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담: 「나라 없는 사람」은 「느리게 배우는 사람」의 짝꿍, 그러니까 ‘컴패니언 피스(companion piece)’ 같은 글이다. 자유 주제 음반 리뷰 정도의 조건으로 외부 청탁을 받아 작성을 시작했을 때까지만 해도 일종의 후속 편이나 스핀오프처럼 생각했지만 말이다. 양쪽 글은 2021년 말과 2022년 중순, 두 계절 정도의 차이를 두고 작업되었는데, 거창히 말하자면 ‘파동 이후’의 시기를 공통적인 문제의식으로 삼았다고 할만 하다. 그것은 훨씬 긴 경력을 가진 음악인들이 70년대 하반기부터 80년대 상반기 동안을 통과하며 발매한 음반과 진행한 음악활동에 초점을 두는 것으로 이어졌고 말이다. 음반 리뷰의 형태를 빌어 느슨한 작가론처럼 썼다는 점 또한 겹치는 「나라 없는 사람」과 「느리게 배우는 사람」 간의 차이가 있다면 두 글에서 다루는 인물이 대중음악사에 기입된 위치나 부여된 의미일 테지만, 도식적으로 구분 지어본 양쪽의 늦음/이름이 꽤나 무자비한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결국 어떠한 지속성과 ‘완결’로 이어졌다는 데에 의미를 두고 싶다. 올해는 두 음악인의 5주기이자 “나라 없는 사람”이라는 제목을 따오기도 한 커트 보니것의 15주기이기도 하며, 그 크고 작은 연관성 사이에서 이렇게라도 이들을 엮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나.

1981년 성탄 전날, 오세은이 정규 4집 [노래하는 나그네 / 친구에게]를 발매한다. 60년대 후반의 숱한 그룹사운드 활동과 거기서 이어지는 딕 훼미리의 ‘또 만나요’라는 히트작을 비롯한 각종 작·편곡 작업, 그리고 잡지모델로서의 경력이 바쁘게 가로질러 있던 시기, 무엇보다도 포크송의 열풍이 정점을 향해 가던 70년대 초반에 이미 의 음반을 냈던 그가 간만에 발매하는 독집이었다. 이전 음반들의 제작에도 참여했던 김진성 PD의 권유로 클로드 제롬(Claude Jérôme)의 샹송곡 “고아 (L’orphelin)”를 번안한 “고아”가 실린 3집은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에 의해 “지나친 비정·불신감 조장”으로 방송·판매 금지 지정된 지도 7년이 흐른 뒤였다.

 

1970년대가 마침내 끝났다는 점, 그보다는 “고아”를 금지곡으로 지정했던 긴급조치 정국의 여파가 어수선한 상태에서 이렇게라도 정리되고 있었다는 점이, 그 직후를 통과한 포크 음악인들의 정착된 행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한대수는 실망한 채 고향과 같은 미국으로 도망쳤으며, 이장희는 가명의 제작자로 음반계에서 암약을 시작했고, 서유석은 “가는 세월”을 노래하다 라디오 교통방송을 진행했다. 뚜아에무아를 마침내 정리한 박인희는 번안 작업에 몰두했고, 긴 휴식을 마친 이연실은 반면 자작곡에 좀 더 집중했으며, 미국으로 떠난 은희는 그래도 한대수보다는 일찍 돌아올 터였다. 전역 후의 김민기는 노동자로서 노래극 테이프를 제작했고, 스튜디오 실험을 해내던 송창식이 그에게 녹음실을 빌려주었으며, 그의 복무 기간 동안 이주원과 함께 히트송을 낸 양희은은 간만에 그의 곡으로 음반을 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던 여과기로 작동한 파동 앞에서 모두가 각자의 선택을 하며, 역사의 단면은 날카롭게 매끄럽기보다는 거칠고 불연속적으로 뜯겨 나갔다. 누군가는 떠났고, 누군가는 남았으며, 요란하게 떠나거나 조용하게 기다리거나 새로이 나타나는 인물들에 따라, 다가올 시기들의 형상이 70년대 중후반의 지형도에 재배치되었다. 그렇지만 오세은은 거기에 없었다.

 

세 해 연속으로 음반을 내다가 뜬금없게 금지 조치를 받은 오세은은 ““고아” 내고 더러워서 못해먹겠다 그럴 때”에 훌쩍 산에 들어갔다. 말 그대로, 설악산에 들어가서 “서울을 오가며 김중섭 선생에게 대금과 단소를, 박동진 선생에게 창과 판소리를, 이양교 선생에게 시조를 배웠다.” 그러니까, “저항도 못했지만 타협도 하지 않았다. 그는 도피를 택했다.”1그 도피기는 알맞게 긴 동시에 짧았다. 여전히 고성과 서울을 오갔던 그는 이 시기를 결산이라도 하듯 “설악산”이라는 곡을 써서 한영애의 [작은 동산]에 덧붙였고, 악기마다 산조를 차차 배워가며 공부했던 국악을 대중음악에도 적용하고자 다짐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의 정태춘과 곽성삼, 무엇보다 김태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랬듯이 말이다. 그리고 “설악산”이 실렸던 [작은 동산]의 B면 첫 곡으로 ”갑돌이와 갑순이”를 민요 느낌이 덜하게 부드럽고 경쾌하게 편곡한 것도 이후 오세은에게 찾아올 시도의 자그마한 일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이상을 음반 단위에 맞춰 종합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그에 걸맞은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가 포크 싱어로서 활발히 음반을 내던 적 각각 더 멘과 동방의 빛이라는 슈퍼밴드에서 활동했던 손학래와 배수연과, 한편 그가 국악을 수학하고 있을 때에 서울 나그네에서 사랑과 평화까지 화려한 훵크 경력을 쌓았던 김명곤이, 이제는 모두 검은 나비라는 초대형 소울 그룹의 일원이자 객원으로 정규 5집 작업을 위해 같은 녹음실을 쓸 터였다. 배수연이 기운찬 퍼커션 리듬을 알차게 제공하고, 김명곤이 이미 출중했던 전자 오르간과 알토 색소폰을 감각적으로 곁들여 주면, 세광음악출판사에서 기타 교본을 숱하게 낼 박훈이 베이시스트로 들어와 이들을 든든히 잡아주고, 무엇보다도 장충스튜디오의 레코딩 엔지니어로서 둘도 없는 베테랑인 정용원이 소리를 다듬어줄 예정이기도 했고 말이다. 심지어 손학래는 리리콘(lyricon)이라 불리는 묘한 악기까지도 녹음 현장에 들고 왔는데, 발명된 지 열 해조차 되지 않았던 이 기계 장치는 첨단 기기였던 신시사이저의 합성 기능을 키보드가 아닌 관악기로 실현하는 진기명기한 기술이었다. 그 소리는 한 해 뒤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라는 모타운 그룹 출신 디스코 가수가 야심차게 녹음할 새 싱글인 “Billie Jean”이라는 장관의 한 조각으로 들어가겠지만, 오세은의 네번째 음반에 참여한 당시 음악가들은 물론 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일곱 해 만에 음반을 발매한 오세은이, 다시 일곱 해가 지나고 나서야 또 다시 이들 중 대부분을 데리고 새 음반을 발매하게 될 것도, 역시 모르고 있었듯이 말이다.

 

1988년하고도 8월 8일, 오세은이 배수연과 김명곤, 한영애를 비롯해 기타리스트 김광석과 어떤 날의 [1960 · 1965]에서 레코딩 엔지니어를 맡은 윤원준, 보컬로 참여한 자신의 아내 까지 함께한 다섯 번째 정규 음반 [남사당]을 발매한다. 역사는 흘러갔고, 지형도는 바뀌었다. 지난 음반이 나온 7년 전에만 하더라도 음지에 어지러이 잠복해 있던 직전 시기의 유산이, 어느덧 제각각의 방식으로 영향력을 뻗어나가며 부상했다. 70년대를 겨우 통과한 이들이 중년의 숙련공으로 복귀하고, 그들을 꽤나 충실히 따른 후대가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핵심으로 분명히 솟아올랐으며, 뒤늦게 실체화된 미래의 가능성은 과거를 단절시킨 힘에게 오래간 기다려온 복수를 하고 있었다. 스튜디오 기술이 더욱 충실하게 사용된 숱한 포크 록 음반부터, 팝과 다를 바 없이 세련되게 편성된 가요 음반과, 물론 짙은 전기기타 효과가 뿜어져 나오는 일렉트릭 블루스 음반까지로. 그렇지만 오세은은 거기에 또한 여전히 없었다.

 

식민지 시기부터 내전 직후까지 ’왜색’과 ’양물’이 고루 뒤섞일 수밖에 없던 ’부루스’가 5-60년대의 스탠더드 팝을 거쳐 마침내 미국의 포크 전통에 더욱 가까운 ’블루스’로서 들어오던 70년대 초에, 블루스적인 연주를 접목한 최초의 트랙들 중 하나를 창작했던 게 오세은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는 기묘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거의 2분간의 출중한 어쿠스틱 블루스 솔로 도입부로 시작해, 재지하게 매만져진 피아노 연주와 차곡차곡 쌓아올린 코러스를 더한 가창 구간을 지나서, 퍼즈 톤이 걸린 일렉트릭 블루스 솔로 연주가 이윽고 ’사랑합니다’를 천천히 읊조리는 결말부로 화하는 8분하고도 반짜리의 “당신”이 1974년도가 기어이 소화해내기에는 과하게 독보적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물론 진정한 문제는, 깔끔히 다듬어진 현악 편성이 돋보이는 다른 포크 트랙들과 함께 ”당신”도 실렸던 그 세 번째 음반에서 애먼 샹송 번안곡이 꼬투리를 잡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단절된 흐름의 사후적인 상속 과정에 있어서는 ’고아’처럼 위치하게 될 오세은의 처지를 예비한 걸지도 모르겠다. 반쯤 강제적이었던 설악산 행을 앞둔 74년도에도, 복귀작이 당대에나 이후에나 주변부에 머물렀던 81년도에도, 대중음악인의 본격적인 국악 크로스오버로서마저 한발 늦었던 88년도에도 말이다. 선형적이고 선택적으로 흘러갈 뿐인 정사 속에서, 자의와 타의가 필연과 우연만큼 구분 불가능하게 섞인 오세은은 무언가 희끄무레하게만 존재했다.

 

둘.

그는 [노래하는 나그네 / 친구에게]가 ’국악가요’라는 일전의 목표에 있어선 실패작이라고 여겼다. 후일에는 “산조를 마스터하지 못해 완벽한 수준이 아니었다. 열심히 했지만 깊이 있는 연주보다는 대중가요적인 노래 위주의 창법에 머물러”2 있었다는 당시의 한계를 스스로 지적하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서양악기로 국악을 완벽하게 표현하기엔 실력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절감”3했다는 문장에는 꽤 훤한 어긋남이 담겨있기도 하다. 양쪽의 양식과 악기는 서로에게 절대로 ’완벽하게’ 호응할 순 없고, 언제나 어긋나게 미끄러져 내릴 테니까. 그러한 의미에서 [노래하는 나그네 / 친구에게]는 그 불가능한 종합의 야망을 실현하는 데 실패했기에, 도리어 바다 건너에서 들어온 블루스가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물론이고 인접한 록·포크의 여러 양식들이 종합적으로 들어간 음반이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노래하는 나그네 / 친구에게]가 완연한 ’블루스 음반’으로도 간편하게 분류될 수 없는 건 음반 스스로부터 자꾸만 미끄러져, 좀 더 강력한 중력을 발휘하던 곳으로 흘러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때 [노래하는 나그네 / 친구에게]는 오세은의 원래 목표였던 국악가요를 실현시키기보다, 70년대의 숱한 가요 음반들을 탄생시킨 장충스튜디오와 그 인물들의 도움으로 제작된 조금 다른 종류의 가요를 가능케 한다. 블루스로 묶이는 A면을 에둘러 배반하는 것만 같은 B면에는 두 개의 포크 곡과 두 개의 하드 록 성향 트랙, 그리고 무려 하나의 레게 비트 노래가 상대적으로 잡다하게 담겨있고, 81년도에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명확히 정착되었을 전통적인 포크 문법을 크고 작게 비껴간다. “친구에게”가 꽤나 ’한국적’으로 느껴질 수 있을 세 박자를 바탕으로 차근차근 전개되지만 이윽고 리리콘과 오르간의 전자음이 사뭇 통속적인 색상을 더해준다면, ”나의 노래”는 18세기 독일 작곡가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의 소나타를 끌어오되, 바로크적인 클래식 기타 독주에 다시 한번 리리콘과 오르간의 전자적인 가요 선율을 급작스럽게 덧붙여놓는다. 한편 음반 끄트머리의 두 곡은 음반 내내 담긴 다양한 기타 사운드에게 딴죽이라도 걸듯, 당대의 다른 록 음반에서도 등장하고 있던 짙은 이펙트의 하드록 성향을 띤다. 그럼에도, “당신과 함께”는 다시금 한국적이라 느껴질 만한 선율이 돋보이는 기타 솔로 구간으로, “금의환향”은 오르간과 기타의 합주가 서로 엉겨 붙는 마무리로 그저 록적인 편성만을 내세우진 않았다. 특히 ”금의환향”에서 슬며시 돋보이는 박자는 ”아가씨야”에서 보다 느긋하게 나타나는 레게 리듬을 닮아 있으며, 이 곡에서는 오세은이 언제나 능히 다루며 내세웠던 기타의 음색보다 잔뼈 굵은 세션으로서 가요에 더 바짝 맞닿아 있던 연주자들이 노련하게 제작한 사운드스케이프가 훨씬 두드러지기도 한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가요사에서 독립된 사건으로만 드물게 나타났던 레게 비트의 도입이 그중 하나일 테고 말이다. 그러니까, 한국의 블루스가 15년 즈음을 거쳐 마침내 신촌 블루스라는 거대한 집단으로 체현되는 데에 큰 몫을 맡은 두 인물, 이정선의 당시 솔로 작업과 엄인호의 장끼들 시절에 발매된 몇 곡들과 함께 말이다.

 

그러나 포크 열풍의 한 갈래로 출발했던 70년대 블루스의 선구자들 중 여러 명이 20세기 끄트머리 동안 신촌이라는 종합지점에 모여들어 오래 묵은 한을 풀었던 것과 달리, 오세은의 블루스는 다가올 미래를 향한 차표를 놓친 듯 당대에만 남겨진 듯 보인다. [남사당]이 신촌 블루스 1집이 발매된 88년도라는 시간적 배경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국악과 블루스 간 5음계 체계의 차이를 능숙히 조화시킨 “아리랑 블루스”부터 김수철이 이미 두 차례의 국제 스포츠 행사무대에서 구현한 화려한 ’기타산조’를 의 방법론으로 소박하게 꾸린 듯한 일련의 ”타령” 연주곡들, 그리고 짙은 이펙트부터 재지한 합주까지로 옮겨온 옛 민요들은 어째서인지 블루스와 국악 크로스오버 양쪽의 정사에 분명하게 기입되지는 못했다. 그런 만큼 [노래하는 나그네 / 친구에게]의 A면에 실린, 이미 80년대 초반에 일찌감치 완성된 것만 같은 블루스 가요, 이정선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뽕 블루스’ 곡들은 오세은의 주위를 둘러싼 이 시간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다섯 곡들은 모두 두 대의 기타 간 주법과 음색의 차이를 리리콘과 오르간의 두드러지는 연주들과 교차시키면서, 가요 곡의 구조에서 벌어지는 포크와 블루스의 다양한 조합쌍을 들려준다. “노래하는 나그네”는 느릿느릿한 속도에서 각자의 어쿠스틱한 톤을 띠고 있는 기타 두 대를 통해 전형적으로 블루지한 풍경을 차근차근 그려가지만, 이어지는 리리콘 솔로는 뽕짝의 전자 오르간과 같은 고유한 음색으로 분위기 있는 통속성을 덧붙인다. “님을 믿는 마음”의 리듬감이 컨트리적인 서던 록보다 차라리 당대의 트로트 고고 양식을 더 닮았다고 느껴지는 것도, 어쩌면 정겨운 색소폰 연주나 쫀쫀하게 걸어 놓은 기타 이펙트 때문일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음반에서 보다 더 컨트리풍의 록에 가까운 트랙은 라디오에서 히트를 쳤다던 “여행”인데, 이번에는 곡이 단순히 인기 포크 가요로만 남지 않도록 어쿠스틱 기타가 컨트리적인 리듬을, 특히 전기기타가 블루지하게 리프를 잡아주며 균형점을 찾는다. 한편, 웅장한 오르간으로 시작되는 “회색 바다”는 오세은 본인의 목소리를 쌓아 구성한 질감과 드럼과 퍼커션이 주로 풀어내는 진행으로 “당신”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를 기운을 늘려가는 듯하면서도, 블루지한 솔로 연주가 트랙의 옆구리에서 끊임없이 존재감을 크게 차지하며 새로운 조화를 성사시킨다. A면의 마지막 곡인 “지나온 시절”에 도착하면, 는 셔플 리듬이라는 탄탄한 근간을 바탕으로 진하게 발휘된다. 포크적인 단출함에서부터 출발한 블루스가 이렇게 다양한 광경들을 통과해 전자적인 진득함으로 마무리되는 A면의 과정은 가요와 블루스 간의 조화가 “당신”이라는 74년도의 프로그레시브한 블루스 창작곡만큼 이르게 완성되는 현장이기도 했다.

 

[노래하는 나그네 / 친구에게]는 이렇게 수록된 양식들의 ’국적’을 단 하나로 특정할 수 없는 음반이 된다. “이 앨범의 기조를 간단히 요약한다면 바로 음악적 ‘뿌리’를 찾으려는 오세은적인 시도라 할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의 원류를 찾는 것은 한국 전통음악(국악)에서, 서양 대중음악의 원류를 찾는 것은 블루그래스(혹은 미국 루츠 음악)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나 할까”라는 평4을 조금 뒤틀어보자면 말이다. 오세은이 설악산 시절을 거쳐 추구하기 시작한 ‘민속’을 담아내려는 시도는, 도리어 그가 이전부터 시도해온 다른 종류의 ‘전통’과 뒤엉켜버려, 양쪽의 원류 모두가 충실히 담기지는 않는 결과물을 냈다. 그리고 4집 이후의 남은 20세기 동안 오세은은 이 두 근간 중 어디에도 분명하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양편을 오갈 것이다. 이는 그가 80년대 포크·블루스와 맺는 관계와도 닮았다. [노래하는 나그네 / 친구에게] 이후부터 [남사당]의 즈음까지, 한영애의 복귀작 [여울목]과 구자형의 첫 솔로 음반 [얼마나 많은 날 그리우면 그대는 나만의 사랑될까] 모두에서 각각 기획·제작과 편곡·기타 연주를 맡은 것처럼, 80년대 중후반에는 이미 서로 뒤섞여갔을 신촌파와 명륜동파의 애매한 분류 양편에서 모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한 신촌파와 명륜동파, 75년도의 ’파동’ 이후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던 포크를 달라진 시공에 맞춰 이어온 이들이 저마다 경력의 연속성을 그려갈 수 있던 것에 비교하자면, 오세은은 대중음악 경력을 완전히 중단하지도, 그렇다고 동료들과의 집단적인 반격을 도모하지도 못한 채 정전과 역사 속에서 훨씬 불연속적으로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70년대에서 80년대로의 이행으로 두기에는 시간의 응집력이 약해 보이는 [노래하는 나그네 / 친구에게]가 오세은 본인에게도 스스로 바라던 것보다 미치지 못했다 평가받았더라도, 온갖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전통의 뿌리들이 구근처럼 뒤엉켜 한 덩어리로 합쳐져 복수의 무국적을 띠는 곳에다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대의 가요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던 블루스의 음색과 박자, 그리고 음계 등을 낱개의 요소들로 기입할 수 있었던 건 음반이 딱 하나의 관습을 따라 양식화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블루지’하지 않았으며, 나지막하게 창을 하듯 노래 부르는 오세은의 목소리를 제외하면 ‘충분히 국악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양쪽의 원류가 충분치 않고 또 충실치 않게 섞이는 이 과정에서, 오르간과 특히 리리콘 특유의 합성된 전자음과 음반 곳곳에 깔려 있는 여성 코러스진의 음색은 무엇보다 가요적인 색채를 든든히 잡아주면서 나머지 질감을 너르게 채운다. 양쪽 전통이 힘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약하게 동원된지라 가요적인 음색이 들이찰 수 있는 골조가 형성되었고, 동시에 익숙한 포크 가요 곡처럼 들릴 수 있는 전체 형상의 이면에는 오세은이 그 모든 불충분함에도 불구하고 통제권을 잡고 있던 기타 연주와 음색에서부터 생성되는 블루스의 주 요소들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일찌감치 장착될 수 있었다. “당신”이 70년대 초중반의 포크 계에서 그러했듯, [노래하는 나그네 / 친구에게]가 비슷하게 국적 없는 고아의 상태에서 직간접적인 영향관계나 사후적으로 형성될 인과관계 없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면 이 때문일 테다. 이 당시의 오세은이 자신의 블루스와 국악가요가 당대의 지형과 이후의 정사에서 주변부에 머물러 약한 연결고리들하고만 이어지리라는 걸 모르고 있었더라도, 블루스 가요이자 가요 속의 블루스라는 존재는 희끄무레한 이 음반 속에 분명히 잠재되어 있었다.

 

셋.

2012년 여름, 오세은은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정규 음반 [Blue Korea]를 발매한다. 2000년대 초중반에 어느덧 정전이자 고전으로 등극된 6-80년대 한국 대중음악 음반들의 본격적인 복각이 진행되던 와중 그의 초기작들 또한 ‘저주받은 명반’ 같은 수식어를 달고 그 흐름에 포함되었던 덕을 본 덕분일지도. 2004년에는 생애 처음으로 단독 공연이 열리면서 크고 작은 인터뷰가 진행되었고, 2005년에는 가족들과 함께 블루스로 불심을 풀어낸 6집 [보현십원가]를 발매했으며, 그가 지금껏 몇십 년가량 좇아온 블루스가 다양한 양식들 속에서 가장 순도 높게 충분하고 충실히 담긴 7집인 [The Blues]는 2007년에 발매되었다. 그간 사뭇 다른 행보를 걸었지만 블루스의 노장으로서는 비슷한 자리에서 다시 만난 이정선이 [The Blues]를 위해 기꺼이 하모니카를 불어주었던 한편, 소량의 스윙을 몰고 오는 더블 베이스가 주요하게 위치한 편곡은 이후 재즈 트리오 구성을 취한 [Blue Korea]의 청사진이 되어주기도 했다. 70년대에 분명한 정규 음반을 내며 활동을 한 이들 중에 21세기에도 거의 창작곡으로만 이뤄진 음반을 두 장 이상씩 발매하는 경우들이 귀한 만큼, 오세은의 늦은 귀환은 80년대에 미처 성취하지 못했던 도전과 끝끝내 만족스럽게 실현시키지 못했던 가능성의 끝매듭을 자그맣지만 확실하게, 하나하나씩 지어나갔다.

 

2000년대의 작업들이 그렇게 오세은의 블루스를 마침내 완성하고 완결 지었다면, 더블 베이스의 김봉배와 드럼의 황성삼과 함께 결성한 오 블루스 밴드(O Blues Band)로 발표한 [Blue Korea]는 거의 40년 전부터 오세은이 꿈꾸고 있던 국악과 블루스 간의 조화를 마침내 실체화한 음반이었다. “기타로 산조를”의 드럼과 전기기타는 마치 장구와 가야금처럼 소리를 내고, 오랫동안 개발해 2000년대의 몇 녹음물에도 반복적으로 실렸던 아리랑의 블루스적 해석은 “블루아리랑”으로 최종 공정을 거쳐 다듬어졌다. 이는 어쩌면 대중음악의 정사 속에서 포크와 블루스가 7-80년대 동안 집단적으로 행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그러니까 일종의 ‘사적인’ 복수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모든 역사가 그렇게 맞물려 들어가듯, [Blue Korea]가 발매될 즈음 전혀 다른 우연과 필연의 조화로 21세기 언더그라운드 씬에서 블루스 열풍이 불었고, 오세은의 오랜 고향인 서울 땅에서부터 그가 수련을 위해 떠난 설악산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춘천에서 CC 블루스 페스티벌이 열렸다. 2017년에 암 투병으로 별세하기 몇 년 전, 오세은은 그 축제의 첫 공연에 초청되었다. 더블 베이시스트와 함께 기타 한 대를 들고 올라온 그는 지난 40년 동안 이리저리 오고 가며 탐구한, 어쩌면 설악산에서 나와 블루스도 국악도 가요도 아닌 음반을 제작할 때부터 착상했을 자신만의 블루스, 이곳저곳에서 내려온 뿌리들이 한 곳에서 절묘하게 엉겨 붙고, 거기서부터 다른 뿌리들이 뻗어 나가지는 않았기에 끝끝내 완결되어 존재하게 된 그 음악을 들려주었다. 그 음악들이 복수의 (무)국적으로 존재해온 저 고아와 같은 시간들이, 곧 오세은만의 오롯한 나라였다. | 나원영 onezero96@naver.com

 

  1. 천호영, “‘가요전설’ 오세은, 그는 왜 설악으로 떠났던가”, 오마이뉴스, 2007. 11. 22
  2. 최규성, “[추억의 LP여행] 오세은(下)”, 주간한국, 2001. 05. 09
  3. 천호영, 같은 기사.
  4. 이는 2004년 11월에 재발매된 3집·4집의 라이너노트에서 확인 가능하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