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차 – 소음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나요?1 [새로운 게임] <언더테일>의 첫 엔딩은 어떻게 하던 간에 불완전하게 끝난다. 불완전한 과정과 불완전한 선택을 한 셈이다. 그리고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 게임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항상 잘못된 선택을 하고, 그렇게 게임은 끝나버린다. “어두컹컹”의 경우에 잘못된 선택과 과정은 무엇이었을까, [던전]을 완벽하게 클리어하는 것은 이렇게나 힘들다. 이제 우리 앞에는 세 번째 회차가 주어져 있다. 기회는 소중하다. 호기를 잡아야 한다. 우리가 익히 알아온 게임의 방법으로 진행했지만, 그 방법을 향해 가는 순간 뭔가가 크게 잘못된 게 아니었을까. 다시 근원적으로, 총체적으로 공략을 되짚어본다. 용사들이 괴물들을 죽여 돈을 벌고 힘을 얻으니, 우리들도 똑같이 갚아야 하지 않겠어? 그리고 이건 게임이잖아, 돈을 벌고 힘을 얻어야지. 그렇게 우리는 돈을 벌고 힘을 얻고 레벨을 올렸다. 최대한 효율적인 방식으로. 그 결과 우리는 우리보다 약한 몬스터를 죽이며 던전의 모든 생명을 싹쓸이 했고, 우리 스스로가 던전의 새로운 최종보스, 새로운 낮과 밤이 되었다. 어두컹컹한 결말. 사실 이것은 게이머들의 특성을 이용한 필연적인 결말이다. 몬스터가 보이면, 죽여야지. 게이머들의 조건 반사. <언더테일> 또한 익히 아는 게임의 방향으로 진행하다가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 심각한 경우에는 겁.나.어.려.운. 최종보스에게 터어어얼릴 수도 있다. “어두컹컹”에서 의지는 잘못된 방향을 보았다. <설국열차>에서도 커티스는 그의 앞, 화면의 오른쪽만을 보고 나중에는 뒤-왼쪽도 보게 된다. 기차가 향하는 방향을 보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는 결국 설국열차라는 던전을 이전과 다를 바 없게 새로운 던전으로 만들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는다. 비슷하게도 <옥자>에서 친구이자 돼지고 어쩌면 몬스터이기도 할 옥자를 쫓고, 옥자를 고기, 결론적으로는 돈으로 보거나 특정한 이데올로기로 밖에 보지 않는 어른들 사이에서 ‘황금 돼지’로 옥자를 구해낸다. 미자는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이 방향은 죽거나 죽이는 방향. [던전]을 제대로 클리어하고 다른 엔딩을 보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이제 그 게임, 그 던전, 그 지옥, 그 지구, 그 우주, 그 세계의 방법에서 벗어날 때다. [던전]은 게임-음반이라고 했다. [소음의 왕]에서 이어진 세계를 전복하는 이야기를 게임의 형식과 구성으로 빌려와 전달하고, 몬스터의 시선에서 ‘던전’인 세계를 뒤엎는 이야기가 펼쳐지며, 이 게임의 방식에 놀아난 괴물들은 결국 던전을 구하는데 실패한다.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결국 모든 건 던전의 방식, 게임의 방식으로 이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던전을 정말로 구원하기 위해 이전의 방법이 아닌 새로운 방법을 찾아 나선다. 그 방법은 너무나 비밀스럽고 아까워서 전자양마저 CD나 라이브로만 공개한다. 트루 엔딩, 진 엔딩, 최종 엔딩, 해피 엔딩에 다다른 마지막 공략. 최후의 보스전. 나 또한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다시 처음부터 게임을 시작해야 한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래, 순수한 순백의 아이들인 우리는 어른들의 방법을 집어치우기로 한다. [야, 그냥 다 같이 쎄쎄쎄나 할까?] 이 놀이가 너를 구할 거야 음반의 가장 마지막에 있는 “쎄쎄쎄”를 어떤 위치는 마침내 도착한 레벨 3의 노래다. 레벨 1이 [던전]의 컨셉과 진행을 담고 레벨 2가 여기서 이어지는 “어두컹컹”이라는 하나의 가능세계에 도달한다면, 이 다음으로 이어지는 레벨 3은 3회차를 돌고 돌아서야 닿을 수 있는 엔딩을 들려준다. 세계를 구원하는 방법, 코인과 경험치와 레벨업의 논리에서 벗어나는 방법. 전자양도 이 공략을 얼마나 비밀로 두고 싶어 했을까. [소음의 왕]이 “멸망이라는 이름의 파도”로 시끌벅적한 묵시록의 결말(과 새 시작)을 장엄하고 변화무쌍한 싸이키델릭 대곡으로 풀어냈다면, “쎄쎄쎄”는 대장정의 끝으로써 거의 비슷한 방식을 취한다. 레벨 3에 온 걸 환영한다. “생명의 수프”는 영 좋지 않은 엔딩이었던 “어두컹컹”과 이어질 “쎄쎄쎄”의 연결고리로, 후반부에서는 세이브 파일 같이 새롭게 [던전]을 로딩시킨다. (정말로 음반을 다시 듣는 건, 어쨌든 귀찮은 일이니까) 새롭게 생겨난, 마지막 HP 한 칸을 얻는 셈이다. 기나긴 전자음의 통로를 지나, “쎄쎄쎄”라는 이름의 바다로 풍덩, 빠져든다. 노랫말이 흐르고, 결국 이렇게 긴 플레이 타임을 헤매며 찾아다니던 공략이 드러난다. 그것은 이미 알아차렸듯이, 놀이다. 지금 호모 루덴스나 지자-호자-락자 따위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뭐 연결되는 측면이 당연히 있겠지만 말이다. [던전]에서 자주 반복되는 빛과 어둠, 아이와 어른의 대비처럼, 놀이와 게임의 대비 또한 음반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한다. 이밀 레벨 1에서도 지구를 뒤엎으려는 과정은 일종의 놀이처럼 그려지고, 이 아이들의 놀이는 어른들의 게임과 대비되며 [던전]을 마지막으로 끌고 간다. 대비된다고 해서 이것이 아예 정반대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한끗 차이로 인해 아이는 어른이 되어버리고, 놀이와 게임의 경계 또한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몇 개의 연구들이 이를 개념적으로 정리했겠지만, 결국 “어두컹컹”한 결말을 생각해보면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쉽게 알아차릴 수도 있겠다. 지난 회차에서 ‘우리’ 몬스터들과 ‘너’는 어른들이 돈과 힘의 논리로 지배한 던전을 해방시키기 위해 인간과 싸우고, 보스 몬스터들과도 싸우며 던전을 파고들어가는 방법을 고른다. 싸움은 곧 게임의 가장 중요한 매커니즘이자 시스템에 발을 들인다는 의미다. 어른들처럼 싸워서 이기고, 코인과 경험치(돈과 힘)을 얻고, 레벨업을 해서(나이를 먹어서) 강해진다. <언더테일>의 몇 가지 주요한 반전 중 하나인 EXP(경험치)와 LV(레벨)의 의미는 2다. 결과는 뭐, 최종 보스 누구씨에게 터어어얼리는 결말. 이 과정의 반복으로 결국 어린 아이 몬스터들은 어른 보스 몬스터들이 되어서 다시 똑같은 논리로 돌아가는 던전을 만들었으며, 이는 언제까지나 반복될 것이다. <설국열차>도 <동물농장>도 마찬가지다. 무수한 우화들에서부터 너무 많이 다뤄진 이야기다. 새로울 건 없다. 다만 전자양은 여기에서 출발해 “쎄쎄쎄”로 놀이라는 그들만의 방법을 제시한다. <설국열차>로 돌아간다. 자신의 앞과 화면이 좌우만을 보는 1차원적인 게임 캐릭터처럼 진행하며 설국열차를 돌파하는 게임을 플레이한 커티스는 최종 보스 윌포드에게서 새로운 게임의 새로운 최종보스가 되지 않겠냐는, 하지만 결국 똑같은 상황과 위치를 이어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는다. 이 때 남궁민수는 여태까지 이어진 방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 기차의 옆, 재미있게도 관객의 시점에서는 ‘앞’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 전혀 다른 차원, 전혀 다른 레벨의 시선은 열차라는 게임 자체를 지정된 루트에서 탈선시키는 것으로 이어진다. 열차는 망가지고, 무수한 어른들이 죽지만, 두 아이들이 살고, 결국 희망은 남는다. 어쩌면, 아마도. “쎄쎄쎄”도 그런 식이다. 어른의 세계를 뒤집기 위해 동등하게 강한, 그래서 똑같은 어른이 되어버리는 걸 고르지 않고, 계속 아이로 남기로 한다. 게임에 참여해 싸우지도 않고, 코인과 경험치도 얻지 않고, 레벨업을 하지도 않는다. 바틀비처럼 하지 않는 편을 택한다. 혼자서 하지 않는 편을 택한 뒤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바틀비는 그냥 죽어버리지만, [던전]에서는 모든 몬스터들이 하지 않는 방법을 고르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 나선다. 사실 찾아 나서기보다도, 그저 놀 뿐이다. 방글 웃고, 빙글 돈다. 어른들이 모르는 방식으로. 물론 그 방식과 그 마음은 “어두컹컹”에서 잘못 만나면 폭력으로 고양된 마음이 될 정도로 불온할 수도 있다. 타인에게 가장 잔인해질 수 있는 건 아이와 괴물이 아닌가. (그래서 <언더테일>도 결국 아이이자 괴물인, 두 개의 가능성을 지닌 캐릭터가 주인공일 테다) 이 모든 시스템과 코드를 전혀 따르지 않는 방식을 고를 때, 게임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쎄쎄쎄가 시작되는 것이다. 한 번 쯤은 다들 해보지 않았는가. 게임이 효율적인 플레이 방식을 추구하는 것과는 다르게, 놀이는 그렇게 많은 걸 바라지도 않는다. 그런지라 효율도 적고, 큰 의미도 없으며, 어찌 보면 덧없고 하찮기까지도 하다. 심지어 아예 필요 없을지도, 방해가 될 지도 모르겠다. 지지직대는 소음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놀이와 소음이 필요하다. 비효율과 무의미와 하찮음과 불필요가 정반대의 논리로 돌아가는 세계에 균열을 내고, 완전히 무너뜨리고, 전혀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 이것은 당연히, 믿음의 문제이며, 나는 그것을 믿기에 이 방식으로 게임을 공략하기로 한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일단, 게임을 시작한다. 불가능해 보일지도 모른다. 아니, <다크 소울>을 안 싸우면서 깬다고? <슈퍼 마리오>도 코인을 먹고 굼바를 죽여야 점수를 얻지! 하지만 재미있게도, 세상에는 효율도 쓸모도 의미도 떠난 공략을 선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수많은 변칙적인 플레이들. 노 킬, 노 데스, 노 아이템, 0점, 불살, 저렙… 무지하게 길게 걸리고, 그만큼 무지하게 어려우며, 진짜 이걸 왜 하지? 싶을 정도의 플레이. 하지만 아주 잠깐, 아주 조금이라도 이 공략들은 게임의 방법과 논리를 부수고 놀이가 되지 않았을까. 익히 알고 있는 그 논리와 그 방법으로 가려는 욕망을 누르고, 무한한 재미(보다는 끝없는 끈기 같지만)로 아무도 죽지 않고 다치지 않는 방식을 택하는 게 정말로 그렇게 의미도 효율도 없는 것일까? 그렇기에 <언더테일>의 세계는 각별하다. 오히려 게임의 방식에 정확하게 알맞은 방식으로 몬스터를 죽여 돈과 경험치와 레벨을 올리면 세계는 구원되지 않고 파멸되며, 진.짜.겁.나.게.어.려.운 보스를 만나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그것마저도 깨면 결국 영혼을 팔아 세계를 되돌리지만, 이미 일어난 일의 잔재는 영원히 남아 있다. <언더테일>의 세계를 구원하려면 게임의 방법이 아닌 놀이의 방법으로 다가가야 한다. 등장하는 몬스터들과 대화를 하고, 함께 논다. 여전히 매우 약하고 덧없고 하찮은 레벨 1과 경험치 0의 상태로 모든 게임을 진행하며, 강한 보스 몬스터들에게 죽고 또 죽어도 놀이는, 놀이의 의지는 세계를 구원한다. 놀이가 만들어낸 소음이 세계를 울린다. [던전]도 마찬가지다. 나는 [소음의 왕]과 <언더테일>이 비슷한 시기인 2015년 9월에 나왔을 때 뭔가 연관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내가 보기에 이 알 수 없는 연결고리는 [던전]으로 이어진 것 같다. 끝없는 놀이가 마들어낸 왁자한 소음이 새로운 세계를 향해 “쎄쎄쎄”를 채운다. 물론 놀이나 소음이 세계를 완전히 구원하지 못할 수도 있고, 그럴 확률은 슬프게도 이 세계에서는 매우 높다. 불가능일지도 모른다.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 공략으로 게임을 깬다면, 깨부숴버린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의미’란 게 생겨버릴 지도 모른다. 잠시 다른 곳으로 향해본다. 정말로 놀이는 세계를 완전히 바꾸지 못할까? 잠깐 어떤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쯤 전에, 작은 동네에 사는 삼형제가 있었다. 삼형제는 어느 날부터 악기들을 가지고 그냥 놀 듯 연주하기 시작한다. 아무 목적이나 의미도 없이 그들은 그냥 놀았다. 삼형제는 방 안에서 왁자한 소음을 만들었고, 그들이 만든 소음은 산울림이 되어 대한민국의 록이나 그러한 것을 완전히 뒤집었고, 뒤바꾸었다. 한국 록이 총체적으로 뒤바뀌고 또 40년 정도 시간이 지난 뒤, 삼형제의 첫째는 “우리가 이런 노래를 발표하면, 어른들이 상당히 괴롭겠지.”하는 생각으로 음악을 했다고 회고한다. 그런 식이다. 놀이는 어른들을 괴롭게 한다. 잘 때가 되었다 해도 놀고, 집안을 다 어질러버리고 그러니까, 놀이가 필요하다. 놀이는 세계를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이제, 3회차 공략을 시작한다. 우리 앞에 선택지는 두 가지 뿐이다. 게임이냐 혁명이냐 그래서, 그렇기에,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놀이를 시작한다. 아이의 마음으로. 이해가 가지 않아도 괜찮다, 정말. 이 놀이는 우리를 구할 놀이니까. 우리는 아이기 되어 몬스터들, 영웅들, 어른들에게 다가간다. 칼과 창, 총과 핵 앞에서 죽고 또 죽지만 의지를 다지며, 함께 놀자고 한다. 죽고 또 죽는 만큼 놀고 또 놀수록 우리는 즐거워진다. 힘과 경험치와 코인과 레벨은 그대로지만, 우리의 몸은 서서히 빛으로 차오른다. 게임의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빛. 낮을 밤으로 바꿔버리는, 빛과 어둠을 뚫고 뻗어나가는 빛. 빛의 호위를 받아 우리는 나아간다. 어둠은 이제 바다가 되어 우리를 받아버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아래로 아래로 올라가고 위로 위로 내려간다. 모두를 만나, 모두와 기꺼이 쎄쎄쎄를 한다. 바다는 더욱 깊어진다. 더욱 더 깊숙이, 더 나쁜 쪽으로가 아닌 더 깊은 곳으로. 우리는 마침내 파도가 될 것이다. 음악과 함께 레벨이 힘껏 고조된다. “쎄쎄쎄”가 “멸망이라는 이름의 파도”와 이어지는 이유는 그 긍정적인 에너지가 만들어내는 장관 덕일 것이고, 이는 노래가 지극히 어둡고 무서운 “어두컹컹”과 다른 이유기도 할 것이다. 아무리 잔혹동화와 동심파괴가 일상이 된 세상이라도, 아이들의 놀이에는 변하지 않는 법칙들이 있다. 선울 밟아 죽어버려 천국에 가지 못해도 네가 찜해준다면 얼마든 다시 살아날 수 있다. 나쁜 편이 아무리 강해도 착한 편이 꼭 끝에서는 이긴다. 세계가 아무리 지옥이어도, 아이들의 놀이에서만큼은 모두가 산다. 이번 한 번만큼은, 지옥은 동화가 된다. 우리가 어른이 되어버린다면 우리와 다른 모습들을 증오하게 되고, 더러운 꿈을 꾸다가 누군가를 결국 먹어버리고 무언가를 부서버리겠지만, 어른이 아닌 우리들은 우리와 다른 것을 증오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것들에게 다가간다. 우리는 오직 쎄쎄쎄만을 한다. 어른이 아닌 우리들은 막연하게 상상만 한다. 어른은 그러니까 즐거운 것들만을 잔뜩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밤새도록 테레비 보기, 커서 너와 결혼하기, 꽃반지를 서로 나눠 끼기. 어둠이 수많은 그림자 대군을 이끌어 쳐들어오고, 우리의 몸을 돈과 힘의 페스트로 더럽히려 해도, 우리는 놀면서 나아간다. 네가 넘어질 때마다 언제든, 내가 금방 달려 와준다. “멸망이라는 이름의 파도”가 묵시록을 코앞에 둔 사랑 고백이듯이 “쎄쎄쎄”도 마찬가지의 사랑 노래다. 이 놀이의 법칙은 사랑이다. 세계를 구하는 법칙이기도 하다. 그리고 찾아오는 이 세계의 노을, 선셋! 집에 돌아가 자야할 시간이 되어도 우리는 계속해서 논다. 어른들은 모르는, 우리들만 즐거운 놀이. 빙글 웃고, 방글 구른다. 누가 밤을 귀신과 도깨비의 시간이라고 했는가. 마지못해 돌아가는 착한 아이들은 더러운 꿈을 꾸고 어른이 되지만, 밤을 뚫고 노는 우리들은 더러운 꿈도, 너절한 욕망도 집어삼키고 환한 빛을 내뿜는다. 착한 아이들의 너절한 꿈에서 더러운 욕망들이 흘러나온다. 집을 태우고 싶어, 부모를 죽이고 싶어, 산채로 썩고 싶어, 괴물이 되고 싶어! 우리들의 빛은 거기까지 닿는다. 쎄쎄쎄는 언제나 아침 바람 찬 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를 몰고 온다. 무한한 재미, 끝없는 놀이. 우리는 어둠이 스러질 때까지 논다. 왜 노는지도 모르고, 즐거워서 논다. 노는 게 제일 좋으니까 논다. 친구들도 모이고, 언제나 즐거운 놀이. 무엇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냥 노다. 그렇게, 게임은 천천히 무너진다. 코드는 어긋나고, 로그는 날아가고, 시스템은 렉을 먹고, 세계는 파괴된다. 동시에 구원된다. 선셋 다음은 선라이즈. 지금은 비포 선라이즈. 책도 많이 읽고 영화도 많이 보고 음반도 많이 보고 게임도 많이 하고 애니도 많이 보는 몬스터가 외친다. <너의 이름은.>에서 황혼의 시간이 기적의 때라고 했지? 일출의 시간도 마찬가지야! 태양, 위대한 천체가 떠오른다. 언제나 우리를 비춰주는 태양, 아침마다 태양을 기다려온 우리는 넘치는 풍요를 받아들였고, 그 대가로 태양을 축복하기 위해, 논다. 계속 논다. 놀면서, 세계는 달라진다. 이 모든 의미 없어 보이는 것들이 세상을 바꾼다. 누구는 오직 힘만이 세계를 바꾼다고 하지만, 세계를 바꾸는 건 언제나 의미 없어 보이는 모든 것들이다.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것, 그 이전에 노래를 하고 춤을 추는 것, 또 그림을 그리고 장식을 하는 것.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는 의미도 효율도 전혀 없는 몸짓들을 해왔다. 그 알 수 없는 손짓발짓과 영문 모를 음들과 난데없는 낙서들이 세계를 바꿨다. 세계를 정말로 바꾸는 건 절대로 힘도, 돈도 아니다. 이것은 압도적인 진실, 최강의 공략. 누구를 때리고 부수고 먹는 건 절대로 던전을, 게임을 바꿀 수 없다. 오직 의미 없어 보이는 것들을 기어이 만들어내고 존재하게 하며 계속하게 하는 것이 의미와 효율만을 담으려는 세계에 균열을 낸다. 그래서 우리는 춤을 춘다. 노래를 하고, 그림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글을 쓴다. 우리는 논다. 그리고 이 세계에 오는 아침을 맞이한다.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돈과 힘으로는 결코 값을 따질 수 없는, 빛나는 황금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배신하는 순간까지 붙들어 매려 노력한 연인의 믿음이?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언제나 잊어버리고 잃어버리는 사랑이. 영영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우리가 잊어버린 보물이. 우리가 희망이라 했던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꿈과 희망, 놀이 속에서, 무의미 속에서 우리는 이 둘을 얻는다. <언더테일>에서는 꿈과 희망이 세계의 완전한 멸망이라는 최종보스를 물리치고, 마침내 세계를 구원한다. (최종보스까지도!) 마침내 지하에 갇혀있던 괴물들은 지상으로 올라오고, 환하게 빛나는 태양을 본다. 선셋? 선라이즈? 중요하지 않다. 아름다우니까, 그걸로 됐다. 그래서 “쎄쎄쎄”는 전자양의 “Hopes And Dreams”이다. 점점 세계에 놀이의 소음만이 가득 차게 된다. 소음으로 포화된 세계, 세계의 균열 사이로 새어나가는 소음, 갈라지는 모든 틈과 밀려들어오는 모든 음. 꿈과 희망, 그리고 빛. 멸망이라는 이름의 파도가 던전을 휩쓴다. 우리의 놀이가 이 파도를 만들었다. 우리와 너, 나와 당신, 모두가 이 놀이와 소음의 파도로 세계를 구원했다. 쎄쎄쎄. 바벨은 무너졌고, 지구는 폭발했다. 전혀 다른 세계가 찾아온다. 가장 어두운 밤과 새벽이 가고 가장 밝은 아침이 온다. 이전의 세계는 유물과 유적으로 남을 것이고, 길을 잃은 영혼들은 과거의 잔해에서 그들이 웃고 울었을 때를 추억한다. 우리는 계속 논다. 나는 이 모든 게 즐겁기만 하다. [던전]을 깼다. 클리어 되었다. 나는 이 게임이 너무 즐거웠다. 당신은 어떤가? 좀 있으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온다. 이 게임, 아니 이 놀이는 어땠는가? 그것에 대해서도 나는 할 말이 많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기 이전에 일단- [Ending : 쎄쎄쎄] [THE END] 개발자 코멘터리 음, 게임은 끝났다. 3회차를 달려오며, 나와 당신은 플레이어인 너와 몬스터들과 함께 우리로써 게임을 플레이 했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세계는 구원되었으며, 다시 우리의 앞에는 한 장의 게임-음반, 팀 일렉트론 쉽이 10년 만에 발매한 정규 시리즈 신작이 있으며, 이름은 [던전]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당신이 이 공략을 읽고 있으니까, 어느 정도는 성공한 셈이다. 당연히 또 어느 정도는 실패하기도 했지만. 기나긴 공략이었다. <언더테일>도 내가 유일하게 계속해서 클리어할 한 쪽의 엔딩을 보는 데에만 7시간인가가 걸렸다. (다른 쪽 엔딩은 시도하지도 않을 생각이다. 나는 <언더테일>에서 놀이를 하고 싶지 게임을 하고 싶지 않다. 끔찍한 시간을 보내기도 싫고) [던전]을 클리어하는 데에도 그만큼의,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였다고 할까. 미련이 남아 아직 공략을 놓지 않았다. 개발자 코멘터리의 시간이다. 이제 이곳에는 나와 당신뿐이다. 당신은, 그러니까, 중요한 사람이다. [던전]에서는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인 ‘너’가 중요했듯이 말이다. 글에서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글을 읽는 당신일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지점에서 당신은 이 모든 걸 좀 더 쉽게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을 것이다. 사실 나도 자주 그랬다. 단도직입적으로, 이 글은 대체 무슨 글인가? 비평? 소설? 게임 공략? 리뷰? 팬픽? 팬게임? 이 글은 무엇에 대한 글인가? [던전]을 중앙에 놓았다지만 나는 이 글이 비밀스럽게 <언더테일>에 대한 비평이 되기도 바랐으며, 2회차에서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한국 문학을 포함한 여러 소설들을 인용해댔고, 물론 게임 레퍼런스도 무지하게 했으며, <설국열차>와 <옥자>까지도 중요하게 써먹었다. 노랫말을 ‘해석’하기보다는 그냥 내 취향의 팬픽을 ‘창작’하는 데에만 써먹었고 (사실 모든 노랫말 해석이 그런 게 아닌가, 하면 반기를 가질 사람들이 많을 거 같긴 하다) 음반의 모든 요소들은 이 글에 끼워 맞춰졌을 지도 모른다. 사실 맞다. 비평으로써는 빵점이고 소설로써는 너무 비-소설적인 이야기가 많으며 공략/리뷰라고 하기에는 그것도 좀 아닌 거 같다. 한 마디로, 이 글은 개판이다. 나는 훨씬 더 평범하고 단정하게 [던전]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 글은 아마 ‘10년 만에 한국의 현재진행형 싸이키델릭 전설 전자양의 새 정규 음반이 나왔다!’ 따위의 문장으로 시작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던전]을 듣고 나서 나는 매우 좋은 게임을 한 판 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 게임-음반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느꼈다. 나는 그냥 그 기분과 느낌을 쓰려 했을 뿐이다. 내게 [던전]은 음반이라는 형식을 깨부수고 새로운 무언가가 된, 아니면 그렇게 되려고 노력한 음반이다. 소설가(?) 정지돈은 기묘한 괴짜 건축가 키슬러의 말을 빌려 “형태는 비전에서 탄생한다. 그리고 비전은 태도에서 탄생한다.”라고 했다. 정지돈이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마찬가지로 소설가(?)인 데이비드 실즈는 소설가(!)인 존 쿳시의 말을 빌려 “작가가 이전에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것을 말하기 위해서 매체를 변형시켰다는 느낌이 한 대목에서도 들지 않는 것”이 훌륭한 글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내게 [던전]은 그런 음반이었다. 전혀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는 태도, 비전, 그리고 형태. 음반이라는 매체에 게임이라는 매체가 덧씌워졌고, [던전]에 그 둘이 섞였다는 위화감은 들지 않는다. 그래서 [던전]은 훌륭한 태도와 비전과 형태의 음반이다. [소음의 왕]에서부터, 아니면 그 이전에서부터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가장 알맞게 이야기하기 위해, 또 가장 재밌게 이야기하기 위해, 전자양은 게임-음반을 만들었다. 그들 스스로가 놀면서 이 음반을 만들었다. 지극히 아이 같은 시선에서 노는 것처럼. 산울림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 나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한국 록밴드와 전자양을 동일선상에 두려고 노력하고 있다. 단순히 어떠한 경파함과 진지함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태도의 문제이며, 비전의 문제고, 믿음의 문제다. 전자양은 놀이를 믿었기에 놀이의 방식으로 게임-음반을 만들며 그들만의 전혀 다른 무언가를 내놓았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게임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던전]이 <언더테일>이나 8090 JRPG에서 여러 요소들을 차용했듯이, 나는 [던전]을, <언더테일>을, 그리고 수많은 다른 작품들을 끌어와 팬게임을 만들었다. 모든 비평은 결국 의미 있는 무언가의 2차 창작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극히 덕후인 나는 ‘2차 창작’이란 단어에서 팬픽이나 팬아트, 팬게임 등 ‘팬’적인 뭔가가 떠오른다. 그러니까 비평은 결국 일종의 팬심에 의거한 창작이라는 말인가. 그렇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이 나의 비전이고, 태도다. 형식이자, 믿음이다. 물론, 그 믿음을 계속해서 의지로써 이어갈 것이다. 그래서 이 팬게임을 만들기로 했다. [던전]이 세 개의 레벨로 구성되었듯이 나는 세 개의 회차로 레벨 디자인을 했고, [던전]이 정신없이 싸이키델릭한 놀이판인 만큼 이 글 또한 정신없이 싸이키델릭한 놀이판으로 만들었다. 나는 여전히 소음이, 아니면 그를 담은 모든 것들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에 나는 너무 나이브하다. 이미 그렇게 써왔다. 작년에 나는 역시나 놀이의 태도가 잔뜩 들어간 밈-뮤직과 김중혁을 빌어 “평범한 진실이란 재밌게 노는 것”이라 했고, 의미도 효율도 없어 보이는 것으로 압도적인 세계 앞에 맞서는 GY!BE를 빌어 그에 맞서는 모든 시도들에 무한한 행운을 빌려 했고, 언제까지나 계속될 우리의 포스트록을 찾는 과정을 빌어 실로 많은 것들이 가능하며 나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라고 했다. 결국 모든 창작물들은 작가의 손을 떠나 독자들에게 닿는 순간 더 이상 손 쓸 수 없고, 독자의 세계에서 작가는 그냥 죽어버린다고 하지만, 이 게임, 이 놀이의 개발자로써 나는 당신에게 바로, 정면으로 직접, 이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만의 이 게임을 만들었다. 당신은 물론 [던전]을 전혀 다른 음반/게임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며, 이 글도 마찬가지로 나의 원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무리 동의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전혀 다른 존재들이기에, 완전히 똑같은 생각을 할 수 없다. 나는 나로 남고, 당신은 당신으로 남는다. 하지만 놀이는 그렇게 다른 나와 당신을 어떻게든 잇는 시도가 된다. 그 모든 시도들이 결국 세상을 바꿨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만, 당신이 그냥 이 놀이가 재밌었기를 바란다. 한바탕 신나거나 아찔했으면 더욱 좋고, 그 놀이와 소음이 마음속에 남아있다면, 의지가 되었다면 더더욱 더. 그게 아니더라도, 이 힘겨운 똥겜을 끝까지 클리어 해주셔서 (물론 [던전]은 GOTY를 탈 갓-겜이지만) 나는 실력 없는 개발자로써, 언제나 감사한 마음뿐이다. 게임은, 놀이는,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디 엔드라는 마무리는 틀린 거 같다. 정말 마지막에 넣을 말은 [To Be Continued…] | 나원영 onezero96@naver.com 정지돈, 「눈먼 부엉이」, 『내가 싸우듯이』에서 변형, 2016, 문학과지성사처형 점수(EXecution Point)와 폭력의 정도(Level of Violence) Leave a Reply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CommentName* Email* Website 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