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오늘의 뮤직] 후보에 무키무키만만수의 [2012]가 올랐을 때 나는 이렇게 적었다. “듣는 이의 취향이나 입장에 따라 평이 달라질, 그래서 본질적으로 로컬 뮤직.” 트위터나 블로그를 살펴보니 실제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궁금했다. 극단적이진 않지만 비교적 선명하게 구별되는 이 차이들은 어떻게 정리될 수 있을까. 앨범이 발매되자마자 ‘진심으로’ 극찬했던 박주혁 씨(그는 내게 전화까지 걸어 이 앨범을 꼭 들어봐야 한다고 소리쳤다)와 앨범에 대한 의견을 묻자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던 최민우 편집장(내가 [기동전사 건담]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도 그랬지…)에게 이 이슈를 정리해보자고 했다. | 차우진 nar75@naver.com

 

무키무키만만수 | 2012

 

이 앨범, 괜찮은 애시드 포크다 | 박주혁_ 반디에라 뮤직

듀오 무키무키만만수의 데뷔작 [2012]에 대해 말도 많고 대립각도 꽤 날카롭다. 이 앨범에 대한 찬반 입장 중에 나는 찬성 측이고, 부연하자면 빅 베이비 드라이버와 함께(스타일은 많이 다르지만) 즐겁게 들은 ‘국산’ 애시드 포크여서 좋다. 즉, 애시드 포크라는 코드의 이해가 있다면 그리고 그걸 즐겨본 적이 있다면 즐겁게 들을 수 있는 음반이라고 생각한다.

잠시 애시드 포크에 대해 얘기하자면 이 개념 자체가 실은 상당히 두루뭉술하다. 예를 들면 도노반(Donovan), 인크레더블 스트링 밴드(Incredible String Band), 카렌 달튼(Karen Dalton), 프레드 닐(Fred Neil), 닉 드레이크(Nick Drake)에다가, 최근에는 드벤드라 반하트(Dvendra Banhart), 바시아 불라트(Basia Bulat), 식스 오르간즈 옵 엇미턴스(Six Organs Of Admittance)까지를 모두 애시드 포크로 묶는다. 대체로 생(生)악기와 목소리라는 기본 진행에 좀 더 다양한 혹은 생경한 편곡이 더해지며 일반적인 모던 포크라는 장르가 지닌 ‘또렷한 메시지’보다는 말 그대로 ‘의식의 흐름과 황홀경’을 모던 포크의 어법을 빌려 표현(<Dig Presents Acid Folk>에서 인용, シンコーミュージック)하는 음악을 말한다.

이 분야는 요즘 좀 더 주목받고 있다. 그 이유는 장르 특유의 ‘원초적인 국지적 특성’의 발현과 그로부터 시작되는 일반적인 영미권의 관점에선 예측이 쉽지 않은 ‘의외성’ 그리고 음악이 초기에 지녔던 ‘주술성’이 보전되며 발전한 부분에 있다. 이 부분이 좋은 건데, 왠지 마음에 걸린다. 사실 이 음악은 지금의 미디어 환경에서는 익숙지 않은 형태다. ‘주술성’은 제3공화국 이후 터부시되어 왔고 ‘원초적인 국지적 특성’은 경원의 대상이며 ‘의외성’은 거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복병으로 오리지널리티가 강하다. 하지만 달파란의 프로듀스가 이 부분에서 살릴 걸 살리면서 뺄 부분을 빼는 신의 한수를 보여준다. 달파란은 저 요소들의 조율을 자연스러운 형태로 이끌어 앨범에 확실한 액자를 만들어 음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보여준 것은 물론 동시에 청자에게 더해질 부담을 줄였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지금까지 내가 들어온 애시드 포크의 특성과 잘 맞물렸고, 이 부분에서 만족했다.

그렇게 완성된 이 앨범은 마치 짝퉁 명품 시장에 진짜 명품 호돌이프린트 쓰레빠가 입점한 느낌이다. 즐비한 짜가리 중에 드문 진품인데, 그게 아이템이 특이해서 영 판단이 애매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특이하기만 할까? 그건 또 아니다. 트레이더 혼(Trader Horne)을 연상시키는 “2008년 석관동”의 서정이나, 커버곡이지만 “내가 고백을 하면 아마 놀랄 거야”의 발랄함이 좋다. 무엇보다 “방화범”의 리듬과 “식물원”의 조용함이 뽑아내는 긴장의 연속은 확실히 보기 드문, 훌륭한 순간들이다. 혼란스러운 “7번 유형”이나 “투쟁과 다이어트”도 아주 좋다. 결국 이 모든 부분에서 ‘의외성’, ‘주술성’, ‘원초적인 국지적 특성’ 등이 고루 나타난다. 이쯤 되면 특이한 아이템이라도 스페셜 아이템으로 구색을 갖춰줄 만하다. 고로 이 앨범, 괜찮은 애시드 포크 앨범임이 분명하다. | 박주혁 bandierarec@naver.com / Bandiera Music A&R

 

 

실험이 아니라 설득력이다 | 최민우_ [weiv] 편집장

무키무키만만수의 음반을 들으며 창작에서의 ‘자연스러움’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누군가 자연스럽게 혹은 마음 가는 대로 음악을 만든다면,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의 관습에 충실히 따르는 음악을 선보일 공산이 크다. 따라서 장르의 관습을 거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식적일 가능성이 크고,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의 ‘지적인’ 활동에 가깝다. ‘계산적’이라거나 ‘의도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창작자가 그걸 ‘자연스럽다’거나 ‘별 생각 없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걸 느슨한 의미에서의 스노비즘 혹은 자의식 과잉이라 부를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위선적이라는 것도 아니다. 예술에는 그게 필요하다. 다만 ‘자연스럽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장르’를 뻔하다는 이유로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장르를 잘 다루는 뮤지션은 그리 많지 않다.

무키무키만만수의 데뷔 음반을 ‘지적인 포크 음반’이라 부른다면 이상의 이유다. 이 음반을 지배하는 것은 관습에서 벗어나겠다는 강력한 욕망이다. 고삐 풀려 질주하는 욕망이라기보다는 고삐를 붙들어 매겠다는 욕망이고, 더하겠다기보다는 쳐내겠다는 욕망이다. 보컬은 노래한다기보다 말하거나 소리 지르거나 ‘두드려’ 대고, 사운드는 단출하다 못해 앙상하다. ‘구장구장’과 어쿠스틱 기타는 선율을 보조하기보다는 ‘리듬악기’로 기능한다. 여기에 담긴 소리들은 내게 경제적이기보다는 금욕적으로, 쓸데없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들린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펑크 에토스’가 아니던가?

그러면서 이 음반에 실린 곡들은 사운드의 쾌락보다는 장르의 관습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발칙함’이 자아내는 효과로 충격을 주면서 가사의 메시지에 집중하기를 요구하는 음악에 가까워진다. 메시지는 일관된 주의/주장을 담기보다는 파편적이고 추상적으로 내뱉어지는데, 이를 ‘집중’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모순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숭례문 화재를 역설적 선망과 토테미즘을 통해 뒤튼 “방화범” 같은 곡은 이 두 측면이 생생하게 결합된 인상적인 순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곡들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투쟁과 다이어트”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음반의 마지막 곡에서 그들은 ‘왜 내가 이러고 있나 어머니’라며 ‘있는 그대로 살고 싶’은데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고 울부짖는다. 여기서 밴드가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우리 시대’의 진실일 테지만, 그것은 외연이 넓은 진실이다. 외연이 넓기 때문에 부정은 못하지만 적극적으로 긍정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혹은 음반의 소리가 메시지를 새삼 환기시킬 만큼의 힘을 유지하지 못한다.

이 음반에 담긴 음악이 ‘평자’들에게 뭔가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말하려 한다면, 무엇을 말할 것인가? 우리 잘난 척 하는 평자들에게 ‘실험’이란 신물 나지 않은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실험이 아니라 아티스트의 욕망을 수용하도록 만들고야 마는 설득력이 아닐까? 여기에 수록된 곡들을 라이브 무대 외에 언제 어디서 ‘즐길’ 수 있을까? ‘인디’, ‘세대’, ‘현실’ 등의 단어를 사용해 비평적으로 ‘상찬’한 뒤 구석에 처박아두는 음반이라는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이 더 필요할까? 상찬과 쾌락 사이의 거리는, 음악 외적 맥락에 따라 우왕좌왕할지 모르는 청각적 행위예술과 연말까지 곱씹을 부분이 많은 음반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밴드는 한 인터뷰(10아시아 인터뷰)에서 다음 작업에 대한 질문을 받자 다소 확신이 없는 대답을 하고 있다. 그건 내게 이 음반의 소리를 두 번 재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식으로 읽힌다. 내가 무키무키만만수에게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점이 있다면 바로 그것인데, 우연찮게도 음반의 홍보 문구 역시 다음과 같다: 지금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음악. | 최민우 daftsound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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