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일종의 DLC이다. 나는 2020 서교예술실험센터 공동운영단 기획사업인 《아고라: 서교크리틱스》 워크숍의 결과물로, 분명 동일한 음악을 지칭하는 것만 같은데도 매우 다른 두 이름처럼 여겨지는 콘셉트로니카(C)와 디컨스트럭티드 클럽(D) 사이를 어떻게 이어내야 할지를 고민한 「C와 D 사이에서」라는 글을 내어 놓았다. 「C와 D 사이에서」의 말미에서부터 나는 “많은 사람들이 장르를 종종 명료한 음악적 특질과 같은 고정된 본질에 의존하는 종(kind)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고 지적하며 이에 관한 비판적 탐구를 기약했으나, 이 글은 사실 의심만이 앙상하게 자리하고 있는 노트에 가까웠다. 이러한 의구심은 「’과잉의 감각을 재현하는’ 음악으로서의 하이퍼팝」(이하 「하이퍼팝」)에서 “하이퍼팝”이라는 표찰이 함축하는 바를 분석하는 과정에서도 지속되었으나, 해당 글에서 나는 장르를 종 개념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대신, 나는 해당 글에서 동일한 음악에 대해 경합하는 하위 장르들이 곧 해당 음악에 대한 특정한 청취 양태를 의도하기 위한 복수의 분류어(sortal)라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며 또다른 논증을 제시했다. 이 글은 앙상하게만 제시되었던 의구심과 지나치게 다른 곳으로 나아가버린 결론 사이에서, 어떠한 생각들이 존재했었는지를 간략하게 회고해보는 글이다. 너무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대중음악에서의 하위 장르 개념을 다르게 논하기 위하여 이제라도 갈무리하여 내놓는다. 동시대 대중음악, 특히 그 중에서도 동시대 전자음악1에는 엄청나게 많은 수의 하위 장르(sub-genre)가 범람하다시피 등장하고 있다. 록이나 힙합, 포크처럼 대중음악의 뼈대를 이루는 큰 줄기에 해당하는 메타 장르(meta-genre)2만이 아니라, 그러한 메타-장르로부터 무수히 많은 하위 장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파생되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1998년과 1999년에 발행된 전자음악 잡지와 전자음악 컴필레이션 앨범을 조사한 결과, 300개가 넘는 하위 장르의 이름들이 새롭게 등장했다.3 이러한 하위 장르의 무궁무진한 분화는 인터넷의 발달과 디지털 오디오 인터페이스의 보편화와 같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사실상 그 기원을 추적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게 동시다발적으로 많은 하위 장르가 고안되고 명명되고 있다. 문제는 범람하는 하위 장르들 간의 공통점이나 차이점이 명확하지 않거나 그러한 관계성이 너무 미미해서 하위 장르들 간의 세밀한 구분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몇몇 연구자들은 장르라는 개념을 마치 자연종(natural kind) 개념처럼 특정한 소리적 특질(sonic quality)을 그것의 본질적인 속성으로 갖는 개념이라고 전제한다. 그래서 대중음악에 큰 관심을 갖지 않은 일반적인 수준의 청자만이 아니라 대중음악 애호가나 비평가 혹은 연구자마저 소리적 특질에만 초점을 맞추어, 동일한 대상(=음악)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지칭하거나 역으로 서로 다른 대상을 동일한 이름으로 지칭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이러한 혼동은 비평과 연구 모두에 있어서 적지 않은 혼란을 초래한다. 우리에게 지각되는 그 음악들은 분명 모두 동일한 유형에 속하는 것만 같은데, 이를 호명하기 위한 이름들은 세 개씩이나 존재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어떤 이는 이러한 상황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다. 실제로 단일한 대상을 부르는 이름이 여럿 존재하는 사례가 꽤 많으니까 말이다. 이를테면, “개밥바라기”와 “샛별”을 떠올려보라.4 관련하여 보다 철학적으로는, 프레게의 퍼즐과 그에 대한 프레게 본인의 해결책이 함축하듯, 동일성 진술의 항들이 서로 다른 인지적 의의나 정보값을 가진다고 답할 수도 있다. 예컨대, 내가 「C와 D 사이에서」나 「하이퍼팝」에서 사례로 언급하는 단일한 음악에 대한 서로 다른 이름들은 그저 동일한 지시체(reference)를 제시하는 서로 다른 방식의 뜻(sense)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주어진 이름들을 계속해서 구분하려고 시도하는 데는, ‘사실 세 표찰이 지칭하는 대상들은 서로 다르다.’라거나 ‘세 표찰들 중 하나의 표찰만이 적절한데 많은 이들이 착각하고 있다.’와 같은 어떤 특별한 직관이 작동하고 있는 게 아닌지 계속해서 의문을 품게 된다. 이러한 의문을 나름대로 해소해보려는 방책으로서, 나는 동시대 전자음악에서 범람하는 하위 장르들이 그저 사소한 동일성 관계에 놓이는 서로 다른 뜻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청취 양태를 의도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갖는다고 주장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나는 동시대 전자음악의 하위 장르로서 발생한 특정한 하나의 음악적 조류를 주된 사례로 삼아 분석을 시도했었다(「C와 D 사이에서」). 더 나아가, 그 이름들이 동일한 지시체를 서로 다른 양태로 청취할 것을 함축하기에 정보값에서 매우 큰 차이를 가지는 분류어임을 논증하고자 했다(「하이퍼팝」). 이러한 일련의 사유 과정에는 분명 어떤 사고의 비약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하위 장르 표찰들이 동일한 지시체에 대한 청취 양태의 서로 다른 국면들을 의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필연적으로 그 표찰들을 분류어로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을 수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하위 장르 표찰들은, 「C와 D 사이에서」의 말미에서 언급했듯 장르를 ‘종’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의 논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그러한 입장을 채택하지 않고, 하위 장르가 종이 아닌 분류어로 이해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이 글에서 나는 장르를 종 개념으로(혹은 종 개념과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본질주의적인 접근을 거부하고, 하위 장르를 서로 다른 특정한 청취 양태를 의도하는 분류어로 이해해야 한다는 대안적 방식을 지지하기 위한 초석을 마련해볼 것이다. 장르를 사유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검토해보는 일부터 시작해보자. 존슨(Thomas Johnson)은 포스트-밀레니얼 시대의 대중음악 내에서의 장르 개념을 고찰하기 위해, 가장 먼저 장르 개념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 논의들을 크게 네 유형으로 분류한다.5 그리고 그러한 논의들 모두에서 도출 가능한 대전제가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존슨은 이 대전제를 포함한 장르와 범주 개념에 대한 이론을 ‘고전적 범주 이론(Classical Category Theory)’이라고 부르는데, 그에 따르면 이러한 이론은 그 범주에 속하는 대상의 본질적 요소들을 규명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의 양식을 정의 내리는 시도에 기반한다.6 존슨은 고전적 범주 이론에 기반한 전통적인 장르 개념을 활용한 동시대 음악 비평과 음악학 연구의 사례들을 열거한다. 그중 한 사례는 아트록(Art rock)이라는 하위 장르에 대한 히트데르크(David Heetderks)의 비평이다.7 존슨에 따르면, 히트데르크는 포스트-밀레니얼 시대의 아트록에서 7화음이 가장 모범적인 특질임을 언급하고 뒤이어 종종 고음의 보컬을 포함하는 흔치 않은 음색이나 여러 양식들로부터 비롯된 소리들의 조합 등이 포스트-밀레니얼 시대의 아트록의 본질적인 특징들이라고 논한다.8 유사한 사례로, 존슨은 하드코어 펑크(Hardcore punk)라는 하위-장르의 본질적 특징들로 빠른 템포의 강조와 간결한 형식, 공격적임(aggressiveness) 등을 제시하는 이즐리의 분석도 언급한다.9 즉, 존슨에 따르면 장르와 하위-장르 개념에 대한 전통적인 논의는 그 범주에 속하는 개별 사례들의 공통적인 특징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다. 이를 다르게 말하자면, 범주에 속하는 모든 개항들에게 귀속될 수 있는 본질을 토대로 장르 개념에 대한 기존의 논의가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본질은 앞서 보았듯 주로 그 개항들의 소리적 특질들로 구성된다. 그런데, 이렇게 본질적 속성을 토대로 장르 개념을 사유하고자 하는 방식은 형이상학에서 자연종(natural kind) 개념을 논할 때 제기되는 주장과 유사하다. 어떤 대상은 다양한 속성들을 갖는다. 그러나 그 속성들 전부가 동일한 지위를 갖지는 않는다. 대상의 속성들 중 특정한 어느 속성은 다른 속성들과 달리, 그 대상을 ‘바로 그’ 대상이게끔 하는 근본적인 속성처럼 생각되곤 한다. 대상의 본질에 관한 일상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될 수 있다. 어떤 대상 x가 속성 P를 그 본질로 갖는다는 것은 곧 “x가 P이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10라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x가 존재한다면 그 x는 필연적으로 P라는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물의 사례를 생각해보자. 예컨대,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생수는 무색무취의 특징을 갖는다. 반면, 수돗물의 경우 소독을 위해 함유된 염소로 인해 특유의 향이 있으며 약간 희뿌연 색을 띠곤 한다. 또 어떤 물은 다소 붉은 빛을 띠거나, 탄산을 함유하여 톡 쏘는 맛이 나기도 할 것이다. 이 모든 물(들)은 각자 다양한 색이나 향, 맛 등의 속성을 갖지만, 어찌됐건 모두 ‘물’이다. 역으로, 이는 어떤 대상이 ‘물’이게끔 하는 본질은 그것의 색이나 향, 맛과 같은 속성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 모든 물(들)은 제각기 다른 향이나 맛, 색을 갖지만 적어도 모두 공통적으로 H2O라는 분자구조를 갖기 때문에 ‘물’인 것이다. 철학자 솔 크립키(Saul Kripke)는 위와 같은 분석을 출발점 삼아, 자연종 개념에는 ‘본질’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11 크립키에 의하면, 어떤 개체의 본질은 현실세계에서 접근가능한 모든 가능세계에서 그 개체가 바로 그 개체이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다시금 물이라는 자연계 물질을 생각해보자. 물을 그 어떤 가능세계에서도 ‘물’이게끔 하는 것은, 물의 색이나 향 혹은 맛과 같은 속성이 아니다. 그러한 속성들은 각 가능세계마다 우연적일 수 있다. 반면, 물이라는 자연계 물질에 대해 접근가능한 모든 가능세계에서 필연적인 것은 물의 분자 구조인 H2O이다. 수소 분자 2개와 산소 분자 1개가 결합된 구조를 보유하고 있는 모든 개별 물질은 물이라는 자연종으로 분류가능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물뿐만이 아니라, 모든 자연종 명사가 지칭하는 자연계 물질은 미세구조(micro structure)라는 본질을 그 필요조건으로 갖는다. 위와 같은 현대 분석 형이상학에서의 본질주의에 기반한 자연종 개념에 대한 논의는 장르 개념에 대한 고전적 범주 이론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이를테면, 포크 음악을 비로소 포크 음악이게 하는 것은 ‘진정성’이라고 간주하는 입장이라거나 록 음악을 정말로 록 음악이게끔 하는 것은 ‘저항 정신’이라고 말하는 등의 케케묵었지만 여전히 흔한 사고 방식을 떠올려보라. 즉, 종 개념에 대한 본질주의적 접근과 마찬가지로, 음악 장르에 대한 고전적 범주 이론을 옹호하는 이들의 경우, 특정한 미세구조를 가졌기 때문에 어떤 개체를 ‘바로 그’ 대상이라고 하듯 특정한 음악적 속성이나 구조 등을 가졌기 때문에 어떤 음악이 ‘바로 그’ 장르에 속하는 음악이라고 간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음악의 장르에 대한 고전적 범주 이론을 종 개념에 대한 특정한 형이상학적 입장과 유사하게 본질주의에 기반을 둔 입장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타당한 분석일 것이다.12 문제는 본질주의에 기반을 둔 음악의 장르에 대한 고전적 범주 이론은 장르 개념에 대해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어떠한 장르에 속하는 개별 음악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본질적 속성’이 무엇인지를 단언할 수 없다. H2O라는 분자구조를 공통적으로 갖는 물의 사례와는 달리, 음악의 장르는 단일한 속성만을 그 본질이라고 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장르의 본질적 속성이 반드시 단 하나일 필요는 없다. 앞서 존슨이 전형적인 고전적 범주 이론의 사례로 언급했던 히트데르크의 아트록 비평처럼 특정한 장르의 본질적 속성을 복수의 속성들(‘7화음을 사용함’, ‘고음의 보컬을 포함’, ‘여러 양식들로부터 비롯된 소리들이 조합됨’ 등)로 상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속성들을 반드시 다 가지고 있는 음악만이 아트록이라고 판단하진 않는다. 때로는 열거된 속성들 중 일부만을 가져도 아트록으로 분류되며, 심지어는 열거된 속성들 중 어느 것도 갖지 않음에도 아트록으로 분류되기도 한다.13 즉, 자연종 개념과 달리, 음악의 장르 개념은 그 본질로 고정된 속성(들)을 갖는 게 아니라 특정한 속성(들)이 일부(혹은 다수) 포함되기만 하면 되는 일종의 클러스터로 갖는다고 이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질의 클러스터를 인정하는 순간, 더 이상 그것이 정말로 어떠한 개체의 ‘본질’인가를 의심하게 된다는 점에서, 고전적 범주 이론은 그 타당성을 의심받게 된다. 게다가, 설령 장르의 본질에 대한 클러스터 이론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어떠한 장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단언할 수 없다. 앞서 살펴보았듯, 우리가 어떤 개체가 갖는 본질적 속성을 검토할 때는 그 개체가 필연적으로 갖는 속성을 참고한다. 하지만 우리는 음악의 장르에 대해서 어떠한 속성이 필연적 속성인지를 확신할 수 없다. 앞서 보았듯, 개체 x의 본질 P는, 개체 x가 존재하기만 하면 그 x는 필연적으로 P임을 함축한다. 그런데 음악의 장르에 있어서, 어떤 속성 R이 필연적 속성인지 혹은 우유적(accidental) 속성인지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14 특히, 장르 개념의 본질을 따져볼 때는 속성 클러스터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면, 이러한 난점은 더욱 더 해결하기가 어려워진다. 이처럼 소리적 특질이라는 본질을 상정하고 그 본질을 토대로 공통된 본질을 갖는 음악들을 모두 동일한 장르(혹은 하위-장르)로 분류하는 방식은, 무수히 많이 분화된 하위-장르가 발생하고 있는 동시대 대중음악에서는 실효성 또한 갖지 못한다. 이를테면, 「C와 D 사이에서」에서 디컨스트럭티드 클럽과 콘셉트로니카라는 두 표찰의 발생 사례를 살펴보았듯, 완전히 동일한 소리적 특질을 가진 개체에 대해서 동시에 사용되고 있는 서로 다른 두 이름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콘셉트로니카”와 “디컨스트럭티드 클럽” 외에도, “힙나고직 팝(Hypnagogic pop)”-“칠웨이브(Chillwave)”, “하이퍼팝(Hyperpop)”-“버블검 베이스(Bubblegum bass)”와 같은 실제 용례들은 전통적인 장르 개념 분석 방식이 해명할 수 없는 현상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본질주의에 입각한 고전적 범주 이론에 기대어, 동시대 대중음악 내에서 범람하는 (하위)장르를 해명할 수 없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이러한 전략이 실패한 것임을 인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A. G. 쿡(A. G. Cook)이 2013년에 PC 뮤직(PC Music)을 설립한 이래로, 해나 다이아몬드(Hanna Diamond)와 대니 L 할(Danny L Harle) 등의 PC 뮤직 소속 음악가를 비롯하여 소피(SOPHIE), 케로 케로 보니토(Kero Kero Bonito), 100 겍스(100 gecs)처럼 그들과 유사한 분위기의 음악을 들려주는 이들이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PC 뮤직 레이블을 중심으로 그러한 음악들이 생산되거나 향유되었고, 유사한 음악을 들려주는 음악가들의 상당수가 PC 뮤직과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활동을 이어 나갔기에, 많은 사람들은 유사한 음악을 통틀어 “PC 뮤직”이라고 표찰화(labeling)하곤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특정 레이블의 이름일 뿐이므로 해당 음악가들을 분류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 전대한 jeondaehan@naver.com ‘전자음악(electronic music)’이라는 용어에 포함될 수 있는 대상의 범위가 매우 다양하다. 넓게는 디지털 악기를 사용하여 만들어진 음악이나 DAW를 통해 제작된 음악을 뜻하며, 좁게는 그렇게 만들어진 음악 중에서도 댄스 음악이나 클럽 음악을 가리키곤 한다. 이처럼 ‘전자음악’이라는 용어가 지칭할 수 있는 대상은 맥락과 상황에 따라 다른데, 이 글에서는 ‘전자음악’이라는 용어를 단지 클럽 음악이나 댄스 음악만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까지 모두 고려하여 사용할 것이다.대중음악의 장르 범주의 층위에 대한 구분은 Mcleod, Kembrew. “Genres, Subgenres, Sub-Subgenres and More: Musical and Social Differentiation Within Electronic/Dance Music Communities.” Journal of Popular Music Studies, vol. 13, no. 1, 2001, pp. 59–75., doi:10.1111/j.1533-1598.2001.tb00013.x. 에서의 용법을 따를 것이다.Mcleod, Kembrew. “Genres, Subgenres, Sub-Subgenres and More: Musical and Social Differentiation Within Electronic/Dance Music Communities.” Journal of Popular Music Studies, vol. 13, no. 1, 2001, pp. 59–75., doi:10.1111/j.1533-1598.2001.tb00013.x.“개밥바라기”와 “샛별”은 금성을 지칭하는 두 이름이다. 금성이 해질녘 서쪽 하늘에서 보이는 경우 “개밥바라기”라고 부르고, 새벽녘 동쪽 하늘에서 보이는 경우 “샛별”이라고 부른다.존슨이 분류하는 장르 개념에 대한 기존 논의의 네 유형은 다음과 같다. 1) 계약으로서의 장르(Genre-as-Contract), 2) 반복으로서의 장르(Genre-as-Repetition), 3) 양식 개념과 구분되는 개념으로서의 장르, 4) 체계로서의 장르(Genre-as-System)이다. 그러나 분량 관계상, 각각의 유형에 해당하는 장르 개념에 대한 더 구체적인 설명은 이 논문에서 다루지 않을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Johnson, Thomas. “Analyzing Genre in Post-Millennial Popular Music.” The Graduate Center, City University of New York, The Graduate Center, City University of New York, 2018. 를 참고하라.Johnson, Thomas. “Analyzing Genre in Post-Millennial Popular Music.” The Graduate Center, City University of New York, The Graduate Center, City University of New York, 2018, p. 12.Johnson, Thomas. “Analyzing Genre in Post-Millennial Popular Music.” The Graduate Center, City University of New York, The Graduate Center, City University of New York, 2018, p. 11.Heetderks, David J. “Hipster Harmony.” Music Theory Online, vol. 21, no. 2, 2015, doi:10.30535/mto.21.2.5.Johnson, Thomas. “Analyzing Genre in Post-Millennial Popular Music.” The Graduate Center, City University of New York, The Graduate Center, City University of New York, 2018, p. 11.한성일. “현대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본질주의의 귀환”. 서양고전학연구. 56(1). 2017. p. 66.크립키의 본질주의는 퍼트남의 본질주의에 대한 논의와 함께 분석 형이상학의 포문을 연 매우 중요하고 방대한 작업이다. 이러한 이론을 이 논문에서 위와 같이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은 사실상 매우 부정확하겠지만, 분량 관계상 크립키의 논의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관련해서는, 솔 크립키. 『이름과 필연』. 정대현, 김영주 역. 2014. 필로소픽을 참고하라.그러나 음악 장르에 대한 고전적 범주 이론과 본질주의 사이에는 차이점도 존재한다. 자연종 개념과 관련하여, 동일한 본질이 귀속되는 자연종 물질이라는 하나의 지시체에 대해서는 단 하나의 이름만이 상응한다. 예컨대, H2O라는 분자구조를 그 본질로 갖는 물질은 오직 “물”이라는 자연종 명사로만 지칭가능하다. 반면, 장르와 하위-장르 개념에 있어서는, 앞서 살펴보았듯 “디컨스트럭티드 클럽”과 “콘셉트로니카”처럼 하나의 지시체에 대해 복수의 이름이 존재한다. 단, 이때 자연종 개념과 관련하여, 하나의 이름에 대한 논의를 번역의 문제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H2O에 대해 “물”(한국어)과 “Water”(영어), “水(みず)”(일본어)와 같은 복수의 언어 체계에서 각각의 이름이 존재하기에, 물의 사례 또한 H2O라는 본질에 대해 다수의 자연종 명사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어’라는 동일한 언어 체계 내에서 H2O는 “물” 이외의 자연종 명사를 갖지 않는다. 물론 문제 제기가 이루어질 수 있는 가상의 상황을 상상해 볼 수는 있다. 예를 들어, ‘한국어’라는 단일 언어 체계 내에서 H2O를 지칭하는 “물”이라는 명사와 함께 “묠”이라는 명사도 그 구조를 지칭한다고 해보자.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가상적 상황이며, 설령 그러한 경우가 참인 가능세계를 상정하더라도 언어의 경제성을 고려했을 때 “물”과 “뮬” 중 하나는 이내 자동으로 도태될 것임을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다. 이는 크립키를 비롯하여 많은 분석철학자들이 가능세계를 논할 때, 현실 세계와 가능세계(들) 사이에는 적어도 동일한 ‘기호와 의미의 연결체계’가 보장된다고 상정한다는 사실과도 연결된다.물론, 이 경우 누군가는 히트데르크의 비평을 문제 삼을 수도 있다. 즉, 히트데르크가 제시한 아트록의 본질적 속성들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이를 문제 삼지 않고, 논지 전개를 위해 히트데르크의 비평이 아트록의 참된 본질적 속성들을 제시하고 있다고 상정할 것이다. 히트데르크가 어떠한 속성들을 제시하든 간에, 장르 개념에 대한 본질주의적 이해 방식은 언급되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이다.이러한 비판은 콰인(W. V. O. Quine)의 논의를 빌려왔다. 콰인은 서구 형이상학에서 전통적으로 옹호되어 왔던 아리스토텔레스적 본질주의를 겨냥하여 사물의 속성을 필연적 속성과 우유적 속성으로 구분하는 것을 비판한다. 콰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학자는 아마도 필연적으로 이성적이긴 해도 필연적으로 두발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전거 선수는 필연적으로 두발을 가지지만 필연적으로 이성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독특한 특성으로 수학과 자전거를 모두 꼽는 개인의 경우는 어떨까? 이 구체적인 개인은 필연적으로 이성적이고 우연적으로 두발을 가지는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우리가 사물에 대해 지시적으로 말한다면, 즉 수학자들을 자전거 선수로부터, 혹은 자전거 선수를 수학자들로부터 구분하여 무리 짓는 방식을 선호하는 이미 전제되어 있는 특별한 선입견 없이 말한다면, 이 속성들 중 어떤 것은 필연적인 것이고 어떤 것은 우연적이라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Quine, W. V. O.. Word and Object. 1960. p. 199., 이영환.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의 필연성과 소위 아리스토텔레스적 본질주의 – 콰인의 반(反)본질주의와 관련하여”. 2010. pp. 41-42.에서 재인용) Leave a Reply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CommentName* Email* Website 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