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힙합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던 이라면 XXX의 첫 번째 정규작 [LANGUAGE]를 결코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 작품이 지닌 혼란스러운 사운드와 비판적인 메시지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냈고, 이는 앨범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지닌 사람이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강력하고 뒤틀린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과연 이 앨범이 그 ‘강력하고 뒤틀린 힘’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앨범인지에 대한 의문을 지닌 이도 분명 존재했다. 이에 [weiv]에서 7년만에 [pros & cons]의 꼭지를 되살려 앨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봤다. 본 칼럼은 올해 1월부터 3월까지 서신의 형식을 빌려 진행되었으며(민경환 비평가의 「위기가 와도 시체처럼 -힙합과 문학의 평행을 껴안기」로부터 형식상의 영감을 얻었다), 그 와중에 발표된 [SECOND LANGUAGE]에 대한 이야기 역시 진행될 예정이다. | 나원영 onezero96@naver.com · 정구원 lacelet@gmail.com XXX | LANGUAGE | BANA, 2018 나원영 |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오늘 [SECOND LANGUAGE]가 월말에 발표된다는 소식이 떴습니다. 사실 [LANGUAGE] 이후로도 시간이 꽤 지났습니다.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고, 당연히 많은 말들도 나왔습니다. 이미 국내 언론사나 해외 매체들에서 XXX를 받아들이고 설명하는 기본적인 공식이나 표현들이 심심치 않게 보이더라고요. 동아일보에서 진행한 XXX와의 짧은 인터뷰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용접 불꽃이 튀고 쇠 철창이 갈리는 소리 같다. DJ 프랭크(FRNK)의 혼란하고 무자비한 비트 말이다. 그 위로 사이코패스 같은 김심야의 무표정한 금속성 고음 랩이 철컹거리며 날아다닌다. XXX의 음악은 그래서 마치 공사 중인 교도소의 소리 풍경 같다.” 김심야의 랩이 ‘사이코패스’ 같다고 하는 건 제쳐두고, FRNK의 비트에 대한 표현들이 제법 재밌었습니다. ‘공사 중인 교도소’에서 나는 ‘용접 불꽃’과 ‘쇠 철창’ 소리. ‘금속성 고음’이나 ‘철컹’과 함께 생각해보면 맞는 말인 것도 같습니다. 일단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해볼까요. 갈 길이 좀 멀 거 같네요. 동아일보의 단어들이 넌지시 지시하는 금속성의 이미지들은 자연스럽게 인더스트리얼 힙합으로 이어집니다. 지금이야 데스 그립스(Death Grips)가 일종의 밈이 되어서 거의 모든 지분을 다 가져간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 찾아보니 장르의 개념 자체는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1980년대 중후반부터 존재했다고 합니다. 팝 그룹(The Pop Group)의 마크 스튜어트(Mark Stewart)나 택헤드(Tackhead), 비트닉스(The Beatnigs) 같은 팀들을 발견했는데, 들어보니 70년대 말부터 80년대 당시의 포스트 펑크나 노 웨이브와 교차되는 지점이 많다고 느꼈습니다. 이후 90년대에 등장한 테크노 애니멀(Techno Animal)은 이름처럼 당시의 테크노를 비롯한 레이브 음악에서, 2000년대를 대표하는 다이얼렉(Dälek)은 이 때 폭발하던 앱스트랙트 힙합에서 많은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데스 그립스를 비롯해 클리핑(clipping.)이나 제이펙마피아(JPEGMAFIA), 물론 [Yeezus]의 카녜 웨스트(Kanye West)까지 같은 동시대의 음악인들의 경우엔 글리치를 비롯한 실험적인 전자 음악들이고요. 아마 지금의 인더스트리얼 힙합과 가장 부합하는 소리를 만들었겠죠. 여기서 저는 ‘인더스트리얼 힙합’ 자체의 형태나 개념이 힙합 자체의 역사를 어느 정도 따라가는 것도 있지만, 레프트필드 진영의 다른 장르들에 더 많은 영향을 받으며 유동적으로 변화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각각의 음악인들이 저마다의 인더스트리얼 힙합을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인더스트리얼 음악 자체부터 노웨이브, 레이브 음악, 앱스트랙트 힙합, 노이즈와 글리치… 이 모든 시기의 음악인들을 전부 ‘인더스트리얼 힙합’으로써 같이 묶기에는 장르적 다양성 면에서 애매하고 느슨한 지점들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그러므로 XXX의 ‘인더스트리얼 힙합’을 장르적으로 파고든다면, 이를 일종의 느슨한 개념으로 보면서 XXX가, 정확히는 FRNK가 어떤 방식으로 그들만의 ‘인더스트리얼’한 소리들을 만들어냈는지에 대해서 파고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XXX의 소리는 원래부터 [LANGUAGE]에 있는 것만큼 인더스트리얼하지는 않았습니다. 2014년의 [XX]나 2016년의 [KYOMI]의 비트는 확실히 하드코어한 트랩이 바탕이었다고 느껴집니다. (‘인더스트리얼/하드코어 트랩’ 같은 표현이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808 베이스나 신스음을 화려하게 이용한 비트들은 EDM류의 트랩에 하우스나 베이스 뮤직 등이 무겁게 섞인 쪽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여기에 ‘공사 중인 교도소’ 같은 표현들이 쉽게 나올 수는 없어 보입니다. “Dior Homme”에서의 감각적인 신스음 활용이나 “승무원”의 수려한 베이스 라인 같은 FRNK의 특징들은 “4 Walls”의 리믹스 같은 경우에서도 나타납니다. 물론 “Liquor”나 “우물정자” 같은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세게 느껴졌던 부분들이 많긴 했지만요. 이후에 나온 “Ooh Ah”를 비롯해 “Gift”의 리믹스나 “Heels” 같은 FRNK의 다른 작업들에서 이 시기의 특징들이 보이는 걸 생각해보면, [LANGUAGE]에서 전자음으로 만들어내는 ‘인더스트리얼’은 의도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하튼 [XX], [KYOMI], [LANGUAGE]를 죽 늘어놓고 보면, FRNK의 비트가 점진적으로 일반적인 트랩 형식에서 점차 벗어나 인더스트리얼에 닿았다고 봅니다. 어쩌면 스타일리시한 트랩보다 인더스트리얼이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겠죠. FRNK의 ‘인더스트리얼’한 소리에 가장 큰 특징이 있다면 충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걸 이야기하려면 키라라 이야기를 살짝 해야 할 거 같네요. 「살아, 움직이는 Sarah, moves」에서 ‘강한’ 빅 비트 베이스와 ‘이쁜’ 멜로디 라인이 서로 충돌하고 해체된 뒤 재조합되며 키라라의 소리들이 만들어진다고 했는데, 이 과정이 곧 키라라의 음악 자체에 맥락으로써 존재하는 모순이나 역설, 양가적인 세계관에 이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각기 다른 영역의 소리들이 충돌하는 건 [LANGUAGE]의 비트에서도 드러난다고 봅니다. 물론 키라라의 경우와는 확실히 다릅니다. 키라라의 모순/역설/양가적인 소리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그 모두를 그러안아 키라라만의 소리를 만들어낸다면, XXX는 쪼개지고 분열합니다. 소리들은 말 그대로 서로 맞부딪혀서, 산산조각 나버립니다. (어쩌면 초창기의 인더스트리얼 음악들이 공연장이나 악기 같은 걸 다 부숴버리는 게 연상되기도 하네요.)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대표적이라 생각하는 곡을 뽑아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우선적으로, [KYOMI]의 어느 정도 인더스트리얼했던 곡들과 [LANGUAGE]에서 확실히 드러나는 인더스트리얼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FRNK의 프로듀싱을 ‘감각적’이거나 ‘세련되게’ 느껴지게 하던 신스음의 부재입니다. 이 대신에 베이스의 몸피가 어마어마하게 묵직하게 왜곡되어 불어났고, 신스음 대신에 온갖 날카로운 하이햇이나 스네어 등이 글리치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로 등장합니다. 소리를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거에 항상 한계가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유채 물감으로 새카맣고 두텁게 덧칠한 모노크롬 캔버스에 거친 날붙이를 직직 그어대는 느낌일까요. 이런 비유는 너무 오글거리나요. 어쨌든 저는 그러한 모습이 상상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음반의 첫머리에 있는 곡들이 이를 굉장히 잘 드러낸다고 느꼈습니다. “18거 1517”은 초반부에 베이스와 킥 드럼에 신스음을 얹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구성이지만, 후반부로 들어가면 김심야의 가사가 이전까지의 서사를 뒤집는 것과 함께 (김심야에 대해서는 차차 말하는 편이 나을 거 같습니다.) 소리도 마찬가지로 뒤집힙니다. 베이스는 더욱 더 무겁고 둔탁하게 울려 퍼지고, 신스음은 뒤로 희미하게 물러나는 대신 샘플링된 높고 날카로운 소리들이 파편화된 채로 그 위에 깔립니다. 물론 김심야의 하이톤 또한 전체적인 사운드를 구성하는 요소로써 보기도 해야죠. 낮고 무거운 베이스와 거칠고 날카로운 목소리/글리치가 서로 충돌할 때, 이는 핵융합보다는 핵분열 같은 효과를 냅니다. 듣는 이가 어느 한 소리에 적응할 수 없도록, 극단의 위치에서 상충하는 두 소리를 동시에 배치하며 긴장 상태로 몰아넣습니다. 키라라의 소리들이 서로 충돌함에도 불구하고 키라라만의 방식으로 합쳐지는 것에 비해, XXX의 소리는 오히려 더욱 더 찢어지고 조각납니다. 뒤이은 “Ugly”에서도 마찬가지로 무거운 베이스 비트를 깐 다음 깨지고 터지는 것처럼 들리는 각종 글리치와 샘플을 하이햇과 스네어에 위치에 놓으며 균열을 만들어내고, “수작”은 아예 메타적으로 접근해 FRNK의 비트가 김심야의 두 번째 벌스를 글리치와 노이즈로 잡아먹으며 서로 반목하기까지에 이릅니다. 이 충돌은 “간주곡”에서 조금 이르게 절정에 닿는다고 봅니다. 메타적으로 먼저 보자면 제목이 ‘간주곡’인데 음반에서 길이가 가장 길다거나, FRNK의 연주가 김심야의 랩보다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게 일단 그렇습니다. 물론 곡 자체에서도 초반부의 합창과 강이채의 바이올린에서 FRNK의 가장 ‘인더스트리얼’한 비트로(심지어 말 그대로 기계적인 시즈 탱크의 샘플링까지도 있죠.) 완벽하게 전복되는 전개나, 전체적인 사운드의 분열적인 구성은 물론이고 깨지고 터지는 듯한 샘플까지 매우 다양한 영역에서 충돌이 일어납니다. “간주곡”에 대한 건 사실 결산 때 ‘올해의 트랙’에서 다뤘으니까 줄이는 게 나을 거 같네요. 결론적으로, XXX의 소리들이 분열적으로 충돌하는 과정은 사람을 새삼스럽게 불쾌하게 합니다. 불쾌하게 한다고 하는 건, 계속해서 그 긴장 상태를 유지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양한 의미에서 ‘노이즈’ 자체가 이러한 성질을 담고 있기도 하고요. 이 방법론은 제이펙마피아나 클리핑이 전자 음악의 글리치와 노이즈를 훨씬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과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노이즈 록에 더 가까운 데스 그립스보다는 말이죠. 클리핑이 [Midcity]의 인트로에 끔찍하게 시끄러운 하쉬 노이즈를 배치하는 것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일 테고, 제이펙마피아가 “Baby I’m Bleeding”에서 계속해서 ‘에 아 에 아’거리는 샘플링을 배치해 정신 사납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면 대니 브라운(Danny Brown)이 [Atrocity Exhibition]에서 써먹은 전자음악 샘플링들도 있고요. 소리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는 말 그대로의 ‘잔혹 행위 전시’입니다. (생각해보면 페기(JPEGMAFIA)와 클리핑의 다비드(Daveed Diggs)도 그렇고 대니도 제법 날카로운 하이톤이네요.) XXX는 이들과 비슷하게 무거운 베이스와 날카로운 글리치를 상충하도록 배치하며 불쾌감을 만들어냅니다. 뭔가가 그렇게 충돌해서 산산조각 나고 망가지는 광경은 당연히 기분 나쁠 수밖에요. 다시 인더스트리얼로 돌아가서, FRNK의 인더스트리얼은 이런 지점에서 성립된다고 봅니다. 쓰로빙 그리슬(Throbbing Gristle)이나 아인슈튀어첸데 노이바우텐(Einstürzende Neubauten)이 악기도 무대도 말 그대로 다 부숴버리는 것과 좀 비슷하게, XXX도 소리를 충돌시키고 부수면서 불쾌한 효과를 냅니다. 우선적으로 아무리 노이즈에 익숙하더라도 청자를 불쾌한 긴장 상태로 끌고 간다는 점에서 그렇고, 앞으로 더 얘기하겠지만 이 분열적인 충돌이 김심야의 리릭이나 태도와도 어느 정도 연결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XXX의 소리가 국내외적으로 굉장히 고유한 ‘인더스트리얼’의 특징을 띤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해외의 음악인들과 함께 두고 보더라도, XXX의 소리는 확연히 다릅니다. 독보적으로 잘한다, 의 의미보다는 지금까지 언급했던 다른 팀들과 마찬가지로 확실하게 뚜렷한 개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요. 물론 전자 음악에서 여러 비슷한 소리들을 많이 찾을 수도 있겠지만, XXX는 이를 그들만의 인더스트리얼 힙합으로 담은 거죠… 쓰다 보니 조금 많이 길어지긴 했지만, 이런 이유로 저는 XXX가 [LANGUAGE]로 들려준 사운드를 지지하는 편입니다. 글을 어떻게 끝낼지를 잘 모르겠어서, 일단은 여기에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간주곡” 정구원 | [LANGUAGE]의 사운드는 인상적이다. 그것을 부인하고자 하는 사람조차 어느 순간 이 앨범의 사운드에 홀릴 정도로. 이 명제를 거부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FRNK가 DAW 라이브러리의 저 구석에 쳐박혀 있던 소리를 극단적으로 왜곡한 뒤 파편화된 비트의 형태로 재조립하는 과정은 힙합이란 음악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황홀한 순간을 만들어내고, 그것은 [LANGUAGE]에서 어떤 정점에 이른 것처럼 보이니까요. 온갖 비정형의 소리가 초 단위로 포개어지는 “Ugly”의 브레이크다운이나 ‘떠떠떠떠’ 하는 소리가 피치를 달리하며 고막을 융단폭격하는 “수작”의 비트는 FRNK의 공격적인 사운드메이킹의 매력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원영 씨께서 설명해 주신 FRNK의 사운드에 대한 역사적 접근은 XXX의 소리를 파악하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 같습니다. 다만 그것이 ‘불쾌한 긴장 상태’를 유발하는가에 대해서는 조금 의견이 다른데, 저는 FRNK가 사용하는 소스가 비록 궤를 벗어난 것처럼 들릴지언정 그 뼈대에 있어서는 리듬의 강과 약을 비교적 정석적인 브레이크비트의 패턴으로 배치하고 있다고 파악했기 때문이에요. 온갖 글리치와 노이즈가 귀를 찢는 와중에도 그것은 (특히 김심야의 랩이 동반되는 상태에서) ‘쿵’과 ‘짝’이라는, 우리가 아주 익숙하게 고개를 흔들 수 있는 리듬 패턴에서 벗어나는 것을 거부합니다. 말씀해 주신 초기 인더스트리얼 음악과 비교하자면, 단순히 ‘소리를 충돌시키고 부수’는 것으로만 공통점을 밝히기에는 기존 대중음악의 모든 틀을 탈피하고 싶어했던 초기 인더스트리얼의 해체적 구조와 XXX의 ‘들음직한’ 구조는 기본적인 전제부터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FRNK의 사운드는 ‘불쾌’하다기보단 ‘흥미로운’ 긴장 상태, 굉장히 괴상하고 기형적인 식재료로 만들어진 채로 그릇에 담겨 있는,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요리’로 인식하고 (맛있게) 먹는 데는 큰 무리가 없는 정식과도 같다고 할까요. 그릇이 부수어진 채로 서빙되는 것이 아니라요. 그런 점에서 [LANGUAGE]가 지향하고 있는, 혹은 레퍼런스로 삼고 있는 가장 절대적인 작품은 [Yeezus]일 거라고 봅니다. 카녜는 ‘듣기/익숙해지기 쉬운 실험’이란 역설적인 가치를 이 작품을 통해 구현해냈고, 그것이 [LANGUAGE]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지향하고 있는, 혹은 ‘따라가고’ 있는 가치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흥미롭고 신나는, 그리고 강박적일 정도로 꽉 짜인 소리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는, 이것을 여러 사람들이 평가하는 것처럼 ‘도전적’이라고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떤 점에서 이는 FRNK에게 좀 불공평한 상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카녜와, 다이얼렉과, 데스 그립스와, PNSB와, TFO가 선행하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선행자들을 잠시 염두에서 내려놓는다고 해도, 저는 XXX의 비트가 ‘니 건 너무 난해’하고 ‘좆같은 한국은 날 싫어’한다는 자기암시의 영역에서 재주를 넘는 듯하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어렵습니다. 과시적이고 그 과시에 합당한 짜임새를 갖췄지만, 동시에 그것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소리라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러한 인상은 아마 김심야의 가사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봅니다. 끊임없이 예술과 돈과 가짜 사이에서 배회하고 있는, FRNK의 프로덕션을 언어의 방식으로 특정한 세계관에 배치시키는 가사 말이죠. 저는 김심야가 가진 세계관에 대한 원영 씨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나원영 | 사실 제가 XXX를 [KYOMI]로 처음 들었을 때에는 김심야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좋을 거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음악을 들을 때 가사 자체를 최우선으로는 두지 않거나 아니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입니다. 구원 씨도 어느 정도는 아시겠지만, 저는 소리에 조금 더 관심이 많은 편이니까요. 물론 가사에 관심 있다면 찾아보긴 하지만 말이죠. 이건 힙합도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입니다. 힙합에서 가장 중요한 건 오로지 랩에 그 자체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고, 이것은 이것대로 또 다른 이야기일 것 같습니다. 제가 [KYOMI]에서 한동안 제일 크게 주목했던 건 무엇보다도 FRNK의 비트였습니다. FRNK는 어느 정도 다뤘으니까 김심야로 넘어가자면, [KYOMI]에서의 김심야는 FRNK의 무거운 베이스와는 대조적인 특유의 하이 톤과 플로우로 구원 씨가 말하신 ‘흥미로운 긴장 상태’를 만들었다고 느꼈습니다. (생각해보니 긴장 상태나 ‘익숙해질 수 있는 실험’에 대해서는 구원 씨 쪽이 조금 더 적절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 XXX를 접할 무렵의 저에게 김심야는 일단은 그 정도였는데, 가사들이 그 때까지는 좀 애매모호했다는 점도 있습니다. 사실 음반이 나왔을 당시에 여러 곳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기도 했죠. 다만 ‘한영혼용’이나 ‘영어 가사의 무분별한 사용’ 같이 오래 전에 철이 지난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닙니다. [KYOMI]에서 김심야는 소비적인 (가상의?) 공간을 제시합니다. 음반 전체적으로 언급되는 파티의 풍경들이나 “승무원”에서의 고급 비행처럼요. 스스로는 ‘동물들의 잔치’라고 표현을 하더군요. 향락이나 허영 같은 물질적인 감각들이 넓게 퍼져있는 가운데 김심야는 이 한복판에서 모든 것에 대해 분노로 차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음반 시작부터 엄청나게 날이 선 채로 술에 취해 시비를 겁니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해서) 이 거대한 파티에 있는 모두에게 화를 냅니다. 다만 이 분노는 정확한 상황이나 대상을 설명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정동처럼 표현됩니다. [KYOMI]와 그 전후에 나온 “1775”나 “Air” 같은 곡까지 포함해서, 2016년의 김심야는 그냥 눈에 뵈는 모든 것들에 화를 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이 방향성이 보이지 않는 모호한 분노 때문에 [KYOMI]에서 김심야의 랩이 ‘서사적 도구보단 단순 악기로 인식했을 때 훨씬 가치를 갖는 (이선엽)’다거나 ‘전체적으로 프로덕션이 구현한 스타일과 무드에 일조하는 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진석)’ 정도로 평가받았다 생각합니다. 저도 어느 정도는 동의하고요. 물론 이 분노는 「혼자 화난 래퍼들」에서 윤광은이 언급한 ‘전면적 미국화’ 혹은 ‘로컬라이징’의 영 좋지 않은 사례들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고, 거기서부터 김심야의 랩과 정서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저 자신의 세계관과는 닮은 곳보다는 다른 지점이 많다고 느끼지만, 어쨌든 저는 개인적으로 김심야의 세계관의 동력이 분노라고 생각합니다. [KYOMI] 이후 XXX와 특히 김심야는 여러 인터뷰에서 이 음반이 3부작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는 당연히 [LANGUAGE]고, 다른 하나는 [Moonshine]이죠. 결국 이 음반들을 관통하며 (물론 [SECOND LANGUAGE]의 존재도 지금 시점에선 고려해야겠지만요.) 김심야가 랩으로써 보여주고, FRNK가 소리로써 받쳐주는 세계관은 분노를 바탕으로 한 세계관입니다. [KYOMI]의 가사에 의의가 있다면, 이 ‘3부작’의 첫 시작에 두고 보았을 때 이제부터 XXX가 들려줄 분노가 얼마나 거대한지를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나가는 모든 것들에 시비를 걸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욕을 할 만큼 큰 분노요.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김심야가 제시한 분노의 대상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 궁금해질 겁니다. 결국 이 분노의 정동을 제대로 이해시키지 못했다는 게 어쩌면 [KYOMI]의 한계일지도 모르겠네요. 글이 일종의 김심야 연대기처럼 써지지만, 일단은 계속해보겠습니다. [KYOMI] 이후 김심야는 디샌더스(D.Sanders), 그러니까 ‘손대현’과의 믹스테잎 작업을 발표했고, 2017년 3월에 250이 프로듀스해준 솔로곡인 “Interior”와 손대현과의 데모 작업곡인 “Manual”을 각각 음원 싸이트와 사운드 클라우드에 동시에 발표합니다. 저는 김심야가 [KYOMI]에서 제시한 분노의 대상이 어디로 향하는지가 이 두 곡에서부터 확실하게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Interior”과 “Manual”은 제시된 분노를 동력으로 확실한 지향을 그으며 세계를 만들어가는 거죠. 사실 “Interior”은 [KYOMI]와 전후의 곡들처럼 모호한 대상을 향해 조소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랩이 최고라고 하는 류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많이 나오고 김심야도 예외는 아니지만, ‘방송 안 나오냐고 감히 여쭙는 새끼들을 위해 방송 하나 만들어야겠어 / 토요일마다 만나면 되겠지 바나TV 대망의 아작이 나는 주말연속’ 같은 부분은 조금씩 구체적으로 그 분노와 조소의 대상을 밝히죠. 그리고 이는 물론 “Manual”에서 곧바로 드러납니다. “Manual”은 직설적인 곡입니다. 김심야가 그 때까지 가사들을 배배 꼬았던 것 때문에 그 효과는 더 늘어나고요.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만 봐도 확실합니다. ‘Stop making rap music’이랑 ‘지금 가장 뜨거운 건 랩이 아니라 SHOW ME THE MONEY.’ 음원 차트와 랩 레슨, ‘로컬라이징’ 같이 국힙-시스템(‘씬’ 같은 표현도 있지만 뭔가 마땅한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아서 맘대로 지어보았네요)의 구성요소들이나 래퍼들의 창작행위 그 자체를 비롯해, <SHOW ME THE MONEY>까지 언급하며 끝내는 “Manual”은 김심야의 분노가 (사실 어느 정도 예상 가능했겠지만) 국힙-시스템 자체를 향해있다는 걸 가사의 모든 부분에서 빼곡이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는 단순한 ‘씬 비판’과도 어느 정도는 다르게 느껴지고요.) [KYOMI]에서는 지극히 모호했던 분노의 대상은 확실해지고, 기본적인 세계관의 세팅이 마무리됩니다. 국힙-시스템에 대한 분노. 한국에서 태어나 랩을 하며 산다는 것에 대해 어떤 의미를 두고 있는가, 에 대한 것들이라고 해야 하나요… 본격적인 이야기들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김심야가 어떻게 세계관의 형상을 만들었는지를 말하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LANGUAGE]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 전의 작업들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우선은 일종의 프리퀄 느낌으로 [KYOMI]에서 “Manual”까지의 김심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우선 모호한 상황과 그에 대한 강한 분노를 먼저 드러냈고, 이후 애매했던 대상을 국힙-시스템으로 확실히 하며 김심야는 이 다음의 행보를 예고합니다. 재미있게도, 어느 시점부터 계속 예고되었던 [LANGUAGE]보다 김심야와 손대현이라는 이름으로 작업되던 믹스테잎인 [Moonshine]이 2017년 말에 먼저 발매됩니다. 더욱 재밌는 건 [Moonshine]이 김심야가 말하는 서사의 순서에 있어선 발매일과 맞게 두 번째가 아니라 마지막(혹은 세 번째)라는 점이죠. 개인적으론 그에 대해 이야기를 먼저 해야 결국 김심야가 [LANGUAGE]에서 자체적으로 구축한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원 씨는 김심야의 이 연대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또 순수하게 리릭의 측면에서 김심야의 [Moonshine]을 어떻게 보셨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싶습니다.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Manual” 정구원 | “Manual”과 함께 릴리즈된 “Interior”의 마지막 라인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돈이 만든 위치가 만든 / 돈이 벌어주는 거’. 아마도 우연이겠지만, 저는 김심야가 국힙 씬을 바라보는, 혹은 국힙 씬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이 가사에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위치’를 추구하는 것. 물론 그것이 돈으로 쌓아올린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합니다. 그의 이러한 세계관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던 [Moonshine]에서 [LANGUAGE]가 보여주듯이 말이죠. [Moonshine]에서 김심야는 패배자입니다. 서두에서부터 ‘이 앨범도 / 어차피 잘 안 팔릴 거’ (“Moonshine”)라고 운을 띄운 뒤 자신을 ‘난 그런 돈 없이 / 간지 하다가 망친 놈’ (“Closecall”)이라 칭하고 예술성과 상업성 사이의 반비례 관계를 ‘실력과 벌이 / 젊은 부부의 이혼상태’ (“Take A Look”)라고 묘사하는 [Moonshine]에서의 그의 모습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돈 안 되는 예술을 추구하는 아티스트’의 그 모습입니다. 돈만 밝히는 씬(‘모든 게 다 필요 없어진 / 이 시장 또한 돈으로 굴러 가는구나’, “Baggage Claim”)과 자신(‘제일 싫어했던 돈 얘기가 / 나의 현재쯤’, “Flowers”)에 대한 환멸과 그런 현실에 대한 인정(‘돈은 젊음 빼고 모든 걸 계산해 / 세상만사가 다 은행 안에’, “Dance”) 혹은 냉소(‘내가 욕심이 좀 지나치게 / 간지랑 돈을 다 챙기려는 실수’, “Money Dummy”)까지 빠짐없이 들어가 있으니, 이 화자의 염세주의에는 보증 마크를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패배감에만 빠진 루저만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힙합으로서의 가치가 부족하겠죠. ‘내 앨범을 이기는 건 / 새로운 내 앨범뿐이었으니’ (“Process”)처럼 스왝도 한번 부려 주고, ‘잘 팔리는 거 만들 줄 알았으면 / 랩을 왜 해 go sing a hit’ (“Closecall”)라고 읊으며 돈만 쫓는 래퍼들과 자신을 구분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90프로가 / 예술가인 척’하는 여기(“Comintoya”)에서 나머지 10프로에 자신이 위치한다는 것을 밝히지 않으면 김심야가 그리는 패배자의 모습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은퇴해도 / 내 위치는 / locked and good’ (“Process”)인 그 위치말이죠. 그럼으로써 김심야는 ‘멋지게’ 패배합니다. “Outro”는 그러한 멋있는 패배의 완성입니다. ‘진심이 담긴 노래가 / 손 꼽을 만큼밖에’ 없고 ‘사는 대로 적는 놈’도 얼마 없는 한국이란 시장에서 김심야는 자신의 운명을 ‘난 찝어내는 걸로 / 먹고 살아야’ 한다고 표현하면서 ‘날 딛고 올라갈 다음 애들은 / 더 나은 시장에서 살길 바래’라고 기원합니다. 여기에는 진심이 담겨 있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가짜로 가득 찬 국힙이란 세계에서 환멸을 느끼면서 ‘푼돈 만질려’고 ‘좆 빠지게 만들어’야 하는 자신에 대한 비애감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어구입니다. 물론 이 노래를 듣는 청자들은 그 비애와 패배감에 감정적으로 몰입하면서 김심야가 [Moonshine]을 통틀어 그려낸 국힙에 대한 관점을 수용하게 될 것이고요. [Moonshine]에서 그려진 국힙 세계관은 이분법적으로 단순합니다. 한 축에 ‘돈더미’를 쫓는, 그리고 실제로 많은 돈을 거둬들이는 ‘성공적’인 래퍼들이 있고, 그 반대편, 김심야가 자신을 위치시키는 곳에 예술을 쫓지만 돈은 벌지 못하는 아티스트가 있습니다. 여기서 계속해서 자각하게 되는 것은 김심야가 실제로 성공적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상관없이 그가 자신을 지속적으로 후자의 위치에 ‘위치시키는’ 모습입니다. 설득력의 측면에서 이것이 단순히 ‘상업성=Fake’라는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보다 유효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김심야가 그러한 위치에서 ‘대항마’로서의 자신을 부각시키는 것이 더 쉬운 작업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위치선정은 본인 스스로가 ‘[KYOMI]와 [Moonshine]의 중간다리’라 칭했던 [LANGUAGE]에서 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앞서 언급했던 FRNK의 공격적인 비트에 실린 김심야의 랩은 ‘멋있는 건 뜨게 돼 있지 / 다만 미처 생각 못한 건 베껴서 돈 버는 놈들’ (“18거 1517”)과 ‘연예인 놀이’를 하는 래퍼, 현실에 관심 없는 척하는 ‘부잣집 아들’, 아인슈타인처럼 자신을 베끼는 뱁새 새끼들(“S_it”)을 까내리면서 [Moonshine]의 비애를 분노로 전환시킵니다. 그 분노의 대상에는 자신의 위치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 드릴 벤틀리는 없던 걸로 돌리는 “18거 1517”로 시작해 ’간지 좇다보니 비참해진 꼴에 / 내가 그리고 있던 내 생활과는 조금 다른 그림, fuck this’의 좌절(“Trust Us”), ‘결국에 나 또한 똑같아지겠지 / It’s all about the money‘ 같은 비관(“Ugly”), ‘빡치는 이유 서술해서 푼돈 버는 business 중 / … / 단순히 버는 것보다는 내 좆대로 사는걸 골랐지 우선’에서 드러나는 자기 비하(“Bad For You”) 같은 파편적인 구절에서 드러나듯이 말이죠.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위치를 진정으로 ‘비관’하는 것이 아닌 ‘정당화’의 기제라는 건 ‘돈 얘긴 그만’하자고 계속해서 되뇌이는 “뭐 어쩔까 그럼”만 들어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술은 인간/상업, 인간은 욕심/상업은 이익, 욕심은/이익은 돈이라는 명제를 계속해서 지연시키면서 예술을 사랑과 자연으로 재배치시키려는(그리고 끝내 마무리짓지 못하는) 시도처럼요. 아마도 김심야가 지닌 힘, 자신이 위치했다고 주장하는 위치의 정당함을 청자에게 설득시키는 힘은 이 환멸의 굴레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에서 비롯될 것이고, FRNK의 분열증적인 사운드나 디샌더스의 침잠하는 소리는 그 환멸을 각자의 방식으로 채색하면서 김심야가 지닌 세계관의 설득력을 더합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XXX, 그리고 김심야와 손대현의 음악을 고평가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을 테고요. 가짜가 판치는 세계에 오롯이 서서 빛을 발하는 진정한 무언가, 돈이라는 가장 저열한 인식의 지평을 돌파해서, 혹은 거기에 붙잡혔음에도 불구하고 붙들려 있지 않으려는 듯이 발버둥치는 그의 모습에 이들 작품을 지지하는 청자는 감화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김심야가 자신의 가사에서 드러내는 인식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그것은 돈과 예술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깨우친’ 듯이 환멸로 일관하는 태도 – ‘모든 게 다 필요 없어진 / 이 시장 또한 돈으로 굴러 가는구나’ (“Baggage Claim”) – 의 참을 수 없는 단순함, 혹은 ‘쉬운’ 접근법에 대한 일종의 지겨움에서 비롯됩니다. 그것이 설령 작품에서의 수사가 아닌 국힙을 비판하는 가장 정확한 렌즈라고 가정해도, 저는 이런 류의 아티스트십(artistship)이 그가 (역설적으로) 소구하는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제일 쉬운 종류의 길이라는 점이 걸리적거린단 말이죠. 더불어, 그가 이 세계관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XXX가 확장시키는 사운드의 가능성이 오로지 그러한 믿음으로 인해 유효함을 띤다는 의심을 떨칠 수 없게 만듭니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상당히 위태로운 상태가 아닐까 싶어요. 나원영 | 김심야가 ‘상당히 위태로운 상태’라는 표현이 되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만 다른 이유에서 맘에 들었는데, 이는 어쩌면 말씀하셨던 아티스트십에 대한 의견 차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우선 저는 김심야가 ‘예술 VS 자본’으로 단순화할 수 있는 구도 속에서 자신을 ‘예술’에 두는 것에 끝날 정도로 모든 걸 ‘쉽게’ 인식하며 그 믿음을 끌어간다고는 보지는 않습니다. 사실 그러한 식의 구도는 나름대로의 힙함을 추구하는 래퍼나 예술가 등 누구나 흔하게 두고, 아티스트십에 대한 일종의 클리셰로써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왔다고 봅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나 커트 코베인(Kurt Cobain) 등이 그런 방식으로 ‘진짜-예술’의 대변자(?)로써 대중에게 유명하게 ‘소비’되었고요. 특히 국힙 씬에서는 자신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에 더 가깝건 간에 일단 자신을 나름의 진짜로 두고 자신이 아닌 래퍼들 중에서 한 부분을 가짜로 치는 식의 가사들은 여기저기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또 자연스럽게 작업량이나 랩 스킬 등을 자랑한다거나 결국에는 돈을 많이 번다는 식으로 잇고요. (김심야도 어쨌든 그 기본적인 구조 안에는 있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써먹습니다.) 이런 ‘진짜 VS 가짜’라는 또 다른 흔한 구도가 ‘예술 VS 자본’과 합쳐지는 거죠. 진짜-예술과 가짜-자본의 이분법. 개인적으로는 이미 이러한 식의 이분법적 인식은 너무 오랫동안 여러 방식으로 쓰여 왔고, 김심야가 적어도 그걸 모를 리는 없다고 일종의 비약을 해봅니다. 여러 인터뷰에서 김심야는 계속해서 자신이 돈을 벌고 싶다고 이야기를 해왔고, XXX로써 만드는 음악들로는 그것이 너무 힘들다고도 이야기해왔습니다. 그러면서도 국힙 씬에서 돈을 확실히 벌 수 있게 해주는 <쇼미>에 참여하기는 싫다고 말하기도 했고, [Moonshine]에 대해서는 ‘너무 진부하고 모든 래퍼가 다들 한 번 씩은 했던 얘기인데 이걸 내가 왜 굳이 해야 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며 작업을 하기 싫었다고도 얘기합니다. 사실 김심야의 가사에서도 드러나는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를 보고 징징거림이나 떼쓰기, 투정 등이라 이야기하는 의견도 꽤 많이 보았습니다. 게다가 김심야 본인도 어느 정도 그 사실을 인정하기는 하고요. 물론 분노나 환멸 같은 단어가 그보단 좀 더 괜찮게 느껴질 수는 있겠지만요. 저는 김심야가 자신을 단순히 진짜-예술과 가짜-자본의 이분법적 구성 속에서 자신이 진짜-예술의 영역에 있다고 인식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를 메타적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은수저 쥐고 어려운 척하’(“18거 1517”)는 것 자체에 대해서 말이죠. 만약에 김심야가 오로지 이분법적으로 세계를 인식해 진짜-예술의 위치에 자신을 뒀다면 그런 이중성(?)은 보여주지 않았을 것 같아요. 모순, 역설, 양가, 상충, 부조화… 이전에 키라라에 대해서 쓸 때도 자주 언급했지만 저는 왜인지 김심야의 세계관도 그렇게 보는 것 같습니다. (물론 다른 요소들로요. 그래도 제가 여러모로 주목하는 요소들이긴 하죠.) 진짜-예술과 가짜-자본의 이분법으로 쉽게 나눌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냥 모든 것들이 혼란스럽게 섞였을 뿐인 세계에서, 진짜-예술로 자신을 두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짜-자본을 바라고 바라보는 형태로요. 그리고 스스로의 기만(?)을 알아차려버린 거죠. 그래서인지 저는 김심야의 분노나 환멸을 스스로에 대한 정당화보다는 자기혐오로 해석하는 편입니다. [LANGUAGE]에서 분노와 환멸 사이에 등장하는 ‘내가 이러고도 한국에서 뜨겠다는 놈이 도대체 쓰는 가사마다 반이 꼬부랑이냐’(“수작”)나 ‘난 그 사이 어딘가에 / 난 이제 더 이상 래퍼가 아니지 / 숨어사는 느낌’(“S_it”), ‘난 예술 안 하지 이제 / 예술인 척해 대단히'(“Just Like”) 아니면 ‘내 예술과 상업 사이 메스 대 / 1대 1대 1의 비율 / 나약한 소리만 할 거야’(“Ugly”) 같은 자조적인 문장들이 우선 그렇게 느껴집니다. ‘제일 싫어했던 돈 얘기가 나의 현재쯤 / 내 다음 문제’(“Flowers”)나 ‘돈에 관하여 말이 안 통하던 / 내 자신과 이제 말로 다툴 일은 / 없어 내가 뭐래도 money flows’(“Money Flows”) 같은 문장들이 나오는 [Moonshine]도 마찬가지고요. 이분법적인 구도 속에서 자신을 진짜-예술을 하는 쪽으로 두는 게 클리셰로써 항상 우려 먹히지만, 그것이 언제나 잘 먹혀들어가는 시스템을 ‘결국 타협 안하는 척 하는 놈이 이기는 싸움'(“Baggage Claim”)이라고 하는 게 대표적이죠. 제가 보기에 김심야는 자신을 그렇게 ‘예술 하는 척쟁이’(“Bad For You”)로 두는 것 같고, 그러한 페르소나가 단순한 ‘진짜-예술’보다는 그가 만드는 형상에 가까워 보입니다. 바로 그것이 김심야라는 인물을 여러 의미에서 ‘이방인’으로 만들기도 하고요. 시스템 바깥에서 계속 존재하려는 인물이지만, 그럴수록 안쪽에 있는 이들에게 호명당하지만 완벽하게 들어오지 못하고, 그러지 않으려고 하면서 그 중력을 오롯이 느끼는 위치에서 ‘이방인’ 말이죠. (개인적으론 XXX나 김심야의 음악과 영상에 달리는 ‘형은 쇼미 나오지 마요’ 같은 댓글 자체가 김심야를 이방인으로써 <쇼미> 근처의 래퍼들과 다를 바 없이 소비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쇼미7> 이전의 메킷레인이나 저스디스 등을 소비했던 것처럼요.) 이렇게 김심야는 이분법적으로 나뉘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세계에서 애매하게 있는 자신의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위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고, 그의 분노가 그 상태에서 어쩔 줄 모른 채로 일단 ‘척’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에 대한 자기혐오로 이어진다고 봅니다. 물론 이것이 시스템 전체에 대한 분노와 그러한 ‘척’을 드러내는 구절들과 함께 두고 보자면 비슷한 의미로 읽히는 면이 많을 테고,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하는 건 당연히 해석의 문제일 테지만 말이죠. 구원 씨께서도 말했던 “뭐 어쩔까 그럼”의 훅이 도리어 그런 자기혐오의 과정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I just wanna talk art’이라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만 어느새 돈으로 돌아온 자신에게 스스로 ‘Wait Hold up / 돈 얘긴 그만’이라고 제동을 걸며 이를 계속하고, 결국에는 체념하고 ‘근데 이제 돈 얘긴 그냥’으로 가는 거죠. 그 ‘제일 쉬운 길’인 이분법으로써 (나름대로의) 열광을 일으키는 자신 자체를 분노와 부정, 환멸감과 패배감의 대상으로 삼는 김심야의 ‘패배’는 단순히 진짜-예술을 추종하다 가짜-자본 앞에서 굴복하는 익숙한 스토리로 빠지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럼 진짜와 가짜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지는 거다. 그럼 차라리 내가 원하는 걸 이루자. 내가 지금 원하는 건 돈이니까 그러면 돈이 되는 음악을 하자, 그런 거다. 돈을 버는 게 중요할까, 내 세계를 계속 가져가는 게 중요할까 고민하다가 선택한 거다. 전자를 고르고 나서 생긴 답답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같은 인터뷰에서의 문장처럼 말이죠. (물론 너무 많이 메타하게 보면 이마저도 일종의 ‘척’일 수도 있습니다, 만 그거는 너무 많이 들어간 거 같네요.) 저는 그래서 XXX를 김심야가 인터뷰에서 밝혔듯 ‘모순 그대로’를 있는 대로 FRNK와 함께 상호보완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Moonshine]에서 손대현의 비트가 말해주셨던 것처럼 착잡하게 가라앉혀 비감을 드러내는 것에 일조하면, FRNK의 비트는 이를 분열적으로 표현하는 편이죠. 제가 맨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 무겁고 둔탁한 베이스와 킥 드럼을 날카로운 하이햇과 스네어 소리로 이뤄져 있는데, 이렇게 각기 다른 두 소리가 ‘인더스트리얼’의 방식으로 충돌하고 무너지는 (또 쌓이기도 하죠. 계속 생각해보니 FRNK와 [Yeezus]에 대한 구원 씨의 이야기가 제 것보다는 더 맞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는 힙합의 구조 자체는 파괴하지 않으니까요.) 과정이 곧 김심야가 가사로 표현하는 이분법 사이에서의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충돌과 이어지지 않을까요. (이는 사실 제가 「살아, 움직이는 Sarah, moves」에서 말했던 문장들의 반복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수작” 같은 경우에는 FRNK의 비트가 두 번째 벌스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김심야의 랩을 소리로써 덮어버리는데, 저에게는 이러한 구성이 비트와 랩의 침입과 대비로 모순과 양가를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시스템에 대한 김심야의 분노와 환멸은 어쩌면 이러한 자기혐오를 통과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만큼 스스로에게도, 바깥에게도 더 독해지는 것일 수도 있고요. 개인적으로 이러한 모순과 양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것이 창작자 본인에게 파괴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면이 많다고 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도, 시스템에 대한 절망과 스스로의 모순에 대한 자기혐오의 다음에 오는 단계는 아마 둘 중 하나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역설을 인정하고 지속적으로 의식하며 어쨌든 계속하던가, 아니면 그냥 바틀비 증후군(『바틀비와 바틀비들』, 엔리께 빌라-마따스(Enrique Vila―Matas))에 걸려 그만두던가요. 김심야의 가사에 은퇴나 포기 등 이를 암시하는 단어들이 많이 등장하는 걸 보면 김심야는 아마 후자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김심야가 그러한 과정마저도 가사에 포함시킨다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꼬아서 보면 김심야가 이마저도 돈벌이의 수단으로 쓴다고 할 수는 있겠고,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자신의 모순과 양가, 기만과 ‘척’을 알아차리는 것과 그것을 또 수단으로 써먹는 자신에 대한 자기혐오, 그리고 그러한 모순의 인식에서 이어지는 그만두고 싶단 마음까지 정말로 모든 것을 ‘모순 그대로’ 담은 가사를 쓰는 김심야가 어쨌든 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죠. 김심야가 ‘이미 이걸 모두 다 알고 있었다면 / Good for you / 넌 나보다 똑똑하군 / 부럽다 이제 그럼 난 갈 테니 / 너흰 할 일해’(“Outro”)라며 때려 치고 싶었다면 진작 그렇게 하고도 남았겠죠. 하지만 김심야는 그마저도 가사로 씁니다. 쓰고, 이야기하고, 어쨌든 계속합니다. 지금 시점에선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김심야는 계속해서 써서, 지금까지는 왔습니다. 저는 그러한 모순과 자기혐오 속에서 그 ‘상당히 위태로운 상태’가 어쨌든 얼마간은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 계속됨이 김심야의 세계관을 의미 있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심야 개인의 측면에서 보자면 스스로를 혹사시키고 갉아먹는 느낌이 들지만요. 어쨌든, 저에게는 김심야가 FRNK와 함께, XXX로 계속하고 계속된다는 게 맘에 듭니다. 그런 맥락에서 제가 글을 쓰는 지금 시점에서 저번 주에 나왔던 [SECOND LANGUAGE]도 그 과정이 계속된다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적으론 지금까지 나왔던 이야기들을 정리하면서 XXX의 두 번째 언어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편이 나을 거 같네요. “뭐 어쩔까 그럼” 정구원 | 원영씨의 말씀처럼 XXX의 음악을 단순히 ‘예술 VS 자본’이라는 구도만으로 분석하는 것은 그 안에 녹아 있는 모순적 매력을 너무 단순화해서 보는 감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쨌거나 김심야가 현재 한국 힙합 씬의 래퍼들 중에서 자신이 느끼는 괴리감을 가장 투명하게 드러내는 리릭시스트 중 하나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테니까요. 꼬고 꼬아서 짜치는 감각으로 똘똘 뭉쳐 있는 상태를 ‘투명’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그러한 내용을 완충장치 따위는 없는 것처럼 들이민다는 점에서 우리가 느끼는 투명하다는 감각이 틀리진 않을 거라고 봅니다. 그러한 의미를 싣는 배배 꼬인 목소리나 FRNK의 뒤틀린 비트까지 전부 포함해서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여전히 XXX에게 일말의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까닭은 아마 그렇게 ‘들이밀여지는’ 사운드와 메시지가 저를 지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음악은 압도적이지만, 그 압도감만큼 피로감을 유발해요. 물론 압도로부터 비롯되는 피로감 역시 음악적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음을 생각해 보면(만약 이것이 피로감으로만 남아 있다면 제가 갓스피드 유! 블랙 엠퍼러(Godspeed You! Black Emperor)나 스캇 워커(Scott Walker) 등의 음악을 좋아할 일도 없었겠죠) XXX에게만 이러한 기준을 부정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조금 불공평한 처사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하지만 여타 피곤한 음악들과 [LANGUAGE]에 깔린 피로감의 차이는 온전히 추상적인 사운드적 특질에서 비롯된 피로냐, 아니면 사운드적 특질과 메시지라는 구체적 의미변수가 결합된 존재에서 비롯되는 피로냐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김심야의 메시지부터 이야기해 볼까요. ‘가짜(지만 돈 잘 버는)’ 래퍼들에 대한 분노와 그렇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이 어지럽게 섞여 있는 가사, 그 가사를 씹어먹으려는 듯이 잔뜩 힘이 들어가 있거나 자조가 한가득 녹아 있는 좌절감을 오고 가는 목소리는 어떤 식으로든 피로감을 유발합니다. 이것은 ‘자, 난 지쳤어. 그러니 이걸 듣는 너도 지칠 수밖에 없을 거야’라고 말하는 듯한 뒤틀린 몰입감을 유발하는데, 언제부터인가 저는 이러한 접근이 효과적인 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효과를 유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가 만드는 음악이 ‘자아의 전시’에 가장 가까운 대중음악 장르인 힙합이란 것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보여주는 형식이 자신이 투사하는 감정 및 상황과 너무나도 밀접하게 닿아 있는 것을(혹은, 자기가 하는 말을 정말로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걸) 듣는 이로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무리 원영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일종의 ‘메타’적 태도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려를 해 보려고 해도, 저는 피로의 감각을 청자에게 끝끝내 공명하게 만들려고 하는 시도가 그러한 고려보다 우선적으로 와 닿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FRNK의 비트에 대해서도 조금이나마 반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LANGUAGE] 최고의 트랙으로 꼽았던 “간주곡”이, 제게 있어서는 흥미로울 수도 있었던 음악적 아이디어를 너무나도 과잉된 구조로 잡아 늘린 실패로 들렸다는 걸 우선 말씀드리고 싶어요. 강이채의 첼로, 가스펠 코러스, <스타크래프트>의 시즈 탱크를 샘플링한 기계음과 길게 잡아끌려나가는 베이스라인은 그 요소 자체로는 재미있지만, 여기서 초점이 되는 것은 그러한 요소의 흥미로움보다는 ‘가장 긴 간주곡이라는 (에픽한) 아이러니’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프로듀서의 욕망이에요. 그 확고한 자의식이 요소에 내재해 있는 흥미로움을 지나칠 정도로 연장시키고 있고, 듣는 이에게 요소보다는 자의식에 집중하게끔 만들죠. 대단해서 대단한 것이 아닌, 대단해지고자 해서 대단한 불쾌한 느낌. 김심야가 ‘근데 왜 비트는 못 베끼냐?’ (“S_it”)라고 질문했던가요. 이러한 대단해지고자 하는 자의식, 혹은 과시욕은 “간주곡”뿐만이 아닌 [LANGUAGE] 전체에서 군데군데 감지됩니다. 앞선 편지에서 ‘공격적인 사운드메이킹의 매력’이라고 썼던 두 곡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해 볼까요. “Ugly”에서 김심야의 훅이 들어올 부분을 대신 채가며 더듬거리는 우주적 비트나 “수작”의 ‘떠떠떠떠’거리는 파편적인 칼춤 같은 비트는, 다른 무엇보다도 처음 들었을 때의 ‘강렬한 인상’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듯한 느낌을 전달합니다. 그것이 인상적이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자글거리듯이 오밀조밀한 드럼 패턴과 후반부의 ‘드롭’ 사이 낙차가 제대로 표현된 “18거 1517”이나 선명한 신스 소리가 효과적으로 구축된 “S_it”처럼 이상한 소리의 생기가 활발히 살아 숨쉬는 트랙에 비교하면, 저는 전자의 경우에서 ‘과시’라는 목적 – ‘니들은 이런 거 못하지’ – 이 다른 무엇보다도 선행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력에 비교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Ugly”나 “수작”이 전하는 감흥은 점진적으로 감퇴합니다. 그 모든 왜곡된 소리들이 중첩되면서 전하는 피로감은 굳이 더 이야기할 필요도 없겠죠. FRNK가 이러한 트랙으로서 일종의 ‘짓눌리는’ 감각을 전달하고자 한 것이라면 그의 의도는 상당 부분 성공적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소리에 압도되는 동시에 어쩔 수 없이 피곤함을 느낍니다. 그건 비슷하게 ‘피곤한’ 청취를 요하는 다른 작품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달라 보입니다. 과시적인 기교를 통해 다른 누구도 자신의 위치를 넘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감지되는, 뒷맛이 쓴 감각이죠. 여기서 이 앨범의 ‘위치’를 한 번 더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종류의 피곤함은 사실 이들이 의도하는 바에 공감할 수 있는 청자에게는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터이니 말이죠. 하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공감이 차단되는데, 그것은 [LANGUAGE]가 상정하는 자기정당화의 공간이 사실은 숨막힐 정도로 기존의 ‘국힙’과 그 등을 맞대고 있는 장소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저는 이들이 그려내고 있는 ‘돈으로만 모든 것이 돌아가는 국힙 씬’이라는 프레임이 자신들의 음악이 유효하게 작용할 수 있는 범위 안의 단편적인 톱니만을 극대화해서 구성된 가상적 공간이라고 여겨져요. 사실 여기서부터가 이들의 패착일 것이지만, XXX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격한 사운드와 ‘있는 그대로’ 드러난 자기모순과 자가당착 속에서 그 가상적 공간을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설득력으로 투영해 냅니다(XXX만 이 공간을 지닌 것도 아니고 말이죠). 하지만 그 대가로 이들이 지불하는 것은 그 갇힌 공간 속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의미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국힙’으로부터 다시 빌려온 익숙한 요소들입니다. ‘빡치는 이유 서술해서 푼돈버는 business’를 김심야만 할 줄 아는 것은 아니고, 어떤 식으로든 ‘스웩’으로 분류될 만한 언사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그 상태 말이죠. 물론 이들은 익숙한 것을 뒤틀고, 그것도 ‘잘’ 뒤틉니다. 하지만 모두가 어렴풋이나마 ‘익숙한 것’, 즉 국힙에서의 과시라는 게임에 출구가 없다는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면 이 ‘뒤틀기’의 유통기한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요? 그것이 잘 만든 작품 하나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우리 모두가 (심지어 XXX 본인들마저도) 알고 있을 때 이들은 어떤 출구전략을 택해야 할까요? 어떤 점에서 제가 이야기하는 바는 원영씨가 ‘창작자 본인에게 파괴적으로 작용한다’고 말씀하신 부분이나, 힙합엘이 커뮤니티의 한 리뷰어가 ‘슬프네요. 이 예술가가 대성해서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감상을 밝힌 바와 일맥상통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제 경우에는 그것이 ‘걱정’이 아닌 ‘피로’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이 다를 테지요. XXX가 제가 느끼는 이러한 의문에 대한 또 다른 대답을 제공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최소한 [LANGUAGE]와는 다른 위치에서 자신들이 던지는 또 다른 질문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저희 둘 모두 이들의 ‘두 번째 언어’를 들어 봐야겠지요. Leave a Reply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CommentName* Email* Website 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