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여름 | The Republic of Trees | 붕가붕가레코드, 2019

 

나무들의 투명한 시선으로

생각의 여름은 오랫동안 자연의 이야기를 해왔다. 나무도 그 중 하나다. 가끔씩은 나무가 곡의 주제였다. 자연의 이야기는 다른 포크 음악인들의 이야기와 그의 이야기를 따로 둘 수 있게 하는 몇 가지 특징 중 하나다. 그럼에도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언제나 미니멀리즘이었다. 포크 기타에 어떤 효과도 넣지 않는다. 넣어도 최소한의 효과를 넣는다. 기타 스트로크가 만들어내는 소리와 목소리만을 오로지 담았다. 사운드에 있어서 미니멀함은 그렇다. 이는 곡의 구성도 마찬가지다. 2절이 없이 1분에서 2분 남짓한 짧은 시간의 곡들이 많다. 새로운 절이 없다는 것은 반복이 없다는 말이다. 반복이 없다는 말은 곧 그 노랫말과 멜로디가 한번 흘러가면 끝나버린다는 의미다. 노랫말마저도 종종 이 재빨리 지나가버리는 특징을 닮았다. 소리와 구성, 노랫말까지 모든 특징들이 간결했다. 간결하지만 세심했다. 그러므로 ‘포크의 근본주의자’라는 붕가붕가 레코드의 별명은 적절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휙 흘러가는 노래로 왜 하필 나무 이야기를 하는지가 조금 궁금했다. 나무는 한 순간에 휙 하고 지나가지 않는다.

서정민갑은 단편선과 함께 2010년에 생각의 여름을 인터뷰했다. 진정성에 대해 물어봤을 때 생각의 여름은 이렇게 답했다. “노래를 부르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드러난다고 해야 하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시선이 드러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거기에 나라는 게 하나도 없더라도 시선이 비추어지는 게 진정성 있는 노래라고 생각한다.” 나는 오랫동안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봐왔다. 그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더 이상 유효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사이먼 프리스(Simon Frith)는 록 비평과 담론이 ‘진정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신화이자 허구라고 간주한다. 그에 의하면 진정성이라는 이름으로 록을 포장하니 잘 팔려서 록을 진정성으로 포장했다고 한다. 1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중음악에서의 진정성 개념을 논한 송화숙은 더욱 더 많은 대립항들을 예시로 든다. “본래의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진실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오리지널과 복제, 진지함과 그렇지 않음, 독창적인 것과 모방적인 것.” 그에 의하면 대중음악을 매체화/매개화 하는 방식이 변할 때 이러한 ‘진정성’ 개념들이 등장한다고 한다. 이를테면 진짜 악기가 아닌 악기들로 음악을 만들 때. 작가주의적 자아가 아닌 팝적 페르소나를 등장시킬 때.

그 중에 있어서도 포크는 오랫동안 대중음악에서 ‘진정성’을 담보하는 장르로 평가받아왔다. 이것이 오래된 이유는 당연히 포크라는 형식 자체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밥 딜런과 김민기가 있어 왔다. 포크 기타의 반주와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만 있으면 되었다. 소리 자체에 대해서는 신경 쓸 부분이 별로 없었다. 밥 딜런과 전기 기타의 이야기는 이미 엄청나게 유명하다. 자연스럽게 포크에서는 멜로디가 상대적으로 중요해졌다. 어떤 경우에는 노랫말은 그보다 조금 더 중요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낭만주의적인 작가관이 투영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노래로 표현하기. 그리고 포크는 50년 전의 대중음악에서 이를 가장 깔끔하게 해내는 장르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실제로 그렇게 포크를 노래하는 이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번안 위주였던 한국 대중음악사의 포크는 시간이 지날수록 민중가요와 저항 운동과 연관되었다. 정치사회적인 맥락들이 많이 들어가며 ‘진정성’이 차지하는 입지도 넓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1980년대 후반이 지난 이후, 정치사회적인 맥락이 더 이상 이전처럼 유효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을 때에도 지속되었다. 사실 그보다도 여전히 포크를 통해 스스로의 생각과 마음을 노래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은 것도 있다. 그리고 이것을 개인의 내부에서만 유래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진정성을 여기에 연결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진정성을 “반박할 수 없는 원본 혹은 원작자성 (of undisputed origin or authorship)”가 있는 것이나 “원본에 충실한 것 (faithful to an original)” 혹은 “믿을 수 있고 정확한 재현 (reliable, accurate representation)”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니2 말이다. 이 때문에 개인의 세계관이 차지하는 범위가 다른 음악과는 상대적으로 많다고 받아들여지는 포크는 진정성과 강하게 연관되었다. 그것이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비평에 있어서 그것은 참고할 수는 있어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생각의 여름이 한 나무 이야기들은 어떨까. 우선적으로 앞에서 말했던 극도의 간결함은 노랫말에만 집중하도록 하는 요소로 받아들일 여지가 많다.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엄청나게 건조하거나 그저 덤덤하게 느껴질지라도. 그의 ‘근본주의’적인 구성 자체는 얼마든 작가주의적인 진실함과 연결될 여지가 많다. 조동익이나 시인과 촌장, 하나음악 등과 계보를 이을 수 있을만한 서정성도 그렇다. 하지만, 일단은, 나무다. “활엽수”의 ‘그대 한 그루 활엽수여 / 그 둥근 입새 같은 마음으로 나를 안아주오’가 있다. [곶]에서는 바다와 곶과 물의 이미지가 많았다. [다시 숲 속으로]에서는 제목 그대로였다. “두 나무”에서는 ‘견뎌지지 않을 시간들이 견뎌지는 것이라고’라고 한다. “침묵에서”는 ‘길고 하얀 침묵을 지나 다시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고 한다. 나무는 천천히 그의 또 다른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작년에 싱글 “From a Tree Perspective”가 나온 이후 [The Republic of Trees]가 나왔다. 나무들의 공화국이라는 번역처럼 나무들만의 이야기가 있다. 이 음반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선공개 곡으로 “From a Tree Perspective”가 나왔을 때 생각의 여름은 ‘목소리는 도시의 나무(들) 것이고, 화자가 나무와 인간을 비롯한 여러 것들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노랫말이 진행’된다고 말했다. 물론 이것 또한 참고용일 뿐이다. 이러한 전제는 [The Republic of Trees]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음반에는 생각의 여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는 박종현의 목소리가 아닌 나무(들)의 목소리가 담겼다. 지니에는 심지어 생각의 여름이 직접 번역한 노랫말들까지 있다. 음반을 시작하는 “Preface (서설)”는 ‘We are wearing the world that includes you / We are sensing the world in different ways from you (너희를 비롯한 세계를 입고 있어 우린 / 너희와 다른 방식들로 지각하면서 말이지)’이라고까지 말한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의 여름은 나무들의 공화국이 하는 이야기를 전한다. 우선은 그렇다고 한다.

김홍중은 「진정성의 기원과 구조」3에서 사회적인 의미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진정성의 레짐’을 제시한다. 그는 우선 진정성 개념이 “인간이 무엇이 옳고 그런지에 대한 직감 즉 도덕관념을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18세기의 사유”에 뿌리내린다고 한다. 칸트를 중심으로 나타난 비판과 계몽의 정신들. 그러니까 근대 서양에서 나타난 거대한 이성주의 혹은 합리주의. 계속해서, 그에 의하면 진정성의 레짐은 “1) 그것이 형성시키는 특수한 ‘주체’ 2) 그 주체가 자기 자신과 성찰적인 관계를 정립하고 실천하는 윤리적 기관이라 할 수 있는 ‘내면’ 3) 내면적 고뇌와 모색의 결과 참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 그가 투신하게 되는 ‘공적 지평’”의 세 요소들로 구성된다. 우선 이것을 적용해보려고 한다. 주체, 내면, 공적 지평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진정성의 레짐을 만든다. 이 도식은 비단 문학뿐만이 아니라 대중음악의 노랫말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20세기에 등장했던 포크들이 진정성 있다 평가받은 것이 여기에 알맞게 연결된다. 김홍중은 80년대적 진정성은 ‘도덕적’ 성격이 강했고 90년대적 진정성은 ‘윤리적’ 성격을 띤다고 말한다. 그와 함께 내면의 공간은 정치사회적일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확충되었다. 하지만 ‘97년 체제’ 이후 진정성이 아닌 생존주의가 마음의 레짐이 된다. 그리고 진정성 개념은 해체된다. 적어도 정치, 사회, 문화 아니면 문학에 있어서. 여전히 존재한다고는 해도 이전처럼 강하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중음악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포크의 경우에만 이야기하도록 해보자. 최대한 있는 그대로 반영한 자신을 내면에서 성찰하며 ‘참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써 포크는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는다. 그것은 물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 마음이니까. 중요한 건 포크를 이야기할 때 오로지 그러한 담론에 있어서 ‘진정성의 레짐’이 우세종으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물론 창작자의 의도를 최대한 존중한다고는 볼 수 있겠지만, 그 때문에 주목받는 것은 오로지 진정성뿐이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 진실한지. 그 진실한 이야기를 얼마나 진실하게 들려줬는지. 그 진실하게 들려준 이야기가 얼마나 진실하게 전달되었는지. 그 진실하게 전달된 이야기가 얼마나 진실한 가치를 하는지. 거의 모든 포크 음반들을 이야기하는 전형은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계속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단어만 다양한 동의어와 유의어로 교환될 뿐이다. 이 과정에서 진정성은 해당 음악에 대한 적합한 비평의 기준이 되기보다는 모두가 사용해서 굳어진 디폴트 값이 되어버린다. 문제는 여기서 나타난다. ‘진정성’을 그렇게까지 추구하지 않는 포크가 나타날 때. 제대로 이야기하자면, 진정성이라는 디폴트 기준으로 ‘비평’ 혹은 담론을 반복할 수 없는 포크가 나타날 때. 그러니까 ‘다른 포크’가 나타날 때.

이 때 이 ‘다른 포크’들은 송화숙이 언급했듯 ‘진정성’을 기준으로써 조금은 부당하게 해석되거나 설명되어왔다. “안드로메다”와 “식물원”을 오가는 충격적인 프릭 포크를 들고 온 무키무키만만수의 [2012]가 우선 그랬다. 충격 효과만을 강조하고, 이를 젊음 따위와 엮는 방식으로. 그만의 자전적 성격을 있는 그대로 담았던 이랑의 [욘욘슨]도 왜인지만 그랬다. ‘아마추어리즘’을 지적하면서. 옥상달빛과 제이 래빗, 랄라스윗 등 2010년대 초반에 인기 있던 여성 포크 팝 듀오들도 그랬다. 그보다 조금 이전에 등장한 요조와 타루, 솔로 한희정 등의 포크는 ‘홍대 여신’이라는 멸칭을 듣기까지 했다. 이들의 팝적인 지점과 그 이외의 여러 특징들이 무시되면서. 그보다도 이전의 아마츄어 증폭기는 또 어떨까. 전자양의 첫 음반은 어떨까. 동시기에 나온 단편선의 솔로 프로젝트는 어떨까. 이유는 많겠지만, 나는 공통적으로 이들의 포크가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전통 포크’의 문법과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통 포크’는 진정성의 레짐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적절히 해석되어 왔다. 이른바 ‘97년 체제’가 시작된 이후에 등장했던 포크 음악인들도 ‘전통 포크’와 비슷하다면 주로 진정성을 바탕으로 해석되었다. 내가 궁금한 건 ‘다른 포크’를 비평적으로 다루는 다른 방식이다. 진정성의 기준을 계속해서 들이댄 다음 진정성이 없다고 평가 절하하는가. 아니면 그 ‘다름’에 조금 더 집중하면서 진정성 이외의 요소를 살피는가. 그것도 아니면 제 3의 방법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공중도둑의 [무너지기]로 잠깐 돌아가야 할 것 같다. 나는 [무너지기]에 대해서 제법 긴 글을 썼다. 이 글이 이후에 다른 사람들이 [무너지기]를 이야기할 때에 얼마 정도의 영향을 미쳤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여기에서 나는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진정성의 레짐’으로 [무너지기]를 해석하지는 않았다. 나는 ‘희미한 소리들의 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서정적인 소음’과 ‘소리의 사이’를 제시했다. ‘무너지고 쌓이기’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이것은 ‘압도적임’으로 결론을 맺었다. 내가 [무너지기]가 ‘압도적’이라고 말했을 때 이는 희미한 압도적임이었다. 일반적인 압도와는 다른 방식이라고 판단했던 ‘희미한 소리들의 힘’은 음반의 소리들이 무너지고 쌓이면서 성취된다. 나는 [무너지기]가 나온 후에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음반을 진정성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경우를 보았다. 노랫말을 해석하며 의미를 파악하는 식으로. 아니면 공중도둑의 숨겨진 정체에 의미부여를 하는 식으로. 그리고 그 방법이 [무너지기]에서는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위의 방식들을 이용했다. 나는 주로 소리의 구성과 과정을 분석했다. 노랫말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배제한 부분도 있다. 글에서 언급했지만 내가 [무너지기]를 들을 때 노랫말에 거의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리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무너지기]의 포크가 전통 포크의 문법과 구별되는 ‘다른 포크’라고 가정한다. 애초에 장르적으로 전자음악으로 두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공중도둑의 포크가 기존과는 조금 다른 포크인 이유는 전통 포크와 구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희미한 소리들’과 ‘서정적인 소음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노랫말은 의미 전달보다는 그러한 소리 혹은 소음의 영역에 좀 더 포함된다. 이것이 공중도둑의 포크와 전통적인 포크를 구별하는 가장 큰 특징이다. 그래서 나는 그 특징에 집중했다. 그런데 이 방식이 과연 [무너지기]를 해석하는 데에 가장 알맞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떠한 포크 음악이 전통 포크와는 확실히 다르기 때문에 이를 ‘다른 포크’라고 두는 것은 전통 포크가 전통 포크이기 때문에 ‘진정성’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사실 이렇게 되면 결국에는 그게 그거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전통적인 음악을 전통성으로 해석하는 것. 실험적인 음악을 실험성으로 해석하는 것. 사실 둘은 음악에서 이미 강조된 측면들에 맞게 이를 관성적으로 해석한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From a Tree Perspective”

 

[The Republic of Trees]를 들을 때 나는 그런 해석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 음반은 묘한 음반이다. 우선적으로 생각의 여름이 [The Republic of Trees] 이전까지는 전통 포크에 훨씬 더 가까운 포크를 들려줬다는 컨텍스트가 있다. 전통적 서정성, 극도의 미니멀리즘, 시적 노랫말, 단출한 소리들은 ‘근본주의’적인 태도를 중심으로 모여 진정성과 매개되어 이야기되었다.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과정일 것이다. [다시 숲 속으로]에서는 팝적인 전환이 잠시간 있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진정성’의 담론은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다. 아마 가장 쉬운 방법이 될 것이다. 여태까지 있었던 담론들을 생각의 여름과 맞게 조금 수정하면 된다. 하지만 [The Republic of Trees]은 그와 많이 다르다. 우선적으로 소리가 다르다. 여전히 유지되는 부분은 있다. 곡 길이에 있어서 미니멀함, 시적인 노랫말은 그대로다. 달라진 것은 소리들이다. 전자음이 적극적으로 들어온다. [다시 숲 속으로] 때의 하모니카와 바이올린이 들려준 컨트리와 블루스 연주와는 다르다. 프립 & 이노(Fripp & Eno)와 트래비스 & 프립(Travis & Fripp)과 앰비언트란 단어가 음반의 설명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그 맥락에서 사용된 전자음을 [The Republic of Trees]에서 들을 수 있다. “Preface”의 후반부에 약한 전자음 노이즈와 건반을 쓴 듯한 멜로디가 등장한다. 그나마 이 경우는 생각의 여름의 포크와 김한주가 프로듀싱을 담당한 전자음이 잘 어울리는 경우다. “Relapse”도 이와 비슷하다. “From a Tree Perspective”의 후반부에는 자연의 소리가 녹음되어 샘플링된다. “By This Bonfire”도 그와 비슷하다. 전자음이 그보다 더 갑작스럽게 등장하기도 한다. “Looking Downward for Decades”는 스포큰 워드식의 낭독과 앰비언트 노이즈가 배치된다. “Implanted in the Past”에서는 두 소리가 함께 등장하며 오고 간다. “Love Me as Mosses Do”는 의도적으로 로우파이를 이용한다. “Late Autumn”에서는 그 소음들이 곡과 음반의 마지막 대부분을 집어삼킨다. 이런 전자음들은 우선적으로 포크의 전통적인 구성과는 다르다. 그래서 [The Republic of Trees]는 생각의 여름의 전작들과 다르게 그의 전작들이나 전통적인 방식과는 다른 포크라고 둘 수 있는 여지가 훨씬 더 많다.

문제는 내가 여기에서 [무너지기]를 잠시 떠올렸다는 점이다. 그리고 [The Republic of Trees]와 [무너지기]가 포크와 전자음, 앰비언트, 필드 레코딩 등의 몇 특징들을 공유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무너지기]에서 제시했던 방식으로 다시 한 번 [The Republic of Trees]를 다루는 것은 맞지 않다고 느꼈다. 전자음의 조금 느닷없는 사용은 비슷할 지라도 공중도둑은 기본적으로 대곡을 지향했다. “왜?”는 1분 동안 진행이 서 너 번씩은 바뀌며 멜로디의 반복이 굉장히 적다. “함께 무너지기”는 무려 10분짜리 곡이다. “쇠사슬”은 적극적으로 소리가 무너지고 쌓이는 경험을 겪을 수 있는 구조다. 무엇보다 [무너지기]의 소리들은 언급했듯 희미한 소리와 서정적인 소음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졌다. [The Republic of Trees]는 확실히 다르다. 생각의 여름이 고수한 미니멀리즘은 곡 길이와 구성에서 유지된다. 소리에서 달라진 것은 다른 성향의 소리를 적용한 것뿐이다. 이 소리들은 서로 명확하게 구분된다. 생각의 여름이 내는 목소리와 김한주가 내는 건반 소리는 확실히 구분된다. 앰비언트나 필드 레코딩 등은 한 두 순간을 제외하면 포크 기타 연주와 목소리를 침범하지 않는다. 쌓이기보다는 따로 구분되어있다. 그러므로 일종의 느닷없음은 더욱 강조된다. 그럼에도 [The Republic of Trees]는 분명히 다르다. 그렇지만 이러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다른 포크로써 언급하는 것에 큰 의미가 있을까.

여기서 다시 생각의 여름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시선이 드러나는” 것. 그는 심지어 “거기에 나라는 게 하나도 없더라도 시선이 비추어지는” 것에서 ‘진정성’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나는 이 부분이 굉장히 문제적이라고 생각했다. 다시금 김홍중의 논의를 끌어와 본다. 진정성의 레짐을 구성하는 세 요소는 주체, 내면, 공적 지평이었다. 진실한 주체는 내면에서 고뇌하고 사유해서 공적 지평에서 참된 자아를 완성한다. 생각의 여름은 여기에서 ‘거기에 나라는 게 하나도 없’다는 말을 한다. 이를 주체의 부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내면에서 고뇌와 사유를 담는 주체, ‘나’가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김홍중이 논의한 진정성의 구조는 유효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라는 것이 없는’ 성질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일단, 진정성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 문장이다. ‘시선이 드러나는/비추어지는’ 성질. 생각의 여름이 [The Republic of Trees]의 기본적인 설정으로 두었던 ‘나무들의 목소리’를 떠올려본다. 만약에 이것을 어느 정도 수용해서 적용한다면, 조금 다른 형태의 진정성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진정성’이란 이름 또한 바뀔 것이다. 기존의 방식대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니까.

생각의 여름은 나무의 목소리를 빌려서 이야기한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나무)가 하는 말을 표현하기 위해” 계속 쓰던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노랫말을 썼다. 이것은 우선적으로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청자들에게는 거리감의 효과를 준다. 여기에 더해, 음반에서 이 나무들은 ‘우리’와 ‘너희’를 구분한다. 그들의 관점에서 시간의 변화를 서술한다. 뿌리들의 욕망에 대해 말한다. 꺾인 꽃에 대해 표현한다. ‘우리’로써 함께 공생하는 것을 논한다. 불과 빛,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나무들의 공화국을 이야기하는 과정은 나무의 시점(From a Tree Perspective)에서 진행된다. 나무들의 시선이 드러난다. 물론 생각의 여름은 나무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나’가 아닌 다른 존재의 시선을 상상해서 그 차이와 거리를 드러낸다. 물론 생각의 여름이 상상하는 나무의 시선이 ‘진실한’ 나무의 시선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무도 모른다. 이 과정에서 진정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인 ‘주체’, 즉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이야기를 하는 다른 존재가 등장한다. 그 존재는 ‘나’와는 다르지만 스스로의 내면을 탐구하고 고뇌한다. 생각해보면 그 고뇌는 인간의 것이 아니기에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공적 지평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The Republic of Trees]에서는 기존에 논의된 진정성의 담론이 유효하게 적용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음반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미묘하게 다른 포크에 대해. 단순히 소리의 실험성으로도, 전통적인 진정성으로도 논하지 않고. 나는 어쩌면 쓸데없이 먼 길을 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에서 나는 전대한이 언급했던 ‘투명성’의 개념을 생각했다. 생각하기보다는 비약하는 것에 조금 더 가깝지만. 전대한은 이 개념을 켄달 월튼(Kendall Walton)이 사진에 대해서 한 논의에서 참고해왔다. “이를테면, 사진은 투명성을 지닌 매체이기에, 어떤 대상이 찍힌 사진을 보는 것은 곧 그 대상 자체를 보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식이다. 투명한 창문을 통해, 그 너머의 풍경을 직접 보는 일처럼 말이다.” 나는 여기에서 비약을 시도한다. 전대한에 있어서 ‘투명성’은 단순히 소리의 투명함이 아니다. 그는 장명선과 함께 한희정, 이아립, 시와, 곽푸른하늘, 김목인 등 동시대의 포크 음악인들을 언급한다. 그리고 이들의 특징이 ‘음악가의 내면과 감정을 진솔하게 내비쳐왔’던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러한 특징은 진정성의 담론에서 너무 오랫동안 많이 사용되어왔다. 전대한 또한 이를 지적하며 ‘투명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월튼이 말했던 사진은 여기에서 음악 혹은 소리와 치환될 것이다. 투명성을 지닌 음악이 있다. 그렇다면 그 음악을 듣는 것은 그 자체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월튼의 논의에서 다뤄지는 사진에서 대상은 매우 중요하다. 음악의 경우 중요한 것은 대상보다는 오히려 ‘주체’일 것이다. 음악에서 드러나는 주체가 음악을 들려주는 창작자와 완벽히 일치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렇다면 이 ‘투명함’의 차이를 음악에서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나는 이것을 시선의 투명성이라고 비약을 해보고 싶다. 월튼과 전대한의 용어 사용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지만, 비약을 감수하고서라도. 대상보다는 주체의 측면에서 투명성을 적용해본다. 이를테면, 투명성을 지닌 음악은 창작자와 주체의 관계가 어떻건, 주체가 담아내는 시선 그 자체를 드러낸다. 투명한 시선인 셈이다. 만약에 창작자와 주체가 일치한다면, 이를 진정성으로써 논의할 수는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면의 공간에서 사유하고 고뇌하는 주체의 개념이 적어도 김홍중의 방식으로는 성립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The Republic of Trees]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여기에서 창작자는 생각의 여름이고, 주체는 나무들이다. 그리고 나무들의 시선이 노랫말을 통해 투명하게 담아진다. 이 둘은 다르다. 소리와 연관 짓자면 전자음이 이를 어느 정도 표현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선적으로는 노랫말에 담긴 시선의 측면에서, 음악의 투명성이 성취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나무들이 보이고, 보여진다. 생각의 여름이 [The Republic of Trees]에서 시도하는 방식을 통해, 음반은 투명성을 갖게 되고, 나무들의 시선이 드러나고 비춰진다. 거기에 ‘나’로써의 생각의 여름이 전혀 없더라도 말이다. 만약에 이것을 진정성의 방식으로 논했다면 창작자와 일치하는 주체의 부재 때문에 적용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생각의 여름이 말했던 그만의 ‘진정성’을 시선의 투명성과 겹쳐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입장에서 이 음반은 독특한 음반이다. 포크에서 주로 사용되지 않는 일반적인 진정성의 방식이 아니라, 시선의 투명성을 활용해서 그 시선의 주체인 나무들을 드러낸다. 음반을 듣고 상상된 시선을 다시 구현해내며, 나무들을 투명하게 바라보고 그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 나무의 시점으로. 나무의 시선으로.

그러한 측면에서 다시금 음반을 살펴본다. [The Republic of Trees]에 담긴 많은 요소들은 여러 경우 창작자와 주체를, 또한 주체와 청자 사이에 확실한 거리를 만든다. 창작자와 주체의 경우에는 박종현 혹은 생각의 여름을 주체로 삼지 않으면서. 나무를 발화의 주체로 삼으면서. 그 발화의 방식으로써 영어 노랫말을 택하면서. 이것은 주체와 청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영어보다는 한국어가 더 익숙한 상황에서. 영어 노랫말을 한국어만큼 즉각적이고 확실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서. 지금까지 생각의 여름이 들려줘온 관습과는 어긋나는 소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당연하게도, 소리 안에서도 마찬가지의 거리가 만들어진다. 포크 기타와 목소리와는 따로 구분되는 전자음이 만들어내는 차이에서. 두 개의 확연한 음들이 함께 만나며 만들어내는 나름의 결합과 나름의 충돌에서. 이러한 요소들은 [The Republic of Trees]를 다양한 측면에서 이질적인 위치에 놓는다. 주체에서, 생각의 여름 자체에서, 전통적인 포크 문법에서. 물론 음반은 이러한 이질성을 총체적으로 결합시켜 나무의 시선을 드러냈다. 생각의 여름이 아닌 나무(들)을 주체로 삼고, 그 발화에 일정한 거리를 만들어내고, 이것을 의도적인 청자와의 거리로 연장하고, 소리 안에서 그러한 거리 혹은 차이를 구현하면서. 그 때문에 [The Republic of Trees]를 이렇게 투명성의 방식을 성취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단순히 이 개념을 [The Republic of Trees]의 특수한 경우에서만 적용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물론 장명선의 [이르고 무의미한 고백]에서만도 아니다. 오남용된 진정성으로 해석된 동시대 포크들에서 나는 시선의 투명성이 나타나는 경우를 종종 봐왔다. 대표적으로 가상의 인물인 ‘콜라보 씨’를 설정해서 그의 하루를 따라가 [콜라보 씨의 일일]이라는 컨셉 음반을 만든 김목인이 있다. 가상의 ‘너’와 ‘우리’를 설정해서 종종 “넌 별로 날 안 좋아해”나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은 너무 평범해요”, “우리는 각자 모두 문제점이 있어” 등의 이야기를 들려준 신승은도 있다. 최고은은 [NOMAD SYNDROME]에서 노마드 혹은 디아스포라의 목소리를 전체적으로 설정한다. 말 그대로 ‘개의 입장’에서 노랫말을 지었다고 볼 수 있는 지윤해도 있다. 도마는 “황제 펭귄이 겨울을 나는 법”에서는 황제 펭귄(들)의 목소리를 노래한다. 혹은 창작자로써 노래하는 자신보다는 투쟁하는 군중 혹은 사람들을 주체로 담은 권나무의 “깃발”과 “LOVE IN CAMPUS”도 있다. 송은지의 “칸이는 밖으로 나왔어”는 엄마의 말과 생각을 이기고 처음으로 밖으로 나온 칸이를 상정한다. 조율의 “상어”는 어쩌면 사진과 비슷한 방식으로 상어를 보여주고 이야기한다. 한희정의 최근 곡들인 “비유”와 “걱정”은 각각 김사월, 이아립과 함께 하며 노랫말 속에서 ‘나’와 ‘너’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제목이 은근히 지시하는 ‘거인’과 함께 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곽푸른하늘과 함께 담은 단편선과 선원들의 “거인”도 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곽푸른하늘의 “읽히지 않는 책”은 비유로 읽을 여지도 다분하지만 말 그대로 읽히지 않는 책이나 쉬지 않는 공휴일 등의 목소리로 상상한다면 조금 더 재밌게 생각할 점이 많다. 홍갑의 “나는요”의 ‘나’를 실제의 홍갑이 아닌 조금은 다른 사람으로 상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러한 사례들을 시선의 투명성으로 독해할 때, 어떠한 주체를 상상할 수 있을까.

비약을 한 번 더 시도해볼 수도 있다. 창작자와 주체가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경우들 또한 익히 있어왔다. 여기서 자기 반영적인 노랫말들은 주로 진정성의 방식으로 논해졌다. 말했듯, 주체가 내면에서 고뇌하고 사유해서 공적 지평에서 이를 실현할 때에 참된 자아가 된다. 하지만 시선의 투명성으로 이러한 창작자=주체의 이야기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이 이야기들은 창작자의 내면을 진실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그 자신이 어느 정도 반영되지만 창작자 자체는 아닌 가상의 주체들이 하는 생각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렇게 된다면 김사월이 [수잔]과 [로맨스]에서 들려주는 여성의 서사와 연애담들은 음악인 본인을 넘는다. 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했음에도, 음반 속에서 새로이 생명력을 얻어 음반의 이야기를 이끄는 주체를 상상할 때 조금 더 풍성한 맥락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김사월에게만 한정되지도 않는다. 다른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민휘가 [빌린 입]에서 넓게 들려주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사람들”과 “들을 수 없는 것들을 듣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음반에 등장하는 이들은 혀를 도둑맞은 이들이고, 말 그대로 ‘빌린 입’으로 이야기하며 이민휘는 ‘받아쓰기’의 방식으로 이 이야기를 전한다. 그 ‘빌린 입’을 이민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또한 그 ‘받아쓰기’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는지를 투명성의 방식으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한편, 이랑이 [신의 놀이]와 그 이후에 들려준 곡들은 특히나 창작자와 창작자를 어느 정도 반영한 주체 사이의 간극을 염두에 두었을 때 마찬가지로 ‘노래를 만드는 사람’으로써 이야기하는 많은 걸 찾아낼 수 있다. 이것은 최근에 자전적 성격을 띠고 나온 천미지의 [Mother and Lover]나 천용성의 [김일성이 죽던 해]에서도 적용해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단순히 그들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을 반영한 주체의 이야기로써 이를 상상해보자. 물론 그 주체들은 종종 창작자들을 닮아있고, 반영하는 과정에서 창작자들의 많은 부분을 담아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이 주체들은 동시에 창작자들과 어긋나고, 창작자들과 완전히 닮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창작자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반영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 이야기를 만드는 자신의 일부는 어쩔 수 없이 반영된다. 창작자가 만들어내는 작품들은 ‘나’가 최대한으로 반영되었거나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들의 편집된 자신이다. 그리고 그 편집 과정에서 창작자와 주체 사이의 차이가 작게라도 어떻게든 존재한다. 시선의 투명성을 통해 그 간극을 조금 깊게 파고들고 탐구할 수 있을 것이다. 창작자들이 그들의 목소리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가 아니라, 창작자들이 어떠한 주체를 두고 무엇을 보여주거나 이야기하고 싶은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창작자와 주체의 거리가 청자와 만날 때 일어나는 반응에 대해서도.

창작자가 언제나 주체와 같다고 두는 기본적인 진정성의 디폴트 값을 제거해본다. 그리고 시선의 투명성이라는 새로운 값을 입력한다. 그렇게 창작자와 주체 사이의 간극을 인지한다. 그 다음 인지된 간극에서 투명하게 나타난 주체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이야기와 목소리를 상상한다. 물론 그 과정에 있어서 또 다른 문제들이 나올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이 방법들을 적용해야 할지. 이것들이 랩과 아이돌 팝 등의 페르소나를 장치하는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 결국에는 진정성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개념이 아닌지. 관성적인 해석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대중음악의 노랫말 안에서 만들어지는 주체를 설정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주체와 창작자, 그리고 청자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지, 등등. 개인적으로는 창작자 자체와 주체의 이야기가 완벽히 분리되었다거나 창작자가 곧 주체와 같다는 양극단의 착각만 거둔다면, 시선의 투명성은 진정성보다 조금 더 많은 방식으로 그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모든 창작자와 주체를 완벽하게 일치시키거나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겠지만 창작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균열들을 인지하는 방식으로. 그 균열을 일종의 불일치로 만드는 다른 포크에서도, 그 균열을 세심하게 이용하는 전통적인 포크에서도. 답보다는 질문을 더 많이 한 것 같지만.

[The Republic of Trees]를 들으며 나는 나무들의 시선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 투명한 시선들로 수많은 다른 시선들을 상상해보았다. 계절은 지나고, 나무들은 바뀐다. 그렇게 바뀐 나무들의 시선과, 그와는 또 다른 누군가 혹은 무언가들의 시선을 또 한 번 상상해본다. 겨울 끝자락에 나온 음반을 들으며 나는 봄에 글을 썼다. 그리고 여름을 통과하는 중이고, 멀리서 가을이 오고 있다. | 나원영 onezero96@naver.com

 

Rating: 8.5/10

 

수록곡
1. Preface
2. Looking Downward for Decades
3. Implanted in the Past
4. Relapse
5. From a Tree Perspective
6. Love Me as Mosses Do (최새봄 Big Baby Driver 와 함께)
7. By This Bonfire
8. Late Autumn


“Preface”

 

 

  1. 송화숙, “대중음악에서의 진정성 개념”, 『대중서사연구』 21호, 2009
  2.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 “authenticity” 항목
  3.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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