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한 근거에 의해 상반된 두 명제가 동시에 성립하는 사태’ 정도로 이율배반을 규정한다면, 노이즈 음악은 명백히 이율배반적인 것 같다. 일반적으로 음악에서 노이즈란 배제되어야 하고 또 소거되어야 하는 비-음악적 소리인데, 이러한 노이즈를 주재료로 삼는 음악이 바로 노이즈 음악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노이즈 음악은 “비-음악적 소리로 구성된 음악”이라는 다분히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는 기술구1를 그 정의로 갖기에, 매우 역설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노이즈의 역설’은 역설일까? 노이즈는 분명 그 특유의 불온한 질감으로 인해 어딘가 기이하고 묘한 인상을 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이즈 자체를 역설적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특히, 노이즈 음악에서의 노이즈가 청자에게 주는 매력이나 가치의 근원을 오롯이 그 역설적인 존재론적 지위에서만 찾는 것은 의문을 품게끔 만든다. 이러한 불만과 의구심을 원동력 삼아, 이 글은 ‘노이즈의 역설’을 사이비 역설(pseudo-paradox)로 규정하고, 노이즈를 둘러싼 담론들이 강조하는 역설이 사실은 역설이 아니라고 논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담론을 제시하던 이들이 노이즈의 역설에 의존하여 설명하고자 했던 노이즈의 가치나 매력을 다른 방식으로 규명해보고자 한다. 이에 따라, 이 글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전개될 것이다. 첫째로, 이 글은 노이즈 음악에서의 노이즈에 관한 역설을 제기하는 이들의 논의를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둘째로, 위와 같은 논증을 토대로 노이즈를 역설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그러한 역설로부터 노이즈 음악이 갖는 고유한2 힘의 근원을 엿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입장이 ‘존재-당위 문제(Is-Ought problem)’에 빠진 것임을 지적해볼 것이다. 이로부터 ‘노이즈의 역설’이 사실은 사이비 역설에 불과함을 주장할 것이다. 셋째로, 이 글은 ‘노이즈의 역설’이 사이비 역설이라고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노이즈의 역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노이즈 음악에 부여하는 특별한 가치 혹은 힘을 긍정할 수 있는 다른 담론적 방식을 모색해볼 것이다. 1. 노이즈의 역설 노이즈 음악에서의 노이즈를 역설적인 것으로 규정하려는 담론적 시도들은 음악 비평과 음악학 내에서 오늘날 꽤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음악평론가 조지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3 (…) 노이즈가 노모스가 되어버렸다는 역설적인 진술은 곧장 하나의 물음을 제기한다. 노이즈가 표준적인 소리가 되었을 때, 노이즈는 더 이상 노이즈이기를 그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달리 적자면, 표준적인 소리가 노이즈일 수 있을까? 하나의 표준에 부합한다면, 그 표준에 따라 만들어졌다면, 그 표준이 제시하는 조건들을 만족했다면, 그것은 노이즈인가? (…) 왜냐하면 노이즈는 오직 거부당했다는 술어를 통해서만 정의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 만약 음악이 소리들의 조직화라면, [노이즈는] 반-음악적 소리로서만 들린다는 것이며, 오직 규범이 허락하지 않은 것으로서만, 표준에서 이탈한 것으로서 들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이즈에 대한 하나의 오래된 규정이다. (하지만 결코 유일한 규정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규정은 노이즈의 조건들을 설정하도록 이끈다. 준비되었다면 노이즈가 아니고, 선별되었다면 노이즈가 아니고, 예상할 수 있다면 노이즈가 아니다. 노이즈는 일종의 부정신학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이르건대 노이즈는 음악적 규범들이 요구하는 자격을 갖춘 소리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음악적 소리’로서의 자격을 갖춘 소리는 노이즈가 될 수 없다고 쓰는 것은, 거꾸로 노이즈의 자격이 무엇인지를 쓰는 일이다. 노이즈의 자격을 따진다는 것은 이미 스스로 역설적이고, 그렇기에 또 다른 물음들이 제기된다. 노이즈의 자격을 결정하는 것은 가능한가? 자격 없는 소리로서의 자격을 갖춘 소리들만을 노이즈라고 이르겠다면, 자격이 없어야 한다는 자격을 갖췄을 때 노이즈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노이즈가 노이즈로서의 자격을 갖춘다면, 그것은 하나의 자격을 만족시킨 셈이므로, 노이즈들의 고유한 영역에서 탈락하고야 말 것인가? 그리하여 노이즈는 노이즈가 되자마자 또다시 노이즈이기를 그치게 될 것인가? 그리고, 자격을 갖췄다는 바로 그 이유로 노이즈로서의 자격을 잃었을 때, 또다시 역설적이게도, 쫓겨난 노이즈는 자격을 박탈당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다시 노이즈가 될 것인가? 자격 박탈로서의 자격 충족, 그리고 다시 자격 충족으로서의 자격 박탈, 또 다시 자격 박탈로서의 자격 충족……. 노이즈는 이 역설에서 저 역설로, 다시 저 역설에서 이 역설로 옮겨 다닌다. 노이즈를 다루는 활동들이 수행되는 한에서, 그리고 그 활동들이 하나의 무리 또는 여러 무리를 이루는 한에서, 반-표준화와 표준화 사이를 오가는 노이즈의 동요는 멎을 수 없을 것이다. 노이즈 음악이란, 노이즈가 그 둘 사이를 순회하며 그리는 궤적에 둘러싸인 영역의 이름이다. 결국 노이즈는 단일한 규정에 고정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노이즈 음악에서의 노이즈가 함축하는 역설에 관한 조지환의 논변은 멀게는 리오타르와 같은 철학자의 이론을 그 배경으로 삼고, 가깝게는 김경화와 같은 음악학자의 논의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김경화는 「노이즈의 역설: 유토피아적 실현인가? 디스토피아적 상상인가?」 (2017)4에서 노이즈가 내포하는 역설을 분석하고, 그러한 역설로부터 노이즈의 가치를 탐구하고자 한다. 김경화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우리 귀를 괴롭히는 소리로 여겨졌던 소음이 음악 안에 아름답게 녹아 들었다면 그것을 여전히 소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소리의 형식이나 구조, 그리고 음악 시스템 안에서 ‘노이즈가 노이즈로서 지속될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김경화 150)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소리를 노이즈로 듣는다면 그 소리는 우리의 인식 틀 밖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귀에 거슬리는 소음으로 여겨진다. 반면 그 노이즈가 귀에 전혀 거슬리지 않고 심지어 아름답거나 매력적으로 들리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질서 안으로 조화롭게 녹아들어 더 이상 소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소음은 매력적일 수도, 여전히 위협적일 수도 있다. 따라서 소음을 하나의 고정된 개념으로 정의하거나 단정지어 논하기는 어렵다. (김경화 151) 노이즈는 청각적으로 ‘불쾌감’을 주거나 ‘공격적인’ 소리이다. 정도가 심하면 청각에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이즈가 음악 안에서 컨트롤될 때 이러한 폭력성이나 부정적 잠재성은 사라진다. 시스템 안으로 조직 되어 들어온 노이즈는 오히려 음악 질서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운드 요소로 녹아든다. 이때 노이즈는 더 이상 불쾌하거나 폭력적이지 않은 매력적일수 있는 사운드로 길들여진다. 그러나 한편 노이즈는 여전히 폭력과 위협의 기제로 작동하면서 구조 안으로 통합되기를 거부한다. 과도하게 증폭된 볼륨이나 거칠고 극단적인 노이즈를 추구하는 음악은 우리에게 더욱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음악 안에서 노이즈의 정체성은 언제나 고정적이지 않다. (김경화 152) 결국 위와 같은 담론적 시도들이 공통으로 주장하는 바는 ‘노이즈는 비-음악적 소리를 지칭하는데, 그러한 노이즈를 주된 재료로 사용한 노이즈 음악은 비-음악적 소리의 음악이기에 역설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노이즈의 역설’을 정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1. 노이즈는 비-음악적 소리이다. 전제 2. 노이즈 음악은 노이즈로 구성된 음악이다. 동어 반복, 분석적 명제 3. 노이즈 음악은 ‘비-음악적 소리’(=노이즈)로 구성된 음악이다. 1과 2를 토대로 한 환언 4. 노이즈 음악에서 [노이즈는 노이즈 음악을 구성하는 재료이므로] 노이즈는 음악적 소리이다. 2 & 3(2와 3의 연언을 토대로 한 도출) 5. 노이즈 음악에서 노이즈는 비-음악적 소리이면서 음악적 소리이다. 1 & 4(1과 4의 연언을 토대로 한 도출) 6. ∴ 노이즈 음악에서 노이즈는 모순적이다. 5에 의한 결론 2. ‘노이즈의 역설’이라는 사이비 역설 이 글에서 문제 삼고자 하는 지점은 ‘노이즈의 역설’의 대전제이다. 정말로 “노이즈는 비-음악적 소리”인가? 우선, 나는 이 대전제가 참이 아닐 수 있기에, 즉, 노이즈는 비-음악적 소리가 아닐 수도 있기에 혹은 노이즈는 음악적 소리일 수 있기에 ‘노이즈의 역설’은 타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논하고자 한다. 먼저, 위 논증의 대전제를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노이즈의 역설’의 대전제에는 양화사5가 생략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생략된 양화사를 고려한다면, “노이즈는 비-음악적 소리이다.”라는 문장은 사실 “모든 노이즈는 비-음악적 소리이다.”라는 전칭 긍정 명제6가 축약된 문장인 듯하다. 귀추법7을 통해 현재 설정된 대전제를 검토해보기 위해, ‘노이즈의 역설’의 대전제가 “모든 노이즈는 비-음악적 소리이다.”가 아니라 “어떤 노이즈는 비-음악적 소리이다.”라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이 역설의 전제는 노이즈라는 유형(혹은 범주, 장르 등)에 속하는 수많은 개별항 중 특정한 몇몇만이 비-음악적 소리와 동일하다는 것을 함축한다. 따라서, 역설의 결론인 “노이즈 음악에서 노이즈는 모순적이다.”라는 명제는 필연적인 것이 아닌 우연적인 것이 된다. 즉, 역설의 결론은 “노이즈 음악에서 어떤 노이즈는 모순적이다.”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론으로는 ‘노이즈 음악에서 어떤 노이즈는 비-모순적이다.’라는 명제가 참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노이즈 음악 속 어떤 노이즈는 모순적이더라도, 얼마든지 노이즈 음악에서 (다른 어떤) 노이즈는 비-모순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역설이 함축하는 바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저 우연성에 대한 언급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 역설은 아주 사소한 논의로 전락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만약 ‘노이즈의 역설’을 주창하는 이들이 의존하고 있는 대전제가 그저 “어떤 노이즈는 비-음악적 소리이다.”에 불과하다면, 이 역설은 아주 시시한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다. 예컨대, “어떤 사과는 맛있다.”라는 명제를 떠올려보라. 이 명제는 세상의 수많은 사과들 중에서 몇몇 사과가 맛있다는 것이 참임을 의미하지만8, 동시에 그 외의 다른 사과들은 맛없다는 것을 함축할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우연적 명제가 그리 중요한 정보값을 갖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명 어떤 사과는 맛있을 수도 있지만 어떤 사과는 맛없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은 키가 크지만 어떤 사람은 키가 작을 수도 있다. 이러한 문장들은 분명 참이긴 하지만, 대체로 우리에게 중요한 의의를 주진 못한다. 그러므로 ‘노이즈의 역설’이 고작 이 정도의 이야기라면, 노이즈의 역설을 토대로 정당화되는 노이즈의 역설적인 힘이나 가치는 사실 매우 당연하고 사소한 것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노이즈의 역설’이 앞서 살펴본 것처럼 “어떤 노이즈는 비-음악적 소리이다.”를 대전제로 삼고 있는 것이라면, 이 역설은 더 이상 역설이 아니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이 역설의 대전제가 “어떤 노이즈는 비-음악적 소리이다.”라면, “5. 노이즈 음악에서 노이즈는 비-음악적 소리이면서 음악적 소리이다.” 또한 그 진리값이 항상 참일 수는 없을 것이다. 즉, 이 역설의 대전제가 “어떤 노이즈는 비-음악적 소리이다.”라면, “노이즈 음악에서 노이즈는 비-음악적 소리이면서 음악적 소리이다.”라는 명제가 거짓인 경우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노이즈는 음악적 소리일 수도 있는데, 우연히 음악적 소리와 동일한 개별항들만 모여서 노이즈 음악을 구성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음악적 소리로서의 노이즈(들)만으로 구성된 노이즈 음악에서는 결국 노이즈는 음악적 소리이기만 할 것이다. 이 경우, 노이즈 음악에서 노이즈는 모순적이지 않고, 그러므로 이 역설은 더 이상 역설이 아니라 우연적인 특정 사태를 일반화하고자 하는 하나의 주장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역설은 전제로부터 결론으로 나아가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에, 상정했던 대전제가 하나의 주장이라면 이 역설은 주장으로부터 또 다른 주장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노이즈의 역설’은 노이즈가 ‘비-음악적 소리’라는 대상과 전적으로 동일하다는 단언을 대전제로 삼고 있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정말로 노이즈가 비-음악적 소리라는 대상과 전적으로 동일하려면, 앞에서 언급했듯 노이즈라는 유형에 해당하는 모든 개별항이 비-음악적 소리여야만 한다. 하지만 이는 명백히 거짓이다. 우리는 실제로 노이즈 음악에서의 노이즈라는 대상의 실재를 마주하기 때문이다. 노이즈 음악 속에서 노이즈는 분명히 음악적 소리로서 존재한다. 아직 그 진리값이 검증되지 않은 “모든 노이즈는 비-음악적 소리이다.”라는 전제는 뒤로한 채, 우리에게 주어진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어 본다면, 우리는 노이즈가 적어도 특정한 음악(=노이즈 음악)에서는 그것을 구성하는 주재료로써 활용되고 있는 사태를 목도한다. 즉, 노이즈 음악에서 노이즈는 음악적 소리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경험적 참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노이즈는 비-음악적 소리이다.”라는 전칭 명제는 참이 아니라 거짓이다. 왜냐하면, 노이즈가 음악적 소리로서 존재하는 경우가 적어도 하나 이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노이즈가 역설적이라고 주장하는 ‘노이즈의 역설’ 그 자체야말로 모순에 빠지고야 만다. 이 지점에서 ‘노이즈의 역설’을 옹호하고자 하는 어떤 사람은 음악적 소리로 기능하는 ‘노이즈 음악에서의 노이즈’의 실재를 근거 삼기에 앞서, 앞서 살펴본 대전제처럼 노이즈 그 자체에 대한 규정이 선제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반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노이즈 그 자체를 비-음악적 소리라고 확정적으로 정의한 다음에서야, ‘노이즈 음악에서의 노이즈’에 대해서 따져볼 수 있게 된다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를 따지는 것과 유사해 보인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 딜레마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게다가, 오히려 이는 ‘노이즈의 역설’을 더 비참하게 만든다. 딜레마의 두 극단 중 ‘노이즈 그 자체’에 대한 규정을 무조건적으로 우선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이즈 음악에서의 노이즈가 음악적 소리로서 실재한다는 사실은 ‘노이즈 그 자체의 규정이 선제된다.’라는 딜레마의 한쪽 극단을 선택한 이들의 선택이 타당하지 않음을 여실히 증명할 뿐이기 때문이다. 3. 노이즈의 역설과 존재-당위 문제 이로부터 우리는 ‘노이즈의 역설’이 상정하고 있는 대전제가 단순한 존재 진술 문장이 아님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앞서 살펴보았듯, 이 역설이 상정하고 있는 전제는 그것이 전칭 긍정이든 특칭 긍정이든 존재 명제로서는 타당하지 않거나 역설을 사소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노이즈의 역설’이 사실상 전제로 삼고 있는 것은 일종의 당위 명제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노이즈의 역설’은 그 대전제를 “[모든/어떤] 노이즈는 비-음악적 소리이다(be).”라고 쓰고 있지만, 사실상 ‘(모든) 노이즈는 비-음악적 소리여야만 한다(ought to).’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노이즈의 역설’이 대전제로 삼고 있는 문장은 아주 기본적인 노이즈의 정의에 대한 기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위장된 당위 문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이즈의 역설’은 노이즈에 관한 존재 진술을 전제 삼아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노이즈에 관한 당위 진술을 그저 ‘주장’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그러한 주장을 출발점 삼아 전개되는 구조의 역설 전체가 무너지게 된다. 바로 여기서 ‘노이즈의 역설’이 범하고 있는 최대의 오류가 발견된다. 나는 노이즈의 역설이 간접적으로 주장하고 있던 이 당위 명제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지적하고자 한다. 모든 당위 명제는 단순히 존재 명제로부터 도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 무언가가 존재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무언가가 (정말로) 존재한다고 진술하는 것 사이에는 매우 큰 간극이 있다. 사실, 이는 흄(David Hume)이 명시적으로 가장 먼저 지적한 사항이다. 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9 이제까지 접해본 모든 도덕 체계에서 언제나 그 체계의 저자가 얼마동안 일상적인 추론 방식으로 진행하다가 신의 존재를 확립하거나 인간사에 대한 어떤 소견을 말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명제의 통상적인 계사인 “~이다(is)”와 “~이 아니다(is not)” 대신에, “~이어야 한다(ought to)나 “~이어서는 안된다(ought not to)”와 연결되지 않는 명제를 하나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 “~이어야 한다”나 “~이어서는 안된다”는 새로운 관계 혹은 주장을 표현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인지되거나 설명되어야 한다. 동시에 그러한 새로운 관계가 어떻게 그와는[당위를 표현하는 계사와는] 전혀 판이한 것으로부터의 연역일 수 있는지 도무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대하여 어떤 이유가 제시되어야 한다. 즉, 윤리적 규범처럼 ‘인간은 ~해야만 한다.’의 형식으로 된 당위 명제는 어떤 대상이나 가치의 실재 여부를 기술할 뿐인 존재 명제로부터 도출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10 다시 ‘노이즈의 역설’로 돌아와 보자. 분명 어떤 노이즈는 비-음악적 소리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노이즈가 비-음악적 소리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음악적 소리로서의 노이즈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이즈 음악에서의 노이즈’라는 너무나 강력한 반례가 존재한다. 노이즈 음악에서의 노이즈는 명백히 음악적 소리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노이즈 음악에서, 노이즈는 비-노이즈 음악에서 음이 수행하는 기능을 대부분 수행한다. 불규칙한 소리들은 지속적으로 제시되면서 마치 선율처럼 일종의 움직임을 재현하거나 일종의 리듬을 형성하는 등 음악을 구성하는 주된 단위인 음과 유사하게 쓰인다. 물론, 노이즈가 음과 완전히 동일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이즈 음악 내에서 노이즈의 기능 혹은 존재론적 지위는 적어도 ‘음악적 소리’라고 간주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노이즈의 역설’의 대전제가 당위 명제로 수정된다고 하더라도 역설의 결론까지 타당하게 도달할 수 없기에, 이 역설의 결론은 성립할 수 없다 요컨대, ‘노이즈의 역설’은 대전제로 삼고 있는 명제가 야기하는 문제로 인해, ‘말이 안되는’ 역설이 된다. 즉, ‘“노이즈의 역설”이라는 이름의 역설’이 되는 것이다.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노이즈의 역설’은 역설이 제기하는 결론(’노이즈는 모순적이다.’)이 정합적으로 제시될 수 없으므로, 그것은 역설로서 성립할 수 없다는 자기-역설에 빠진다. 다시 말해, ‘노이즈의 역설’은 사이비 역설에 불과하다. 4. 노이즈에 관한 대안적 설명: 고정불가능성 그렇다면 ‘노이즈의 역설’이 노이즈를 존재론적으로 모순적인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해명해보고자 했던, 노이즈의 고유한 힘은 아예 성립하지 않는 것일까? 노이즈의 역설은 성립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무언가 특별한 이유에서 노이즈는 역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분명, 노이즈에게는 보편적으로 음악에 활용되는 악기들의 소리와 같은 일반적인 음악적 소리와는 구분되지만, 그 나름대로 음악적 소리로서 기능하기에 고유하게 산출하는 매력이나 가치가 존재하는 듯하다. ‘노이즈의 역설’은 노이즈의 이러한 매력이나 가치를 잘 설명해보려는 나름의 시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 이 시도는 실패했기에, 우리는 이제 다른 방식의 설명을 찾아야만 한다. 따라서, 나는 노이즈의 ‘역설적임’에 의존하여 노이즈의 고유한 매력 혹은 가치를 설명하는 방식이 아닌, 대안적 설명을 수립해보고자 한다. 다시 말해, 노이즈는 ‘음악적 소리이면서 동시에 비-음악적 소리인 대상은 모순이기에 실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해, 그 어떤 것도 지시할 수 없거나 표상할 수 없어서 역설’적’인 대상이 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노이즈 음악에서의 노이즈는 너무 많은 것들을 표상하거나 지시할 수 있기 때문에 고정불가능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정불가능성으로 인해 큰 잠재성을 갖는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노이즈 음악에서의 노이즈는 수많은 것들을 표상할 수 있다. 우리는 노이즈 음악을 들으며 수많은 소리들을 떠올린다. 예컨대, 지글거리는 양태의 노이즈는 공사장의 용접기나 절단기의 소리, 손톱으로 분필 긁는 소리, 바이닐과 같은 물리적 매체가 재생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크랙클 소리 등과 같은 복수의 개별 소리들과 동일시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쉬익거리는 듯한 노이즈는 바람 소리와 같은 자연의 소리는 물론이고, 버스나 기차처럼 운동하는 물체의 움직임에 따라 발생한 공기 흐름의 소리와 같은 인위적인 소리까지, 소리의 발생적 원인의 유형과 상관없이 어떠한 소리를 표상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처럼 노이즈 음악에서의 노이즈 그 자체는 분명 명확한 하나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수많은 대상들로부터 발생하는 다양한 소리들 모두를 재현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역으로 말하자면, 다양한 사물들로부터 발생한 제각기 다른 소리들이 모두 노이즈 음악에서의 (어떤) 노이즈를 단일하게 예화해낼 수도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11 그런데 문제는 노이즈 음악에서의 노이즈가 수많은 다른 소리들을 표상하고, 또 수많은 다른 소리들이 노이즈 음악에서의 노이즈를 복수실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이즈 음악에서의 노이즈라는 대상 그 자체는 완전히 고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노이즈 음악에서의 노이즈가 표상하는 대상을 쉽게 고정할 수 없다. 노이즈를 ‘X에 관한 소리’의 일종으로 간주한다면, 변항 X의 자리에 대입될 수 있는 대상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노이즈를 개별 대상으로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이즈 음악에서의 노이즈는 늘 ‘~에 관한 소리’와 같은 형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 요컨대, 노이즈 음악에서의 노이즈는 표상으로서의 고정불가능성을 갖는다. 이로 인해, 노이즈 음악에서의 노이즈는 오직 ‘노이즈 그 자체’로만 다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또한 실패한다. 노이즈 음악에서의 노이즈를 항상 ‘노이즈 그 자체’로 다루더라도, 우리는 노이즈의 또 다른 고정불가능성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이즈를 단일한 대상으로서도 명확히 고정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소리(들)을 듣고 그것을 “노이즈”라고 부를 때, 어디까지가 ‘노이즈’라는 단일한 단위(혹은 범주, 이름…)로 묶일 수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음”이라고 부르는 대상과는 달리, “노이즈”라고 부르는 대상은 그 분절을 확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노이즈는 특정한 형태의 파동의 반복이 아니라 불규칙하고 가변적인 파형(들)의 연속이기에, 그 연속된 파형 중 어디까지를 “노이즈”라고 부를 수 있는지를 단언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예컨대, 어떤 음악에서 1초부터 10초까지의 구간에서 불규칙한 형태의 파동이 지속되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1초부터 10초까지 제시되는 것을 단일한 ‘노이즈’라고 간주해야만 할까? 아니면 1초부터 2초까지의 ‘노이즈1’, 2초부터 3초까지의 ‘노이즈2’, 3초부터 4초까지의 ‘노이즈3’ … 가 인접하여 연속적으로 제시되는 것이라고 간주해야만 할까?12 또한, 1초부터 10초까지는 불규칙한 형태의 파동이 지속되는데, 곧바로 11초부터 20초까지는 규칙적인 형태의 파동이 이어 나오는 음악을 상정해보자. 이 경우, 우리는 1초부터 10초까지는 ‘노이즈’이지만 11초부터 20초까지는 ‘음’이 제시되었다고 해야만 할까? 혹은 1초부터 20초까지 제시되는 총체가 전적으로 ‘노이즈’라고 간주해야만 할까? 이처럼 우리는 ‘노이즈’라는 대상을 어디까지 혹은 어떻게 분할하고 범주화할 수 있는지를 단언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노이즈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언표되거나 사고될 수밖에 없다. 보다 구체적으로, 노이즈는 지표사적인 방식이나 지시사적인 방식으로 언표되거나 사고될 뿐이다.13 이를테면, 청자는 노이즈 음악을 들으며 “지금 들리는 소리”나 “방금 들었던 소리”와 같이 지표사 “지금”이나 “방금”과 같은 시간과 관련된 지표사를 사용하여 자신이 들은 노이즈를 언급하고자 할 것이다. 혹은, 청자는 음악의 시간적 진행을 선형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공간과 관련된 지표사인 “여기”를 사용하여 “(특정 시점을 가리키며) 여기에서 들렸던 소리”와 같은 식으로 노이즈를 언표할 수도 있다. 또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어떤 노이즈 음악 X에서의 노이즈를 “X의 1분 20초에서 제시되는 소리”와 같이 구체적인 ‘시점 t’라는 색인을 활용하여 언급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이 소리”나 “저 소리”와 같이 “이것” 혹은 “저것” 등의 지시사를 변용하여 노이즈를 지시할 수도 있다. 그 외에도 노이즈를 언표하고 사고하기 위해 동원될 수 있는 수많은 방식들이 존재하겠지만, 그 또한 어디까지나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식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노이즈를 언표하거나 사고하기 위한 간접적인 방식들은 언제나 사실상 무한하게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노이즈가 표상하는 바를 고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노이즈 그 자체라는 단일한 대상을 분절하여 고정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는 무엇을 “노이즈”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인가? 흥미롭게도, 백남준-위너14는 노이즈의 특징으로 위와 같은 고정불가능성과 유사한 지점을 제시한다. 백남준은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와 사회』에서 메시지와 정보의 관계에 대해 논하는 대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15 1940년대 노버트 위너는 정보화된 시청각 시대의 도래를 예견하는 글에서 (…) 규정했다. “사실, 본질적으로 엔트로피의 부정이며, 확률의 부정 지수인 메시지에 담긴 정보를 해독하는 것은 가능하다. 다시 말해, 메시지의 개연성이 높을수록 그 안에 포함된 정보량은 적다. 예를 들어, 상투적인 표현은 위대한 시보다 덜 정확하다.” 이어 위너는 흥미 있는 가설을 계속 얘기한다. 즉, 백색소음이나 무작위적 구조는 최대한의 정보는 포함한다는 것이다. (백남준 234-235) 위너에 따르면 “메시지는 그 자체가 모델과 질서의 한 형식이다. 사실 일련의 메시지는 일련의 외부세계 상태와 마찬가지로 엔트로피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엔트로피를 통해 무질서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것처럼, 일련의 메시지에 포함된 정보를 통해 질서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 즉, 메시지에 포함된 정보를 그 엔트로피의 부정지수 그리고 확률성의 부정 로그로 간주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메시지의 가능성이 클수록 그 안에 포함된 정보량은 적다. 예를 들어, 판에 박힌 표현은 위대한 시 작품들보다 정보량이 적다.” 백색소음은 최대치의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백남준 266) 즉, 백남준-위너가 보기에, 일견 노이즈는 정보값이 전혀 없는 대상이지만, 사실 노이즈는 아주 많은 정보값을 갖는다. 노이즈는 아무 것도 표상하지 못하기에 어떠한 메시지도 지니지 못한 소리처럼 오해하기 쉽지만, 오히려 노이즈는 그렇기 때문에 너무 많은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너무 많은 것들로 환원될 수 있어서 고정불가능한 “노이즈”는 그저 플레이스홀더, 혹은 빈 이름이 아닐까? 그리고 노이즈가 무언가를 마땅히 대표하는 이름이 아니라 가주어처럼 그저 임의의 대상들을 호명하기 위한 편의적 장치라면, 우리는 역으로 그 무엇이든 “노이즈”라고 불러볼 수 있는 가능성을 마주하게 된다. 이로부터 노이즈의 고정불가능성은 노이즈의 잠재성으로 전환된다. 즉, 노이즈는 일종의 열린 집합이 됨으로써 무한한 잠재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마땅히 표상될 수 있는 대상이 부재한다거나 지칭 대상을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무엇으로든 표상될 수 있고 또 무엇이든 지칭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노이즈의 고유한 힘과 매력이 노이즈에 관한 존재론적 논의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노이즈의 이러한 고정불가능성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16 결국, 노이즈가 마주하는 역설은 음악적 소리이면서 비-음악적 소리인 대상으로서의 존재론적 모순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이 될 수 있기에 오히려 그 어떠한 것도 될 수 없는 고정불가능성이 아닐까? 달리 말해, 노이즈는 그 자체로 역설인 존재가 아니라 고정불가능해서 역설을 연상시키는(혹은 역설적임을 재현하는) 대상인 것은 아닐까? 따라서, 노이즈에 관한 탐구는 ‘노이즈의 역설’이라는 사이비 역설이 아니라, 노이즈의 고정불가능성이라는 다른 참조점으로부터, 새로이 시작되어야만 한다. | 전대한 jeondaehan@naver.com 기술구(description)는 어떤 대상을 지칭하거나 설명하기 위한 언어 표현을 뜻한다. 예컨대, 고유명사와 같이 특정 대상을 부르기 위한 이름은 기술구가 아니며, 주로 문장에서 특정 대상을 설명하기 위해 쓰이는 술부 전반을 가리킨다.이때, “고유한”은 “신비로운”, “해방적인”, “초월적인” 등과 같은 온갖 그럴싸한 수식어로 대체되어도 무관할 것이다.조지환. 「장희진, 『Dream Signal』」. 온음. 2020. 10. 12. (2022. 10. 06. 접속)김경화. 「노이즈의 역설: 유토피아적 실현인가? 디스토피아적 상상인가?」. 음악논단 38집. 2017. pp. 149 – 179.양화사(Quantifier)란 1차 술어논리에서 특정한 술어를 만족하는 대상이 얼마나 존재하는지를 표현하기 위해 쓰이는 논리학 개념이다. 일상적으로는 한국어 표현에서의 “어떤”과 “모든”이 각각 존재양화사와 보편양화사에 상응한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양화사는 대상 그 자체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상에 관해 서술하는 술어도 아니지만, 대상에 관한 개념이기에 논리학과 언어철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혹은 “모든 노이즈는 음악적 소리가 아니다.”라는 전칭 부정 문장이 축약된 문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편의상 전칭 긍정 문장의 형식으로만 논하겠다.귀추법(Abductive Reasoning)이란 연역과 귀납에 더불어, 추론의 방법 중 하나이다. 어떤 결론 B가 사실인 경우를 상정해보자. 우리는 사실인 바로 그 결론 B를 합리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가설을 찾기 위해 추론 과정을 수행한다. 이때 연역이나 귀납과 달리, 결론 B로부터 출발하여 가능한 여러 가설들 중 그 결론을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가설 A를 찾아 선택하는 것이 귀추법의 과정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귀추법은 “최선의 설명을 위한 추론(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본고에서는 “노이즈는 비-음악적 소리이다.”라는 전제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보기 위해, 해당 문장에서 생략된 양화사가 무엇인지를 여러 경우로 나누어 분석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귀추법을 수행하고 있다.적어도 하나 이상의 사과가 맛있다는 것이 참임을 의미한다.Hume, David. Treaties of Human Nature, Book Ⅲ: Of Morals. 1738. pp. 469-470. (김광태. 「존재-당위(IS-OUGHT) 논쟁과 도덕에 대한 정의 – 피터 싱어(Peter Singer)의 메타 윤리학을 중심으로」. 윤리교육연구. 2011. p. 145에서 재인용)물론, 맥킨타이어와 같이 흄의 논의가 ‘당위 명제는 존재 명제로부터 결코 도출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존재 명제로부터 당위 명제를 도출하는 식으로 논증을 구성할 경우 합리적인 정당화 근거와 그 근거를 토대로 한 정당화 과정을 제시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재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흄의 논의를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간에, 존재 진술로부터 당위 진술을 별다른 검증 없이 도출해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MacIntyre, A. C. “Hume on ‘Is’ and ‘Ought.’” The Philosophical Review, vol. 68, no. 4, 1959, pp. 451–68.)이는 단일한 심적 상태의 복수실현가능성 논제와 유사하다. 심적 상태의 복수실현가능성 논제는 “동일한 심적 상태가 하나 이상의 물리적 기반에 의해 실현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논제이다. (한우진. 「복수 실현 가능성과 환원」. 철학적 분석. 2011. p. 109.) 이러한 복수실현가능성 논제에 따라, 우리는 노이즈라는 하나의 대상이 둘 이상의 다른 소리들에 의해 동일하게 실현될 수 있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논의의 편의를 위해, 소리의 최소 지속 시간이 1초라고 해보자.카플란(David Kaplan)과 같은 철학자는 지표사와 지시사를 구분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와 같은 엄밀한 구분까지 하지는 않을 것이다.보다 정확하게는 ‘백남준이 이해한 노버트 위너’일 것이다. 나는 이를 줄여서 “백남준-위너”라고 부르겠다.백남준,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혹은 “나를 우주를 받아들인다.”」(1972)와 「노버트 위너와 마셜 매클루언」(1974). 에디트 데커, 이르멜린 리비어 편,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임왕준, 김문영 역, (백남준아트센터, 2010)에 수록됨.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점에서, 내가 이 글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소음을 “하나의 고정된 개념으로 정의하거나 단정”할 수 없다는 김경화의 논의와 동일한 결론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Leave a Reply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CommentName* Email* Website 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