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농장에 입성하다

올해에도 비와 진흙은 어김없이 함께했다. 우의야 필수품이고, 어디든 진흙이 묻지 않는 곳은 없을 거라 체념하면 속 편하다. 휴대용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공연을 지켜볼 때는 물론이고, 가만히 서 있을 때에도 진흙탕을 어기적어기적 헤쳐 나가는 이들의 발걸음에 허리 위로 진흙이 튀어 묻는 일도 부지기수다.

3일 내내 피크 타임인 저녁시간부터 늦은 밤까지는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았지만, 해가 쨍쨍하게 내리쬐다가도 가랑비와 소나기는 내렸다 멈추곤 했다. 우리는 금요일 점심쯤 캠핑장에 도착했는데, 멀쩡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쫄딱 맞으며 텐트를 쳐야만 했다. 그나마 먼저 와 있던 다른 일행이 물색해놓은 공간이 있었기에 비 맞는 시간을 줄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우리의 캠핑 장소는 아더 스테이지와 가깝고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한 길목의 가장자리여서 비교적 각 메인 스테이지로의 접근성은 좋은 편이었다.

텐트에 짐을 풀고 나니 하늘이 다시 파랗게 개이며 노란 햇살이 내려앉는다. 그제야 우리는 밖으로 나와 글래스토에 도착한 뒤 처음으로 여유를 부리며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아더 스테이지에 막 오른 브라잇 아이즈(Bright Eyes)가 첫 곡으로 [Cassadaga](2007) 앨범의 첫 트랙 “Clairaudients (Kill or Be Killed)”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청명한 하늘 아래 유난히 낮게 걸린 흰 구름들, 그 아래로 불어오는 산들바람, 그리고 이어지는 브라잇 아이즈의 또 다른 신곡 “Four Winds”가 나머지 공간을 채우는 그 낯선 순간, 여기가 글래스톤베리임을 실감한다.

어느새 농장 안은 강하게 내리쬐는 햇살과 북적이는 사람들로 후끈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따스한 기운을 품 안으로 끌어 모으며 캐나다의 인디록 밴드 뉴 포르노그래퍼스(The New Pornographers)가 오를 존 필 스테이지(John Peel Stage)로 이동했다. 존 필 스테이지는 글래스토에서 대략 5번째로 큰 규모의 섹션이지만, 천장이 원형의 천막으로 둘러싸여 있어 오붓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었다. 프론트맨 칼 뉴먼(Carl Newman)의 보컬은 지난 앨범 [Twin Cinema](2006)와 이전 앨범들, 그리고 글래스토 당시에는 발매되지 않았던 2007년 신보 [Challengers]에서의 몇몇 트랙 위를 쾌활하게 쏘다녔다. 디스트로이어의 멤버이기도 한 댄 비자(Dan Bejar)는 예상대로 무대에 서지 않았고 공연 시간도 짧은 편이었지만, 런던 곳곳의 클럽 브로셔 광고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새 앨범에 대한 기대를 짧게나마 품어볼 수 있었다.

저녁 여섯 시에는 블록 파티(Bloc Party)가 서게 될 피라미드 스테이지(Pyramid Stage)로 자리를 옮겼다. 피라미드 스테이지는 글래스토에서 가장 큰 무대인데 그 앞으로 펼쳐진 널찍한 관람 자리는 젊은 팬들로 순식간에 가득 채워졌고, 그곳에서 또 한 번 글래스토의 거대한 스케일을 체감할 수 있었다. 관중 뒤쪽으로는 완만한 경사를 두고 빼곡히 들어찬 텐트촌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 언덕배기가 실은 피라미드 스테이지를 향한 ‘대형 관람석’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엔 그 엄청난 규모에 잠시 진저리가 날 정도였다.

 

 

공연장으로서의 글래스토

현장 스케치를 위한 취재원으로서가 아닌, 페스티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의 입장에서 일일이 밴드의 퍼포먼스를 글과 사진으로 묘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쉬지 않고 잡담을 나누는 주변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양 손에는 맛없는 피쉬 앤 칩스(fish & chips)와 식어 빠진 파인트 잔을 들고서 밴드의 연주 하나하나에 집중한다는 건 부담스러운 짓이다. 대형 ‘인간 방목 페스티벌’인 글래스토에서는 특히나 그렇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제일 나은 방법이다.

글래스토는 한국의 펜타포트(Pentaport) 페스티벌이나 일본의 서머 소닉(Summer Sonic) 페스티벌, 그리고 런던에서 여름 내내 쉼 없이 펼쳐지는 도심 페스티벌들과도 사뭇 성격이 다르다. 그 행사들은 비교적 음악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아레나/스타디움 공연 형태를 띠는 반면, 글래스토는 자신이 이 같은 오지에 떨어져 있다는 의식을 놓치지 않는 상황 하에 모든 걸 내려놓고 다양한 형태의 자유와 방종이라는 재미를 누리는 축제에 가깝기 때문이다. 몇 번의 글래스토 참여 경험이 있는 일행 중 한 명은 심지어 “글래스토에서 할 일이라곤 삼일 내내 먹고 싸고 노는 것 밖에 없다”라고 자못 진지한 어조로 말하기도 했다. 그러니 누군가의 말마따나 글래스토에 있어 음악은 오히려 부수적인 요소라는 말이 틀린 얘기만은 아닌 듯하다.

그런 점에서 이 거대한 행사에서 나는 무수한 출연 팀 중에서 단지 몇몇을 목격했을 뿐이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3일간 내가 접한 팀은 뉴 포르노그래퍼스, 블록 파티, 루퍼스 웨인라이트(Rufus Wainwright), 아케이드 파이어(The Arcade Fire), 핫 칩(Hot Chip), 케이난(K’naan), CSS, 베이비솀블즈(Babyshambles), 티나리웬(Tinariwen), 베이루트(Beirut), 앰프 피들러(Amp Fiddler) 정도였고, 그조차 제대로 즐기기엔 벅찬 편이었다. 거리가 멀어 귀찮다는 이유로, 혹은 딴짓을 하느라 스테이지 관람을 포기한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기 팝(Iggy Pop), 가십(The Gossip), 릴리 알렌(Lilly Allen), 피온 레건(Fionn Regan), 소웨토 킨치(Soweto Kinch) 등이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놓쳐버린 라인업이었다.

한편 사람이 많이 몰리지 않는 스테이지에선 의외로 그 어느 곳보다도 흡족한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중 루츠 스테이지(Roots Stage)가 유독 인상적이었는데, 규모가 아담한 편이어서인지 여타 스테이지에서 경험할 수 없는 오붓한 공간에서의 왠지 모를 소속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다지 많지 않은 관중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무척이나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사람들은 단출한 레게 음악에 맞춰 저마다 포근한 리듬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수백 년간 자메이카를 식민 지배했던 대영 제국의 역사적 배경이 새삼 환기될 만큼 미국산 힙합보다는 루츠 레게(roots reggae)나 덥(dub), 댄스홀(dancehall) 같은 장르가 더 환영받는 영국 블랙뮤직 씬이 상징적으로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일요일 밤 다시 찾은 그 무대에서는 소말리아 출신의 뮤지션 케이난의 공연에 다수의 청중이 그의 곡을 따라 부르며 글래스토의 마지막을 즐기고 있었다.

 

 

사운드 문제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음향 부분과 관련해 한 가지 얘기할 점은 바로 3일 내내 불량한 사운드를 자랑한 메인 스테이지들에서의 오디오 시스템 문제다. 첫날 뉴 포르노그래퍼스의 공연에서부터 느꼈던 바, 유독 메인급 스테이지에서 사운드상의 트러블이 빈번했던 것은 올해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였다. 첫날의 헤드라이너였던 악틱 멍키스(Arctic Monkeys)는 무대에 올라 “Temptation Greets You Like Your Naughty Friend”를 불렀지만 초대형 스피커에선 아예 소리가 나오질 않았고, 다른 곡의 연주 시에도 음향 수준이 무척 불량했다고 한다. 그건 다음날 피라미드 스테이지의 헤드라이너였던 킬러스(The Killers)의 공연 때에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개인적으로 경험한 사운드 문제의 극치는 둘째 날 아더 스테이지에서 있었던 루퍼스 웨인라이트의 공연에서였다. 연주 내내 믹싱 콘솔의 채널들이 각기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볼륨 밸런스도 좋지 않았고, 사운드 체킹을 충분히 했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비틀려지거나 불균일한 음향 조각들이 종종 무드를 깨곤 했다. 급기야는 동성애자인 웨인라이트가 여장 복장으로 밴드 멤버들과 함께 앵콜 무대를 선보이던 중반쯤에는 갑자기 MR이 나오지 않아 한동안 머쓱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AR 버전으로 다시 부른 주디 갈랜드(Judy Garland)의 “Get Happy”와, 노래에 맞춰 열심히 춤추던 웨인라이트의 립싱크 퍼포먼스가 한순간에 뻘쭘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음향 문제들에 대한 참가자들의 불만이 크게 표출되지 않았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후 훑어본 영국 내 음악 매체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으로 경험한 가장 조악한 음향 시스템을 갖춘 아발론 스테이지에서조차 그러한 문제에 투덜거리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잠시 조용해진 그 시간에 저마다 웃고 떠들기에 바빴을 뿐이다. 결국 앞서 말한 ‘단지 음악만이 아닌(not just music)’ 이 페스티벌의 정체성이 작용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운드에 무심해서라기보다, 그것에 지나치게 신경 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거라는 얘기다. 물론 메인 무대의 사운드 트러블은 글래스토측에서도 그냥 넘어가기엔 심각한 수준이었는지, 마이클 이비스는 행사가 끝난 뒤 월요일에 언론과의 공식 인터뷰를 통해 ‘내년에는 반드시 이번 해와 같은 음향상의 문제점이 시정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사과했다.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한 글래스톤베리”

3일간의 일정이 끝나고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월요일 아침이 왔다. 축제 기간에 내리던 것보다 한층 더 굵어진 빗줄기는 새벽부터 텐트 지붕을 때리고 있었고, 더욱이 기온까지 뚝 떨어져 입술이 파르르 떨릴 정도의 한기가 금세 몸을 휘감았다. 결국 우리 일행은 피곤함과 귀차니즘의 압박으로 런던에서 구입한 텐트와 의자 따위를 모두 남겨두고 그곳을 떠나기로 결정하고는 귀가 대열에 합류했다. (그날 글래스토측은 수천 장의 담요를 배포했고, 적잖은 자원봉사자들이 그 후 수일에 걸쳐 농장을 정리했다고 한다.)

브리스톨행 셔틀버스를 기다리던 우리 줄에서는 새치기 소동이 일어나 잠시 시끌벅적해지기도 했고(저마다 집에 빨리 가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들에서 어찌나 강한 연대감이 느껴지던지…), 버스 요금을 받던 한 젊은이는 지친 표정의 사람들에게 “그래도 좀 웃어봐요. 페스티벌은 아직 끝난 게 아니잖아요!”라며 잠시간 웃음을 불어넣기도 했다. 그때 내 머릿속엔 불현 듯 줄리언 템플의 다큐멘터리에서 들었던 두 대사가 떠올랐다. 하나는 “글래스톤베리에서 살아남았다는 건 모든 것을 견뎌낸 보람과 같은 것이다. 지난 35년의 역사에서 그것은 분명한 글래스톤베리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였고, 또 하나는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한 글래스톤베리!”라는 명언이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글래스토는 비로소 끝이 난다는 누군가의 말을, 그 정황 속에 이 두 문구를 상기시킴으로써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글래스토는 영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페스티벌인 동시에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잡탕 페스티벌이다. 영미권의 유행하는 팝/록 뮤지션들이 연주하는 무대 말고도, 군데군데 위치한 중소급의 스테이지들이 20여 개나 있다는 것은 글래스토의 다양성을 넘어 이 축제의 스케일을 보여준다. 물론 그러한 점들 때문에 글래스토에 참여하기를 꺼려하거나 외려 ‘음악 축제’로서의 가치를 폄하하는 입장도 한편으론 존재하지만 말이다.

글래스토가 막을 내린 뒤 마이클 이비스는 “내년엔 좀 더 많은 젊은 팬들이 표를 살 수 있도록 강구할 것”이라고 말했고, 올해 역시 축제 기간에 한 명이 사망했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생겼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그리고 나는 개인적으로 3박 4일 동안 그 명성 자자한 간이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지 않겠다는 애초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다음에는 더 많은 친구들과 함께 좀 더 느슨한 마음을 갖고 와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게 아니라면 (경비 때문에라도) 두 번 다시 오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비에 젖은 웰링턴과 양말을 벗어던졌다. 싫기도 하고 좋기도 했던 글래스톤베리, 결국 가방에 묻은 진흙이 완전히 말라 떨어진 일주일 뒤쯤에야 비로소 나는 <NME>에 실린 ‘추억의 글래스톤베리 2007’ 사진들을 보며 또다시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련 글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한’ 페스티벌, Glastonbury 2007 [1]


관련 영상


2007 glastonbury & wireless (www.festivalgeneration.com)

관련 사이트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공식 사이트
http://www.glastonburyfestivals.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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