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MTV VMAs]에서 MPC로 “Runaway”를 연주하는 카니예 웨스트 “정통 힙합? 그런 건 엄마한테나 물어봐.” 9년 전 MC 스나이퍼는 이렇게 외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후 강호동은 타이거 JK에게 물었다. “힙합이 뭐에요?” 힙합은 도대체 뭘까. 누군가는 답을 ‘삶’이라고 하는데 이건 ‘철학이 뭐에요?’ ‘살아가면서 고통 받는 이유가 뭔가요?’란 물음에도 얼추 어울릴 만한 답이다. 어떤 결론을 내리든 정답은 없는지도 모른다. 분명 논쟁에서도 음악은 이미 저만치 물러나 있다. 개념의 암투만이 난립한다. 그렇다면 일렉트로니카도 ‘삶’이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심지어는 군대에서도 전기는 들어오니까. 일렉트로니카 음악도 이 삶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 정당하다. 전기가 발명되면서 미래 사회를 상상하게 되고, 사회는 ‘기술 공포(techno phobia)’로 포장되면서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한다. 정작 우리가 받는 공포는 오히려 아날로그적인 것이 많다. 이미 전 세계는 수많은 전쟁을 통해 총포의 위협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실감했다. 실제 사람들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작금의 정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미래사회에 대한 공포를 주입시키는 것은 기술(technology)이라니. 물론 일견 수긍은 가능하다. 밴드는 오케스트라의 생존을 위협했고, 밴드는 다시금 디지털 기기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전기가 들어오는 환한 조명 아래 오케스트라는 배치되고, 밴드는 디지털 녹음을 하며, 디제잉 아티스트들은 효과적인 음악 입출력을 위한 아날로그 컨트롤러와 스피커를 찾는다. 마치 그게 일상인 것처럼. 사전을 검색하면 일렉트로니카는 현대의 전자음악을 일컫는 광범한 용어다. 좀 더 세밀히 이야기하자면 디지털 효과가 가미된 전자음악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굳이 시대에 용어를 함몰시키지 않고 ‘전기’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보자. 초딩 시절 익혔다시피, 전기는 전압의 차에 따라서 양과 음 전자가 발생되며, 전자가 흐르는 것을 전류라고 한다. 전류가 저항에 부딪히면 흐름이 달라진다. 전원을 넣고 빼는 것에서부터, 볼륨을 높이고 줄이고 하는 것들이 이러한 흐름의 변화와도 연관된다. 악기로 비유하자면 기타를 세게 내려치는 것과 살짝 긁는 것의 소리가 다르듯이, 음악에서 발생되는 모든 효과들은 소리의 흐름을 발생시키고 제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 전기를 이용한 악기와 일반악기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여기서 일반 악기는 다분히 ‘시각적’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리는 보이지 않아도 인식할 수 있다. 감각적인 것에 가깝다. 하지만 음악교육과 비평에서는 바이올린 소리, 기타 소리와 같이 소리를 시각적으로 보이는 공간에 가둔다. 악보는 이런 시각적인 소리를 전제로 기록된다. 과연 음악에서 사용되는 소리들이 고유할 수 있는가. 바이올린에 이펙터를 하나 걸더라도 일반적인 바이올린 소리와는 사뭇 다른 음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이렇게 소리가 시각적인 것에서 벗어날 때는 무엇이 될까. ‘환각’이 된다. 극단적인 예로, 1960~70년대의 사이키델릭 음악을 들 수 있다. 소리에서 나타나는 환각성을 마약과 결부시켜 감각의 체험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마약을 통해 사이키델릭 음악이 완성되었다기보다는, 본래 소리의 특성이 그러한 것이다. 전기는 시각적으로 연상되었던 고유한 소리들을 변화시킴으로써 음악을 무한한 소리의 장으로 탈바꿈시켰다. 감각으로 음악을 받아들이는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하지만 고전 클래식 음악가들에게는 상당히 억울한 대목일지 모른다. 하나의 악기를 다뤄오는 데 매진한 그들에게, 변화란 아무래도 불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드시 클래식 음악뿐 아니라 밴드 음악을 하는 이들도 악기의 고유성을 힘주어 강조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연주력을 중요시 여기는 클래식의 기조와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래서 혹자는 샘플링을 이용한 힙합과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연주’ 음악이 아니라는 이유로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아쉽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상기시켜야 할 점은 음악은 소리들의 질서라는 것이다. 어떠한 방식으로 전달되든, 음악에는 아티스트의 의도가 반영된다. 의도는 결국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소리들을 추려 배열하는 것이다. 샘플을 변형시키고 배열하는 행위는 일종의 소리를 질서화하는 것과 같다. 연주도 소리의 질서를 만드는 행위다. 실력고하만을 놓고 연주가들이 샘플링을 폄하할 것이라면, 연주가 스스로 전자음악이 쉽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고 증명하면 된다. 샘플링을 하나의 연주로 본다면 힙합과 일렉트로니카의 제작방식도 연주에 버금가는 가치가 있다. 힙합과 일렉트로니카로 대표되는 전자음악은 시각적인 악기를 이용하기보다 소리의 샘플을 변형시키고 음색을 달리하는 것에 관심을 뒀다. 전기를 이용하는 20세기 음악의 면면은 이들 음악의 충실한 기원이 된다. 무디 워터스, 하울링 울프는 일렉트릭 기타로 블루스를 연주하면서 어쿠스틱 기타로 연주되는 음보다 강렬한 비장미를 만들 수 있었다. 무그가 상업화시킨 아날로그 신서사이저는 오실레이터의 각 파형(사인파, 삼각파, 톱니파, 펄스파)을 합성하여(synthesized) 음색을 만든다. 어떤 파형과 필터를 이용하느냐에 따라서 음색이 획기적으로 변한다. 시각적인 음악 형식에서의 음색이 논리에 가까웠다면, 20세기의 음악은 ‘놀이’에 근접한다. 힙합음악의 전설로 불리는 디제이 쿨 허크(DJ Cool Herc)는 턴테이블을 갖고 놀면서 스크래치 소리를 발견했다. 1940년대 프랑스 방송국의 엔지니어였던 피에르 쉐퍼(Pierre Scheffer)는 음향기기를 다루다가 마그네틱테이프를 루핑(looping)시키는 효과를 연출했고, 그 이전에는 레온 테레민(Leon Theremin)이 발진기를 이용한 라디오 파형의 간섭을 알아냈다. 그리고 1924년, 자신의 이름을 딴 ‘테레민(Theremin)’을 완성시켰다. 레온 테레민이 직접 테레민을 연주하는 모습 갖가지 새로운 소리들은 ‘악기’라는 정체성을 사실상 떠났다. 소리를 제어하는 것은 이성적인 논리보다는 감각에 가까운 것이 됐다. 감각적으로 샘플을 섞고, 변형시키고 하는 사이에 음악들이 탄생되고 있다. 이를 본격 장르화한 것이 힙합이었다. 좀 더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초기 힙합 음악은 1960~70년대 훵크(funk) 음반에서 따온 샘플을 주로 활용했다. 이후 소울, 재즈 등이 광범위하게 사용되면서 힙합은 흑인음악을 매개하는 집합체 역할로 불려졌다. 적어도 1990년대까지는 이러한 인식이 통용되어 왔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 힙합과 일렉트로니카 음악들의 구분이 점차 희미해져간다. 어디까지가 힙합이고 일렉트로니카인가. 아이러니하게도 흑인의 정체성을 표방하는 블랙 아이드 피스의 윌 아이엠이 이 경계를 흐리고 있다. 카니예 웨스트는 또 어떤가. 그들의 음악에서 과거의 그루브(groove)는 얼마만큼 유용한 수단인가. 맥이 빠질지 모르지만 이미 답은 나와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20세기 이후 현대의 모든 음악은 알게 모르게 ‘전기’의 영향을 받아왔고, 이어오고 있다. 세시봉의 멤버들은 각자의 통기타를 자연스럽게 앰프에 꽂는다. 예술의 전당에는 녹음용 마이크가 설치되고, MTV 언플러그드 공연은 ‘Unplugged’라고 하지만 매번 전기를 사용한다. 표현의 논리, 방법들은 모두 다르지만 현대의 모든 음악들에서 전기가 빠질 수는 없다. 그러니 전기 그 자체를 표방하는 일렉트로니카 음악은 정체성이 형성될 수 없는 공식에 묶여 있다. 정체성이 있다면, 소리를 시각적인 공간에서 벗어나 무한대의 공간으로 확장시켰다는 데 의미를 둘 수 있다. 정통 힙합에 대한 논쟁을 기대했다면 사과하고 싶다. 상업성에 대한 사회사적 논의부터 흑인의 민족주의를 토론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본다. 근래 흑인음악 커뮤니티에서 유행하는 ‘힙부심’과 같은 말들로 위협이 되는 괜한 발설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음악을 만드는 행위들이 힙합과 일렉트로니카가 완벽히 구분되어야 할 성격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힙합 전도사로 불리는 케이알에스원(KRS-One)이 한 강의에서 요즘 DJ들을 두고 턴테이블 스크래칭 능력이 없다는 비판을 던졌다. 힙합 커뮤니티에서는 통용되는 개념이라 할지라도 다르게 생각하면 모순이 발견된다. 결국 턴테이블 스크래칭 기술도 한때 유행한 소리 효과의 일종이었고, 지금은 다른 소리들이 힙합을 대변한다. 릴 웨인의 프로듀서 미스터 방글라데시는 ‘a milli’나 ‘6 foot 7 foot’에서 단어를 조합해 리듬을 만들었는데, 이는 전에 유행하지 않았던 비트다. 더 이전, 그러니까 2005년 에이콘이 ‘Lonley’를 히트시켰을 때 카니예 웨스트의 칩멍크(chipmunk) 기술이 사용됐다. 다람쥐가 내는 소리와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 기술은, 원음의 피치를 올려서 보컬 톤이 재잘대듯 들리게 하는 효과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기술은 정통 힙합에 속하는가 아닌가, 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가장 흥미로운 점은 힙합과 일렉트로니카에서 쓰이는 장비들이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요즘 들어 무대 위에서 곧잘 사용되는 AKAI사의 MPC는 본래 레코딩 장비의 일종이었다. 소리 샘플을 버튼에 입력한 뒤 감각적으로 버튼을 내려치면서 하나의 비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MPC는 닥터 드레, 디제이 섀도우와 같은 힙합 아티스트뿐 아니라 케미컬 브라더스, 다프트 펑크와 같은 일렉트로니카 아티스트들에 의해서도 사용되며 다양한 쓰임새를 뽐낸다. 같은 MPC를 무대에 놓고서 한쪽에서는 힙합공연이 이루어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렉트로니카 향연이 이루어지는 장면은 어색하지 않다. ‘디지털 소리’를 만들고 편집해내는 DAW(Digital Audio Workstation) 프로그램들은 또 어떤가. DAW는 가상악기를 활용하는 연주에서부터 녹음, 편집까지, 하나의 디지털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지는 체계를 지칭하는 용어다. 녹음용, 공연용으로 모두 사용되는 프로그램으로 흔히 ‘Cubase’, ‘Abletonlive’, ‘Logic’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힙합과 일렉트로니카 장르 모두에서 사용되는 이들 프로그램은 악기처럼 차별화된 공간을 갖지 않는다. DAW를 실시간으로 제어하며 연출하는 공연이 늘어나는 가운데, 사과 모양의 로고만이 선명하게 보인다. 같은 체계에서 장르만 다르게 불리는 음악들이 많아지고 있다. DJ Shadow의 MPC 연주. 오르간 소리를 MPC로 연주한다. 힙합과 일렉트로니카의 경우처럼 장르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은 곧 소리가 시각적인 공간에서 점차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소리는 고정된 공간 안에 있지 않다. 끊임없이 부유하는 운동에 가깝다. 안타깝지만 전문가들에 의해서 소리의 운동과정은 다양한 장르로 분파되고 사회적인 의미로 고정되어 갔다. 힙합도 장르 구분의 호시절을 보낸 음악 문화다. 씬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정체성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엮어갈 수 있음을 상징한다. 하지만 음악적 변화는 이들 구분보다 더 유연해졌다. 누군가는 보다 감각적으로 변화하는 음악을 씬의 위협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음악의 변화가 위협이 된다면 일단 장르 음악의 정체성에 관해서부터 해명해야 하지 않을까. 장르 구분의 정체가 불분명해지는 틈을 타 ‘일렉합(elec-hop)’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음악은 유행어 만들기 경연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복잡해 보이는 소리들의 구분을 애써 지으려하지 말고, 그저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느낌이 언어보다는 더 구체적이고도 정확하게 우리의 일상과 닿아 있다. | 류석현 soulryu@hanmail.net info. 매체의 관점으로 음악을 연구하는 류석현은 아카펠라, 사운드 아트에도 관심이 많다. 5년 전 음악웹진 [이즘(IZM)]의 필자로 활동했고 다양한 관점의 음악 칼럼을 써왔다. | http://www.facebook.com/soulryu Leave a Reply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CommentName* Email* Website 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