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강철중:공공의 적 1-1]을 다시 봤다. 거기서 정재영은 문성근과 독대하는 중에 다음과 같은 대사를 뱉는다. “나는요, 사업하는 사람이고요, 최정필 사장은, 그냥 내 고객이요. 그러니까 목숨걸고 일해야지요.” 일개 건달을 이렇게 멋지게 남자로 만들어도 되나 싶지만 저 대사를 칠 때의 정재영은 멋이 있다. 참으로 멋이 있다.

영국 대중음악의 본진 잉글랜드를 제외하고 나머지 지역의 음악들을 듣노라면, 역시 매혹의 2인자는 스코틀랜드라 생각한다. 그 뒤를 지역색이 강해도 진미가 속속들이 이어지는 아일랜드가 잇고, 웨일즈는 어딘지 약하지만 메리 홉킨(Mary Hopkin)이나 수퍼 퓨리 애니멀스(Super Fury Animals)같은 초대형 그랜드 슬램이 있는지라 무시못할 흑막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된다. 특히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가 잉태했다해도 과언이 아닌 C-86씬의 음악은 글쓰는 이의 인생이 여기까지 오게 하는데(글라스고 ㅆㅂㄹㅁ) 제법 큰 공헌을 했다. 그 기세를 몰아 오늘은 글라스고의 큰 형이자 대장 크리스토퍼 레인보우(Christopher Rainbow)의 [Home Of The Brave]를 소개하고자 한다.

1980년대 심야 방송을 수놓은 목소리 중에 특히 이 분의 목소리가 많다. [Stationary Traveller]를 발표할 당시의 카멜(Camel)이라던가, 카멜에서 인연을 맺은 ‘화란의 카멜’이라 불리던 카약(Kayak)의 리더 톤 셔펜젤(Ton Scherpenzeel)의 솔로앨범, 혹은 비슷하게 80년대 초중반의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Alan Parsons Project)에서 보컬 디렉션과 건반연주를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럼 서두의 뜬금없는 정재영의 대사는 왜? 그렇다. 이 분이야말로 음악을 목숨걸고 사업으로 생각하는 분이라서다.

사실 악사를 예술가 측면보단 직업 측면에서 바라보는 편이다보니 음악 만들 때 장인 정신에 입각해 제작에 임하는 악사들을 좋아한다. 그 점에서 이 크리스 레인보우의 음악은 악사라는 직업 윤리에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모범적인 악사며, C-86의 파워 팝 / 네오 어쿠스틱의 단초를 심은 인물이다. 그  뿐 아니라 80년대 초, 그의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광고 음악들은 KPM이나 뮤직 드 울프(Music De Wolfe)의 라이브러리와도 비견될 만한 완성도 높은 작업들이기도 했다.

그런 크리스 레인보우의 솔로 앨범들을 정의하자면 ‘비치 보이스(Beach Boys) 계보에서 가장 독특한 발전을 이뤄낸 작품’일 것이다. 비치 보이스에 뿌리를 두되 더 어두운 쪽으로 발전시키면 대니 윌슨의 [Pacific Ocean Blue]가 나올 것이고, 밝은 면을 부각시키면 크리스 레인보우가, 그것도 지금 소개할 [Home Of The Brave]를 비롯한 세 장의 솔로 앨범이 나올 것이다.

실제로 그의 최대 히트곡인 “Dear Brian”이 바로 브라이언 윌슨에 대한 헌정곡인데 곡마다, 리듬마다, 사운드를 창출하는 방식마다, 브라이언 윌슨의 색채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 여기는 영국이고 딱히 볼 건 없어도 축구와 연극, 그리고 대중 음악만큼은 세계 최고의 리그를 갖춘 곳이다. 리그가 달라지면 음악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지사. 대니 윌슨의 고통스러운 고백조의 곡보다는 밝지만 어딘지 배어있는 아련한 서정성이 폭신한 하모니에 실려 흐르고 당대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들의 세션을 다닐 정도의 실력자이다보니 앨범 내에서 신디사이저의 운용 만큼은 팝에서 나올 수 있는 최고의 세련된 형태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형태는 톤 셔펜젤과 “Heart Of Universe”를 발표할 때 까지 찬란하게 이어진다.


Ton Scherpenzeel & Chris Rainbow – Heart Of The Universe

사실 이 앨범은 글쓰는 이의 올타임 페이브릿 중 하나여서 어떤 한 곡을 꼽을 필요가 없지만, 여름이 지나가는 자리에서 “Is The Summer Really Over?”를 듣고 잠시 플레이를 멈추고 섬머 와인(Summer Wine) 버전(혹은 토미 리오네티(Tommy Leonetti)의 버전도 고려해 볼 수는 있겠다)의 “Wasn’t It Nice In New York City?”를 함께 듣는다면 좋을 것이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혹시 내릴 지 모를 늦은 비(최근 태풍이 지나가긴 했지만)를 보며 키린지(キリンジ)의 “愛のCoda”가 이어진다면 올 여름은 썩 훌륭하게 마무리가 될 것 같다. 


Chris Rainbow – Is The Summer Really Over


Summer Wine – Wasn’t It Nice in New York


キリンジ – 愛のCoda 

바이닐(vinyl)은 영국에서만 발매됐고 레이블은 폴리도어(Polydor)다. 2383 338의 카탈로그 넘버를 지녔고 이너슬리브에는 폭풍 후진하는 크리스 레인보우의 사진이 있으니 구매 전에 꼭 확인하길 바란다. 예전에 이 앨범을 샀을 때 15 파운드(GBP ) 언저리로 실드 카피를 구입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요샌 매물도 거의 없고 가격도 컨디션에 따라 다르지만 깨끗한 상태의 경우 30 파운드가 넘는 가격에 거래되는 편이다. 그래도 LP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정교하고 폭신한 공기감이 담긴 소리니 한번 쯤 구입하길 권해본다. CD의 경우는 일본 유니버설에서 발매됐는데 마스터링이 상당히 멋지게 된 편이다. CD와 바이닐은 그 뉘앙스가 사뭇 다르면서도 모두 훌륭한데 비교 청취를 위해 두 가지 포맷을 전부 구입하는 경우도 봤다. | 박주혁 bandierarec@naver.com / Bandiera Music 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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