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아름다움을 직관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 직관 이상의 질문을 던지는 글을 접하는 건 쉽지 않다. 음악은 왜 아름다운가? 음악적 취향은 어떤 식으로 형성되거나, 혹은 구조화되는가? 예상하지 못한 음악이 자아내는 긴장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DJ 케이티 아키(Keiiti Aki)의 글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몇 가지 제안을 제시한다. 이것이 답을 제공해주진 못한다 할지라도, 당신이 음악을 경험하는 데 있어서 새로운 실마리를 안겨 줄 것이라는 점은 틀림없다. | 정구원

 

 

음악은 낭만이다. 인과관계가 명확한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두 대상, 음악과 낭만은 거짓이라 비난받기 쉽고 동일시될 만하다. 음악과 낭만이 굳이 존재하지 않아도 숨쉬며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다. 둘은 마치 통조림처럼 이상한 필요와 수요에 의해 공정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물이라 말할 수 있다. 개체가 자발적으로 절대적 가치인 시간을 쏟아가며 한껏 꾸밈이 들어간 음악을 듣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꾸밈이란 음악에 부여한 사회적 합의를 의미한다. 웬만한 열정으론 알 엄두를 내기 어려운 이론, 기술적 요소들은 권위자가 제시한 규칙 혹은 공식 석상에서 발표된 합의문이 아닐지라도 다분히 사회적이다. ‘음악’이 되기 위한 자연스러운 조건, 이러한 요소들은 개체가 어떤 이유를 통해 동의를 보인 후, 자연 법칙과 감성 작용을 혼합한 결과물이다. 다시 말해, 물리적 의미의 소리에 굉장히 인간스러운 판단을 부여한다. 따라서 음악 수용에 취향을 이유삼기는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며 생김새를 짐작하는 것과 같다. 경험은 어느 시점에 완성되었다 규정할 수 없으며 항상 과정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또한 경험이 절대적이라 보기도 어렵다.

문화이론학자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은 저서 『Questions of Cultural Identity』에서 자아는 완성된 상태라기보다는 형성되는 과정에 있어 역사, 언어, 문화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의문1이라고 말한다. 분명,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이상 일반적인 경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기 마련이다. 지금이야 인터넷 덕분에 사실상 원하는 만큼 정보를 습득할 수 있지만,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정보에의 접근은 개체가 직접 닿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 인터넷에서 키워드만 주어지면 알 수 있는 범위를 넓히는 데에 한계는 없다. 그러나 똑같은 현상이라도 개인은 정보 차이에 따라 다른 판단을 내리며, 각자의 정보의 습득 경로나 시점 또한 다르다. 즉 경험이 비슷한 맥락으로 묶일 수는 있어도 하나의 총체가 되기는 어렵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생성된 판단 근거인 취향이 음악 판단에 중심이 되는 기준은 제공하나 새로이 고개를 돌릴 용기를 주지는 않는다.

기교와 상징으로 뒤덮인 음악적 이미지를 마주하고 진실을 따지기 시작한다면 그 순간부터 음악이 가만히 흘러가도록 두기 어려울 것이다. 음악적 이미지는 자극과 반응 간 유기적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음악에서 직관적으로 느끼던 이미지를 의심해보자. 직관적이라 함은, 자극과 반응 사이의 연결 관계가 의심을 유발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예시로, 라디오 광고에서 효과음이나 배경음악이 광고의 메세지를 강화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신축 아파트 분양 광고에서는 비발디(Antonio Vivaldi)의 “사계”처럼 누구나 반드시 접해 봤을 법한 클래식 음악을 이용한다. 뻔하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음악 이미지를 통해 모종의 고급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다. 또한 발칙한 상상의 일환으로 야외 수영장에서 장송곡을 튼다고 가정해보면 매우 상식 밖이며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반응을 예측할 수 있다.

이러한 감정적 반응은 자극, 즉 음악을 제시하는 개인이 특정한 방향을 의도한다고 해서 바로 발생하지 않는다. 음악적 이미지는 개인 혹은 공표된 상태가 아닌 작은 공동체에서 창작된 후 타인의 시선과 생각을 거쳐 수용자의 동의를 얻음으로써 완성된다. 어떠한 종류의 감정이 되었건, 소리로써 무언가를 유발하는 일이 처음 시도되면 청자는 모호한 인과관계의 갈피를 잡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창작하는 개인이 긴 시간동안 고통스러운 내적 성찰을 거쳐 어떤 이미지의 틀을 구축해내도 타자와의 소통이 없는 한 그 이미지에 강력한 생명을 부여하기는 어렵다. 초기의 이미지는 여실히 다양한 반응을 유도하고, 이로 미루어 쉽게 짐작해보면, 소통이 완료된 이미지는 일정한 반응을 스스로 제안한다. 이 제안을 거부하면 흥미로운 발상을 할 수 있다.

 

Death Grips “Takyon (Death Yon)”

 

예상 불가능한 이미지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유발한다. 사고는 낯선 것에 우선 경계부터 하도록 설계되어있다. 현재는 무척 좋아하는 그룹이지만, 처음 데스 그립스(Death Grips)를 들었을 때는 정말이지 폭력과 다름없는 음악이었다. 음악으로써 존재 가치를 물을 겨를조차 없었다. 두려움의 대상에는 다분히 강력한 에너지를 분출한다고 판단되는 음악만 있지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화가 거의 없는 정적인 음악, 똑같은 마디를 반복하다가 후반에 소리를 조각내버리는 음악, 소리가 파편으로 시작해서 하나의 완성체가 되는 음악 등 처음 듣는 구성이라면 도무지 예측 불가능한 자유분방함에 기가 죽었다. 어느 순간부터, 음악 감상이 공동체적이라기보단 사생활의 영역에 훨씬 가까웠던 상황에서, 예전과는 달리 스스로에게 이미지로 다가온 음악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사한 판단으로 귀결될지 궁금해졌다. 당시의 친구들에게서 공포를 볼 수 있었다. 거부감에 가까운 반응은 흥미로웠고, 왜 같은 음악임에도 다른 반응이 나타나는 지 의문이 생겼다.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감각 내용은 감각 이전에 막연하다는 감정을 우선 자아낸다. 심할 경우 역겨움, 혐오, 적대심까지 이어질 수 있다. 폴더에 넣지 못하는 ‘기타’ 파일들, 마땅히 둘 자리가 없어 무심코 창고에 쌓아둔 짐짝을 보고 답답해하기. 그렇다면 이러한 감정을 극복하거나, 혹은 감안하는 사람들은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을까? 게다가 상당한 시간을 쏟는 이유는?

아름다움은 기존의 이미지로부터 제시될 수 있고, 빠르기나 음률같은 물리적 요소일 수도 있으며, 새로운 이미지의 형태로 생성되기도 한다. 기존의 이미지인 장르는 음악이 가진 상징의 1차 분류이다. 느린 음악엔 부드러운 움직임이 보편적으로 어울린다. 새로운 분야로써, 기계어를 통해 가상악기를 연주하는 알고레이브(Algorave)2는 기술 발전의 성과를 보여준다. 감흥을 언어로 드러내면 쉽게 괄시받거나 치기로 치부되기는 하지만, 여전히 모든 음악에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여기서 음악적 이미지의 완성도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낯선 만남에서의 두려움은 막연한 공포로 연결되는데, 그 공포는 피하기 어렵고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구간이며, 사실 무지에서 오는 공포는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 관계에 있다. 누군가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무지막지한 공포가 종결된다. 아름다움에 굴복해보자. 여기서 굴복은 자신의 우둔함을 내보이는 것이 아닌 부담없는 삶을 택하는 행위이다. 회의에 빠지기 쉽지만, 그래도 개체적 문화를 시작하며 적어도 시간이 가로막지 않는 괜찮은 조건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모색해볼 수 있다. 아름다움은 직관을 유발하는 무언가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바로 개체가 음악을 듣는 일로 시간을 소비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아름다움이 이미지에 속하기 때문에, 반드시 상호 소통 내에서 이해를 위한 시도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어렵고 현학적인 과정이라기보다는 주변에 보는 눈이 없음을 확인하고선 자유로이 전시중인 그림을 손으로 한번 만져보는 것과 같다.

개인의 취향에 존재하는 도미난타(Dominantá), 가장 우월한 판단 요소를 중심이라 지칭하자. 이 중심이 상하구조를 만들기보다는 병렬의 구성원이 되도록 조금의 시간을 투자한다면, 정말 무한한 음악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나타나지는 않기 때문에, 아름다움이 절대적인 진실이며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준이 명확하면 배척을 일삼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이상인 무언가가 손쉽게 낭비 요소로 취급받는다면 개체의 존재 가치가 무색해질 것이다. 한 아름다움이 있으면 가치 판단의 근거로써 상대물을 생각해낼 수 있다. 이 때 비교 대상으로써의 상대물은 아름다움의 새로운 대상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존중받아 마땅하다. 존 케이지(John Cage)는 무언가가 아름답지 않을 때 이유를 모색해보면 곧 이유가 없음을 발견한다고 말한다.3 이는 기존의 미적 논리 체계 혹은 판단 근거를 버리라 함이 아니다. 무엇이라도 활발한 과정에 놓여있다면 미숙함이나 이미 완고해졌음을 이유삼아 미워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미래의 음악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지금은 수식어 ‘실험’을 달고 있는 음악이 어느 순간 완전한 상징이 되어 시점에 따라 다른 반응을 유도할 수 있다. 다수에게 공유되고 동의받은 이후에는 처음엔 의미를 내포하지 않았던 소리가 우리에게 강력한 감정을 예지하며 접근한다. 감상자는 이미지를 사랑하며 때때로는 갈망하기까지 한다. 마치 광고가 단순한 노출효과를 이용해서 소비 심리를 조장하듯이, 새로운 이미지도 접근 경로를 가져야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되돌아가지 않는 시간을 보낼 경험 대상의 선택은 꽤나 도덕적인 일으로 여겨진다. 과거를 돌아보면 촌스러움과 향수의 경계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정확히 짚어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이미지가 의미있어지는 순간 또한 구차하게 이정표를 세우지 않아도 나타날 수 있다. 이 시점이 도래하는데에 사람들의 선택이 핵심 역할을 한다.선택은 사회적으로 현명하지 않아도 괜찮다. 상반의 경험을 통해 대상을 거꾸로 혹은 안팎을 뒤집어 헤쳐볼 수 있는 판단 근거를 가지면, 순간이 한없이 재미있어진다. 현실은 가장 희박한 가능성이라고 한다. 변화가 무조건 옳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그러나 변화는 언제나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외적, 내적 요소 중 이유가 무엇이 되었던간에 기준이 바뀜을 두려워하지 말자. 아무것도 아닌 뜨거운 날것을 삼키며 통증이 잦아들 때의 향취를 겁없이 들이마시자. | Keiiti Aki keiitiakii@gmail.com

 

* Keiiti Aki
음악을 좋아하는 대학생입니다. 어떤 음악이 너무 좋은데, 사람들은 왜 그 음악을 좋아하지 않을까 고민한 지 9년째입니다. 어느 순간 내가 그 음악을 왜 좋아하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여전히 왜 좋아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음악을 더 많이 들어보고 있습니다. 취미와 탐색의 일환으로 DJ를 합니다.

관련 사이트
Keiiti Aki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keiiti_aki
Keiiti Aki 사운드클라우드 https://soundcloud.com/par0821

 

 

  1. “Identities are about questions of using the resources of history, language and culture in the process of becoming rather than being.” Stuart Hall
  2. 실시간 코딩 등을 통한 알고리즘으로 만들어진  댄스 음악을 선보이는 레이브 이벤트. 알고리즘(Algorithms)과 레이브(Rave)의 합성어.
  3. “The first question I ask myself when something doesn’t seem to be beautiful is why do I think it’s not beautiful. And very shortly you discover that there is no reason.” John C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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