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한 골짜기

로봇공학에는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 이론’이라는 게 있다. 로봇이 인간을 닮을수록 그걸 대하는 인간은 호감을 느끼게 되는데, 일정 이상 닮은 구간부터는 오히려 불쾌함을 느끼기 시작한다는 이론이다. 쉽게 말하자면, 건담 같은 이족보행 로봇에는 호감을 느끼지만, 사람처럼 돌아다니는 마네킹 같은 로봇을 보면 무서움이나 불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하지만 또한 인간을 닮은 정도가 그 지점을 지나 사람과 구분하기 어려운 지점에 이르게 되면 다시 호감도는 상승하게 된다.


불쾌한 골짜기에 해당되는 로봇의 예

불쾌한 골짜기 이론은 3D 애니메이션에도 적용되곤 하는데, 하츠네 미쿠 같은 보컬로이드 캐릭터들은 그러한 현상 자체를 회피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들의 경우, 로버트 저메키스(Robert Zemeckis)의 애니메이션처럼 사람을 닮으려는 시도를 애초부터 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저 만화답게 3D를 구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컬로이드의 목소리만은 그렇지 않다. 인간에 많이 가까워졌지만 아직은 적당히 인공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컬로이드의 노래가 사람들에게 불쾌감이나 공포감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적어도 스피크 앤 스펠(Speak & Spell)처럼 누가 들어도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것보다는 불쾌감을 덜 주기 때문인 듯하다.


교육용 장난감 스피크 앤 스펠.
인공적인 특유의 음색은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를 비롯한 많은 전자음악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목소리의 경우 불쾌한 골짜기 이론을 적용하기 어렵다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불쾌한 골짜기의 지점에 들어간 로봇에게 인간이 불쾌함을 느끼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로봇으로부터 움직이는 시체나 장애가 있는 사람 같다는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합성된 목소리로부터는 시체나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 보컬로이드의 자연스럽지 못한 음색은 인간에 비해 더 로봇 같을 뿐이고, 발음은 외국인 같을 뿐이다. 불쾌한 느낌보다는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이다. 보컬로이드는 이런 점에서 로봇과 달리 불쾌한 골짜기라는 거대한 산을 회피하거나 넘어갈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유리하다.

또한 이미 대중음악에서 오토튠(Auto-Tune)이 유행하고 난 뒤라는 점도 중요하다. 오토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오토튠의 느낌을 풍기는 보컬로이드가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불쾌함을 느끼는 사람도 존재하지만, 그처럼 불쾌함을 느끼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불쾌한 골짜기 이론에 따른 불쾌함이 아니라 ‘모에’를 노린 캐릭터와 음색에 대해 느끼는 오글거림에 가까울 것이다.

 

보컬로이드의 가능성들

대중이 오토튠에 익숙하다고는 하지만, 보컬로이드는 오토튠을 과도하게 쓰는 가수와도 차이가 있다. 현재의 기술적·정서적 문제는, 보컬로이드가 음악가들의 새로운 종류의 악기로 정착할 수는 있어도 새로운 종류의 가수가 되기는 힘들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보컬로이드라는 가상악기 자체는 지금까지 소비되던 방식과는 다른 몇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메인 보컬에서 한발 물러나 쓰인다는 것이다. 보컬로이드의 인간 모방은 아직 불완전한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곡에서 메인 악기로 쓰이고 있다. 이는 불완전함을 더욱 드러나게 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실제 가수가 메인 보컬이 되고 보컬로이드가 코러스를 넣는 방식으로 보조를 한다면, 느낌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히라사와 스스무는 이런 식으로 보컬로이드를 사용하여 곡에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한편 처음부터 보컬 자체가 메인이 되지 않는 곡을 만듦으로써 보컬로이드를 그저 지나가는 하나의 악기처럼 사용하는 것 또한 생각해볼 만한 방법이다.

두 번째는 가이드 보컬로 사용되는 것이다. 가이드 보컬이란 작곡가가 가수나 곡 구매자에게 보컬 파트까지 들어가 있는 곡을 들려줄 용도로 데모처럼 녹음하는 보컬을 말한다. 보이스웨어가 나온 이후, 녹음실에서 성우 녹음 전에 간단한 스케치로 보이스웨어를 사용해 배경음악과 믹싱해보기도 한다. 이처럼 보컬로이드도 가이드용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가능하다. 가이드 보컬의 경우, 건당 최소 1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보컬로이드로 돌릴 경우 제작비 절감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계속 똑같은 음색의 가이드 보컬이 필요할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곡마다 분위기에 맞는 보컬로이드를 사서 써야 한다면, 그 역시 결코 싼 것은 아니다.

세 번째로는 특정 문화나 장르 속의 특정한 음색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비디오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의 노래에 들어가는 보컬로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게임 음악의 경우 오래 전부터 기술과 비용 때문에 영화에 비해 저렴하게 들리는 음색이 장르적 특성으로 용인되어 왔기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보컬로이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란 예상을 해볼 수 있다. | 고두익 drgothic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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