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의 가장 근본적인 성질 혹은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어떠한 오락이나 재미, 또는 감동이나 의미가 아닌 ‘관심 끌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지극히 난해하고 실험적이든, 또는 심각하게 가볍고 이른바 ‘대중’적이든, 효과적인 대중문화와 그 작품은 어쨌든 관심을 끈다. 심지어 작품이 관심을 끌고 싶어 하지 않는 경우에도 말이다. 오락과 감동, 재미와 의미 등 모든 요소들은 그러한 관심 끌기의 부차적인 효과일 뿐이다. 효과적인 대중문화는 어떤 매체건 이야기건 간에 내용과 형식의 구분 없이, 규모와 범위의 관계없이 관심을 끌고, 이것은 대중문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고 성질이며 기능이다. 효과적인 대중문화가 많은 관심을 끄는 것에 성공했다면, 이는 시선의 집중과 전환을 의미하기도 한다. 각기 다른 곳에 향해 있던 시선의 방향들은 ‘관심 끌기’로 집중되는 동시에 전환된다. 곧 대중문화는 시선을 자신의 쪽으로 옮기고 모아 낸다. 이러한 시선의 집중과 전환은 또 다른 두 가지를 의미하기도 한다. 대중문화로 관심이 끌어진 방향으로의 직시, 그리고 간접적이고 상대적이며 의도치 않게 생겨나는 다른 방향에 대한 외면. 한쪽을 보게 되면, 당연히 다른 쪽은 볼 수 없다. 관심과 시선은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매 순간의 모든 공간이 수많은 종류의 ‘관심 끌기’로 가득 찬 대중문화는 관심을 끌기 때문에, 수많은 종류의 시선들의 방향을 집중하고 전환하며, 무언가를 직시하고 다른 무언가를 외면하게 하는 특징과 성질과 기능을 갖춘 셈이다. 관심 끌기는 이렇게 시선의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직시와 외면의 기능은 대중문화가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능이 간파된 지도, 사용된 지도 이미 오래다. 80년대 독재 정권이 어떻게 대중문화(이 경우 프로 야구나 외국 문화 수입 등)를 관심 끌기를 통한 외면의 수단으로 활용했는지, 혹은 그 정반대의 위치에서 그러한 외면으로 잊힌 것들을 직시하는 수단으로써 또 다른 대중문화(이 경우에는 80년대 당시의 민중가요나 노동자 르포 등)가 어떻게 이용되었는지를 생각해보자. 이러한 예시는 끝도 없다. 한쪽을 보면, 다른 한쪽을 보지 못한다. 전경에 주목하면 후경을 보지 못하고, 마찬가지로 후경을 주목하는 순간 전경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우리의 시야각은 좁디좁다. 대중문화의 관심 끌기와 시선의 방향 전환은 그 좁은 시야각을 이용해 시선을 ‘조작’한다. 이를 노리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말이다. 그렇다면, 이 관심 끌기와 방향 전환, 직시와 외면의 ‘조작’을 훌륭하게 이용해, 하나의 대중문화 작품이 그 목표를 훌륭하게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This Is America”, mcDJ/RCA, 2018 수많은 사례들 중에서 가장 최신의 것은 2018년 5월, 차일디시 갬비노(Childish Gambino)가 싱글 “This Is America”와 그 뮤직 비디오를 발표했을 때다. 노래는 “이것이 미국이다”라는 제목 그대로 갬비노가 흑인으로써 바라본 미국 사회를 노래와 뮤직 비디오로 표현한 싱글이다. 조금만 인터넷을 돌아다녀보면 알겠지만, 비디오의 경우에는 특히 온갖 종류의 리액션 영상과 뮤직 비디오 분석 영상으로 요약될 수 있는 엄청난 관심이 터져 나왔다. 리액션 영상들의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디오 중간중간에 들어간 급작스러운 총기 발사 장면과 더불어 갬비노와 아이들이 춤추는 동안 그 배경에서 일어나는 혼란 사이의 부조화에 집중했다. 한편 분석 영상들에서는 앞쪽의 갬비노가 아닌 그 배경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중심으로 온갖 ‘상징’들이 어떤 의미인지를 찾아내는 데 집중한다. 짐 크로우(Jim Crow), 찰스턴 총기 난사 사건, 릴 펌프(Lil Pump)의 “Gucci Gang”과 미고스(Migos)의 “Versace”가 인용된 플로우, 성경에 등장하는 죽음의 기사 등등의 맥락들은 정신을 강타하는 총성과 무겁고 탁하게 박히는 트랩 베이스, 그리고 날 선 목소리로 이어지는 갬비노의 랩 등 음악 내적인 요소들과 어우러졌다는 게 주된 분석이다. “이것이 미국이다”는 미국 사회에 대한 정치적 메시지를 그와 맞는 음악과 영상으로써 풀어낸, 정치성이 가득하며 훌륭하게 표현된 곡으로 평가받았다. 다만 “이건 조니 크로우고, 저건 죽음의 기사다! 이게 다 비유고 상징이고, 비판이야!! 이것이 미국이다!!”하는 반응들과는 다르게,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미국이다”에 담긴 정치성이 단지 흑인 인권과 인종 차별 등을 상징적으로 풀어낸 영역에만 국한된다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미국이다”에는 또 다른 정치성에 대한 사유가 존재하며, 이는 미국 사회의 정치성에 대한 논의와 면밀히 결합되기도 한다. 그 정치성은 상술한 대중문화의 정치성, 관심 끌기 혹은 시선 조작의 정치성, 전경과 후경, 또 직시와 외면의 정치성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미국이다”에서 이 정치성은 어떻게 효과적으로 드러나는가, 또 어떻게 미국 사회에 대한 정치성과도 연결되는가. 다시 비디오와 노래로 돌아간다. 릴 펌프/미고스의 머니 스웩과 플로우를 닮은 노래와 총성과 혼란과 비유와 상징이 가득한 뮤직 비디오로. 우선 노래 자체부터 보자면, “이것이 미국이다”는 장르적인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되는 식의 서사가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매우 밝고 경쾌한 가스펠/소울 성향의 보컬과 그와는 정반대로 매우 무겁고 거칠며 서늘하기까지 한 트랩 랩이 서로 탁구처럼 주고받듯 오간다. 노랫말은 계속해서 파티와 돈을 이야기하는 와중에 사운드적으로 한쪽과 다른 쪽을 부단히 오가는 구성은, 당연하게도 각 부분이 바뀔 때마다 노래의 분위기를 계속해서 전복시킨다. 음악 자체로도 꽤 훌륭한 이 전복의 방식은 비디오와 만났을 때에 더욱 더 효과적이다. 청각적이고 음악적인 전복에 시각적이고 이미지적인 전복이 더해지는 셈이라고 볼 수 있는데, 특히 비디오에서 염두에 둘 것은 노래에서 가스펠과 트랩이 교차하는 순간에 상술한 총기 난사와 더불어 총성까지 삽입되는 장면이다(곡의 음원 버전에는 총성이 들어가 있지 않다). 이 장면이야말로 “이것이 미국이다”의 서사가 곧 반전의 서사라는 걸 확실히 알려준다. 뮤직 비디오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여기에서부터 출발하면 될 것이다. 첫 등장부터 생각하면, 비디오 속의 갬비노는 끊임없이 관심을 끈다. 웃통을 벗고, 화면의 중앙에서 우스운 표정을 짓고 기묘한 몸짓을 취하며, 온갖 유행하는 춤들을 추는데다가, 거기에 아이들까지 함께 그 춤판에 가세한다. 비디오 안에서 갬비노의 모습은 철저하게, 대놓고 전경에 위치한 채로 우리의 관심을 끈다. 뮤직 비디오를 보는 우리의 시선은 당연히 그쪽으로 향하며, 그렇게 자연스럽게 전환-집중된 시선은 전경의 갬비노를 직시하는 동시에 후경의 혼란과 폭력을 외면하기 시작한다. 시선은 그렇게 ‘조작’된다. 이 지점에서 갬비노는 비디오에서 보이는 전경-후경의 묘한 부조화와 노래에서 들리는 가스펠/소울-트랩의 반전 서사를 결합한다. 이는 영상에서의 전경-후경의 교차와 음악에서의 반전의 서사가 결합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고, 예상 가능하듯 이 순간은 바로 총이 발사되는 순간이다. 전경의 흥겨운 갬비노가 후경의 폭력을 그의 자리로 끌고 와 총을 쐈을 때, 전경과 후경은 충돌하며 관심 끌기에 의한 시선의 집중과 전환 또한 무너진다. 우리가 직시하던 갬비노의 춤과 우리가 외면하던 배경의 폭력 사이의 차이는 총성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진다. 여기에 더해 음악까지 그 반전 서사에 맞춰 전환된다. 관심 끌기와 그에 의한 시선의 집중과 전환, 그리고 직시와 외면은 이 지점에서 이분법적인 구성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갬비노가 대중문화의 관심끌기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솜씨는 이 부분에서부터 가장 두드러진다. 이 붕괴의 충격은 대중문화의 ‘관심 끌기’란 성질을 형식적으로 활용해낸 결과다. 더욱 중요한 건 갬비노가 이러한 관심 끌기와 시선 조작을 형식적으로 활용해내는 동시에 내용적으로까지 합쳐냈다는 점이다. “이것이 미국이다”, 총소리에 의한 붕괴 직후 갬비노가 내뱉는 랩이다. “이것”은 갬비노가 그 전까지 뮤직 비디오에서 보여준 것들이다. “이것”은 흥겨운 춤과 그 너머의 폭력과 혼돈이고, “이것”은 대중문화가 관심 끌기로 만들어낸 직시와 외면의 풍경이다. “이것”은 대중문화의 미필적 고의 같은 시선 조작의 효과다. “이것”은 곧 미국 사회에서의 대중문화가 이뤄낸 효과와 그 일부다. “이것”이 미국이다. 갬비노는 적어도 미국에서의 대중문화가 생산해내는 관심 끌기와 시선 조작 효과를 머니 스웩과 플로우를 따라하는 방식으로서 내용적으로 담아냈고, 동시에 노래의 반전 서사와 비디오의 전경-후경의 형식으로 풀어냈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나는 것만은 아니다. 이렇게 노래의 소울/가스펠과 트랩, 비디오의 전경/후경으로 분리된 채로 시작된 “이것이 미국이다”는 후반부가 되면 하나로 합쳐지거나 어느 한쪽이 사라지며 초중반부의 이분법적인 구성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노래에서는 소울/가스펠 부분과 트랩 부분이 두 번씩 반복된 이후 소울/가스펠 파트에서의 코러스와 트랩 비트가 합쳐지며 두 영역이 섞이기 시작하고, 노래가 완전히 끝난 이후에는 두 영역이 모두 부재하는 대신 둔탁한 전자음 비트의 잔해에 피쳐링에 참여한 영 떠그(Young Thug)의 보컬만이 등장한다. 한편 비디오의 후반부에서는 카메라가 점점 갬비노에게 다가가며 그는 자연스럽게 모든 후경이 사라진 자리에 오로지 전경(혹은 그 구분이 무화된 지점)으로서만 위치하게 된다. 노래가 잠시 멎는 이 부분에서 총을 겨누는 자세(어쩌면 이는 총성이 들리지 않는 총격일지도 모른다)를 취한 갬비노는 이후 담배를 피며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서 소울/가스펠과 트랩이 합쳐진 음악이 시작되고, 갬비노는 차에 올라가서 다시 춤을 추기 시작하지만 멀어지는 카메라와 함께 이내 (덤으로 출연한 SZA와 함께) 후경이 된다. 갬비노는 이렇게 유일한 전경에서 유일한 후경으로 이동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 음악에서는 영 떠그가 노래하는 부분에서 다시 등장한다. 그는 다시 전경의 위치에 있지만, 오히려 후경의 사람들이 그를 맹렬히 그를 뒤쫓고 있고 갬비노는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난다(이 장면에서 인용된 <겟 아웃>의 도주 장면과 갬비노 본인이 “Redbone”을 영화의 삽입곡으로 제공한 걸 생각하면 연관성이 더 잘 느껴질 것이다).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 두 영역들은, 이제 교차하거나 섞이는 것을 넘어서 그 경계를 완전히 없앴다. 아니, 경계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경계’ 따위는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흥겨운 춤과 총기 난사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존재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전경과 후경 사이의 경계를 놓은 전제 자체가 무너지는 순간. 그 순간이 찾아오면, 기존의 생각들은 뒤집히고, 질문이 이어진다. 우리가 지금까지 무엇을 듣고 보고 있었는지에 대해. 문제는 다시 시선으로 돌아온다. 시선. 갬비노는 노래와 뮤직 비디오 양쪽을 모두 이용해 시선의 직시/외면과 전경/후경을 분리시키듯 제시한다. 하지만 그러한 이분법적 분리는 비디오에서의 총기 난사와 노래/비디오의 후반부로 전복된다. 보는 것과 보지 않는/못하는 것은 달리 분리된 것이 아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된 것들은, 다르게 생각해보면 사실 하나의 동전 자체에 속해있다. 동전은 양쪽 면을 모두 한 몸에 가지고 있다. 직시와 외면, 전경과 후경도 마찬가지다. 그 지점에서 시선 끌기 자체에 대한 질문들이 시작된다. 시선이 가진 힘 자체, 보는 동시에 보지 않게/못하게 하는 힘 자체에 대해. 이러한 힘을 갖고 있는 대중문화에 대해. 질문은 이어진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보고 보지 않고/못하고 있는가? 이것이 완전히 분리될 수 있을까? 우리의 시선은 어떤 방식으로 조작되고, 시선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조작하는가. 시선은 조작하고 시선에게 조작당하는 우리는 어쩌면 후경에게 쫓기는 전경의 신세가 된 갬비노와 다를 게 없을 지도 모른다. 우리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는가? 어쨌든 간에 대중문화는 계속해서 관심을 끌 것이고, 우리는 거기에 관심을 가질 것이며, 우리의 시선은 다른 방향으로 돌려질 것이며, 우리는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보고 또한 무언가를 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여기에서 어떠한 것에 관심을 갖고 있고, 그 때문에 무엇을 보고 또 보지 못하는가. 갬비노의 총성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관심 끌기의 매커니즘을 불러온다. 우리는 무엇을 직시하고, 무엇을 외면하는가. 또 우리는 무엇을 관심의 전경에 두고, 무엇을 관심의 후경에 드는가. 대중문화가 개인의 삶 전체에 끝없이 영향을 미치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지금, 관심 끌기와 그 효과들은 그 어떤 문제들보다 근본적이고 중요하게 보인다. 관심 끌기를 통해 수많은 시선들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조작’하는 대중문화는, 그러므로 정치성으로 지극히 가득하다. 우리 주위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이 관심을 잔뜩 끌어내는, 시선의 정치성으로 꽉 찬 대중문화 속에서 비평가 이전의 한 명의 수용자이자 감상자이자 소비자로써, 나는 어쩌면 우리가 지금-여기에서 보는 것과 보지 않는/못하는 것에서 한 발 떨어져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것이 미국이다”는 여러 리액션과 분석들이 열광하는 풍자나 비유나 상징의 음악도 비디오도 아니다. “이것이 미국이다”은 직언이고, 선언이다. 우회적이지만, 간접적이진 않다. 제목부터 “이것이 미국이다”이다. 갬비노는 지금-여기 미국 사회의 정치성과 시선을 끄는 대중문화의 정치성을 그의 방식으로 정의내린 셈이다. 그의 음악과 뮤직 비디오는 곧 비디오 속의 총성과 같다. ‘관심 끌기’가 만들어낸 직시와 외면의 효과들을 순간적으로 판단 중지, 일시 정지, 무력화하는 총성, 그리고 그러한 총성으로써의 선언, 총알 대신 정치성이 장착된 피스톨, 그리고 차일디시 갬비노가 쏘아올린 거대한 총성. 이것이 “이것이 미국이다”이다. 갬비노가 “이것이 미국이다”에서 보여주고 들려준 정치성은 단지 미국 사회의 흑인 인권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총기 사용, 폭력에의 노출, 인종 차별, 무차별 테러 등의 지극히 동시대에 걸친 사회적 정치성이 노래와 뮤직 비디오 안에 수많은 상징들로 채워져 있지만, 내가 보기에 갬비노는 단지 이러한 사회적 정치성을 넘어 그가 속한 대중문화의 정치성 또한 담아낸다. 그 정치성은 시선의 정치성이며, 사회적 정치성과도 합쳐진다. 사회가 어떻게 대중문화의 관심 끌기를 이용하는지, 어떻게 시선을 집중하고 분산하는지, 무엇을 직시하게 하고 외면하게 하는지의 메커니즘이야말로 갬비노가 “이것이 미국이다”로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던 점이 아닐까. 단순히 ‘대중문화가 대중들을 현혹해 눈멀게 한다’나 ‘지금의 미국 흑인 대중문화(의 일부)는 잘못되었다’ 같은 일차원적인 진단이 아니다. 이 시선의 문제, 시선의 정치성은 단지 흑인 인권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세상 모든 정치적인 문제와 논쟁거리들이 이 시선의 정치성으로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의 일부 중의 일부 밖에 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며, 거기에 더해 우리의 말과 이미지 등으로 구성된 언어 또한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직시하고 무엇을 외면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직시하게 되고 무엇을 외면하게 되는가. 시선의 정치성에는 사회 내부의 존재로써 우리가 가진 주체성/능동성과 객체성/수동성이 있고, 특정한 사건이나 문제에 대한 직시와 외면이 있으며, 대중문화를 비롯한 수많은 시선 끌기의 메커니즘의 수많은 사용 방법들이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무엇에 시선을 두는가. 그러한 질문들이 등장하는 순간 갬비노는 시선의 힘, 곧 시선의 권력과 얽힌 정치성을 미국 사회의 흑인 인권에 대한 정치성과 절묘하게 엮는다. “이것이 미국이다”는 그렇기에 대중문화의 시선 끌기와 끌지 않기에 대한 노래/비디오인 동시에 흑인 인권/미국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과 무관심에 대한 노래/비디오가 된다. 두 개의 정치성이 종횡으로 중첩하는 지점에 그가 있다. 미국 흑인 중심의 대중문화가 흑인 문제 자체와 더욱 면밀하고 근본적/급진적으로 결합하는 지금-여기의 시점에서, 갬비노는 대중문화와 그 시선의 정치성을 미국 사회의 정치성과 함께 결합해냈다. 생각해보면 “이것이 미국이다”만도 아니다. 차일디시 갬비노, 아니 도널드 글로버(Donald Glover)는 지금-여기 미국 대중문화에서 가장 넓고 깊게, 전방위적으로 활동하는 인물이다. 그는 <30 ROCK>의 작가였고, <커뮤니티>와 <마션>, <한 솔로: 스타워즈 스토리> 등에서 연기한 배우이고, 동시에 <핀과 제이크의 어드벤처 타임>이나 <얼티밋 스파이더맨>, <라이온 킹> 등에서 성우로도 활동했으며, 이미 [Because The Internet]이나 [“Awaken, My Love!”] 같은 훌륭한 음반을 낸 음악인이기도 하다. 2016년에 그는 대중문화의 창작자이자 미국 사회의 흑인으로써의 두 정체성을 동시에 엮어낸 <애틀랜타>를 만들어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코미디의 방식으로 랩을 둘러싼 흑인들의 대중문화와 인종 차별, 흑인들의 삶 등의 사회 문제를 합쳐냈다. “이것이 미국이다”는 <애틀랜타>의 시도를 대중음악으로써, 랩의 방식으로 번역해낸 셈이다. 대중문화와 시선의 정치성과 흑인 인권/미국 사회 문제의 정치성을 엮어내며, 가장 면밀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이것이 “이것이 미국이다”고, 이 사람이 차일디시 갬비노, 도날드 글로버다. 그는 미국 사회와 대중문화의 정치성을 향해 총을 쐈고, 우리는 그곳으로 향해 고개를 돌렸으며, 그 총성을 목격했다. 이제 우리는 총성의 여운을 머금은 채로 다시 시선을 돌려야 한다. 집중과 전환, 직시와 외면, 관심과 무관심이 충돌하고 교차하며 폭발하는 지금-여기에서. | 나원영 onezero96@naver.com Leave a Reply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CommentName* Email* Website 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