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의 감각을 재현하는’ 음악으로서의 하이퍼팝”은 2020년 10월 12일 음악 비평 워크숍 『Various Critics』를 통해서 최초로 공개되었다. 공개 1주년을 맞이해, 『Various Critics』 및 [weiv]에 무료로 글을 공개한다. 본 칼럼은 『Various Critics』을 통해서도 읽을 수 있다. | 편집장
1. 배경
A. G. 쿡(A. G. Cook)이 2013년에 PC 뮤직(PC Music)을 설립한 이래로, 해나 다이아몬드(Hanna Diamond)와 대니 L 할(Danny L Harle) 등의 PC 뮤직 소속 음악가를 비롯하여 소피(SOPHIE), 케로 케로 보니토(Kero Kero Bonito), 100 겍스(100 gecs)처럼 그들과 유사한 분위기의 음악을 들려주는 이들이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PC 뮤직 레이블을 중심으로 그러한 음악들이 생산되거나 향유되었고, 유사한 음악을 들려주는 음악가들의 상당수가 PC 뮤직과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활동을 이어 나갔기에, 많은 사람들은 유사한 음악을 통틀어 “PC 뮤직”1이라고 표찰화(labeling)하곤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특정 레이블의 이름일 뿐이므로 해당 음악가들을 분류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해당 음악들이 들려주는 소리의 질감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버블검 베이스(Bubblegum Bass)”라는 다소 직관적인 장르명을 붙이기도 한다. 분명, 풍선껌이 연상시키는 몇몇 이미지들, 이를테면 톡톡 터질 것 같은 느낌이나 귀여운 분위기 혹은 (곡의 전개에 맞추어) 지속되는 팽창감 등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이러한 표찰화는 언급한 음악들을 직관적으로 잘 설명해주는 것만 같다. 다시 말해, 버블검 베이스라는 표찰은 그에 속하는 실례들의 가장 두드러진 소리적 특징을 압축적으로 기술하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이 표찰은 꽤 많이 압축적이어서, 해당 표찰로 분류될 수 있는 음악들 중 상당수를 포섭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 표찰의 정의를 누구도 명료하게 제시하지 못한다는 더 큰 문제도 존재한다. 버블검 베이스에 대한 대부분의 설명은, 풍선껌이 주는 이미지를 단순 열거한 뒤, 더 상세한 내용은 “a.k.a. PC MUSIC”라는 구절을 통해 “PC 뮤직”의 정의를 참고하라는 식으로 순환적 정의를 제시할 뿐이기 때문이다.2
그래서일까. 영미권의 몇몇 이들은 PC 뮤직 레이블 소속의 음악가 뿐만 아니라 유사한 여러 음악가들까지 성공적으로 포섭하기 위해 “하이퍼팝(Hyperpop)”이라는 새로운 명명을 시도한다. 이들은 하이퍼팝에 대해 “댄스 음악/전자 음악적 저의를 가지고, 팝의 주제들과 수사들을 패러디하는 실험적인 음악”3이라는 규범적이지만 추상적인 정의를 제시한다. 지나치게 짧고 수사적인 규정이기에 사실 단언하기가 어렵지만, 그들은 위와 같은 정의를 통해 댄스 음악이나 전자 음악의 요소를 포함하면서 주류적인 팝 음악의 주제나 형식을 패러디하는 음악을 지칭하려는 의도로 하이퍼팝이라는 명명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허나, 이런 식으로 하이퍼팝을 정의하는 것은 너무나 모호해서, 하이퍼팝이라는 표찰을 통해 수많은 실험적인 전자 음악들을 모두 지칭 가능하게 만든다.4
2. 주장
이처럼 PC 뮤직 소속의 음악가들 그리고 그들과 친연성을 갖는 음악가들이 들려주는 음악을 분류하기 위해 고안된 세 가지 대표적인 장르명이 존재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 이 세 표찰 모두 우리가 염두에 둔 음악-유형의 개항(token)들을 잘 포섭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글은 해당 음악가들의 음악을 유의미하게 포섭할 수 있는 표찰을 모색하고, 그 표찰이 어떤 근거로 유의미한 표찰인지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단순하게 음악의 발생과 관련된 인과적 연쇄를 드러낼 뿐인 “PC 뮤직”이라는 표찰과, 해당 음악들의 가장 두드러진 소리적 특징만을 환기하며 순환적인 정의를 제시할 뿐인 버블검 베이스라는 기존의 두 표찰과는 달리, 하이퍼팝은 그 표찰에 속할 수 있는 음악들이 청자에게 지각되는 과정(혹은 메커니즘)의 특징을 잘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표찰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따라서, 가장 먼저 이 글은 앞서 언급한 (레딧의) 하이퍼팝의 명시적인 정의를 따르지 않고 하이퍼팝이라는 표찰을 다른 의미로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이를 위해 하이퍼팝이라는 표현의 축자적(literal) 의미를 검토한 후, 이 축자적 의미로부터 하이퍼팝의 가능한 의미 후보들을 몇 가지 살펴보며 적절하지 않은 후보들을 소거해 나갈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하이퍼팝이라는 표찰에 귀속될 수 있는 정의를 정식화한 다음, 해당 정의를 따르는 하이퍼팝이 재현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는 인간 지각의 메커니즘을 간략히 설명해 볼 것이다. 더 나아가, 그러한 지각 메커니즘을 언급했던 음악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재현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하이퍼팝이라는 표찰이 해당 음악들을 유의미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하이퍼팝이라는 표찰이 영미권의 특정한 조류에 속하는 음악만이 아니라 해당 지각 메커니즘을 재현하는 듯한 음악을 모두 포섭할 수 있는 (장르라기보다는) 음악의 특정한 양태를 가리키는 일종의 분류어(sortal)로서 유의미하다고 논증해보고자 한다.
3. 하이퍼팝의 축자적 의미
레딧을 중심으로 하는 영미권에서의 담론이 하이퍼팝에 대해 제시하는 규범적인 정의와는 다르게, 이 글에서는 아주 단순하게 하이퍼팝이라는 단어의 축자적 의미를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하이퍼팝(Hyperpop)은 “hyper“라는 접두사가 “pop”이라는 명사에 덧붙여진 단어이다. 이렇게 접두사가 붙은 단어의 의미를 간략하게 형식화한다면, “○○한(인)-” + “무엇”이 된다. 즉, 명사 “pop”의 의미가 무엇이건 간에, 그 의미에 “hyper”가 함축하는 수식어를 붙이면 “hyperpop”의 의미가 될 것이다. 따라서, 하이퍼팝의 의미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hyper“라는 접두어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므로, 본 절에서는 먼저 “hyper”라는 표현의 의미를 살펴보려고 한다.
많은 이들은 접두사 “hyper”가 ‘~ 너머의(over)’ 혹은 ‘~을 넘어서는(beyond; above)’이라는 의미를 갖는 고대 그리스어 “ὑπέρ”에서 유래했다고 간주한다.5 이러한 의미가 확장되어, 오늘날 “hyper”는 ‘지나치게(excessively)’나 ‘과도한(too much)’라는 뜻까지 갖는 것으로 여겨진다. 더 나아가, “hyper”를 형용사 “hyperactive”의 축약어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6 물론 이 경우에도 앞서 언급한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hyperactive”라는 표현이 ‘비정상적으로 혹은 극단적으로 활동적인/왕성한(abnormally or extremely active)’7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hyper”는 그것이 덧붙게 되는 단어나 어근의 의미에 ‘과한’, ‘지나친’, ‘과잉의’ 등의 수식어를 덧붙인다. 따라서, 우리가 애초에 살펴보고자 했던 “hyperpop”의 축자적 의미는 ‘지나친/과한/과잉의 팝’이 된다. 다만, 국내에서 명사와 “hyper”가 결합된 단어를 번역하는 경우, 대체로 ‘과잉의’를 그 의미로 채택하는 것 같다.8 따라서, 이 글에서도 하이퍼팝의 축자적 의미를 ‘과잉의 팝’이라고 규정할 것이다.
4. ‘과잉’의 후보들
하이퍼팝의 축자적 의미를 ‘과잉의 팝’이라는 기술구로 상정한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긴다. 과잉이라는 표현은 항상 목적어를 필요로 한다.9 과잉은 무언가가 예상이나 기대 혹은 필요보다 많거나 지나치다는 의미이기에, 그 무언가에 해당하는 대상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과잉은 필연적으로 ‘X의 과잉’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하이퍼팝의 축자적 의미인 ‘과잉의 팝’은 사실 과잉의 대상을 포함하는 변항이 생략된 기술구인 ‘(X의) 과잉의 팝’으로 정식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하이퍼팝이라는 표찰이 함축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하이퍼팝의 축자적 의미에서 생략된 변항 X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목적어는 무엇인가? 본 절에서는 하이퍼팝으로 분류되는 음악의 개항들을 토대로, 과잉의 대상인 X의 가능한 후보들을 검토해볼 것이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과잉이라는 개념을 양적 과잉과 질적 과잉이라는 두 차원으로 구분하여 하이퍼팝의 함축 대상을 검토할 것을 제안한다.
4.1. 양적 과잉으로서의 하이퍼팝
우선, 과잉이라는 개념이 대상의 양적인 측면에 적용되는 경우인 양적 과잉을 생각해보자. 어떤 대상이 다른 대상들에 비해 특정한 요소에 있어서 ‘양적 과잉’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대상이 비교군에 속하는 다른 대상들보다 양적으로 혹은 수적으로 비교 대상이 될 공통된 특정 요소를 훨씬 더 많이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어떤 농작물이 ‘아연 과잉’이라고 해보자. 이는 그 작물이 다른 작물들에 비해(특히 동일한 군에 속하는 작물에 비해) 더 많은 양의 아연을 체내에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하이퍼팝으로 표찰화되는 음악이 다른 장르의 음악들에 비해 양적으로 과잉인 팝이라고 규정한다면, 이는 하이퍼팝이 다른 장르의 음악보다 특정한 음악적 요소를 양적으로 혹은 수적으로 더 많이 갖는다는 것이다.
이 경우, 하이퍼팝이라는 표찰이 함축하는 과잉의 대상은 비교적 명료해진다. 음악에서 양적으로 혹은 수적으로 많아지거나 적어질 수 있는 대표적인 요소는 바로 지각가능한 음(note)의 수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제한된 시간 동안 양적 혹은 수적으로 더 많은 음을 들려주는 음악은 다른 음악들에 비해 양적으로 과잉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단위 시간을 기준으로 했을 때, 하이퍼팝에 속하는 음악들이 다른 장르에 속하는 음악(특히, 동시대 전자음악의 다른 하위 장르들)에 비해 과잉이라고 할 만큼 양적으로 과잉은 아니다. 이를테면, 정글이나 드럼앤베이스에 속하는 음악의 경우 동일한 단위 시간 동안 훨씬 더 많은 수의 음을 들려준다. 바로 앞에서 우리가 양적 과잉을 정의한 바에 의하면, 오히려 정글이나 드럼앤베이스가 하이퍼팝에 비해 양적 과잉인 음악이다. 심지어 단지 정글과 드럼앤베이스만이 하이퍼팝에 비해 양적 과잉인 것도 아니다. 하이퍼팝보다 특정 단위 시간 동안 지각가능한 음의 수에 있어서 양적 과잉인 음악은 얼마든지 제시될 수 있기에, 결국 하이퍼팝이 지각가능한 음의 수를 기준으로 양적 과잉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은 정당화되지 못한다.
물론, 다른 양적 요소를 토대로 과잉 여부를 판단할 수도 있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이를테면, 음악에서 분석가능한 또다른 양적 요소는 음악에 포함된 언어적 요소의 수, 즉 가사의 수를 고려해보자. Kero Kero Bonito의 보컬 Sarah가 곡 중간중간 발화에 가까운 소리를 내뱉거나10 100 gecs가 짧은 한 두마디의 말을 곡의 전개에 따라 극단적으로 빠르게 반복시키는 것을 떠올리면, 하이퍼팝으로 분류되는 음악들이 들려주는 언어적 요소의 수가 꽤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랩이나 스포큰워드11, 혹은 (가사에 천착하는) 포크 등과 같이 얼마든지 해당 요소를 더 많이 가진 다른 장르의 음악을 상기해본다면, 하이퍼팝이 양적으로 과잉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음악에서 지각가능한 언어적 요소의 수를 기준으로 삼아도 하이퍼팝은 과잉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언급한 두 요소 외에 어떤 양적 요소를 그 비교 기준으로 설정하건, 위와 같은 식의 반론은 하이퍼팝이 함축하는 과잉이 양적 과잉이라는 주장에 대해 얼마든지 적용 가능하다. 이를테면, 음악에 포함된 음이 아닌 소리의 수 같은 것도 과잉의 대상일 수 있겠으나, 이러한 요소들에 있어서도 하이퍼팝보다 분명 과잉인 경우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이퍼팝은 어떠한 양적 요소에 있어서도 다른 음악에 비해 과잉이 아니다.
4.2. 질적 과잉으로서의 하이퍼팝
하이퍼팝이 함축하는 바가 양적 과잉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이퍼팝이 함축하는 과잉을 질적 과잉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본 절에서는 하이퍼팝은 질적 과잉조차도 함축하지 않음을 논증할 것이다.
다만, 이에 앞서 질적 과잉이라는 개념을 잠시 검토해보고자 한다. 우선, 질적 과잉은 어떤 대상이 가진 특정한 질적 요소를 갖는 양태가 다른 대상들이 그 특정 요소를 갖는 양태보다 훨씬 강렬하다(intense)는 것이다.12 이를테면, 내가 쓰고 있는 안경의 색이 같은 방에 놓여 있는 주변 사물들의 색보다 훨씬 더 빨갛다면, 이 안경은 같은 방에 놓여 있는 사물들 사이에서 ‘빨강’이라는 속성을 기준으로 질적으로 과잉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위와 같은 일상적 진술도 모호한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이 진술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서로 다른 두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 과잉인 사물은 다른 사물들에 비해 RGB 색상표를 기준으로 빨강으로 간주되는 동일한 RGB값에 해당하는 색요소를 양적으로 더 많이 갖는다.
② 과잉인 사물의 색에는 다른 사물들은 갖지 못한 RGB 색상표를 기준으로 R의 최극단인 ##FF0000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색상이 하나라도 포함된다.13
그런데 ①은 사실상 두 사물의 동일한 질적 요소의 양적 차이를 비교하는 것이므로 양적 과잉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질적 과잉이라고 판단할 때 취할 수 있는 해석은 ②의 방식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된 질적 과잉 개념조차도 정말로 성립가능한지는 다소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과잉’이라는 표현의 의미에 포함될 수 있는 ‘과도하다(excess)’거나 ‘초과된다(over)’와 같은 술어들은 필연적으로 ”a는 b보다 @에 있어서 과도하다/초과되다.”라는 형식으로 쓰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a와 b가 속한 범주가 질적인 속성일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a와 b이 가진 @의 정도를 비교할 수 있으려면 @는 (@ 그 자체가 양적 요소는 아니더라도) 비교가능한 지표로 환원가능해야만 한다. 앞서 살펴본 ②의 방식에서 우리가 색이라는 질적 속성을 RGB값이라는 수치화된 지표로 환원하듯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라는 요소가 환원가능하다면, 우리는 굳이 명료하게 비교할 수 없어서 과잉이라는 술어가 내포한 형식을 적용하기 어려운 질적 과잉 개념을 채택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라는 요소를 과잉이라는 표현이 적용될 수 있는 대상들은 양적 혹은 수적인 지표로 환원되는데, 이 환원 이후에 두 대상을 비교하는 과정은 양적 과잉에 해당할 뿐이다. 따라서, 질적 과잉이라는 개념은 미봉책(ad hoc)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이렇듯, 질적 과잉은 양적 과잉과 다르게 엄밀하게 고찰한다면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지만, 이 글에서는 자비의 원칙을 적용하여 ‘질적 과잉’이라는 개념이 은유적인 층위에서 특정한 질적 측면이나 요소가 다른 음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두드러지는 것을 지칭하기 위해 쓰였다고 간주한 뒤 논의를 이어나가기로 한다.
허나, 문제는 질적 과잉을 은유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더라도 하이퍼팝은 다른 음악에 비해 질적으로 과잉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마 하이퍼팝이 함축하는 질적 과잉의 대상으로 고려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후보는 ‘소리의 다양성’일 것이다. 즉, 하이퍼팝이 다른 음악들과는 다르게 다양한 음고의 소리를 다채롭게 포함하고 있다거나, 다른 음악들은 잘 포함하지 않는 소리들을 포함하여 특이한 소리 스펙트럼의 양상을 띈다거나, 흔히 잘 사용하지 않는 화음을 자주 사용한다거나… 와 같은 국면들이 나타날 때, 우리는 어떤 음악이 소리의 다양성에 있어서 질적 과잉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리의 다양성’을 기준으로 놓는다고 하더라도 하이퍼팝은 그리 다양한 소리들을 들려주는 것 같지 않다. 하이퍼팝보다 훨씬 더 다채로운 소리들을 들려주는 음악들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고 또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질적인 두 장르에 속하는 두 곡이 매시업된 곡의 경우 단일한 기조로 만들어진 하이퍼팝보다 훨씬 더 다채로운 소리들을 제시한다. 게다가, 글의 초반부에서 언급했듯 하이퍼팝의 소리적인 특징을 압축적으로 포착한 것이 “버블검 베이스”라는 표찰이라는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이 표찰에 속하는 음악들이 제시하는 소리들의 특징이 풍선껌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사물의 이미지로 수렴될 만큼 그 다양성이 그리 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질적 과잉으로서의 하이퍼팝의 또다른 대상으로 ‘악기 구성의 다채로움’이나 ‘곡 구조의 다양성’과 같은 측면들도 고려해볼 수 있겠으나, 소리의 다양성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과잉의 대상에서 배제될 수 있다. 따라서, 하이퍼팝은 어떠한 질적 요소에 있어서도 다른 음악에 비해 과잉이 아니다.
4.3. 대안적인 분석: 속성으로서의 팝
마지막으로, 하이퍼팝이라는 표찰을 조금 다르게 이해하는 대안적인 방식이 존재할 수 있어서 짤막하게 언급하려고 한다. 앞서 우리는 하이퍼팝이라는 표현을 ‘(X의) 과잉의 팝’이라고 정식화했다. 이 형식화의 초점은 하이퍼팝이라는 표현에서 “하이퍼”라는 접두사가 “팝”이라는 명사에 덧붙게 되면서 부과하는 함축적 의미와 그 함축의 대상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본 절에서 짧게나마 언급해보려는 대안적 분석은 “팝”을 고유명이 아니라 일종의 기술구로 간주하는 전략을 취하여, 팝이 특정한 대상을 지칭하기보다 어떤 대상의 속성을 함축하는 것으로 분석하려는 입장이다. 즉, 하이퍼팝이 의미하는 ‘과잉의 팝’은 해당 표찰에 속하는 음악들이 다른 음악들보다 훨씬 더 ‘팝’이라는 속성을 많이 가지는 음악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분석은 자승자박의 상황에 빠진다. 하이퍼팝이라는 표찰의 의미를 호착하기 위해 ‘팝’을 일종의 속성으로 간주하는데, ‘팝’을 속성으로 간주하기에 그 의미를 고정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팝’을 일종의 속성으로 간주할 경우, 팝이라는 속성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하는데 사실상 이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영미권의 주류 음악을 주로 지칭하는 장르로서의 팝은 사실상 명료하게 진리 조건을 도출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넓은 의미에서 클래식 음악의 대립항으로 상정된 대중음악(Popular Music)의 준말에 해당하는 팝(Pop)은 그나마 어떻게든 그 의미를 규정해볼 수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14, 이 절에서 상정한 속성으로서의 팝은 영미권의 주류 음악을 지칭하는 장르로서의 팝에 더 가깝고 이는 가족 유사성이나 친연성 등에 의거하여 후험적으로 판단되는 무언가에 가깝다.
더 나아가, 팝의 역사를 잠시 떠올려보자. 팝은 인접한 수많은 장르의 음악들을 게걸스럽게 흡수하면서 그것들 모두를 팝으로 소화시켜왔다. 록이나 재즈, 힙합, 전자음악 등 많은 장르들은 어느 순간 자연스레 팝에 흡수되어 팝 음악이 들려줄 수 있는 요소들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팝을 하나의 속성으로 간주하고, 하이퍼팝이 팝이라는 그 속성이 다른 음악들에 비해 매우 과잉인 음악이라고 분석하는 입장이 가능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왜냐하면, 앞서 살펴보았듯 팝이라는 속성이 매우 과잉되어서 다른 수많은 팝 음악들 사이에서 돌출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것은 팝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러한 입장에서 하이퍼팝은 그저 더 팝적인 팝(혹은 팝스러운 팝)에 지나지 않는다.
5. 과잉의 감각을 재현하는 하이퍼팝
따라서, 우리는 하이퍼팝을 양적으로건 질적으로건 결코 ‘(X의) 과잉인 팝’이라고 정식화할 수 없다. 그렇다면 A. G. 쿡이나 소피, 케로 케로 보니토, 100 겍스 등이 들려주는 음악을 하이퍼팝으로 표찰화하는 시도는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앞서 비판했던 “PC 뮤직”이나 버블검 베이스만큼이나 하이퍼팝도 글의 초반부에서 언급했던 음악가들을 잘 담아내지 못하는 표찰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제기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퍼팝이라는 표찰이 “PC 뮤직”이나 버블검 베이스보다 훨씬 더 해당 음악들의 양태(mode)를 잘 함축한 표찰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따라서, 본 절에서는 먼저 프레드 드레츠키(Fred Dretske)의 인간의 지각 경험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인지 사이의 차이에 대한 논의를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그 후, 하이퍼팝이라는 표찰이 드레츠키의 논의에서 제시된 인간의 지각 과정과 인지 과정 사이의 차이를 재현하며 인간 지각의 한계를 상기시킨다는 주장과 함께, 언급했던 음악들의 어떠한 지점들에서 그러한 재현이 발생하는지를 논할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재현을 통해 해당 음악들이 (정말로 어떤 대상 X의 과잉이 아니라) 과잉의 상태를 재현한다는 점에서, 하이퍼팝이라는 표찰이 이 음악들을 유의미하게 포섭하는 표찰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5.1. 프레드 드레츠키의 논의
하이퍼팝이 대체 무엇을 재현하고 있으며 또 그 재현이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과잉의 감각을 환기시키는지 논하기 전에, 잠시 이러한 논의의 배경이 될 철학적 분석을 살펴보자. 인식론과 심리철학을 주로 연구했던 미국의 철학자 프레드 드레츠키는, 인간의 지각(Perception) 과정과 그 지각으로부터 비롯되는 인지(Cognition) 과정의 차이에 관해 논했다.
이를 위해, 그는 지각과 인지 과정의 기본 단위가 되는 정보(Information)를 디지털과 아날로그라는 두 형식으로 구분한다. 드레츠키에 따르면, 어떤 정보가 디지털 형식으로 되어있다는 것은 그 정보가 “다양한 속성의 분절적인(discrete) 표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뜻이다.15 마찬가지로, 어떤 정보가 아날로그 형식으로 되어있다는 것은 그 정보가 “다양한 속성의 연속적인(continuous) 표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16
이해를 위해, 두 종류의 계기를 생각해보자. 첫번째 계기는 계기판에 숫자를 띄워서 자동차의 속도를 실시간으로 표시하는 속도계이다. 이 경우, 대상의 속도가 변해도 그 변화에 따라 속도는 연속적으로 표시된다. 이를테면, 달리고 있는 자동차의 속도가 50km/h에서 50.000000000000001km/h로 아주 미세하게 변해도 이 속도계는 이를 표상한다는 말이다. 이 첫번째 계기는 연속적으로 속도라는 속성을 표상하고 있기에 아날로그 형식에 대응될 수 있다. 반면, 두번째 계기는 대상이 낼 수 있는 속도의 범위 전체를 임의적으로 분할한 대략 6-7개 정도의 급간 중 대상의 현재 속도가 포함된 급간을 표시하는 속도계이다. 이 경우, 대상의 실제 속도는 연속적이겠지만 속도계에 나타나는 표상은 (사전에 설정된) 분절적인 몇몇 급간들 중 하나이다. 이를테면, 현재 자동차의 기어가 몇 단인지를 표시해주는 계기가 이에 해당한다. 이 두번째 계기는 (실제 속도와는 다르게) 분절적으로 속도라는 속성을 표상하고 있기에 디지털 형식에 대응될 수 있다.
정보의 디지털 형식과 아날로그 형식의 또 다른 사례로 ‘컵 안에 커피가 담겨 있는 상태’에 대한 진술문과 그림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러한 상태에 대해 누군가가 “내 앞의 컵에는 커피가 담겨 있다.”라는 진술문을 발화했다고 해보자. 이 진술문은 청자에게 오직 ‘○○(발화자)의 앞에 있는 컵에는 커피가 담겨 있음’이라는 비교적 단순한 정보만을 전달한다. 반면, 누군가의 앞에 있는 컵에 커피가 담겨 있는 풍경을 그린 회화 작품은, 동일한 상태에 대한 진술문보다 훨씬 많은 정보들을 전달한다. 컵의 크기, 컵의 모양, 컵에 담긴 커피의 양, 컵의 구체적인 위치 등… 진술문에 비해 훨씬 풍부한 정보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이때, 비유적으로 진술문의 정보 전달 방식은 디지털 형식에 상응하고, 그림의 정보 전달 방식은 아날로그 형식에 상응한다.
이러한 정보의 두 형식과 관련하여, 모든 신호17는 정보를 아날로그와 디지털 형식 둘 다로 전달한다고 드레츠키는 전제한다. 즉, 우리가 감각을 통해 무언가를 지각하는 경우, 그때 우리에게 전달되는 정보는 아날로그 형식과 디지털 형식 모두로 동시에 전달된다는 것이다. 이 정보는 우리의 지각 과정까지는 그대로 전달된다. 다시 말해, (일반적인 지각 주체의 경우) 수용된 정보는 지각 과정까지는 아날로그 형식과 디지털 형식 모두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지각 과정을 거친 그 정보(와 그것의 내용)가 인지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는 일종의 부호화(encoding)를 필요로 하는데, 이 부호화는 인간의 생득적인 (혹은 선험적인) 한계18로 인해 디지털 형식만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멀리서 나는 종소리를 듣는다고 해보자. 어떤 성당의 첨탑 꼭대기에 위치한 종이 정오를 맞아 움직이면서 소리가 발생했고, 이것이 공기의 진동을 통해 우리의 감각 기관인 귀에 도달했다. 종에서 발생된 정보는 이러한 지각 과정까지만큼은 디지털과 아날로그 형식 둘 다로 전달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종소리에 대한 믿음이나 지식 등을 형성하는 인지 과정에 들어가는 순간, 전달된 정보들 중에서 아날로그 형식의 정보는 자연스레 손실된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풍부한 정보들이 전달되었기 때문에, 이 정보들을 일종의 압축이나 변환 없이 원본 그대로 처리하는 것은 인간의 여러 한계들로 인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드레츠키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지각 경험(즉, 우리가 대상에 대한 시각과 청각 등을 구성하는 경험)과 그런 경험에 의한 결과인 지식이나 믿음 사이의 차이는 ‘부호화의 차이’”19라고 주장한다.
5.2. 하이퍼팝의 과잉적 특징들
그런데 우리의 지각 경험과 그 지각 경험의 결과(인지)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달리 생각하면 우리에게 지각을 통해 입력되는 정보들은 항상 인지 이후에 남게 되는 정보에 비해 과잉이라는 것이다.
나는 하이퍼팝에 속하는 음악들이 무언가 과잉인 듯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해당 음악들이 이러한 인간의 지각 과정과 인지 과정 사이의 부호화로 인해 발생하는 (아날로그 형식의) 정보의 손실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정말로 어떤 대상 X가 과잉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음악적 요소들을 통해 무언가가 과잉인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우리로 하여금 인지 과정에서 부호화로 인해 손실된(더 엄밀하게는, 손실되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는) 정보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과잉의 (상태를 재현하고 상기시키는) 팝’으로서의 하이퍼팝이라는 표찰이 유의미하다는 것이다.20
하이퍼팝으로 분류되는 음악들의 대표적인 특징들이 이러한 주장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먼저, 하이퍼팝에 속하는 음악들의 소리적인 특징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듯, 하이퍼팝에 속하는 음악들은 과잉의 상태에 놓였을 때 우리가 마주할법한 이미지와 감지할 듯한 분위기를 매우 구체적으로 재현한다. 각종 효과들로 인해 왜곡된 신시사이저 소리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하이퍼팝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느 정도 통통 튀는 인상을 주는 신시사이저 소리를 정말로 빵빵하게 부풀어오른 풍선껌마냥 과장시켜 곧 있으면 터질 것만 같은 소리로 변형하여 들려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언가가 극단적으로 팽창하여 터지기 직전의 이미지, 즉, 전형적인 (부피의) 과잉의 이미지를 재현한다.
또한 보컬의 속도를 빠르게 만들어서 그 음고를 의도적으로 높게 만드는 기법21을 이용하여, 알아듣기 힘든 보컬이 심지어는 매우 빠르게 지나가 버리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특히, 이때의 빠름은 단순히 빠른 리듬에 맞추어 노래도 빠르게 부르는 게 아니라, 포스트-프로덕션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작된 빠름임을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라서, 청자로 하여금 음고 지각에 있어서 자신이 놓치고 있는 음고들이 많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자기-회의적 태도를 갖게 만든다.
100 gecs “stupid horse (Remix) [feat. GFOTY and Count Baldor]”
게다가, 짧고 단순하면서 큰 의미도 찾기 힘든 가사들을 연속적으로 반복시켜서 청자로 하여금 곡 내에 그나마 존재하는 언어적 요소마저 포착하기 어렵게 만들며, 자신이 놓치고 있는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염두에 두게 만들어 과잉의(혹은 과잉적인) 상황을 끊임없이 연출한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하이퍼팝은 이러한 음악적 요소들을 통해 과잉의 상황에서 느낄 법한 감각들을 재현한다.
그리고 이는 언급했던 음악들의 공통적인 구조에서도 나타난다. 하이퍼팝에 속하는 음악들은 대체로 계속해서 상승하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구조를 취한다. 물론 이는 파티와 춤 등을 목표로 하는 전자음악의 여러 하위 장르들이 공통적으로 취하는 구조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EDM의 경우 반복을 하면서 비트를 더 빠르게 하거나 음량을 더 크게 하는 식의 약간의 변형을 주어 상승하는 분위기를 자아낸 후 한 두 차례의 드롭으로 이를 해소한 뒤 또 다시 상승하는 분위기의 빌드업을 반복해가는 구조를 (대체로) 채택한다. 그러나 하이퍼팝은 이런 일방향적인 구조만을 단순하게 취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바로 앞에서 살펴보았듯 하이퍼팝은 단순한 구조의 반복에 극단적인 가속이나 음고의 왜곡을 결합시키거나 강박적인 반복을 수행함으로써, 전자음악의 다른 하위 장르들이 취하는 전형적인 방식과 차별점을 두면서 과잉의 감각을 재현하기 위한 초석을 마련한다.
Six Impala “5W3375W3375W337L1K3BUBBL36UM”
이에 더하여, 하이퍼팝은 동일한 구조 혹은 유사한 구조를 반복해나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아예 다른 구조를 제시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이를테면, 일정한 구절을 반복하다가 이를 반복이나 가속을 통해 상승시키거나 드롭을 통해 하강시키는 게 아니라 아예 다른 리듬과 멜로디나 음색 등을 갖는 새로운 테마를 제시하여 그 테마를 전개하는 식이다. 이러한 음악적 구조는 일반적으로 예상 가능한 반복이나 전개 과정을 통해 음악의 진행이 모종의 전체적인 계획 하에서 해결되었다는 느낌을 배반한다. 즉, 청자는 그 음악 내에서 계속해서 새로이 제시되는 테마들이 주는 이질감과 생경함 등으로 인해, 들려오는 음악이 자신이 갖고 있는 음악적 구조에 대한 기대나 예상을 배반하여 그 음악이 어딘가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품게 된다. 이러한 의구심은 그 음악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감상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향하고, 그래서 우리는 들려오는 음악에서 스스로 놓쳤을 법한 것들을 상기해보면서 과잉의 감각을 환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잉의 감각은 그들의 음악을 구성하는 비-소리적 요소들에서 정점을 찍는다. 이들의 앨범 커버나 뮤직비디오와 같은 시각적 요소들은 굳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매우 명시적으로 과잉의 이미지를 재현한다.
6. 결론: ‘과잉의 감각을 재현하는’ 음악의 한 양태를 나타내는 분류어(sortal)로서의 하이퍼팝
하이퍼팝에 대해 위와 같이 논하는 것은 이 글의 초반부에서 언급되었던 특정한 음악의 표찰을 둘러싼 문제와 지나치게 멀어져버린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결국 이 글은 100 겍스, 소피, 케로 케로 보니토, A. G. 쿡처럼 아주 강력한 친연성을 기반으로 직관적으로 아주 쉽게 하나의 군으로 묶일 수 있는 것 같은 음악가들을 “‘과잉의 감각을 재현하는 혹은 환기하는’ 음악을 들려주는 음악가”라고 에둘러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정의는 1절에서 거부하기로 했던 하이퍼팝에 대한 레딧의 명시적 정의만큼이나 추상적이고 수사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혹은 그보다 더 애매모호하고 느슨한 정의로 보일 수도 있다. 특히, ‘과잉의 감각을 재현하는 음악’이라는 음악의 특정한 한 양태 전반을 가리키기 위해서 하이퍼팝이라는 표찰을 사용한다면, 당연히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된 조류의 음악가만이 아닌 여러 음악가들이 그러한 양태의 음악을 주로 만들고 들려준다면 그들 또한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하이퍼팝은 지나치게 포괄적인 용어(umbrella term)가 되어 별로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22
이러한 비판을 전적으로 부인하기란 어렵다. 분명 ‘과잉의 감각을 재현하는’ 음악이라는 의미의 하이퍼팝은 “PC 뮤직”이나 버블검 베이스라는 표찰보다 더 많은 수의 음악을 포함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하이퍼팝을 “PC 뮤직”이나 버블검 베이스와 동일한 층위에서 장르명을 나타내는 표찰로 간주할 때만 단점으로 작용한다. 허나, 나는 ‘과잉의 감각을 재현하는’ 음악으로서의 하이퍼팝은 하위장르(sub-genre)라기보다는 일종의 분류어(sortal)23라고 생각한다. 분류어로서의 하이퍼팝은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명명에 따르는 장르 개념과는 다르게, 음악의 특정한 양태를 지칭한다. 즉, 특정한 그 양태를 띄는 음악은 모두 하이퍼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오히려 그렇기에 하이퍼팝이라는 표찰은 더 유의미하다. ‘과잉의 감각을 재현하는’ 수많은 음악들이 환기하는 모종의 유사성을 토대로, 우리는 더 다양한 음악들을 하나로 그러모아 고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이를테면, 언급했던 음악가들과의 직접적인 친연성을 명백히 갖지 않지만 소리적으로 다소 유사하게 들리는 수민(SUMIN)이나 오메가 사피엔(Omega Sapien)부터 이달의 소녀나 있지(ITZY)까지를 막연하게 “하이퍼케이팝”24이나 “네오케이팝” 등의 기이한 표찰로 한꺼번에 묶어 내려는 시도를 떠올려보라. 음악가의 배경이나 음악의 발생에 관한 인과적 연쇄만을 토대로 하는 세부 장르명으로는 이러한 논의를 결코 쉽게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지나치게 비유적이고 공상적이라는 비판을 피해가기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잉의 감각을 재현하는’ 음악이라는, 지각 메커니즘과 관련하여 기술된 음악의 특정한 한 양태를 의미하는 분류어로서의 하이퍼팝은 지나치게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장르 개념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무모한 희망을 품어본다. | 전대한 jeondaehan@naver.com
- 앞으로 레이블을 가리킬 때에는 (따옴표 없이) PC 뮤직이라고 쓰고, 장르명을 가리킬 때에는 “PC 뮤직”이라고 쓸 것이다.
- 레이트유어뮤직(Rateyourmusic)의 “Bubblegum Bass” 항목이나 어반딕셔너리(Urban Dictionary)의 “Bubblegum Bass” 항목이 대표적인 예이다.
- 이는 PC 뮤직 레딧(Reddit)의 글에서 규정된 정의이다. 원문은 “experimental music that pushes pop themes and tropes to parody, with some dance/electronic undertones”이다.
- 단적으로, 여타의 클럽 음악들의 소리를 해체하여 전유하는 “디컨스트럭티드 클럽(Deconstructed Club)”도 얼마든지 위의 정의를 만족한다.
- https://www.lexico.com/definition/hyper-, https://www.dictionary.com/browse/hyper
- https://www.lexico.com/definition/hyper
- https://www.lexico.com/definition/hyperactive
- 대표적으로, (ADHD와 관련하여) “hyperactivity”를 “과잉행동”으로 번역하는 것을 그 예로 볼 수 있다.
- ‘과잉의’를 그 의미로 갖는 “excess”의 원형이 ‘~는 …보다 과하다.’를 형식으로 갖는 이항 술어 “exceed”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이를테면, “Break”의 2분대에서 Jamie에게 전화를 걸어 자동응답기에 메시지를 남기는 연출을 하는 부분.
- 물론 스포큰워드를 음악의 한 갈래로 간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겠으나, 이 글에서는 음악의 한 갈래로 간주할 것이다.
- 사실, 이 문장에 완벽히 적합한 술어를 떠올리지 못했다. 어떤 대상이 갖는 특정한 질적 요소를 갖는 양태가 다른 대상의 양태보다 더 풍부하다거나 심층적이라는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으나 모두 완벽하게 적절한 것 같지는 않다.
- 즉, ‘R: 255, G: 0, B:0’이라는 RGB값에 더 가까운 값을 갖는 경우.
-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후술하는 (좁은 의미에서) 장르로서의 팝보다 상대적으로 규정하기 쉬워 보인다는 의미이지, 정말로 이 작업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 작업에는 ‘대중’이라는 모호한 단위를 어떻게 명료화할 것인지를 정하는 일이 선제되어야 할 텐데, 이 또한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 이때,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구분을,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디지털 시계와 아날로그 시계의 차이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 Dretske, F., “Sensation and perception (1981)”. In Jonathan Dancy (ed.), Essays on Nonconceptual Content. Cambridge MA: Bradford Book/MIT Press., p. 25p
- 이때, 드레츠키의 신호 개념은 우리에게 감각 자료를 전달하는 사건이나 구조나 상태 등을 포괄한다.
- 대표적으로는 뇌의 물리적 한계가 있을 것이다.
- Dretske, F., op. cit., p. 31.
- 비평가 윤아랑은, 이에 관하여 해당 음악들에 있어서 가장 적확한 표찰은 ‘하이퍼팝’이 아니라 ‘하이퍼틱 팝’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해주었다. 그의 요지는, “이러한 주장이 함축하는 바는 결국 100 gecs나 KKB와 같은 음악가가 들려주는 음악이 문자 그대로 무언가의 과잉인 팝이 아니라 과잉을 재현하고 과잉의 느낌을 연출할 뿐이라는 것이기에, ‘과잉의 팝’이 아니라 ‘과잉적 팝’에 해당하는 표찰로 명칭을 수정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나 또한 이 지적에 매우 찬동한다. 다만, 1) 영어에서의 “-tic”과 한국어에서의 “-적”이라는 표현이 완벽하게 대응되는 표현인지 확신할 수 없고, 2) 한국어에서의 “-적”이라는 표현이 지나치게 남발되는 경향이 있으며, 3) 영어표현 “hyper-“가 이미 그 자체로 접두어이면서 형용사로 쓰이기에, 명사에 덧붙어 그 활용을 형용사로 만드는 “-tic”이 다시 붙는 게 어색해 보이며, 4) 마지막으로 영미권 음악 커뮤니티의 관습을 어느 정도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이 글에서는 하이퍼팝이라는 표찰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그러나 윤아랑이 지적한 지점은 유의미하며, 이러한 표현 수정에 대한 고려도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지적해준 윤아랑에게 감사를 표한다. - 칩멍크(Chipmunk) 효과 혹은 칩멍크 샘플링라고도 부르는 듯하다.
- 비평가 나원영이 이를 지적해주었다. 또한 비평가 정구원도 이와 유사한 물음을 제기해주었다. 두 비평가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 관련해서는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의 “Sortals”을 참고하라.
- 나원영, “’하이퍼 케이팝’에 대한 미완성 일대기”, 2020.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