹컹! 짖어대는 두 번째 최종 보스와의 더욱 격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까지 다다라 몸도 마음도 지치면 생명의 수프를 먹고, 마침내 [던전]의 최종보스 “쎄쎄쎄”를 만나는 셈이다. “쎄쎄쎄”와의 강렬하고 웅장한, 싸이키델릭한 대격돌을 치루고 나면 우리는 마침내 던전의 유물과 유적에 다다르게 되고, 게임은 끝난다. (야, 어디서 대작냄새 풍기지 않나요?)

그러니까 음악적으로 한 번 더 정리하자면- 전작에서 담긴 로파이 포크, 모던 록, 싸이키델릭 대곡 스타일은 각각 지금-여기의 전자양의 색채를 입고 [던전]에 몬스터처럼 이곳저곳에 퍼져있으며, 이 게임 디자인적인 배치는 자체적인 던전 컨셉과도 정확히 어울리고 전자양이 늘 들려준 기묘하고 엽기적인 세계관과도 정확히 어울린다. 다시 <언더테일>을 끌어오자면 [던전]은 전자양이 선보인 여태까지의 모든 레벨의 패턴들을 하나로 끌어온 모 루트 모 캐릭터의 모든 공격 방법을 이용한 보스 배틀과도 같다. [Day Is Far Too Long]의 방법과 [숲]의 방법과 [소음의 왕]의 방법을 끌고 와 [던전]의 방법을 만들어냈다. 그러면서도 단순한 자기 반복에서 끝나지 않고 한 번 더 변화한다. 삼단변신. 전자양 MK3. 지금까지의 최종형. 그러니까 마치 프리더. 모든 방법들을 모조리 끌고 와 다시 한 번 새롭게 했기에 이 음반은 특히나 덕후들을 위한 선물이고 그래서 뭐, 덕후로써는 “잘 먹겠습니다”라고 해야지. 그게 바로 [던전]이 빛나는 지점이다. 전자양은 그들이 어떤 밴드인지 잘 알고, 어디로 가야하는 지도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해서 그들의 수많은 가능세계 중에서도 가장 정신없고 재밌고 멋진 루트를 타 스스로 최종보스가 끝없는 어둠이 되고 또 스스로 불타오른다. 으레 모든 던전들이 그랬듯이, [던전] 또한 무한한 재미와 함께 클리어 된다. 띠리링. 1회차 클리어! 하지만,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2회차가 기다리고 있고, 나는 아직 밝혀내지 못한 게 많다.

[여기서 저장하시겠습니까?] 
[GAME SAVED] 

 

2회차 젊은 친구 던전에 온 걸 환영하네4

 

[게임을 불러오시겠습니까?] 
[Loading…] 
[로딩 중 잠깐 상식 : 데모곡 저고는 백은선의 시 <저고>에서 따왔습니다.] 

 

1회차에서는 겨우, 아니면 무려? [던전]의 게임적 구성, 레벨 디자인을 팔 수 있었다. 마치 게임의 소스코드를 직접 분석하는 느낌이랄까. <언더테일>의 팬들이 디버그 모드로 들어가 무수한 코드의 줄기 사이에서 숨겨진 비밀들을 찾아낸 것처럼 어쩌면 이 짓거리도 [던전]의 숨겨진 보물들을 찾아나서는 과정이 되면 좋겠다. 그래서… 1회차를 달리며 [던전]이 어떠한 구성과 난이도와 레벨로 되어있는지를 알아냈다. 하지만 그것만 알고 게임을 하면 쓰나.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레벨만 분석하면 왜 마리오가 그렇게 화면 오른쪽으로 냅다 달려가면서 점프하는지는 모른다. 이야기가 필요하다. 스토리가, 내러티브가. <언더테일>의 모 보스들이 진.짜.겁.나.어.렵.다.는 것만 알면 뭐하나. 왜 그 보스들이 그렇게 극악한 난이도를 선보이는지를 알아야한다.

뭐 어쨌든, 게임은 다시 켜졌고, 2회차에서 공략해보는 건 스토리다. 겉보기로는 [던전]은 매우 기본적인 느낌의 RPG다. 중세풍의 게임 판타지. 던전이 있고, 그곳을 탐험하고, 몬스터를 잡고, 코인을 얻고, 레벨업을 하고, 보스와 싸우고, 다음 레벨로. 하지만 이 클리셰는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되어 왔고, 수많은 쯔꾸르 게임들이 ‘중세풍의 게임 판타지’를 넘어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해왔다. <유메닛키>의 방대한 세계 구석구석에 퍼진 괴이한 이미지들이 만들어낸 알 수 없는 은유, <이브>의 잔혹동화 같은 배경 속에서 지레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들, <언더테일>의 게임적 디자인들과 전체적인 이야기 사이의 상관관계 등등. 생각해보면 매우 비유적으로 이야기를 채운 게임들도 참 많다. [던전]도 그런 예시가 아닐까. 가장 기본적인 구성을 바탕으로,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니까, 낯선 던전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아무것도 모르는 순박하고 순수한 순백의 용사여, 일단 던전에 왔으면 게임을 시작해야지.

 

[젊은 친구 던전에 온 것을 환영하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곳이라네] 
[둥글고 축축하고 북적대는 곳이라네] 
[자네 이곳에서 고작해야 백년이나 살까] 
[세이프 섹스를 하고 새 생명을 내보내지 말게] 
[이 던전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 만들었다네] 

 

던전에서 우리(라고 하면, 인간 플레이어)가 마주치는 건 당연히 몬스터, 괴물들이다. 고전적인 슬라임도 있고, 고블린이나 오크도 있을테고, 해골 전사 같은 것도 빼놓으면 안 되고, 징그러운 벌레들도 있어야 하고, 아니면 창의력을 발휘해서 슬라임-오크-해골-벌레 같은 걸 만들어도 되고, 통이 크다면 톨킨 때부터 판타지의 영원한 최종 보스였던 드래곤을 배치해도 좋다. 지극히 평범한 중세풍의 게임 판타지 속에서 몬스터를 죽이면 우리는 황금을 코인을 EXP를 얻는다. 하지만 생각이 드는 게, 이러한 던전들은 대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를 정말 세세히 설명하는 게임은 없었다. 던전은 단지 언제부터인가 거기 있었을 뿐이다. 무슨 원리로 돌아가고, 무슨 생태를 갖췄는가? 쿠이 료코의 <던전밥>이 흥미로운 이유는 요리의 방식으로 창의력을 발휘해 던전의 생태와 생활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던전]은?

 

입을 먹는 입5

게임에 초입에 놓인 “던전 1”과 “오컬트”에서부터, 이야기는 전형적인 “던전을 공략하는 용사의 이야기”에서 빙 돌아간다. 그 자리에 있는 건 용사들이 휘두르는 칼에 스러지는 몬스터들의 이야기. 슬프게도 어떻게 던전이 만들어졌고 던전에 오게 되었는지 따위를 기억하기에, 이미 괴물들은 너무 깊이 내려왔다. 끝없는 미로보다 더 깊은 어둠 속에서 서로를 끌어안는 그들은 단지 그곳에 그렇게 존재했을 뿐이지만, 어둠의 한가운데로 내몰리고, 몬스터라고 불리고,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게 된다. 그나마 집이 될 수 있었던 던전마저 돈과 힘, 코인과 EXP의 소문이 들어오면서 용사들에 의해 대대적인 재개발과 젠트리피케이션이 이뤄진다. 던전에 들어오는 건 어른과 노인, 횃불과 쇠, 마법과 창. 철과 오크. 그들의 뇌를 채운 영원한 삶, 영원한 꿈. 그리고 “오컬트”의 시작.

이제 던전 곳곳에는 빨간 진흙 벽돌들이 아닌 형광 플라스틱 토템들이 들이찬다. 괴물들의 몸은 피가 흐르는 살과 단단한 뼈가 아닌 죽은 다마고치와 악취 나는 데이터로 채워진다. 영원히 썩지 않는 시체가 된 몬스터들. 영혼의 값은 동전 몇 개와 같으며, 던전은 그렇게 꿈과 희망과 사랑으로 가득 찬다. 죽음은 감옥, 사랑은 열쇠. 이렇게 게임은 영웅 아닌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어둠 속을 헤매는 이야기에서 출발하며, 게임의 전체적인 설정을 제공한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자신도, 각자도 제대로 볼 수 없다. 우리는 과연 인간인가, 아니면 몬스터인가. 우리의 몸은 과연 어떤 모양을 띄고, 어떤 냄새를 풍기는가. 이곳은 죽거나 아니면 죽이는 곳이다. 내몰리는 삶, 입을 먹는 입. 여기 괴물들이 있다. 누군가는 이곳을 지옥이라고 부른다. 레벨 1의 중간 보스인 “사스콰치”와 최종 보스인 “돈은 페스트, 우리는 쥐”는 거대한 몬스터들을 게임 속에 본격적으로 출연시키며 던전 속 몬스터들의 이야기를 더욱 발전시킨다. 먼저 등장하는 건 털북숭이 사스콰치. 발자국 소리가 쿵쿵, 멀리서 들려오네 쾅쾅.

 

 

사스콰치가 입을 연다. 입을 먹는 입을 이야기하는 입. 이전에도 간간히 호출되다가 “사스콰치”에 이르면 그의 입을 통해 맹렬한 증오가 섞여 불리는 “너”도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널 그냥 잡아먹을 걸!] [널 그냥 구워먹을 걸!] 아주 처음에, 던전에도 인간들이 몇 있었을 것이다. 괴물들은 딱히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는 인간들을 무심하게 여겼을 것이며, 한때는 그들이 너무 멋지게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인간들의 입을 통해 던전의 소문이 퍼지고, 결국 이곳은 폐허인 꿈동산, 뒤집힌 바벨이 되었다. 사스콰치가 외친다. [너도 어른이 되고 털이 자라면] [다른 나의 모습을 증오를 할까] 너는 힘을 얻고, 돈을 얻는다. 너는 노인이고, 영웅이고… 어찌되었던 어른이다. 어른들은 네온빛 소비자. 어른들이 던전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레벨 1의 노래들이 들려주는 건 이러한 던전의 전체적인 풍경, 곧 블랙홀이자 하수구인 지옥도다. 이곳은 원래 자연의 법칙으로 돌아갔지만, 어른 인간들이 들어오고 나서는 신세계의 신앙이자 신화, 혁신적으로 미친 과학, 돈에 의해 돌아간다. 털북숭이 사스콰치 따위 두 발 딛고 서기엔 돈이 아깝다.

 

[몬스터를 죽이면, 코인이 나옵니다!] 
[코인을 모이면, 부자가 됩니다!] 
[부자가 되면, 힘을 얻습니다!] 
[힘을 얻으면, 레벨이 오릅니다!] 
[레벨이 오르면, 더 강한 몬스터를 죽일 수 있습니다!] 

[더 강한 몬스터!] 
[더 비싼 코인!] 
[더 많은 힘!] 
[더 높은 레벨!] 

[더 많이!] [더 많이!!] [더 많이!!!] [더 많이!!!!] 

 

그렇게 외치면서, 무수한 수많은 소비자들을 몰아오며 등장하는 최종보스, 페스트. 영혼값이 동전 몇 개인 ‘우리 몬스터’들은 쥐가 되어 실체 없는 페스트에 휩싸이고, 싸움이 시작된다. 허공을 겨냥한 주먹질과 발길질. 신용과 그래프의 값들이, 뼛속까지 박힌 다이아몬드와 금은보화들이, 하늘에서 추락한다. 거대한 탄막, 무수한 폭격. 왕관 쓴 해골 병사의 공격. 만만치가 않다. <소울 시리즈>의 무수한 괴물도 이보다는 덜 강하고, <컵헤드>의 미칠 거 같은 공격 패턴도 이보다는 덜 변화무쌍하고, <아이 워너 비 시리즈>의 무수한 함정도 이보다는 덜 복잡하다. 네온싸인은 레이져가 되어 우리를 지지고, 차고 넘치는 동전들은 제 값을 잃고 총알이 되어 우리의 심장을 겨냥한다. 뱅뱅뱅, 빵야 빵야 빵야. 우리의 심장 속으로 파고든 동전은 페스트가 되어 핏줄 속으로 흘러들어온다. 우리를 돈으로 감염시킨다. 우리의 DNA를 바꾼다. 왜냐면 이 모든 건 우연이 아니니까. 어느새 눈동자는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우리는 영원한 노예가 된다. 그렇게 되면 안 된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우리는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공격해야 한다. 돈을 모으고, 경험치를 쌓고, 파티를 만들고, 레벨을 올려야 한다. 그것만이 유일한 길.

사실 레벨 1의 보스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문제와 폭발을 단둘이서 일으키자고 하는 말들이 시작되긴 했다. 단순히 맞서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정말로 필요한 건, 총체적이자 전체적인, 근본적이자 근원적인 문제와 폭발. 보스전에서 어느 몬스터는 너희들의 태양을 맞추어 쏘아 떨어트린다. 너희들의 궁전을 갉아 무너트린다. 도시를 파헤쳐 거꾸로 심기 시작한다. 우리가 원하는 건 동전 몇 개가 아니다. 태양 뒤에 감춰진 밤, 궁전 뒤에 감춰진 삶, 동전 뒤에 감춰진 삶. 진동하기 시작하는 해골,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과연 어떻게? 그 ‘어떻게’의 이야기는 아직, 다음 레벨 혹은 다음 회차에서 밝혀지는데… 슬프게도, 아직 2회차에서는 공략 가능한 부분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외칠 수는 없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딱 하나.

 

[새 씨앗들을 위해, 지구를 갈아엎자!] 

 

[LEVEL 1 Clear!] 
[LELVE 2 Loading…] 

 

막간을 이용한 이야기 하나 : 그렇습니까? 키위샙니다

 

 

정신없는 돈-페스트와의 전쟁이 겨우겨우 마무리되고, 레벨 2로 들어가기 전, 로딩의 시간… 한편., 키위새의 경우. 적이 없는 그들은 날 필요도, 공격하고 방어할 필요도 없다. 밤새도록 그들끼리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놀 뿐. 텔레비전은 키위의 모닥불이고, 마쉬멜로우는 노예들의 영혼이다. 날지 못해서, 키위새는 멸종 위기에 처했다. 나는 문득 박민규가 생각나는데… 어느 날 전생에 훌리건이었던 냉장고에서 <카스테라>를 꺼내와 간식으로 내줬기 때문이다. 이렇게 귀한 걸… 먹어도 돼? 박민규는 웃기만 했다. 키위는 몸에

좋으니까. 개복치와 대왕오징어가 뒤엉킨 것 같은 세상에서 기린으로 너구리로 변하는 사람들 중에도 키위새가 있었을 것이다. 오리배 시민 연합에게 물어보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박민규의 동물원, 보다는 <동물의 왕국> 같은 세계도 결국 [던전] 같은 곳이니까. 카프카도 체코의 거리들을 걸어 다니며 수소문한 끝에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를 찾아냈고. 박민규도 서울의 갑을고시원 거리를 돌아다니며 집요한 탐문 끝에 동물이 된 사람들을 찾아냈다. 그가 키위새를 찾으러 펠리컨을 타고 뉴질랜드로 향했을 때, 이미 키위는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있었다. 웨어 이즈 키위? 이제는 정장을 입고 다니는 마오리 족 원주민이 웰링턴 코스트코를 가리킨다. 데어 이즈 키위! 웰링턴 코스트코에서 키위 하나를 사먹으며 박민규는 중얼거린다. 몰라 몰라, 골드 키위라니.

 

[박민규는 웰링턴 코스트코 골든 키위를 얻었다!] 
[5000코인이 차감되었습니다!] 
[박민규는 웰링턴 코스트코 골든 키위를 섭취했다!] 
[HP2 회복되었습니다!] 
[박민규 : 몰라 몰라, 사기템이라니!] 

 

한국으로 돌아오니 또 한편 오한기는 홍학이 되어 있었고 늙은 암소와 동거를 시작했으며 소설가 정지돈에게 전화를 걸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한기 : 나는 홍학이다!] 

 

완벽한 우화

나는 조지 오웰의 작품들 중에서도 에세이들을 좋아하지만, 결국 유명하고 잘 팔려서 출판사에게 돈을 주는 건 [1984] 혹은 [동물농장]이다. 홍학이 된 사나이 오한기는 자서전 [홍학이 된 사나이]에서 이렇게 말한다.

 

[조지 오웰은 <동물 농장>에서 전체주의를 비판했고]  
[나쓰메 소세키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통해 인간사의 부조리를 지적했다.]  
[카렐 차페크도 <도룡뇽과의 전쟁>의 서문에 나는 인간을 생각하며 이 책을 집필했습니다.”라고 썼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너무 유명해서 더 이상 할말도 없다.] 
[<금수회의록> <이솝우화> <서유기> 모두 마찬가지다.]  
[완벽한 동물 소설은 없다.]  
[이 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놓고 우화가 된 이야기들은 결국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던전]도 마찬가지다. 동물이 몬스터일 뿐, 우화가 되고 결국 인간의 이야기다. 대놓고 우화여서 이걸 모르는 게 우스울 정도다. 레벨 1이 일종의 발단으로써 던전의 상황과 몬스터들의 처지, 돈이라는 이름의 페스트, 지구를 뒤엎자고 소리치는 발단의 시작까지를 다뤘다면 레벨 2는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 전, 잠시 쉬어가다가 (기억하자, 약-중 노래가 2곡 이어지고 바로 중-강 보스와 강 보스가 나타난다!) 한 발을 호기롭게 내딛고, 그 길로 냅다 달려가기 시작한다.

“던전 2”에서 시작해 잠시 “명상”의 시간이 찾아온다. [던전]이 진행되는 내내 끊임없이 반복되고 변주되어 등장하는 빛과 어둠의 테마는 계속되고, 이제 몬스터들은 더욱 ‘너’ 혹은 ‘그대’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 호명을 받아내는, 또 다른 몬스터인지 아니면 던전에서 길을 잃은 아이인지 아니면 포기한 쪼렙 뉴비 용사인지 모를 ‘너’ 혹은 ‘그대’는 플레이어로써 그 메시지를 받는 동시에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밤은 끝없는 미로고, 여긴 끝없는 암흑인 와중, 우리는 그대를 유일한 등불이라고 부른다. 일종의 사랑고백 같은 전언들은 점점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인 당신의 위치를 부각시킨다. 그래, 당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지금 나원영의 던전 공략기를 따라오고 있는 당신, 당신도 그 세계에서 중요하다. 이제야 알아차린 것인가. 이미 우리는 흔해빠진 양판소나 겜판소마냥 게임 속 이세계로 빨려 들어왔다. 잘 따라오고 있는가? 어디 다친 곳은 없는가? 이해 못하는 게 있다면 전적으로 내 탓이다. 그건 미안하다. 하지만 아직 나에겐 물약이 많이 남았고, 이야기도 많이 남았다. 나도 괴물들과 함께 너, 그대, 당신을 보고 합창한다.

 

[네게 모두 주고 싶어] 
[네게 뭐든 주고 싶어] 

 

인간들을 물리치고 보스 몬스터들까지 물리치며 돈을 벌고 경험치를 올리고 레벨을 올린 우리들. 어느새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깊이까지 다다르고, 잠깐. 명상의 시간이 찾아온다. 밤이기 때문이다. 이미 지난 보스전에서 우리는 던전의 태양을 부숴버렸다. 밤의 세계로 진입한 우리들. 깊은 밤의 질서를 따라가고, 한 번 세계를 뒤집기 시작한 우리는 이제 끝을 봐야하며 이제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 모두가 자고 있고, 밤을 지키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만이 뜬눈 또 맨눈으로 밤의 정중앙을 바라보며 울고 또 운다. 밤은 무서운 시간이기 때문에. 하지만 이 무서운 밤의 세계로 진입했기 별과 달을 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깊은 공간에서도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어둠 속에서 꿈을 꿀 수 없으면 무슨 소용이람. <언더테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비오는 한밤의 늪지대에서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플레이어와 괴물 아이가 멀리 있는 성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조용하고 외로운 순간. 아름다운 순간. [던전] 또한 다가오는 거대한 전투들 앞에서 잠깐 편안한 꿈을 꿀 수 있는 시간을 준다. 지구를 뒤엎으려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꿈과 희망.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 이성적으로 이런 말을 하면 모두가 이상적이라고 해서, 나는 그냥 감성적으로 감상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꿈을 꿀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우리는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우리는 꿈과 희망을 가졌다] 

 

막간을 이용한 이야기 둘 : 크툴루의 재림

 

 

우주에서 온 색채가 하늘을 가로지른다. 마치 2차 세계 대전 때 런던 하늘을 가로지른 V2 미사일처럼. 중력의 무지개가 눈앞에 펼쳐진다. 무서운 일이 생긴다, 무서운 일이 생긴다! 레벨 1에서 페스트를 상대로 싸웠고, 레벨 2의 보스전은 크툴루다. 그가 다가온다. 어두컴컴한 밤의 영역을 뚫고, 왈왈컹컹 개가 짖는다. 게임 오프닝 화면에 있는, 거대한 아가리를 쩍하고 벌린 고양이를 향해 달려가는 조그마한 차가 기억나는가? 그 차가 크툴루가 뿜어낸 “우주에서 온 색채”에 집어삼켜지는 가엾은 차다. 거대한 몸집. 코즈믹 호러. 그 앞에 여태까지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몬스터들이 있고, 내 옆에는 ‘너’가 있다. 물론 이곳에는 게임을 공략 중인 나도 있고, 이 모든 공략기를 읽고 있는 당신도 있다. 그러니까, 준비 됐나?

 

구원

나는 자주 구원에 대해서 생각한다. [weiv] 편집장님을 자주 생각하는 건 아니다. (죄송합니다, 편집장님) 레벨 2, 스테이지들이 계속해서 진행되고 맵을 돌파하고 통과할수록 몬스터들은 한 줌의 코인이 되어 어른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 남은 괴물들은 적어지고, 이 던전의 밤은 춥고 무섭고 더럽고 가렵다. 기본 장착으로 입고 있는 하얀 티셔츠에는 피가 잔뜩 묻었다. 낡은 카디건 보풀을 뜯어낸다. 이곳은 덥고 우스우며 따갑고 마려운 곳이다. 우리는 페스트를 지나 “스티커”와의 보스 배틀을 시작한다. 이름이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만. 우리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있는 희귀한 금속 메달을 얻었고, 룸미러 아래 흔들리는 숲속향을 지나왔고, 달처럼 불룩하게 불러온 부끄러운 트로피들의 무덤들도 지나갔다.

이미 오래 전에 알아차렸겠지만, 던전은 지옥이고, 지구이고, 세계고, 우주고, 지금-여기다. 간편한 비유, 간단한 산수. 조지 오웰이 오래 전에 써먹었고 박민규와 오한기가 최근에 써먹은 우화. 그럼에도, 이 비유 혹은 우화는 언제까지나 유효하다. 이곳은 정말로 던전이고 정말로 지옥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돈이 조금 더 많아 조금 더 살기 좋은 지옥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곳을 끝내버리려고 한다. 그러니까, 박민규식으로는 언인스톨, 전자양식으로는 “홀리엔드”. 끝은 또 하나의 시작이 되기, 가장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래디컬한 끝은 그만큼 더욱 새로운 시작이 된다. 사실, 팀 일렉트론 쉽은 이전 게임인 [소음의 왕]에서도 이 이야기를 한다. “거인”이 몰고 온 “멸망이라는 이름의 파도”가 세계를 뒤덮고, “생명의 빛”이 그 이후를 비춘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대명제가 사라진 서드 임팩트 이후의 세상에서 아스피린 소년, 당분인간은 “소음의 왕”이 된다. 전자양은 [소음의 왕]으로 그 전복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곳에도 천국과 지옥, 혁신적인 현대 사회의 이야기가 있다. 뒤엎고 불태우고 폭발을 일으키고 갈아엎는 이야기가 가득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던전]도 마찬가지다. 전자양의 이름이란 몬스터는 다른 수많은 몬스터들과 함께 이 지옥을 구하려고 한다. 이 게임, 이 음반을 통해 이 게임이자 음반이 있는 세계 자체를 뒤엎으려 한다. 이 게임을 하고 이 음반을 듣는 너, 그대, 당신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하지만 여기서 잠깐, 보스전 직전에 게임을 세이브하는 건 게이머의 센스다. <언더테일>은 모 루트 보스전이 시작하기 전에 여태까지의 맵들을 다시 돌아보고 그 맵들의 몬스터들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한 번 더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셈이니 회차가 하나 더 추가되는 셈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세계를 구원할, 총체적으로 뒤엎을, 마지막이자 처음이고 끝이자 시작인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 걱정해도 빛은 줄지 않으니까. 구원은 이제 싫다고? 이럴 때 무슨 표정을 지어야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웃어야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처음 지어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어 어색하지만, 그 앞에 있는 우리는, 너는, 당신은 아름답다. 우리 앞에 안개 낀 숲으로 가는 터널이 놓여있다. 원래 모든 엄청난 이야기들은 홀몸으로 세계를 구원하는 류가 아닌가. 그러니까, 자 이제 모두-

 

[여기서 저장하시겠습니까?] 
[GAME SAVED] 

 

마지막 거대한 두 보스전을 남기고, 잠깐의 시간이 남아있다. 정지된 게임, 시간의 틈새, 던전이라는 이름의 세계를 뒤엎으려는 몬스터들의 움직임은 가장 근원적인 곳까지 파고들어온다. 사스콰치와 페스트와 크툴루와 스티커를 이겨냈다. 돈을 벌고, 경험치를 벌고, 레벨을 올렸다. 우리는 이제 어른들만큼이나 강해졌다. 우리의 무기는 꿈과 희망이고, 우리의 배경은 밤이며, 우리의 지원군은 너, 우리의 공략자는 나, 나의 독자는 당신. 모두가 파티가 되어, 진짜 파티를 시작한다. 세계를, 던전을, 어떻게 뒤집는가. 어떻게 구하는가. 어둠이 밤을 집어삼키려면 우리는 무얼 해야 하는가. 마지막 배틀이 시작된다. 우리는 과연 옳은 길로 갈 수 있을까. 파이널 배틀, 스타트! 그리고, 암전. 어둠이 내린다.

 

지금 여기가 맨 밑

던전에서 가장 어두운 밤만이 퇴적되어, 발자국을 먹는 괴물이 탄생했다. 이 깊이의 칠흑에서는 눈알만 둥둥. 어쩌면 밤이야말로, 어둠이야말로 우리의 적일지도 모르겠다. 눈앞이 어두컴컴. 최종보스가 나타났나? 어디에 있나? 그가 보이나? 어디에 있어? 이쪽, 아니면 저쪽? 나는 보이지 않는데? 냄새가 나고, 소리가 들려, 하지만 보이지 않아. 이 냄새와 소리는 나의 것 혹은 너의 것. 우리의 것일지도 몰라. 어디에 있지?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밤은 점차 두툼해지고 무거워진다. 발밑에서부터 차오르고 눈앞에서부터 빽빽해지는 어둠. 어둠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상처 입힌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나는 나를, 너는 너를 모른다. 어둠을 방패 삼고 밤을 창 삼아 여기까지 왔건만, 너무 많은 어둠과 밤에 물들어진 우리의 마음은 점점 폭력으로 고양된다. 우적우적 누군가를 집어삼키고, 우당탕탕 무언가를 때려 부수고. 어둠 속에서 모든 경계는 사라진다. 진하게 울려 퍼지는 피 냄새와 매캐하게 차오르는 비명, 이제는 분노밖에 남지 않았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 우리는 천국에서 더 나쁜 쪽으로 내려와, 더 이상 나아갈 곳 없이 이렇게 테러의 시를 쓰고 있다, 항상 이런 식이다, 결국에는. 최초의 빛이 힘을 잃고 어두워지면, 우리는 우리를 먹는다. 우리도 입이 있고, 우리는 우리를 깨문다. 책을 많이 읽은 몬스터 하나가 어둠을 찢고 외친다. <동물농장>에서도 결국 그랬잖아! 안 그래요, 미스터 오웰? 어둠 속에 당신도 있나요? 헬로우, 미스터 오웰? 주인을 잃은 개는 스스로 주인이 되고, 우리는 죽고 죽이며 잘 살고 있습니다!

이미 전세는, 아니 누가 누구와 싸우는지도 모르기에 그런 것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은 급속도로 안 좋아진다. 영롱했던 결의와 다짐은 까만색으로 지저분하게 흩어진다. 던전의 가장 깊숙한 곳, 바벨탑의 꼭대기에 어둠이 어두컹컹 내려온다. 불이 짙을수록 그림자도 짙어진다. 점점 일어나 부피를 키우는, 百의 그림자들. 白이 아닌 黑이 되어 우리가 그림자의 발밑에 매달린다. 북적북적 어둠은 우리의 새로운 몸이 되고, 삐죽삐죽 이빨은 우리의 레이저 나이프. 맨 밑에서 우리는 눈을 감은채로 우리와 싸운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모든 것들에 맞서서. 밤이 지나간다. 밤은 노래한다. 밤은 선생이다. 우리는 영원한 학생. 우리는 밤에서 왔지만, 이제는 어디서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의 시체를 우리가 치우고, 우리의 시체를 우리가 만든다. 처음에 우리는 어땠었지? 우리를 봐, 이미 사스콰치와 페스트와 크툴루를 이겼다고. 우리는 이제 자그마한 고아 몬스터들이 아니야, 레벨1 뉴비의 막대기 하나에도 스러지며 동전 두어개를 남기는 영혼이 아니라고. 던전의 맨 밑에 최종보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지? 이 어둠 속에는 아무도 없어, 이 어둠이 최종 몬스터야. 그 속으로 들어오면 누구나 최종보스가 된다고. 우리가 우리의 최종보스야. 우리가 우리의 마지막 상대. 총구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와 뒤통수를 겨눈다. 영화를 많이 본 몬스터가 또 어둠을 찢고 외친다. <설국열차> 안 봤어? 마리오처럼 화면 오른쪽으로만 걸어가던 커티스. 열차의 맨 앞까지 겨우겨우 온 다음에, 지금까지 모든 것들이 있던 왼쪽을 보잖아. 그리고 그의 뒤에 있던 윌포드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우리는 맨 밑에서 던전을 올려다본다. 누군가가 또 중얼거린다. 너무 흔한 이야기야… <동물농장>의 돼지 나폴레옹이 괜히 나폴레옹이 아니라고. 그 흔한 비유를 알아? 어둠은 조용히 몸집을 부풀린다. 우리도 그 몸집에 매달린 살덩이가 된다. 점차 시꺼매지는 화면… 그리고 등장하는 한 마디…

 

[GAME OVER] 
[ENDING : 어두컹컹] 

 

 

그리고, 암전. 어둠이 내린다.

 

암전 이후 : 누군가의 중얼거림

몇 날 며칠간 내려갈 곳 없는 어두컹컹에서, 우리는 우리를 죽이며 레벨업을 했습니다. 달리 할 일이 그것밖에는 없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더욱 많은 코인과 경험치와 힘을 남겼기에, 가장 훌륭한 식자재가 될 수 있었죠. 더 많은 동료들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먹고 자랐습니다. 지금까지 던전은 그런 식으로 운영되어 왔습니다. 가장 효율적인 무한동력. 암전의 세계, 영원한 밤, 만인에 대한 만인의 보스 배틀. 우리는 조용해졌습니다. 책을 많이 읽던 친구 하나는 기어이 살아남아 그러더라고요. 테드 창의 <바빌론의 탑> 읽어봤어? 바벨을 향해 오르고 오르고 오르니까 결국 지상으로 나와 버렸잖아. 우주는 평평하지 않아. 그래도 우주는 둥글다. 돌고 도는 모든 세계. 밤이 가면 낮이 오고, 낮이 새로운 밤, 밤이 새로운 낮이 되죠. 우리는 맨 밑에서 어두컹컹, 조용해집니다.

우리는 세계를 구원하려 했습니다. 공략 방법에 맞게, 차근차근, 코드와 시스템과 로그가 마련해준 길을 따라와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었습니다. 저는 셀 수 없이 많은 동료들을 죽이고 먹었습니다. 모두 여태까지의 실적으로 통통하게 살이 오른지라 맛은 있더라고요. 모두가 동의했습니다. 우리는 이 엔딩에 아직도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페이크 엔딩입니까, 이건? 아니면 배드 엔딩? 우리가 뭘 잘못했습니까? 우리는 열심히 우리를 죽이려다는 어른들과 싸웠다고요. 천애 고아 같은 어린 몬스터들을 모으고 모아서, 악착같이 어른들과 용사들과 싸웠다고. 던전을 휘어잡는 강한 몬스터들까지, 우리 손으로 해치웠어. 우리는 나이를 먹었지, 돈을 모았고. 그래야 세계를 바꿀 힘을 얻으니까. 더 많이, 더 많이, 더 많이. 싸우고 모았어. 그런데, 이 꼴을 봐. 우리가 최종보스가 되었네. 우리가 어둠이 되었고, 우리가 어른이 되었어. 다시 돌고 돌고 돌고. 어른에 맞선 아이는 어른에 맞서기 위해 어른이 되어버린다. 나이가 차면 물러나야지, 안 그래?

위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우리가 뒤엎어서 새로이 만든, 전혀 다를 거 없이 똑같은 지옥을 뚫고, 어린 몬스터들이 오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도 우리를 죽이고 우리가 되겠죠. 우리는 던전을 구원하려, 뒤엎으려 했지만, 우리가 한 건 밭고르기였을 뿐이야. 새로고침, 업데이트를 했을 뿐이라고. 이 모든 게 결국 전부 던전의 함정인가? 던전 자체가, 거대한 함정인가? 맨 밑은 어둡고, 우리는 밤만큼 큰 몸집을 가져,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책인지 음반인지 영화인지 많이 본 몬스터(사실, 그게 바로 저입니다.)가 또 중얼거립니다. 이런 시구가 하나 있어. 땅은 용암을 뿜어 해를 만들고, 다시 삼켜 황금을 만든다. 우리는 욕망을 뱉어 밤을 만들고, 다시 삼켜 꿈을 만든다. 우리는 결국 무엇을 만든 걸까요. 우리가 만든 새로운 해, 새로운 법칙, 새로운 던전, 새로운 게임. 우리는 영혼을 팔았습니다. 영혼의 값은 무한. <언더테일>에서도 영혼을 팔아야 망쳐버린 게임을 뒤엎고 새 게임을 시작할 수 있는데, 과연 그게 잘 먹힐까요. 이미 모든 걸 망쳐버렸는데? 우리는 아직도 어둠 속에 있습니다. 새로운 우리가 될 또 다른 우리를 기다리며. 여기에도 몬스터가 있습니다. | 나원영 onezero96@naver.com

 

[새 게임을 다시 시작하시겠습니까?]

 

 

  1. Roguelike, 최초의 던전 탐색 RPG <로그(Rouge)>의 형식과 유사한 게임을 총칭하는 장르. 레벨이 무작위로 형성되며, 플레이어는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등의 특징이 있다.
  2. 하나의 게임을 클리어한 뒤 반복하며 그 사이에 있는 차이들을 공략하는 방식으로, RPG 게임에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2회차 이상에 도전해야지만 ‘진엔딩’을 보는 경우도 많다.
  3. 마크 브라운(Mark Brown)의 유튜브 채널 <Game Makers’ Toolkit>
  4. 커트 보니것의 나라 없는 사람, 혹은 이랑의 “좋은 소식, 나쁜 소식” ([신의 놀이])에서 변형
  5. 황정은, 「입을 먹는 입」,『문학동네』 200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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