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19년 5월 12일
장소: 합정 앤티앤스 메세나폴리스점
질문, 정리: 박준우 blucshak@gmail.com

누군가에게는 정규 앨범이 큰 의미 없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살면서 큰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음악을 시작하고 긴 시간이 지나서 첫 정규 앨범을 발표한 사람이라면 아마 그 의미가 더욱 클 것이다. 지금 이야기를 공개하는 음악가 송희란은 긴 시간 누군가의 보컬 디렉터로, 보컬 트레이너로, 그리고 싱어송라이터로 활동을 해왔다. 그리고 [이 모든게 봄]이라는 자신의 첫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 음감회에 이어 공연까지 계획하고 있는 송희란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정규 앨범이 나오면서 주변 반응이 어땠나요?
반응은 정말 감사하게도 좋아해 주셨어요. 이번 정규 타이틀곡이 “너는 봄”이잖아요, 근데 그런 곡들이 있어요. 음악가들이 좋아하는 곡이 있고 대중들이 좋아하는 곡이 있고. 그런데 이번 곡들은 주변에 같이 해주시는 분들을 포함해서 대부분이 음악가들이 다 좋아해 주셨거든요. 근데 그중에 한 오빠가 있는데, 그 오빠가 좋다고 하는 곡은 잘 안된다는 그런 징크스가 있어요, 뭔가. (웃음) 근데 그 오빠가 너무 좋다고 하는 거에요. 오빠가 좋아하시는 곡은 약간 대중적이지 않다는 그런 징크스가 있어서, 그것 때문인지 홍보가 덜 되는 느낌도 들고. 저는 음악 하는 분들이 좋아해서 그런지 곡 되게 좋거든요. 좋습니다, 반응 좋습니다.

 

제자분들하고 소풍 다녀왔다고 들었어요. 최근에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음, 지금 하고 싶었던 청소를 못 하고 바로 코러스 녹음 부탁받은 것들이 있어서 하고, 디렉팅도 하고, 도움을 주셨던 분들이랑 와르르 들어와서 돕고, 피크닉은 이제 음감회 끝나자마자 잡은 거라서 미리 비워놓고, 애들이랑 이것저것 먹고 게임을 하다가 왔어요.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 것처럼 프라이팬 놀이나 마피아 같은 게임을 하고. 요즘은 정신없게 공연 준비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물론 전에도 음악을 좋아하셨겠지만, 아주 어릴 때는 지금과는 조금 달랐을 것 같은데요. 어릴 때 좋아하던 음악들은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어렸을 때 집에 오디오 CD 장이 있었어요. 다른 집은 어땠는지 모르겠는데 아버지가 CD를 많이 갖고 계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팝송이 되게 많았고, 어렸을 때부터 팝송, 올드팝을 많이 들었어요. 가요도 많이 듣고. 노래 틀어놓고 립싱크하고 춤추고 그랬거든요. 팝 중에서도 컨트리랑 올드팝 위주로 들었어요. 그리고 중학교 때 제가 기억하기에는 중1 땐가, 그때 영화 <이집트의 왕자> OST가 나왔었나 봐요. 학교에서 집에 오면 소파에 누워서 그거 틀어놓고 감상하는 게 제 취미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중학교 1학년이 시디 틀어놓고 따라 하면서 어떻게 그랬지? 싶어요.

 

원래 미술을 전공하다가 음악으로 진로를 바꾸겠다고 결심하고 학교에 다시 가셨잖아요. 큰 결심이 필요했을 텐데 그 당시 고민의 내용이나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좋겠어요.
원래는 고3 때 진로를 정하려고 했어요. 제 주변에 이미 예대에 간, 드럼을 치는 오빠가 있었는데 제가 입시를 준비할 때 노래를 하면 어떻겠냐고 물어보니까 ‘보컬은 경쟁률도 너무 세고 비주얼도 되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준비도 너무 늦었고, 이미 경쟁률도 세고 비주얼도 안되는 것 같고 그래서 안 했어요. 근데 그때 그 사람들이 나중에 노래방 같은 데서 노래하는 것을 듣고 제 목소리로 노래를 해보라고 조금 더 신중하게 이야기를 해주시는 거예요. 저는 항상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미 검증되었다고 생각하는 나이대에 오빠들이 저를 재능 있다고 띄워 주니까 결심을 하게 된 거에요. 그전에도 부모님께 나중에 음악을 하겠다고 이야기했었는데 그때는 ‘그냥 나중에 취미로 해’ 식으로 깊게 잘 안 들으셨어요. 그동안 반대를 하시긴 하셨거든요? 뭔가 얼토당토않는 소리라고 전에는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근데 막상 이번에 제가 직접 벌어서 음악을 하겠다고 진지하게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알아서 해라’ 이런 느낌이 된 거예요. 그래서 홀가분하게 음악을 시작했던 것 같아요. 음악을 다시 하게 된 게 전혀 후회가 안 됐어요. 하나도 후회하지 않았어요. 지금도 하지 않아요. 오히려 음악을 하고 나니 미술을 한 게 후회가 됐어요. ‘음악을 왜 이렇게 늦게 시작했지?’하고요. 그땐 저보다 어린 애들이 벌써 2~3년 음악을 공부하는 동안 저는 음악을 시작한지 석 달밖에 안됐고. 근데 지금은 오히려 제가 예전에 미술을 했기 때문에 되게 도움 되는 게 많아요.

 

그러면 요즘은 부모님의 반응은 어떠세요?
음대를 가서 활동을 처음 시작할 때 엄마가 오히려 반대하셨던 것 같아요. 아빠는 원래 노래하는 걸 좋아하셨지만, 엄마께서는 제가 그건 아직 레슨도 하지 않았을 때 돈을 못 버니까요. 그리고 제가 OST 타이틀을 불렀거든요. 그런데 신인이니까 거의 돈도 안 받고 하잖아요. 돈도 들어오는 것도 없고 ‘지금이라도 빨리 그만두고 일자리를 찾아라.’라고 하셨죠. 지금도 음악을 하는 걸 반대하시진 않는데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시기도 하세요. 반대하시는 건 아니에요. 20대 중반까지는 이렇게 해서 어떻게 먹고 살래 그러셨고, 그래서 저도 좀 악착같이 일을 했던 것 같아요. 근데 악착같이 일을 해서 다 제작비로 나갔던 것 같고요. 지금까지 혼자 한 것만 하면 한 3천이 넘거든요? (웃음) 철없는 딸로 생각하기도 하시는데, 그래도 지금은 되게 응원해주세요. 처음엔 좀 그랬지만 이젠 엄마가 항상 모니터하시고, 앨범 나오는 날 연락도 오고 그래요. 고생했다고. 좋다고.

 

 

쭉 봤을 때 두 곡 이상의 곡으로 발표했을 때, 그러니까 EP 정도의 단위로 앨범을 발표했던 적이 몇 번 있으신데요. 2013년에 있었고, 2019년엔 이번 정규 앨범이 있잖아요. 돌이켜보면 EP 단위의 작품이 커리어의 구분점이 된 것 같아요. 실제로도 그렇게 좀 구분이 되나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왜냐면 앞으로도 그럴 생각인데, 첫 번째 미니앨범은 일단 회사 의견으로 한 거니까 솔직히 말하면 이제 제 온전한 제 작업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만한 애착 같은 건 없었는데, 대신 그때 그런 상황을 공부한 거 같아요. 그리고 EP를 할 때도 처음 싱글을 해봤다가, ‘아, 이거 이렇게 하는 거구나’하는 경험을 쌓았어요. 그래서 처음 냈을 때도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초반에는 곡이 나올 때마다 울었어요. 이제는 별로 안 그러는데. 나올 때마다 대부분 울컥하고 힘들고 힘들면서도… ‘그동안 내가 그렇게 내고 싶었던걸 이제야 내는구나!’ 이런 생각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EP가 나왔고 이번에 정규가 나올 때는 좀 더 정리된 상태였던 것 같아요. ‘이렇게 해서 어떻게 정리를 하면 되겠구나’ 하는 좀 더 프로적인 마인드가 생겼달까? 막 그냥 닥치는 대로 열심히 이렇게 저렇게 달리는 앨범이 [BABY]였으면, [이 모든게 봄]은 그런 감을 찾아가면서 한 앨범이죠. 그리고 그전엔 항상 김용 프로듀서님께 정말 도움을 많이 받았었어요.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저 자신도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기 시작하면서. 원래 제 목표가 제 앨범에 대한 프로듀싱이었거든요. 제 제자들까지도 도와줄 수 있는 프로듀싱까지 하게 되니까 이게 저의 더 큰 목표는 퀄리티 있는 프로듀싱이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긴 해요.

 

아무래도 직접 쓰신 곡이 아닌 경우에는 조금 내 것이 아니라는 느낌도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 지금도 그러신가요?
그게 어쩔 수 없어요. 제가 쓴 곡들도 있고 그래도 제가 만약에 그냥 가수고 보컬로서의 목적만 있었으면 그게 다 마음이 좀 달랐을 텐데, 제가 제 앨범을 내보고 나니까 알겠더라고요, ‘내가 내 배로 낳은 내 새끼’ 그런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게 제가 고통스럽게 창작을 해서 만들어 낸 거를 불러내니까 이거는 제가 정한 거잖아요. 그전에는 받아서 회사에서 하라는 거를 한 거니까 아무래도 제가 좋고 싫고를 떠나서 노래하게 된 것도 있거든요. 근데 어쨌든 이젠 그런 걸 떠나서 저를 좋아하시는 팬분들이 있다면 제 목소리를 좋아해 주시는 거니까 고마운 일이죠. 저희가 좋아하는 음악이 있고, 싫어하는 음악이 있고, 별로 관심 없는 음악이 있는 것처럼 그런 차이인 것 같아요.

 

2008년에 [도레미파솔라시도 O.S.T]에서 노래도 부르셨지만, 작사도 하셨잖아요. 작사가로서 뭔가 사람들이 알아봐 주셨나요?
그때 부탁해주셨던 작곡가 오빠가 저를 원래 보컬로 데리고 계셨었다가 ‘네가 노래를 부를 거니까 네가 가사를 써볼래?’ 이렇게 하게 됐어요. 그래서 [도레미파솔라시도 O.S.T]를 했고요. 이건 공연 때 했던 이야기이기도 한데, 크레딧에 올라가진 않았지만, 앨범에 오리지널 버전의 원래 가사도 반은 제가 쓴 거예요. 그때부터 제가 부른 노래 가사를 제가 썼던 것 같아요. 원래 [도레미파솔라시도 O.S.T]의 “햇살 가득히”라는 노래의 가사를 제가 쓴 건데요, 그거랑 같이 썼을 거예요. 그때 입에 붙는 가사를 처음 썼고, 또 제가 글 쓰는 걸 좋아하는걸 (작곡가 오빠가) 처음부터 아셨어요. 그래서 시켜주셨던 것 같아요.

 

처음 싱글을 혼자 낼 때는 말 그대로 혼자 막 해야 하잖아요. 유통이나 이런 부분에 있어서 시작할 때 막막함은 없으셨는지, 아니면 그때부터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지 궁금해요.
처음에 중간마다 유통을 연결해준 회사가 있었어요. 지인의 소개를 받았는데 그게 벅스랑 연결이 되어있었거든요. ‘벅스랑 연결해줄 테니까 앨범을 빨리 내보지 않겠느냐’ 그렇게 이야기가 된 거고. 그땐 프로듀싱이나 그런 진행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전혀 몰랐어요. 곡을 써놨는데, 이거를 어떻게 진행을 할 건지를 몰랐었다가, 초창기 멤버분들이신 김용, 조후찬, 임명진, 김준호 이분들하고 지금도 같이 하고 있어요.

 

그사이에 몸도 안 좋고 하셨는데, 몸이 힘들고 안 좋을 때 부정적인 것도 있겠지만 힘들어지고 나서 뭔가 좀 깨달은 거나 얻은 것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럼요, 완전, 엄청나게 깨달았죠. 일단 건강이 최고라는 것과 노래하려면 건강해야 한다는 걸 알았고, 그전에는 그냥 아프면 ‘아, 아프구나’였는데 이제는 아프면 활동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레슨하면서 제가 아팠던 몸도 그렇고 맘도 그렇고 아팠던 내용을 이 친구들이 겪는 걸 보니까 해줄 수 있는 말이 많은 거예요. 애들이랑 이야기를 되게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얘기하면서 많이 느꼈던 게 내가 얘네들한테 먼저 알려주기 위해서 겪었나 보다 이런 생각도 좀 했고, 정말 그랬어요. 그리고 저는 크리스천이다 보니까 그런 걸 더 느꼈던 것 같아요. 감사했던 것 같아요. 애들한테 이야기해주면서 저도 이해가 되니까 그 힘들었던 시간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아요. ‘이럴 수 있구나.’ 그거에 대한 대처도 이야기해줄 수 있고. 그게 우리는 고난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고. 아파봐야 ‘이러면 안 되는구나’를 스스로 깨닫는다는 것도 깨달은 것 같아요.

 

이겨내고 그런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 과정은 어떠셨는지.
근데 그 과정은 진짜 힘들었던 것 같아요. 지금이니까 괜찮지만, 지나고 나니까 괜찮지만, 그때는 좀 많이 무리했던 것 같긴 해요. 스스로 생각할 때. 주변에 있던 선배들이 말씀해주신 게 이럴 때일수록 해야 한다. 근데 저는 그게 너무 힘들었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마치 다리가 부러진 사람한테 일어나서 뛰라고 하는 것과 같았어요. 그냥 넘어진 거면 일어나서 뛰어야 하는 게 맞는데, 부러졌는데 어떻게 뛰지 이럴 정도로 힘이 들었었어요. 그때 그렇게까지 해봐서, ‘아, 이제 쉬어야 한다.’라는 생각을 확실히 밝힐 수 있었고, 그만큼 달려보니까 이걸 제가 어느 정도로 균형을 맞출 수 있는지도 페이스 조절도 가능하게 되고, 너무 정말 힘들 때 그거를 이겨본 경험이 있으니까 이제 좀 힘든 일이 와도 좀 더 ‘해봤었어. 이거보다 더한 것도 해봤어’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이유가 없는 일은 없는 것 같아요.

 

 

이번 앨범 수록곡 중에는 스물세 살에 쓰셨던 곡이 있잖아요. 시간이 한참 이후에 발표하셨어요. 그때의 감성이랑 곡을 발표한 지금의 감성이 다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희란님한테 숙제 같기도 해요. 이거를 낸다는 게 숙원사업 같은 느낌이랄까. 당시에 쓰셨던 곡들이 더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 하셨을 것 같아요.
왜냐면, 되게 순수했을 때 곡이라서 그런지 저도 제가 만들고 제가 부르는데도 그 느낌을 받았어요. 제가 만들고 제가 듣잖아요. 제가 듣고 싶어서 만드는 음악이니까. 저한테는 남들에게도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더 그때를 기억하게 하는 분위기가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빨리 내고 싶기도 했고. 그랬던 것 같아요.

 

직접 쓰고 불러야겠다는 마음이 항상 있으셨던 것 같아요.
네, 맞아요. 원래부터 멜로디 쓰는 걸 좀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근데 어쨌든 제가 듣기에 괜찮은 멜로디가 나오니까 그걸 듣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계속 쓰기 시작한 것 같아요. 제가 처음에 가수 활동을 출발하면서 작곡가분들이나 세션 분들 하시는 걸 많이 보고, 편곡도 많이 지켜보다 보니까, 이제 많이 들으니까 공부가 많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저도 그걸 표현을 해보고 싶은 거예요. 제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근데 곡이 그걸 알게 되니까 쓰는 게 되더라고요. 원래 처음부터 내가 쓴 곡만 불러야겠고 이런 거는 아니었고요. 제 목소리를 활용할 수 있으면 상관없거든요. 받아도. 지금도 그래요, 제가 부르고 싶은 걸 부르는 것뿐인데. 이제 곡을 들으면서 배워오면서 공부를 하니까 ‘내가 좋아하는 멜로디를 쓰는 게 내가 곡을 쓰는 거구나’, ‘내가 좋아하는 편곡을 찾는 것도 결국은 내가 곡을 써야 하는 거구나’ 했죠. 그러니까 ‘멜로디는 좋은데 악기가 아쉬워’ 이런 식으로 되는 게 싫더라고요. 그전에는 내가 편곡자가 아니고 작곡가가 아니니까. 방향을 제가 정할 수가 없잖아요. 근데 이제 그걸 내 맘대로 정하니까 그게 좋았던 것 같아요. 온전히 내 생각대로 나오고.

 

다른 질문인데, 혹시 타인에게 곡을 주는 것도 괜찮으신가요?
그럼요. 실제로 지금도 같이 작업을 한다든가 곡을 주고도 있고. 막 활발하게 하지는 않지만, 기회가 있으면 더 할 수 있어요. 제가 썼는데 저한테 안 어울리는 곡도 있거든요. 저는 제가 이걸 불러서는 시너지 효과가 있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곡, 그런 거는 다 남 주려고 킵하고 있어요.

 

다른 인터뷰에서, 스스로 노래하는 목소리를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사실은 노래하는 목소리도 곡마다 다르잖아요. 어떤 분은 희란님의 차분한 목소리를 어떤 분은 청량한 느낌을 좋아할 수도 있고 그럴 수 있는데, 실제로 그런 이야기도 많이 들으시나요?
엄청나게 듣죠. 팬분마다 장르를 다, 엄마 아빠도, 제 친구들도 좋아하는 곡이 다 달라요. 진짜 많이 듣는 이야기한 거 같아요. ‘너는 가창력 있는 음악을 해야 한다’ 이런 말들도 있고, ‘너는 발라드를 해야 한다. 슬픈 게 잘 어울린다.’ 이런 말씀도 있고 또 누구는 ‘난 네가 밝은 거 부르는 게 좋더라’ 하시는 분도 계시고 이게 너무 달라요. 그러니까 이제 저는 그 노래에 맞춰서 감정을 표현할 뿐인 거에요. 제 개인적으로 가장 제 목소리에 잘 표현이 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날들”이에요. 저 같아요. 제가 들었던 제 목소리. 되게 아이러니한 게 제가 처음 앨범을 시작할 때는 발라드를 싫어했거든요. 나는 발라드는 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잘 어울리는 곡들이 다 발라드예요. “그날들”도, “이렇게 울다”도 그랬고 특이하더라고요. 사람이 역시 지나고 봐야 알아요.

 

곡에 맞게 약간 발성이나 창법에서의 부분도 바뀌잖아요. 음역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으신 것 같았어요. 곡을 다양하게 하셨는데 그러면 ‘이 곡은 이렇게 하겠다’라고 생각하고 작업에 들어간 것인지, 아니면 곡의 분위기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변화를 주는 것인지.
아니에요. 제 보컬 중에서는 저를 어렸을 때부터 봐주신 앤드(AND) 오빠가 제 보컬을 봐주셨는데, 그분이 제일 좋은 소리를 뽑아주신 거고. 컨셉이나 장르는 이미 곡을 쓸 때 제가 가이드로 떠놓죠. 물론 가이드를 정말 대충 떠놓는 때도 있어요. 일단은 기록만 해놓는 그런 때도 있는데, 어쨌든 원래의 톤이 있어서 그거는 정하고 가죠. 가사를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 편곡하는 거라면, 그 편곡에 맞춰서 목소리도 당연히 생각해요. 요 디렉터가 거기서 그 곡에 제일 어울리는 제 목소리 중에서 톤을 잡아주는 거죠.

 

곡을 쓰실 때 어쨌든 목소리를 아주 많이 자연스럽게 부르면서 하겠지만, 목소리를 많이 고민하면서 쓰신 것 같아요. 물론 쓰셨지만, 본인도 안 어울리는 곡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보통 곡을 쓰실 때 어떻게 작업하시는지 궁금한데요.
저는 떠오르는 멜로디 같은 거는 핸드폰에 저장해놓고, 그걸 켜서 바로 피아노로 리듬 같은 것까지 다 연주를 해버려요. 리듬을 찍는 것도 아니고, 요즘은 대충 리듬을 찍거든요. 근데 보통 피아노 한 곡만으로도 느낌이 뭔지 알 수 있게 다 녹음을 해놔요. 그렇게 녹음을 하고, 그리고 제 곡에 약간 제 곡들 들어보시면 코러스가 다양하게 들어가 있어요.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코러스가 더 튀어나오는 것 같거든요. 그 코러스랑 보통은 같이 짜요. 아예 어떤 분위기인지를 대충 만들고, 보컬 코러스가 같이 짜져야 거의 편곡이 바로 나오는 편이에요. 그거에 맞춰서 하는 것 같아요.

 

다른 인터뷰에서 작품 하나를 위해 마스터링을 9번까지 받아보셨다는 이야기를 봤어요. 작품에 어마어마하게 투자한다는 얘기잖아요?
마스터가 돈을 다 일일이 지불한 게 아니라 계속 수정을 받은 거예요. 근데 그건 좀 문제가 있었어요. 뉴욕에 탐 코인(Tom Coyne)이라고 마스터링 엔지니어가 있었는데, 그분에게 [BABY] 앨범 때 보내드렸는데 되게 이상한 소스가 온 거예요. 그래서 뭔가 좀 잘못된 것 같아서 항의를 넣었어요. 그래서 다시 왔는데 너무 잘 나온거에요. 그래서 ‘뭐지? 오류가 있었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후에 [너에게로 가고있어]도 똑같이 마스터를 보냈는데, 근데 또 이상한 게 온 거예요. 근데 그게 저만 그런 게 그 전에 다른 음악가들도 곡을 보냈는데 문제가 없었거든요. 자꾸 이러니까 뭔가 어시를 따로 돌렸나 싶으니까 저희도 너무 기분이 나쁜 거예요. 소스가 망가져서 오니까. 그래서 되게 화를 내면서 항의를 넣었어요. 그래서 다시 또 보내줘서 받았는데 또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유례없이, 원래 보통은 이렇게 수정을 해서 다시 받으면 또 지급을 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제 그쪽에서 저희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다시 해서 보내줬는데도 아닌 거에요. 그래서 고민하다가 그때도 권남우 씨가 해주셨던… 심지어 그분도 두 번인가 세 번 더 했다고 했어요. 원하는 그거를 맞춰주시려고. 그래서 그때는 돈을 다시 투자했죠. 그러고서 얼마 후에 탐 코인이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아,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생각했어요. 그때 확실히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되게 많이 하게 된 거예요. 너무 이상하게 오니까. 그전에 그렇게 잘 왔는데.

 

저 개인적으로는 다른 분들도 다 되게 대단하신 분들이지만 방민혁님이 작업하시는 게 신기했거든요. 디자인도 하신다고 들어서. 그래서 되게 신기했어요
민혁이는 제 후배거든요, 한 학번? 한 학번이 아닌가? 두세 학번인가, 암튼 후배인데 언제 친해졌냐면, 학교를 졸업하고 친해졌어요. 근데 이 친구랑 친해지고 보니까 제가 미술을 했었잖아요. 얘가 디자인 쪽에 엄청난 재능을 갖고 있더라고요. 알고 보니 앨범 커버랑 이런 것도 많이 한다고 그래서 사진은 이미 나온 거로, 콘티를 부탁을 했죠. 너무 깔끔하게 잘 해줘서 세 번 정도인가 부탁했어요. 민혁이는 음악을 잘해요. 센스도 좋고, 세련되고 디자인도 잘하고 예술적인 재능이 많은 것 같아요. 안 그래도 [너에게로 가고있어] 자켓 디자인을 민혁이가 했는데, 제가 앨범 도와주신 분들을 다 (SNS에) 태그를 했는데, 민혁이를 오랜만에 태그를 했거든요. 민혁이한테 전화가 와선 자기를 갑자기 태그해서 놀랐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거 네가 했다’고 얘기해줬죠.

 

다른 작품을 본인이 쓴 곡을 디렉터를 따로 안 쓰고 직접 녹음하는 경우가 많으셨거든요.
[I GO]나, [BABY] 앨범은 사실 제가 혼자 녹음한 것들이 많아요. 근데 밖에서 제가 좀 들어달라고 다른 분을 앉혀놓고, ‘오빠 이거 괜찮나요? 이건 어때요?’ 물어보면 ‘이거 괜찮아. 이건 아까 것이 더 좋은 것 같아’ 이런 식으로 밖에서 픽스하는데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김지환님이 가수 앤드거든요? 그 오빠가 봐주시는 거는 밖에서 확실하게 톤부터 싹 다 봐주시는 거예요. 이번에 픽스라인이라고 하는 그 친구도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 작곡가이기도 하거든요 원래 노래하는 친구라서 저희와 같이 친한 크루들이에요. 저는 늘 디렉터는 있어야 한다고 느꼈죠. 디렉터 없이는 안에서 듣는 소리와 밖에서 듣는 소리가 달라서. 그리고 저만 그냥 제가 모니터하며 들을 수 있으면 집에서 가이드하는 걸로 충분하잖아요. 녹음실은 환경이 달라서 무조건 두는 편이에요.

 

전 집에 찾아보면 앤드님 앨범도 있을 거예요.
저도 엄청 팬이었거든요. 엄청 팬이었다가 저 데리고 계시는 작곡가 오빠가 ‘아는 동생이야’라며 소개를 해주신 거예요. 근데 그때는 막 오빠 선글라스 끼고 활동하셔서 오빠의 얼굴을 몰랐어요. 그래서 그냥 ‘아, 예 안녕하세요’ 이러고 말았는데, 어느 날 제가 그 노래를 듣고 있는데 그걸 보셨나 봐요. ‘희란아, 그때 그 친구가 앤드야’라고 하시니 제가 너무 놀랐어요. 그때부터 이제 십 년 전부터 인연이 쭉 이어져 왔죠. 제 스승님 같은 분이에요. 오빠한테 제가 코러스랑 디렉팅을 다 배운 거나 다 같은 거니까. 제가 뒤에서 보고 배운 게.

 

 

가사가 대부분 좀 경험이나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고 느껴졌는데, 가사 같은 부분을 신경을 많이 쓰실 텐데,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들인지 궁금했어요.
거의 경험에서 그 기분을 좀 구체화를 하는 거죠. 구체화를 하고 조금 더 혼자 일부러 감상에 빠지기도 하고, 내용에 따라서도 달랐던 것 같아요. 좀 감성적인 거는 감성적으로 밀고 가고, 적나라한 건 적나라하게 밀고 가고, 시점을 두고 하는 느낌? 지금 나는 어떤 상황에 이런 일을 겪고 쓰는 글이야, 이런 느낌 있잖아요. 근데 제가 할 때 항상 영상을 펼치거든요. 어떤 옷을 입고 있고, 계절이 어떻고 그런 것까지 생각해요. 그 상황에서 쓰는걸, 그 느낌을. 그래서 더 영상같이 느껴지는 부분도 많았던 것 같아요. 말씀하신 그 느낌으로 제가 썼거든요. 제가 영상을 생각하면서, 그걸 보고 있듯이. 그렇게 느끼셨다면 성공이에요 (웃음)

 

그런 것들을 나중에는 더 글로 풀어갈 예정이시라고 들었어요.
저는 그리고 책을 나중에 하나 꼭 내고 싶어서 글을 계속 쓰고 있어요. 일러스트같은 그림을 그렸었으니까 옛날 ‘파페포포 이야기’ 같은 걸 만들어본 적이 있어요. 그런 걸 내는 게 제 목표이기도 해요. 그동안에 겪었던 제 경험에서 깨달은 이야기들을. 그냥 읽는 느낌 말고요, 하나씩 하나씩 깨달은 게 소소하더라고요. 이래서 철학을 하나 싶을 정도로, 물론 그렇게 깊은 철학 같은 건 아니지만. ‘겪어보면 이런 생각이 들 수 있구나’를 알려주는 식으로 계획하고 있어요.

 

그래서 계속 쓰시는가 봐요. 최근에 위수님을 비롯해서 여러 제자분이 작품도 발표하고 활동을 계속하시고 계시잖아요. 처음 이렇게 좀 제자를 만들고 돕고 이렇게 시작한 게 언제부터예요?
어떤 걸 우선으로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는 게, 첫 프로듀싱은 미강이고요. 제 제자의 첫 보컬 디렉팅은 위수인 거 같아요. 위수도 디렉을 먼저 하고 레슨으로 만난 거라, 온전한 완전한 프로듀싱은 미강이고, 나머지 친구들은 디렉터나 코러스, 곡의 방향 등… 그런 걸 하면서… 다 보컬 디렉을 하면서 시작한 거죠. 보컬은 회사가 없으면 사실 꿈을 펼칠 기회가 너무 없잖아요. 곡을 쓰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처음에 저한테 배우는 친구들은 보컬이었으니까 곡을 자기가 쓸 줄 모르면 특히나 연주도 할 줄 모르고, 누가 해주지 않으면 애들한테 계속 곡도 써보라고 하는 편이고, 만약 회사가 생겨도 디렉을 저한테 맡기고 이런 식으로 하고, 그런 식으로 하다가 보니까 싱어송라이터를 하는 친구들이 생기더라고요. 앨범 제작을 하고 싶고, 근데 하고는 싶은데 이거에 대한 걸 잘 모르니까 그런 걸 도와주기 시작한 거죠. 처음에는 저도 이렇게 얘를 프로듀싱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한 것은 아니에요. 본인 곡을 갖고 왔는데 같이 계속 수정을 해주고 조언을 해주고 바꾸다 보니까 제가 프로듀서가 되고 있더라고요. 이 친구가 저에게 완전 의지를 하고, 제 말을 들어주니까 제시도 해주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가르치는 일은 언제부터 하셨어요?
가르치는 일은 스물넷부터 시작했어요. 스물셋에 학교를 들어가서 취미로 하는 분들부터 천천히 레슨을 시작했다가, 지금까지 왔어요.

 

그럼 이번 일 말고 또 뭔가 제자를 도와주실 예정이나 계획은 있으신가요?
제자들이 바란다면 해줘야죠. 제가 저렴하게 해주긴 하는데, 페이를 아예 안 받진 않거든요. 그래서 도와준다는 게 말이 모호하네요. 좀 더 (신경 써서) 이것저것 해주는 건 맞긴 한데. 어쨌든 앞으로 제 제자들은 터치하고 제작이나 도움을 줄 예정이에요. 제 제자들은 저한테 좀 각별해서. 저한테 오는 제자들은 다 인연이 있고, 다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느낌이고 해서 인연을 깊게 잡는 편이에요.

 

근데 제작 등의 과정들이 상호 신뢰가 없으면 힘든 일이잖아요. 커뮤니케이션도 중요할 것 같은데요.
사실 제가 그거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을 때가 많았어요. 대표님이나 뒤에 앉아계시는… 그런 거 있잖아요. 본인이 잘 아는 아티스트들은 그렇지 않은데, 몇몇 어떤 아티스트들은 디렉을 받은 것도 다 ‘내가 다 했고, 내가 다 불렀고, 내가 능력이 있는 거야’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때 되게 허무하기도 하더라고요. 한편으로는 완성된 걸 보면 뿌듯하기도 했다가, 마치 자기가 더 잘 나올 수 있는데 이미 지금도 잘 나왔는데, 못 나온 것처럼 자기 맘대로 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어요. 그걸 보면 스트레스를 받는 거죠. 전체 100이 있다면 혼자서 하면 원래 50이 나올 걸 70-80까지 끌어놨더니, 이게 100이 아니란 거만 생각하는 때도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왜 이런 걸 눈치 보면서 해야 하지’라고 생각도 했어요. 디렉이라는게 저도 제가 받아봐서 알잖아요. 밖에서 고민해서 내 것도 아닌 남의 목소리를 만져주시는 건데. 그런 게 서운하고 속상하죠. 제가 그 한번 일이 있고 나서 제 디렉터 오빠한테 연락한 적이 있어요. 장문으로 ‘오빠 정말 대단하시고, 얼마나 힘든 일을 해주셨는지 알겠다, 고맙다 감사하다’ 이런 적도 있었어요. 그래서 저를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면 많이 안 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좋아하는 음악과 영향을 받은 음악가로 정리하면서 장르에서 도전하고 싶은 것도 있으신가요?
지금 씨티팝 같은 걸 계획을 짜보고는 있어요, 프로젝트로. 아직 확정은 아니고요. 솔직히 다양하게 하고 싶거든요. 보통 싱어송라이터나 아티스트는 그 이름에 색깔이 있잖아요. 근데 저는 ‘너무 빗나가지만 않는 선에서라면, 내가 노래를 다양하게 좋아하는 것처럼 목소리도 여기저기 다양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라고 예전부터 생각했어요. 프로젝트로라도 제 색깔에 이것저것 다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사실 그것도 되게 저의 오랜 고민이었어요. 이런 것도 하고 싶고, 저런 것도 하고 싶은데 기존의 것을 좋아해 왔던 분들이 들으면 어떻게 들으실까? 그거에 대한 고민도 계속 있는 것 같아요. 보컬로서의 생각도 내 목소리를 세션처럼 음악 일부라고 생각을 하니까. 프로젝트성으로 이것저것 생각 중이에요.

 

마지막으로 독자분들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노래를 할 거고요. 처음 보컬로 시작할 때는 사람들이 제 목소리를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제 곡을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커졌어요. 좋은 곡을 계속 쓰고 싶어요. ‘예전 곡이 좋았는데 요즘 곡은 별로야!’ 이런 말을 듣기가 제일 싫어요. 활동도 많이 해서 얼굴도 많이 비출게요. 공연은 7월 12일 금요일 8시 레드빅스페이스에서 진행이 될 거고요 이전과 확연히 다른 공연을 준비해보겠습니다. 볼거리도, 즐길 거리도 많은 공연이 될 거예요,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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