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마(Aepmah) | Shapes, Textures, Rhythms and Moods | Con Tempo, 2018

 

뛰노는 미시

프리 재즈를 대표하는 색소포니스트 오넷 콜맨(Ornette Coleman)은 재즈에 대해 “재즈는 매일 밤 같은 음을 전혀 다르게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음악”이라고 말했다. 그가 기존에 존재했던 재즈의 형식과 패턴, 화성과 박자를 붕괴시키고 절대적 즉흥과 원초적 연주를 추구하는 재즈 문법을 촉발시킨 주요 창시자 중 한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 말은 참으로 오넷 콜맨다운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같은 음을 전혀 다르게 연주하는 광경을 실제로 볼 수 없다. 나는 프리 재즈가 언제나 하나의 모순을 감수하고 존재하는 장르라고 생각해 왔다. 가장 극단적인 즉흥성, 제한 없는 무경계성을 지향하는 장르조차도 ‘레코딩’이라는 절대적인 정지 상태(stasis) 하에서는 정확하게 똑같은 음을 무한히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정지 상태가 라이브를 실제로 지켜볼 수 있었던 소수의 사람만이 아닌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프리 재즈의 미학을 널리 퍼뜨렸다는 모순. 의식(ritual)적인 순간으로만 존재하고 사라지는 라이브 연주가 아닌, 레코딩이라는 영원으로서 박제당한 프리 재즈에게 ‘자유’는 형용모순이 아닐까?

그런 의문을 가진 채로 엡마(Aepmah)의 두 번째 레코딩 [Shapes, Textures, Rhythms and Moods]을 듣는 것은 흥미로운 경험이다. 그 흥미는 우선적으로 이 앨범이 (B면 “화 (火)”에 참여한 김오키의 색소폰을 제외하면) 오로지 샘플링만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앨범의 소리는 오넷 콜맨, 파로아 샌더스(Pharoah Sanders), 밀포드 그레이브스(Milford Graves), 알버트 아일러(Albert Ayler) 등 프리 재즈의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아티스트의 산실이었던 ESP-디스크(ESP-Disk)에서 발표된 앨범에서 따온 샘플링만으로 만들어졌다. 푸석거리는 베이스 드럼과 나지막하게 반복되는 콘트라베이스의 모티브로 시작하는 앨범은 포착되려는 순간 사라지고 마는 미시적인 패턴을 쌓아나가며 자신만의 구조를 형성한다.

플런더포닉스(Plunderphonics)라는 단어와 샘플링만으로 구성된 음악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2018년 이 시점에서, 이러한 종류의 앨범을 듣는 건 더 이상 새로운 경험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범의 첫 곡 “Shapes, Textures, Rhythms and Moods”의 치밀한 배치와 사운드의 혼합이 전달하는 감흥은 [Endtroducing…..]이나 [Since I Left You]와 같은 앨범을 들을 때의 그것에 때때로 근접한다. ‘충분히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는 아서 C. 클라크(Arthur C. Clarke)의 격언은 고도로 조직화된 샘플링 음악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니까.

한편, 두 번째 트랙 “화 (火)”에서 얽히는 엡마와 김오키의 협연은 첫 트랙의 그것보다 사뭇 격정적인 색깔을 띠며 과거의 드럼 소리와 현재의 색소폰 소리가 뒤섞이는 묘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ESP-디스크의 누군가가 연주한 드럼, 그 소리를 채취하고 배치하는 엡마, 그 비트와 때로는 화합하고 때로는 불화하는 색소폰을 부는 김오키. 설령 이 모든 것이 평면화된 하나의 레코딩 위에 녹음되어 있다고 해도, “화 (火)”를 들으며 이 세 요인 각자가 지니고 있는 욕망을 상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것이 불처럼 뜨거운 일렁임을 수반하기에 더더욱.

어떤 점에서, 이 앨범에 담긴 모든 소리는 프리 재즈에 대한 안티테제, 혹은 프리 재즈가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모순을 극대화하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LP에서 샘플링을 따내는 정교한 손놀림과 디지털화된 소스의 치밀한 배치는 우리가 흔히 ‘즉흥’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것이 프리 재즈가 결국 탈출할 수 없었던 레코딩이라는 ‘정지 상태’를 질료로 삼는 재구축이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Shapes, Textures, Rhythms and Moods]가 그 과정을 거쳐 들려주는 소리는 이러한 작법에서 예상할 수 있는 예측가능성과는 거리가 아주 먼, 긴장감과 불균형의 연속이다. 연속적으로 이어지기보다 끊임없는 단절 – 곡은 중간중간 삽입된 묵음을 통해 이를 구현한다 – 및 그에 수반되는 소스의 전환을 선보이는 “Shapes, Textures, Rhythms and Moods”의 방식으로, 그리고 언제나처럼 변화무쌍한 김오키의 색소폰과 함께하는(혹은 충돌하는) 드럼 샘플링의 향연이 펼쳐지는 “화 (火)”의 방식으로. 상반된 두 형식이지만 지향하는 방향은 같다. 청자의 예측을 허락하지 않는 것.

그렇지만 그러한 예측가능성의 부재가 가져오는 건 단절과 고립이 아닌 새로운 활력이다. 그 점에서 [Shapes, Textures, Rhythms and Moods]는 레코딩이라는 정지 상태가 프리 재즈 스스로의 미시성에 내재한 활력을 결코 잡아 가둘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레코딩이 즉흥성의 끝이 아닌 또 다른 즉흥성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듯하다. 아마도 그것은 음 하나하나에 담긴 새로움을 끊임없이 탐구해 왔던 이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일 것이다.

나보다 프리 재즈에 대해 조예가 더 깊은 이라면 이 앨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즐거움이 더욱 많을 것이리라. 그렇지만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이 음반의 구조와 텍스처, 리듬을 즐기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프랙탈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원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존재한다. 가장 치밀하게 배치된 미시성이 구조 속에서도 활력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엡마는 프리 재즈에 대한 자신만의 헌사를 통해 입증해낸다. | 정구원 lacelet@gmail.com

 

Rating: 8/10

 

수록곡
1. Shapes, Textures, Rhythms and Moods
2. 화 (火) (Feat. 김오키)

 

“STRM Live : Aepmah, Kim O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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